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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시민문화 워크숍글 수 40
평화워크숍 12.9 평화박물관 김영환 : 함께 만드는 동아시아의 평화 .... 97년도에 일본 북해도 슈마리나이에 갔었다. 그곳 도립 자연공원에 호수가 있는데 거기에 조선사람들이 일제시대에 징역가서 1938년부터 1943년 동안 만든 댐이있다. 그 댐으로 물을 막아서 댐이 생겼는데 이 호수가 겨울에는 영하 41.2도나 된다. 당시 공사 중에 인부가 200여명이나 죽었다. 그래서 이 호수 옆에는 순직자 위령탑이 있는데, 누가, 왜 어떻게 죽었는지 하나도 적혀있지 않다. 당시 이 댐은 동양에서 가장 큰 댐이었는데 제지 공장인 미쯔이 그룹에서 나무를 베서 공사 자재로 착공한거였다. 당시 200여명이 죽었는데 다 조선인은 아니고 160명이 일본인, 40명이 조선인이었다.이 노동자들을 타코베야 노동자라고 하는데, 여기서 타코는 문어다. 문어를 잡을 때는 항아리를 바다 밑에 던져놓으면 문어가 안에 들어가서 머리가 나빠 스스로 나오지 못하는 걸 건지는 것인데, 그 말처럼, 타코베야는 노동자들의 단체 숙소를 말하고 그 뜻은 한번 들어가면 못 나온다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정치범 등으로 몰려서 끌려간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이 강제로 끌려오기도 했다. 그 댐 옆에는 오두막이 하나 있는데 예전에 노동자들이 죽으면 하룻밤 제사를 지내고 옆 숲에 가져다 묻는 용도의 건물이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진에 있는 지붕 위 두꺼운 눈은 조금 녹다가 다시 쌓이고 얼기를 반복해서 1미터 50센티 정도나 쌓인 것이다. 대학원 시절 지붕 위에서 떨어지는 눈이 내 위로 떨어져 주저않는 압력으로 허리가 부러져 병원으로 실려갔는데, 처음에는 하루 이틀 있다가 나올 수 있겠지 했는데 나중에는 휠체어를 타게 될지도 모르고 비행기를 탈 수 없다는 진단이 나왔다. 당시 여행자보험에 들지 않아서 보험 혜택을 받는 사람에 비해 20배나 치료비를 부담해야 했다. 하루 입원비가 약 50만원 정도나 들어서 듣자 마자 일어날 뻔 했다, 하하. 일어도 잘 못해서 그 때 딱 두단어만 배웠는데, 똥이랑 오줌이다. 입원은 한달 정도였는데, 누워서 할 일없으니까 일어 공부도 좀 하고 지냈다. 여담을 이야기하자면 하루에 50만원드는 입원료를 한 푼도 안 냈다. 사실은 북해도 신문에 내가 강제 징용 공부한 한 한국인 청년이 눈에 맞았는데 보험에 안 들었다더라, 모금하자는 내용이었다. 어느 날 입원 중에 어떤 할아버지가 찾아오셨는데, 알고보니 그 분이 재일교포 1세이신 그것도 징용당하신 경험이 있으신 분이었다. 내가 있던 곳은 나요로라고 인구 4만명도 안되는 소규모 도시인데다가 욘사마도 아직 안 유명해서 한국에 대해서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 지역에는 30년 정도 징용 문제에 대해 연구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내 이야기를 여기저기해서 3천만원이 모였었다. 원래 3개월 예정인 입원이 한달만에 끝나고 나왔는데, 이 때 내 운명이 결정지어졌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많은 은혜를 입었으니 평화운동에 대해서 더 공부해야겠다, 라고 생각했다. 그 오두막 안에서 한 위폐가 발견되어있었는데, 황병만 군 지병, 구월 십일 쇼와 십팔년이라고 적혀있었다. 당시 조선사람 징용에 대해 별로 알려진 바가 없었는데 이 위폐가 발견되어지고 바로 운동으로 이어진 계기가 되었다. 당시 조선 사람이 죽으면 가족에게 연락을 해야하는데, 어떻게 연락할까 고민하다가 죽은 사람 이름으로 본인의 고향 주소로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 주변 관청 사망기록부에는 폐결핵 등 질병으로 죽었다고 기록되어있지만 맞아 죽었거나 하는 식으로 죽은 사람들도 많았던 것을 속인 것이다. 