생명과평화06 여름 생명평화학교 대전청소년수련마을 2006. 8. 18. 2:00
생명과 평화의 길
장 회 익
1945년 여름 미국의 핵폭탄이 히로시마에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아인슈타인은 고통스런 비명을 질렀다. 핵폭탄이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 나왔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과장이지만 그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핵폭탄의 가능성을 알리고 이것의 제조를 건의하는 편지를 썼던 것은 사실이다. 그 주된 동기는 나치 독일이 이미 이 연구에 착수한 것으로 보고 이에 대한 제재수단을 마련한다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독일이 이미 항복하고 일본 또한 전쟁 막바지에서 항복을 목전에 두고 있는 시점에 이를 구태여 실전에 투입했다는 것은 그의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 일 이후 1955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자신의 시간과 명망을 백분 활용하여 핵 위기로부터 인류를 구제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그가 단 한가지 위안으로 삼은 것은 이제 인류는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핵무기 제작의 비밀을 함부로 노출시킬 일은 아니지만, 그는 이것이 사실상 노출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원리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알려진 이상 어느 국가나 마음만 먹으면 제작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전쟁은 결국 핵전쟁이 되고 말 것인데, 이것은 인류의 자멸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더 이상 전쟁은 수행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 후 오늘까지 다행스럽게도 핵전쟁은 수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전쟁은 여전히 수행되고 있으며, 세계의 평화는 아직도 요원하다. 더 이상 핵전쟁은 수행되어서 안 된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하면서도 아직 전쟁은 지속되고 있으며, 이것이 또한 핵전쟁의 형태로 확장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생명 개체간의 협동과 경쟁
우리는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이것의 근원을 개체들 사이의 협동과 경쟁의 문제로 소급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 태양계에 생명이 시작된 것은 대략 40억 년 전이다. 태양계의 이 생명은 태양과 지구를 포함하는 하나의 전체 즉 '온생명'을 구성하는 동시에, 그 안에 '낱생명'이라고 불릴 단위 개체들이 서로 부딪쳐가며 부단히 새로 형성되고 소멸되는 형태를 취한다. 처음에는 지금 세포라 불리는 단위들보다 훨씬 단순하고 원시적인 개체들이 생겨나 서로간의 협동과 경쟁을 통해 생존을 유지해나갔고, 다시 이들 사이의 좀더 긴밀한 협동을 통해 협동체라 불릴 상위의 개체를 형성했다. 이러한 상위 개체들은 다시 그들 사이에 새로운 형태의 상호작용을 하면서 그 생존을 유지해나가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대략 40억 년 진행되어 온 가운데, 오늘날에는 세포들로 구성된 인간이라는 협동체가 형성되었으며, 이들 인간이라는 개체들이 다시 상위 협동체인 국가라는 단위의 새로운 개체들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국가들 또한 서로간에 일정한 상호작용을 하면서 그 존재성을 지속시켜나가고 있다. 전쟁이라든가 평화라는 것은 국가라 불리는 이들 협동체들 사이에 발생하는 상호작용의 한 독특한 양상에 해당한다. 이들 사이의 협동과 경쟁이 조화로울 때 우리는 이를 평화라 하고, 이들이 조화를 깨고 물리적 힘을 동원해 서로의 파괴를 도모할 때 우리는 이를 전쟁이라 한다.
그러므로 전쟁과 평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단위 개체들 사이에 발생하는 상호작용 즉 협동과 경쟁의 일반적 성격이 무엇인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온생명의 전개 과정에서 모든 단위의 개체들은 주변의 여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자신의 존재성을 지켜나가야 하는 기본 특성을 지닌다. 이 특성에 결함이 있을 경우 그 개체는 존재성 자체를 상실하게 될 것이므로 이것이야말로 생존의 기본조건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주변여건들 가운데 특히 자신과 유사한 동종 개체들과의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를 상호작용이라 하며, 우리는 이를 크게 협동과 경쟁이라는 두 형태로 나누어보게 된다.