말했 듯이 지금은 그곳이 기념관으로 만들어져있다. 당시 사람들은 훈도시 한장입고 맨 몸의 차림으로 일하게 했다.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런 식으로 입힌 것이었다. 얼마 전 칠레에서 광부들이 한달만에 지상으로 탈출한 사건이 있었는데 일본에서는 생중계할 정도로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었다. 사실 실제로 일제 시대에 탄광에서는 부지깃수로 그런 일이 많았다. 옛날 일제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탄광으로 끌려갔는데 굴 안은 안으로 들어갈 수록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데 폭발사고가 일어나면 아예 사람이 있어도 그 구멍을 막아버린다. 실제로 해저탄광 공사에서도 180여명의 사람들을 구하지도 않고 그냥 수장시키도록 방치한 사태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 일제 시대 어느 비행장 건설을 위해 징용된 사람들의 유골을 발굴했었는데, 고작 30cm 파니까 유골이 나왔다. 해방된 지 60년만에 발견되었던 것이다. 발굴 후에는 전통식으로, 기독교, 불교, 아이누 식으로 제사 지냈다. 유골 발굴은 실제로 그냥 단순노동인데, 파트를 구분해 나눠서 작업한다. 북해도는 기상의 변화가 별로 없는데, 내가 유골 발굴을 떠난 5번 전부다 비가 엄청나게 내렸다. 슬픔 때문에 하늘이 우는 지 아닌지는 믿거나 말거나. 사진을 보면 파낸 흙이 색깔이 조금 다른데, 그것은 그 주변에 무언가 묻혀있기 때문에 변색된 토양인 것이다. 그래서 구분한 파트에서 색깔이 다 같다면 그 부분은 꽝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고고학자가 같이 간다. 땅을 삽으로 푹푹 파는게 아니라 조금씩 전체적인 면을 갉아내려간다. 당시 비행장 건설하던 곳에 장티푸스 전염병이 돌았다는데, 수십명이 죽었다. 우리나라는 매장하지만 저기서는 화장을 했는데 기름을 쓰다보니 물자가 부족하면 통나무를 모아다가 태우기도 해서 덜 탄 화장재들도 있다. 유골을 발견하면 하나 하나 살살 붓으로 긁어낸다. 섞이면 안되기 때문에 구분도 확실히 하고, 금방 산화되기 때문에 아세톤으로 세척 후 칫솔로 닦아낸다. 유골 중에 금니가 있는 두개골이 있었는데, 같이 데려간 징용당하신 할아버지 분을 데려갔는데 딱 보시더니 건달이라고 하셨다. 당시 생니를 빼고 금니를 박는게 유행이었다고 하시더라. 발견한 유골은 DNA를 검출해서 검사 후 유골을 유족에게 돌려드려야 하는데 검사비가 얃 300만원이기 때문에 비싸서 모두 그렇게 하지 못한다. 국가가 해야 하는 일인데 말인데 잘 되지 않고 있다. 질문: 유골을 발견하면 계속 가지고 있나요? / 사망자 명단 확인해서 가족 확인되면 돌려드릴 수 있다. 한번은 아버지 유골을 발견했다고 어느 분에게 연락드렸는데 그 아버지가 생전에 깡패같은 사람이었고 자기 눈을 때려서 멀게 했다며 그런 아버지 필요없다고 안 받는다더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끌려가서 죽었는지 모르는 사람이 엄청 많기 때문에 자기 가족의 유골이 아니더라도 받는 사람도 있고 산소 쓸 돈이 없다며 받지 않는 사람도 있다. 한국으로 보내기 전까지 매일 제사지내준다며 절에 맡기기도 한다. 일제시대 대한민국에서는 서민들이 소작농으로 돈이 없기 때문에 돈을 벌거나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여러 케이스들도 많다. 모두가 강제로 끌려간 역사가 같은게 아니라 모집에 돈을 벌러 일하러 간 경우도 있고 그렇다. 징용은 세가지 단계가 있었는데 첫번째는 모집, 둘째는 관청의 알선, 셋째는 강제 징용의 형태를 띄었다. 조선 사람들이 먹고 살 게 없으니 일하러 건너간 사람도 있는데 남쪽 사람들은 주로 일본, 북쪽 사람들은 만주로 갔다. 이때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조선족이다. 