협동이라는 것은 서로 사이에 도움을 주고받는 행위이므로 이것이 서로의 생존에 유익하리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협동이 서로에게 주는 유익함의 정도가 반드시 대등한 것만은 아니다. 어느 한 측에는 크게 유익하지만 다른 한 측에는 덜 유익할 수도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유해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할 경우 상호작용 당사자들 간에는 서로 자신에게 더 유익한 관계를 맺기 위해 서로 간에 상반된 행동양상을 보이게 되는데, 이것이 곧 경쟁 상황이다. 그러므로 서로가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이 정확한 대칭성을 지니지 않는 한, 협동과 동시에 경쟁의 상황이 발생하는 것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개체들이 보이는 이러한 행동양식이 이해득실에 대한 의식적 계산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극히 지능적인 일부 상위 개체들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모든 행동양식들이 진화과정을 통해 마련된 본능의 지시로 이루어진다. 즉 전형적 상황들에 대처할 협동 또는 경쟁의 유형이 본능 속에 각인되어 있어서 이에 맞는 행동이 기계적으로 설정되는 것이다. 이런 본능적 행동이 지니는 위험성은 이들이 끝없는 생존 실험에 노출된다는 데에 있다. 이 행위유형이 실제 상황에 적합할 경우 생존에 성공할 것이며, 그렇지 못할 경우 생존 현상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특정의 개체들이 지닌 협동적 그리고 경쟁적 성향들은 이들이 겪어온 진화과정과 현재의 생존양상에 따라 크게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 신체를 구성하는 세포들 사이에는 협동적 관계가 지배적이다. 과다한 경쟁을 통해 신체의 기능을 저하시킬 경우 자신들이 구성하고 있는 상위 개체 곧 사람 신체의 생존이 어려워져 세포들 또한 존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모여 한 사회를 구성하는 경우에도 경쟁보다는 협동의 측면이 더 크게 나타난다. 사람의 사회에서는 협동과 경쟁이라는 양면적 관계가 불가피하게 나타나지만 대부분의 경우 파괴적인 대립 양상보다는 협동적 문제해결 방식이 서로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사람들에 의해 구성된 상위 개체라 할 국가들 사이에는 협동의 측면보다는 경쟁의 측면이 더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것이 격화되어 파괴적 대립 양상 곧 전쟁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해 우리는 국가라고 불리는 이 개체들이 진화의 과정을 충분히 거치지 못했다는 데서 그 원인의 일부를 찾을 수 있다. 생명의 긴 역사를 통해 볼 때 국가라고 불리는 단위 개체들이 등장한 것은 불과 몇 천년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적어도 진화적 관점에서 볼 때 생존의 지혜가 그 안에 충분히 비축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 또한 국가라는 단위는 여타의 생명 단위들에 비해 내적 결속력이 빈약한 존재여서 자신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서도 외부의 자극에 대해 상대적으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그러면서도 이 조직은 대내적 그리고 대외적으로 물리적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최고의 존재라는 특성을 지닌다. 한마디로 국가라고 하는 것은 충분한 내적 성숙을 지니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막강한 물리적 힘을 행사할 수 있는 매우 위험스런 과도기적 존재 단위라 할 수 있다.
무리짓기와 호전적 생존 본능
그렇다면 국가가 지닌 이러한 행동양상은 어떠한 방식을 통해 형성되는가? 인간이라고 하는 개체가 세포라는 하위 개체들의 협동체로 이루어지듯이, 국가라는 개체는 인간이라는 하위 개체들의 협동체로 이루어진다. 또한 인간이라는 개체가 지닌 성격이 인간 세포 속에 함유된 유전자에 의해 크게 규정되듯이, 국가라는 개체가 지닌 성격은 이를 구성하는 인간의 성격에 의해 크게 규정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가라는 개체들이 지닌 호전성을 인간이 지닌 그 어떤 원초적 본능과 관련지어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본능이 유인원들 사이에 나타나는 무리짓기 행위에까지 거슬러올라감을 알 수 있다.
영장류 가운데 무리를 짓고 무리들 사이에 전쟁 행위에 해당하는 습속을 보이는 동물은 인간 이외에도 침팬지가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지닌 이러한 행위는 이미 인간과 침팬지의 공동 조상 시대부터 어느 정도 본능 속에 각인된 것이라 상정할 수 있다. 이 본능은 당연히 진화적 과정을 통해 걸러진 성품일 것이며, 따라서 생존상의 일정한 이점을 지녔을 것임에 틀림없다. 즉 이러한 본능을 지닌 존재는 생존에 유리했으며 그렇지 못한 존재는 존속에 성공하지 못했으리라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인간이 지닌 이런 호전적 본능은 스포츠에 빠져드는 인간의 보편적 성향 속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실질적인 아무 이해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스포츠 팀이나 특성 선수를 일단 선호하게 되면 그 팀이나 선수의 승리를 위해 열광적인 관심을 가지고 응원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인간이 무리를 짓고 이를 통해 호전적인 활동을 해오던 행위 본능을 스포츠라는 특정의 방식을 통해 대리 만족시키고 있음을 잘 말해준다.
인간이 지닌 이러한 본능은 초기의 국가 형성 과정에서 긍정적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성향은 전투에 임하여 투지와 용기를 부추김으로써 전쟁수행의 능력을 향상시켰을 것이며 이를 통해 좀더 쉽게 주변을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좀더 강력하고 큰 집단을 이루기에 유리했을 것이며 이것이 결국 근대적 국가를 이루는 초석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라는 기구가 보여주는 호전적 성향은 인간이 지닌 이러한 본능에만 바탕을 둔 것이 아니다. 일단 이러한 호전적 성향이 지닌 유용성이 사람들 사이에서 인지되면, 이는 다시 사회․문화적 방식으로 부추겨지게 된다. 이러한 용기는 칭송될 것이고, 이러한 헌신은 애국․애족이라는 이름으로 권장될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호전적 성향은 사회적 과정을 통해 보강되면서 문화의 중요한 한 요소로 자리잡게 된다. 이것은 또한 여기에 멈추지 않고 다시 사회적인 제도로 정착된다. 국가 또는 사회에서는 이러한 성향의 행위에 대해 제도적 포상의 길을 마련하게 되고, 반대로 이에 거슬리는 행위에 대해서는 이를 견제할 각종 장치들을 만들어내게 된다.
국가 체제의 위험성
인간이 지닌 이러한 본능적, 문화적, 제도적 호전성은 현대국가의 성격 안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사실상 현대국가라는 것은 이러한 성격을 바탕으로 근대적 물질문명과 제도적 장치가 추가되어 형성된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호전적 성격이 현대국가 안에서도 계속 긍정적 기능을 하리라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것이 설혹 현대국가의 형성과정에서 유용한 기능을 했다 하더라도, 강력한 살상무기의 등장을 비롯해 상황이 크게 달라진 오늘날에는 오히려 역기능의 가능성이 크게 우려되고 있다. 핵무기를 포함한 현대 전쟁의 가공할 파괴력을 감안할 때, 우리가 만일 전쟁을 조장해내는 이 성격을 효과적으로 견제하지 못한다면 인류 자멸의 가능성조차 배제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현대국가 체제의 위험성은 한마디로 본능적으로 각인되고 문화적, 제도적으로 고양된 된 인간의 호전성이 살상무기 체제가 극대화된 오늘의 상황에서도 여전히 기능하고 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이 지닌 이러한 호전성은 우선 사태에 대한 객관적 판정 능력을 마비시킴으로써 적정한 행동의 범위를 넘어서게 만들게 되고, 이러한 행동은 다시 분쟁을 격화시켜 일방 또는 쌍방에 치명적 피해를 가져오게 할 수 있다. 설혹 사태에 대한 객관적 판정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인간이 지닌 호전성은 이를 거부하고 비합리적인 행위를 유발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전쟁의 상황에 이르러, 막대한 불이익이 예견됨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적개심에 의해 불합리한 행동을 하게되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보게된다.