관 알선은 좋게 들릴 수도 있지만 관의 개입으로 각 행정단위당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관이 개입하는 것이다. 사진의 할아버지도 십대 때 논산에서 관의 개입으로 가게 되어서 부산에서 시모노세끼까지의 연락선을 타고 일본에 갔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일했던 곳은 바다 근처였는데 숙소가 비행장 건설장 바로 옆에 있어서 바다도 본 적 없다고 하신다. 장티푸스가 돌아서 자기도 병에 걸려 입원했는데 언제는 며칠동안 잠이 들었다가 추워서 일어났더니 누가 죽은줄 알고 영안실에 안치되었다고 하신다. 걸어나갔더니 간호사들이 놀랐다고 한다. 일제 시대에 강제징용했던 회사들이 지금도 있다. 미쓰비시 등의 기업도 그랬던 회사 중 하나다. 당시 기업의 사장들이 그래도 자기가 징용한 사람들이 누군지 인사라도 해야하니 갔더니 안 만난다고 하셨단다. 지금 그 회사가 어딘지 기억하고 계시는데 사장을 만나고 싶냐고 여쭈니 그 사람들도 나라에서 시켜서 한 것이니 무슨 잘못있느냐고 말씀하신 게 기억난다. 할아버지가 온화하신 분이신데 유골 발굴을 보자마자 화를 내시면서 사람이 죽으면 유품이랑 묻어서 저승가는 길 잘 보내야지 이렇게 구덩이에 묻어넣으면 되냐고 하셨다. ... (추도식 사진들을 보시다가 아이누 사진이 나옴) 아이누족은 사할린이나 북해도에 분포해서 살던 선주민인데, 문자도 없고 인종도 다른 고유의 문화가 있던 민족인데 일본인들이 자기네 말로 '개척'해서 사람들을 민속촌에 몰아넣고 동화시키고 그들의 문화를 바꾸어놨다. 징용당한 사람들이 도망치면 아이누 마을로 숨어들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해방된지도 모른 채 숲에서 13년간 살아서 언어도 잊고 동물처럼 되어서 돌아갔더니 알고보니 중국에서 오기 전 아들이 있었다. 돌아가서 재판을 벌이는데 일본이 전쟁이 끝나고 돌려보내지 못한 책임은 있지만 징용에 대한 책임은 없다는 재판이 나와서 아들이 여전히 싸우고 있다. 해방된지 60년이 지났는데도 그 전까지 정부에서 강제동원에 대해 조사해본 적이 없다. 2004년에서야 조사하고 유족들을 찾아 보상하는 제도가 시작되었다. 당시 강제부역, 일본군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성을 가는 창씨개명을 당하는데 주로 성을 떼고 본관이나 고향의 이름이 그대로 붙는다. 보통 일본에 있는 재일교포들은 차별을 피해서 일본이름을 쓰고 조선학교 사람들은 그냥 그대로 쓴다. 당시 일본군 저금통장등이 발급되었었는데 그걸 아직도 가지고 계신 분들은 보상을 받을 수 있지만 거의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없다. 당시 징용문제 뿐만 아니라 마이너리티 문제도 조사했다. 일제 시대 때 설립된 구 제국대학들이 있었는데 서울대도 경성제국대였다. 북해도 대학도 그 중 하나인데, 거기 수의학과에서 아이누 사람 뼈가 발견되었다. 말하자면 인종 적으로 연구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상당히 논란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홋카이도는 일제 점령 정책의 첨병이 되었었다. 아이누 사람들을 동화시키듯이 조선사람들을 동화시키고 이주시키는 등의 정책이 비슷했다. 과거 제국주의인 나라들은 선주민들을 몰아내고 차별했던 과거가 있다. 호주, 캐나다, 미국 등이 그렇다. 국제행사에서 보면 선주민의 문화를 보여주는 퍼포먼스를 보이는 경향이 있는데 과거 선주민 탄압 정책에 대해 반성하는 정책을 피기 때문이다. 호주에서는 과거 백호 정책으로 태어나는 선주민 아이들을 백인 집안에 입양 시켰는데 그 아이들을 핍박받고 학대 당하고 심지어 성폭행당하는 일도 빈번해서 이들은 호주의 잃어버린 세대라고도 불린다. 과거사의 첫째 규칙은 첫번째는 진상규명이다. 둘째는 사죄인데, 이것은 누가,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지느냐가 굉장히 중요하다. 일본 수상, 천황이 바뀔 때마다 우리나라 대통령에게 계속 사죄를 하지만 여전히 사죄문제가 대두되어지고 있다. 세번째는 적절한 보상이고 마지막은 두번 다시 그런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한 교육이다. 이 네단계가 과거사 해결의 기본적 스탭이다. ... (제주도 사진) 사진에 있는 뒤 배경이 비행기 격납고다. 일제 시대, 제주도에 비행장이 많았다. 일본에서 중국을 폭격하기 위해서 비행을 하는데 당시는 비행기가 한번에 그리 오래 날 수 없었기 때문에 중간 지점인 제주도가 일본의 요새가 되었었다. 일본 본토에도 그렇게 많이 없지만 제주도에만 이런 비행장이 23개가 남아있다. 농민들이 농산물 보관하는 창고로 쓰고 있는 곳도 있다. 여기가 4.3 때의 학살터이기도 하다. (해안가 절벽 사진) 여기 굴이 많은데, 장금이가 죽는 장면을 여기서 찍었다고 한다. 사실 촬영하려고 만든 것은 아니고, 여기서 사람이 폭탄을 싣고 작은 배를 타고 적의 배에 충돌하는, 인간어뢰인 자살 특공대가 연습하던 자리이다. 당시 십대 후반의 소년들이 끌려와서 매일 바다로 뛰어드는 훈련을 했다고 한다. 그 소년들은 우리는 언제 죽을 지 모른다며 매일 술마시고 놀았다지만 한편으로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을 살고 있었다. 두서없이 이야기했는데 이런 일을 했었다. 식민지 역사가 어떤 것이었는지 연구하고 알아왔는데 중요한 것은 이것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역사다. 당시 일을 겪었던 세대의 사람들, 지금 세대의 살아남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개인의 삶, 역사를 통해서 식민지의 역사를 알고 그것이 현재 나와 어떻게 관련되어져있는지 생각해보는 것이 교과서 위의 역사가 아니라 살아있는 삶 위의 역사인 것이다.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 많지만 실제로 식민지 역사에 대해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내가 일본에 가서 무엇을 느꼈댜면, 일본에서도 식민지 역사에 대한 운동을 하는 사람이 많은데, 과거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청산하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양국의 사람들이 손을 잡고 국가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 노력해온 힘이 있고, 그것을 통해 이런 과거사 문제가 해결되어지고 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올해가 한일합병 100년이 되었다고 하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이 많다. 최근 일본의 정부가 조선학교에 대한 고교무상화 정책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민주당으로 정권이 바뀌면서 일본 고교무상화 정책을 선두로 내걸었지만 그것이 공평하게 되어있지 않고 북한과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조선학교가 제외로 되었다. 시민들이 분개해서 힘을 합쳐서 요구하자 무상화에 대해 다시 고려해보겠다고 약속했지만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인해 관계도 없는 이 일이 중단되었다. 교육이란 복지랑 마찬가지로 당연한 인권에 문제이기 때문에 평등해야 한다. 고이즈미 수상이 일본에 갔었던 적이 있었는데 북한에서 일본인을 납치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돌려보내겠다고 한 사건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자신들이 가해자라는 입장이 있었는데 그 사건이 일본에서는 엄청난 화제가 되어서 북한에 대한 반감정이 일고 있다. 일본이 국교하지 않는 나라가 딱 하나 북한이다. 