우리가 만일 이러한 호전성을 견제할 수 없다면 그 대안으로서 초대형 살상무기들을 폐기해버리는 것이 하나의 방책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조차 가능성이 그다지 높지 않다. 초대형 살상무기들로 무장한 현대국가들이 이러한 상황의 위험성을 얼마든지 감지하고 있으면서도 선뜻 무장을 해제하고 평화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은 현실의 혹은 가상의 적에 대한 끝없는 불신 때문이다. 일방적 무장의 해제는 자기 쪽의 상대적 입지를 약화시킬 것으로 생각하며, 쌍방 간의 무장 해제 또한 상대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합의점에 도달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이는 마치도 서로 신뢰하고 합의에 이르면 쌍방에 유익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 큰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있는 것과 같다.
전쟁을 바라보는 몇 가지 시각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러한 전쟁의 위험을 극복하고 자멸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를 생각하기 위해 먼저 오늘날 전쟁의 당사자들이 어떠한 시각으로 전쟁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전쟁의 문제를 바라보는 데에는 몇 가지 서로 다른 시각이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어느 한 쪽은 불의이고 다른 한 쪽은 이를 제지하는 행위로 정의에 해당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예를 들어, 침략은 불의이고 이를 제지하는 방어는 정의라고 보는 것이 그 하나이다. 그러나 실제의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예컨대 현재의 상황이 정의롭지 않다고 판단될 경우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상황을 깨는 일이 정의라고 하는 주장도 성립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정의와 불의를 가려내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관점의 차이는 항상 있을 수 있지만, 예를 들어 제삼자의 입장에서 볼 때 어느 한 쪽이 좀더 정의롭고 한 쪽이 그렇지 못하다는 판정을 할 수 있는 경우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렇기에 전쟁의 당사자가 되어있을 경우, 상황에 대한 예리한 판단을 통해 어느 한 편에 서서 사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일은 전혀 나무랄 것이 못된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한 쪽에서도 스스로가 불의라고 자인하며 전쟁을 하는 경우는 없다는 점이다. 이렇게 견해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어느 한 쪽이 혹은 양 쪽 모두에서 상황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설혹 상황에 대한 이해는 정확하더라도 정당성 여부를 판정할 가치관이 필연적으로 자기중심적으로 형성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전쟁의 행위를 기본적으로 정의와 불의 사이의 대결이라고 보는 관점은,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특별한 방책이 없는 한, 뜻 있는 논의를 이끌어가기에 적합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쟁 자체를 아예 선과 악의 대결이라고 보는 관점이 있다. 이것은 실상 인류 문명사에서 오랫동안 맹위를 떨쳐온 고전적 도식이기도 한데, 자기편은 선이며 상대방은 악이라고 하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호전적인 관점이다. 자기들은 하느님의 편이며 상대는 악마의 세력이므로 이를 반드시 무찔러 궤멸시켜야 한다는 자세가 그 전형적 형태이다. 이러한 관점이 지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상대방이 어째서 자신들에 맞서고 있는지에 대한 고려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다는 점이다. 상대방은 악이므로 그의 모든 행위는 오로지 악의 소행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다. 심지어 상대방이 취하는 특정의 행위 패턴들도 이것을 상대방이 취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취해서는 안될 악으로 규정해버린다.