연평도 사건 일어나자 일본에서는 호외로 난리가 난다. 이렇듯 일본에서는 북한에 대해 적대감을 느끼고 있고, 걱정하고 있다. 그러면 가장 피해입는 사람들이 재일교포이다. 과거 햇빛정책 시절에는 조선적을 가지고 있는 재일교포들에게 임시여권을 발급하고 입국을 허용했지만 이명박 정권으로 넘어가면서 이것을 다 차단했다. 이것또한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행위라고 주장하는 측이 있지만 항소에서도 패배하며 상황이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자기가 가고 싶은데 못가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억울한 것이냐. 자, 동화책 한번 봅시다. 내가 라면을 먹을 때 라는 작품이다. 우리 모두가 언제 어니서나 서로 이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평화라고 이야기할 때 직접적으로 역사나, 전쟁 관련되어있는 일도 있을 수 있지만 상상해보면, 이 친구는 왜 쓰려져있을까. 왜 그런지 생각해보는, 평화에 대한 감수성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라는 것이, 먹고 있는 것이나 입고 있는 것이나 다 연결되어있을까? 천원숍의 물건들은 왜 쌀까? 인건비를 대폭 줄였기 때문이고 그 인건비는 값싼 노동력을 외국에서 착취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난 안 살거다 하는 것도 하나의 운동이고 실천일 수 있다. 평화박물관 운동은 우리나라의 과거사를 가지고 출발했다. 베트남전 때 우리나라도 많은 사람들을 공산주의에 대항해 민주주의, 자유주의를 지킨다는 이념 하에 파병했다. 미국 편에서 싸우면서 많은 민간인을 죽였고, 그 사실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베트남 유학생인 구수정이라는 사람이 베트남에서 마을마다 증오비라는게 서있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것은 한날에 죽은 마을 사람들을 기리는 비였다.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이것을 조사해 우리나라에 보도하게 하고, 미안해요 베트남 이라는 켐페인을 시작하게 되었고 평화박물관을 지으려 했다. 위안부 할머니 두분도 같은 전쟁피해자라며 기부금을 내놓으셨다. 사실 베트남에 평화박물관을 지으려고 했는데, 우리나라에 없기에 우리나라에 지었다. 최근에 강원도 화천에 베트남 참전 용사 만남의 장이라는 것이 생겼다. 처음에 베트남 참전 용사들이 화천에 모여 훈련받고 떠났는데, 지금은 관광지가 되었다. 가면은, 박물관처럼 얼마나 용감히 싸웠는지를 전시해놨는데, 거기 베트남 마을을 재현해놨다. 당시 베트남 사람들이 터널을 만들어 저항하며 몇년을 싸웠다는데, 이 터널을 재현해놓았다. 반대편으로 나가면 구멍에서 총과 화염방사기를 들고 있는 군인이 겨누고 있는 마네킹이 있는데 이게 정말 충격이었다. 이것이 버젓이 행정에서 만든 것으로 있었다. 지금은 철거 되었다. 베트남 사람들이, 혹은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하겠나. 지금 인사동에서 그림이나 미술을 통해서 평화박물관에서 전시를 하고 있고 천명의 회원들이 도와서 운영하고 있다. '총대신 꽃을' 이라크 파병 철회 집회 거리 전시 3.22 이라크 전쟁은 인류 역사상 전쟁 전에 반대 시위가 일어난 사건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라크전쟁을 가장 먼저 지지한 나라가 한국과 일본이었고 그 때부터 병역거부 등의 말이 많았다. 우리나라 핵문제에 관해서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져서 해방되었고, 침략했으니 당해도 싸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많다. 트라우마힐링이라는 사업을 한다. 국가폭력에 의해 피해를 당한 사람들과 함께 한다. 