현 시점에서 무엇보다도 우려되는 점은 현재 많은 국가의 결정권을 행사할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사고에 묶여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현재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국가의 중심 세력들이 이러한 사고에 매몰되어 있어서 전 세계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특정 개인들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누구나 마찬가지로 그들 자신 또한 성장과정에서부터 수동적으로 이러한 의식을 부여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좀더 문제삼아야 할 것은 아직도 맹위를 떨치고 있는 주요 문화전통들이 미처 비판적 사유능력을 갖추지 못한 젊은이들에게 이러한 관념을 도식적으로 주입하고 있다는 점이며, 또 이러한 관념을 무비판적으로 부여받은 사람들이 이른바 민주적 절차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공세적 자세들과 함께 분쟁의 당사자들이 취하기 쉬운 또 한가지 부적절한 관점은 물리적 힘은 거역할 수가 없다고 보는 현실순응적 입장이다. 약한 자는 부득이 강한 자에게 승복해야 한다는 힘의 논리에 순응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관념이 오랫동안 전쟁놀이를 지배하는 게임 룰의 역할을 해왔으며 이에 항거하는 행위가 결과적으로 피해를 받아왔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이 어느 면에서 이를 정당화할 구실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힘의 논리와 정의의 논리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러할 경우, 힘의 논리에 순응하면 정의의 논리를 버리는 결과가 된다. 그러나 정의의 논리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은 껄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도 힘의 논리를 거역해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현실주의’라는 구실로 자신의 태도를 합리화기도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정의가 이긴다”거나 ‘사필귀정’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거꾸로 “힘이 곧 정의”라고 하는 억지 논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은 대체로 약한 자가 취하는 패배논리에 해당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이것이 “지면 안 된다”고 하는 항전 논리와 결합되기도 한다. 힘이 곧 정의이므로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끝없이 힘에 의존해야 한다는 주장이 된다. 특히 분쟁 당사자들이 이러한 논리를 공유할 경우, 힘의 우위를 지향한 끝없는 무기경쟁으로 치달을 우려가 짙다.
이러한 관점들과 대조를 이루는 또 하나의 관점은 전쟁 그 자체를 무조건 나쁘게 보는 이른바 평화주의의 입장이다. 전쟁이란 어쨌든 양편에 피해를 끼치는 것이므로 이것을 피하고 보는 것이 옳다는 것은 쉽게 인정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상대가 분명히 정의롭지 않은 이유로 도전해옴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전쟁을 피하기 위해 굴종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여기에는 물론 자기 희생을 각오한 비폭력적 저항이 있을 수 있고, 또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조차 내주라”는 식의 대응을 통해 도덕적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전략도 있을 수 있다. ‘성자의 전략’이라고도 부를 이러한 자세는 물론 매우 강력한 대응 수단이며 많은 경우 권장할 방식이지만, 이것만에 의존하여 평화를 기대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러한 행위의 성과 자체에도 의문의 여지가 없지 않지만, 설혹 이것이 유효한 방법이라 하더라도 이를 실제로 수행해낼 사람이 극소수일 뿐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 오직 매우 높은 도덕적 품성을 지닌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를 수행해낼 수 있을 것인데, 과연 이러한 극소수의 노력 여하에 의해 평화가 구현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합의 가능한 현실적 대안
위에 검토한 몇 가지 시각이 현재 우리가 전쟁과 평화를 바라보는 주된 관점들이라고 할 때, 이러한 관점들이 지배적으로 존속하는 한, 오직 강자의 힘에 굴복하는 것 외에 인류가 처한 전쟁의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 물론 전쟁을 통해 인류가 자멸하는 것보다는 정의롭던 정의롭지 못하던 강자의 힘에 굴복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논리도 성립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 또한 현실적으로 허용되는 대안은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라도 정의롭지 못한 세력 앞에 굴종해서는 안 된다는 강한 신념을 가진 이들이 반드시 있으며, 이들은 결코 부정의한 세력 앞에 굴종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이상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가장 강한 힘을 지닌 국가가 가장 정의로운 자세를 취해주는 일이다. 그러나 이미 보아온 바와 같이 현재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국가의 최고 결정권자는 사물의 분별을 원천적으로 거부하는 ‘선악의 관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국가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공정한 처사가 무엇인지를 살피고, 이를 기준으로 좀더 공정한 자세를 취하는 쪽에 힘을 실어주는 한편 덜 공정한 자세를 취하는 쪽을 설득하여 행위의 변화를 유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판정은 무엇을 기준으로 누가 할 것인가? 이미 분쟁의 당사자들은 스스로의 기준에 의해 자신들이 가장 정의롭고 자신들의 자세가 가장 공정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당위적 논의만을 통해서는 ‘합의’에 도달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현재 어렵지 않게 합의에 도달할 수 있으면서도 궁극적으로 분쟁의 해결에 도움을 줄 중간 과정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이것부터 취해나가는 지혜를 발휘할 필요가 있다.