송..이라는 분이 분단 당시 월북했다가 60년도에 몰래 한국에 왔다 갔는데, 80년대 전두환 정권에서 이들 일가족을 간첩으로 몰아 매도하고 연행했던 사건이 있었다. 이런 식으로 간첩으로 조작되어 안기부에서 고문당한 사람들 개조심. 박물관이라고 생각하면 박제가 되어있고, 건물이 크고 물건도 많아야 된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우리는 돈도 없기 때문에 마음 속의 박물관을 만들자, 어디서든지 평화에 대한 문화, 감수성을 키울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자. 제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질문이나 감상이 있으면 이야기해봅시다. 오피: 트라우마 힐링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김영환: 올해는 한국전쟁 60주년인데 민간인 학살이나 전쟁미망인등 일상 속에서 전쟁에 대화 이야기하고 강좌도 한다. 서로 사례자끼리 모음도 가진다. 우리나라가 동족상잔, 민주화 운동도 겪었기 때문에 그 세대들이 반공이나 분단에 대해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지만 국가 차원에서 치유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오피: 한국에 평화박물관 여기 하나 있는거에요? 김영환: 평화에 관한 박물관 네트워크라는게 있는데 어떻게 보면 나눔의집도 평화 역사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전시의 문제와는 별개로 기본적으로 평화문화를 다루는 것.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 가보면 원폭 피해로서 기억할 뿐, 침략의 역사는 잘 다루지 않는다. 일본 사람들도 학교에서 침략에 대해서는 잘 안 가르쳐주니까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는 항일에 관한 박물관이 많은 편이고, 독일이나 유럽의 경우에는 아우슈비츠, 유대인 학살 등에 대해 많이 다루는 편이다. 평화에 관한 박물관 네트워크에서는 국제적으로 모여서 회의를 갖기도 한다. 그런데 너무 박물관들이 돈을 많이 들여서 건물만 크게 짓는 경향이 있는데, 중요한 건 내용이다. 또 하나 여러분이 조금 관심을 더 가졌으면 하는 것은, 여러분 정대협 20주년 갔었다고 하던데 독립운동 관련한 할아버지들이 치욕적인 역사를 전시할 수 없다며 반대하고 있는데 어떻게 보면 성차별 아닌가 싶다. 무엇을 전시하는 가도 박물관에는 중요하지만 무엇을 전시하지 않는 가도 중요한 것이다. 전쟁기념관에서 전쟁을 미화하고 영웅으로 추도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천안함 사태에서도 46명의 영웅들을 추도하며 라는 내용으로 전국에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는데 내가 볼 땐 영웅이 아니라 개죽음이다, 얼마나 불쌍하냐. 국가가 어떻게 추도하는가도 중요히 생각해봐야 한다. 왜 그들을 추도하는가? 국가가 그런 이들이, 어쩌면 그런 죽음이 계속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마까라상: 김영환 씨는 아주 구체적인 일을 하다가 지금 평화박물관을 시작하면서 좀 더 포괄적인 개념의 평화에 관한 일을 하는데 좀 더 다른 사고 방식이 생겨서 시작하게 된 것인지? 김영환: 아까 이야기했지만 납치 문제 이후로 너무 반북한 감정이 심하게 일고 왜곡된 인식에서 비롯된 켐페인이 많다. 여러분은 안 그렇겠지만 나는 반공 교육을 심하게 받은 세대이기 때문에 그런 수준의 인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 일본 사람들 인식이 그렇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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