분쟁의 당사자들이 아무리 자기 중심적인 자세에 빠져있다 하더라도 객관적 사실 자체에 대해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기는 어렵다. 아무리 상대방의 주장을 그르다고 보는 입장을 가졌다 하더라도, 상대방이 “빛이 태양에서 온다”는 주장을 할 때 이것마저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실부터라도 합의를 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좀더 중요한 합의에 이를 수 있다. 즉 상대와 자신이 놓인 상황들에 대해 좀더 철저한 객관적 사실파악에 임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합의가 어렵지 않은 것은 이것이 결코 자신의 입지를 약화시킬 방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혹 상대가 이에 합의하지 않더라도 이 방책을 일방적으로 취한 쪽이 손해볼 일은 전혀 없다. 오히려 상대가 이 방책을 취하고 있는데 자신이 이를 취하지 않을 경우, 궁극적으로 자신의 힘이 약화될 가능성은 매우 크다. 단순히 전략적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상대와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지 않고 만용을 택하는 것은 한 두 개의 전투에서 승리를 가져올 수는 있을지라도 전쟁에서 이기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 “적을 알고 자기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는 손자병법(孫子兵法)이 바로 이를 말하는 고전적 지혜가 아닌가?.
일단 이러한 합의 즉 상대와 자신이 놓인 상황들에 대해 서로가 좀더 깊이 알아나가자는 합의에 이른다면, 이는 평화를 향한 커다란 진전이 된다. 많은 경우 분쟁의 주요 원인이 상대와 자신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오기 때문이다. 특히 서로 간에 전쟁상태에 있는 국가들 사이에는 서로가 서로에 대한 사실관계를 의도적으로 왜곡하여 분쟁을 가속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는 적개심을 북돋우어 일시적 사기를 진작시키는 효과는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스스로 파멸의 함정을 파고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서로에 대해 충분히 파악하고 나면 상대에 대한 그릇된 이해로 인해 엄청난 파괴 행위를 자행할 위험을 줄일 뿐 아니라 부득이 전쟁을 하게 되더라도 상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을 견지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일정한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 하나가 객관적 사실이 과연 존재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모든 지식은 보는 사람이 지닌 기존 관념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것이며 심지어 자연과학조차도 인간이 만들어낸 구성물일 뿐 이른바 객관적 지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들이 있다. 이러한 주장 안에는 물론 받아들여야 할 내용들이 담겨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모든 지식은 상대적이고 따라서 객관적 의미를 전혀 지니지 않는다고 하면, 이것 또한 지나친 사실 왜곡이다. 지식 안에는 상대적으로 주관성이 강한 지식이 있고 객관성이 강한 지식이 있으며, 객관성이 강한 지식일수록 서로간에 합의가 쉬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쟁에서 벗어나는 첫 단계는 되도록 많은 사실들에 대해 서로간 합의에 도달하는 일이다.
새로운 생명 이해
그러나 설혹 객관적 사실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이것이 곧 동일한 행위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첨예한 대립관계를 가진 양측에서는 동일한 사실에 대해 얼마든지 자기중심적인 해석을 내릴 수 있으며, 이것에 따라 서로 다른 상반된 대응을 취할 수도 있다. 이러한 자기중심적 행위는 비단 인간만이 지닌 특징은 아니다. 이는 모든 생명 개체들이 지닌 공통된 성격인데, 자기보존 기능을 통해 생존에 성공하게 된 모든 개체들은 일단 자기 보존적 행위를 우선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마련된 것이다.
특히 사람들에 의해 구성되는 국가의 경우, 구성원들은 이러한 자기중심적 특성을 국가라는 기구에 투영하여 고차적 자아로 삼게 되므로 구성원들의 모든 판단이 자국 중심적으로 편향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국가 사이의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성향에 대한 일정한 극복의 수단이 요청된다. 더구나 국가라는 것이 구성원들이 생각하는 가치의 정점에 놓일 경우에는 이것이 매우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작업이 된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 생각해 볼 수 있는 한가지 방안은 초국가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일이다. 그 구체적 사례로서 우리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대등한 존재이므로 설혹 다른 국가의 구성원으로 되어있더라도 함께 행복을 누리고 살아갈 권리를 가진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 안에도 함정이 들어있다. 예를 들어 특정 국가는 그 국민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주지 못하고 있으므로 자신들이 이를 타도하여 그들을 해방시키겠다는 논리를 내세울 수가 있다. 이러한 주장 안에 일말의 진실이 담겨있을 수도 있지만, 이는 자칫 평화보다는 분쟁을 가속시킬 소지를 지닌다.
이것보다는 오히려 생명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여 인간중심의 기존 관념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큰 도움을 준다. 진정한 의미의 생명은 낱생명 속에서가 아니라 온생명과 낱생명의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새로운 생명 이해에 도달할 때, 인간중심의 관념에서 형성된 국가관의 제약을 좀더 쉽게 벗어날 수 있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가치의 기준은 인간도 아니며 인간에 의해 구성된 국가도 아니라 오히려 온생명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낱생명들의 올바른 생존양상이라는 점이 밝혀질 때, 우리는 기존 관념들의 속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이렇게 할 경우 자신의 주체 곧 ‘나’의 내용을 국가 단위에 투영하여 자국중심의 관점에 서는 것이 아니라 온생명이 곧 가장 큰 의미의 ‘나’임을 확인하고 온생명 중심의 관점에서 이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세계 안에서 발생하는 전쟁과 평화의 문제는 곧 온생명으로의 내 안에 발생하는 질병과 건강의 문제로 환원된다. 즉 우리 세계 안에서 분쟁이 발생하는 것은 내 몸의 한 부분과 다른 한 부분 사이의 부조화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질병에 해당하는 것이며, 평화의 회복이라는 것은 이 질병에 대한 치유작업에 해당하는 일이 된다. 이 경우에도 물론 낱생명으로서의 내가 지닌 한계에서 벗어나는 일이란 쉽지 않다. 자연인으로서의 ‘나’가 어느 국가 또는 어느 이념집단에 속하느냐에 따라 불가피하게 형성되는 편견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적어도 의식의 차원에서 이를 견제할 능력은 크게 보강될 수 있으며, 이러한 능력은 특히 온생명 주체로서의 ‘나’에 대한 의식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확고해진다.
맺는 말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투하된지도 올해로 61년이 된다. 다행히 그 후 대규모 핵 폭탄이 투하된 일은 없지만 인류의 평화는 아직도 요원하다. 이는 곧 핵무기를 통한 자폭 위험성에 대한 자각만으로는 평화에 이를 수 없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진정한 평화에 이르기 위해서는 위험에 대한 자각을 넘어서는 한층 더 깊은 지혜에 도달해야만 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혜는 그 어떤 천상의 메시지를 통해 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자신을 소멸시킬 핵폭탄을 만들어내는 데에 기여했던 인간의 지적 능력 그 자체에서 온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생명에 대한 진지한 지적 고찰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모습이 개체 단위의 낱생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감싸안는 온생명에 이른다는 점을 깨달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장기적으로 생존할 수 있고 어떻게 해야 의미 있는 삶을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새로운 비전으로 연결된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지적 능력이 만들어준 파멸의 무기를 택할 것인지, 아니면 같은 지적 능력이 만들어준 생존의 지혜를 택할 것인지를 선택할 위치에 놓여있다. 이러한 선택의 결과에 따라 인류의 운명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우리가 낱생명 안에 각인된 좁은 개체 관념에 매여 살상무기를 손에 들고 내적 분쟁에 몰입할 경우 인류의 장래는 어두울 것이며, 스스로 온생명임을 자각하고 ‘내’ 몸인 온생명의 온전한 건강의 회복을 위해 노력할 경우 자멸이라고 하는 어리석고 위험한 역사의 한 장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본질과 현상』2005 가을호에 실렸던 내용을 다소 수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