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비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
보조3: 명동 노점상 이야기
| | » 중앙길 엠플라자 근처에서 장신구를 파는 노점 주인 신승호(59)씨가 손님들이 흐트려놓은 좌판의 물건을 정리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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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얼마예요?”
“로쿠센엔데스.”(6천원이요.)
“5천원. 5천원. 싸게 싸게.”
“노 바겐. 노 바겐. 이빠이데스네!”(세일 없어요. 충분한 가격입니다.)토요일 저녁, 명동 한복판 중앙길에 사람들이 물밀듯 밀려다닌다. 그 한복판에 자리잡은 노점 좌판에 각양각색의 머리핀, 머리띠 등 액세서리들이 여성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두 볼이 유난히 발그레한 젊은 여성이 머리핀을 들고, 유창한 한국말로 값을 묻는다. 좌판 중앙 높은 단 위에 올라 손님과 눈을 맞춘 노점 주인 신승호(59)씨가 망설임 없이 일본말로 대꾸한다. 일본 사람이 한국말로 흥정을 붙여오면 한국 사람이 일본말로 대답한다. 한국말, 일본말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적당히 섞인다. 문장이 아닌 단어들의 조합이 눈짓, 손짓과 함께 대화를 잇는다. 명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의사소통 방식이다.
한국말 하는 일본인, 일본말 하는 노점상
요즘 명동 노점상 사이에는 ‘발바닥’이라는 신조어가 돌고 있다. 알뜰한 20대 일본 여성 쇼핑객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일본에서 한국 관광이 대중화하다 보니 명동을 찾는 일본 관광객 가운데 20~30대 여성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발바닥이 땀나도록 돌아다니면서 싼 물건만 찾는다. 한국 사정에 밝고, 물건 값을 깎는 데도 스스럼없다. 한국말도 유창하다. “얼마예요. 오빠 깎아주세요” 등 흥정에 필요한 말은 억양마저 한국 사람과 비슷하다. 노점에서도 값이 좀 나가더라도 질 좋고 세련된 ‘준명품’만 찾는다. 일본 손님들에 맞춰 노점은 노점대로 변화를 겪고 있다. 명품에 버금가는 때깔과 품질을 갖춘 상품을 꾸준히 개발해야 한다. 또 젊은 여성들로 단골이 바뀌면서 나이 든 사람들 대신 패션 감각이 뛰어난 젊은 장사치들이 노점에 흘러들고 있다.
신제품 아이디어의 보고이자 실험장
| | » 손님들이 흩트려놓은 좌판의 물건을 정리하는 일을 하루에도 수십번을 반복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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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값싸고 아기자기한 것이 팔린다니까. 젊은 애들 주머니 사정 뻔하잖아. 갈수록 그렇지. 뭐.”
노점들은 팔릴 만한 물건을 남대문이나 동대문의 패션 도매상가에서 구입한다. 그러나 노점 물건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사람들도 있다. 신씨에게 물건을 대주는 ‘김 사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명동 디자이너’다. 명동 노점에서 팔리는 상품을 손수 디자인하고, 제작해 노점에 내놓는다. 머리띠, 머리핀, 핸드폰 고리, 귀걸이, 목걸이 등 액세서리류를 주로 제작한다. 40년 넘게 명동을 손금 보듯 들여다보았다. 명동은 신제품을 개발하는 아이디어의 보고이자 개발한 상품을 가장 먼저 테스트하는 곳이다.
김씨는 “명동, 홍대, 성신여대 순서로 노점 물건이 깔리는데, 이 3곳에서 먹히면 전국적으로 대박이 난다는 말이 있다”며 “그중에서도 명동에 가장 먼저 제품이 깔리고,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상권이라 우리 같은 길거리 디자이너에겐 더없이 중요한 곳”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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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매일 명동에 나온다. 매일 봐야 흐름을 감지할 수 있다. 방송이나 주류 미디어가 선도하는 패션이 길거리에서도 변형을 거쳐 적용된다. 젊은 여성들의 모든 것을 관찰한다. 보이는 모든 것을 눈여겨본다.
소매치기도 잡는 거리의 파수꾼
노점들이 거리에서 장사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한창 장사로 바쁜 저녁 무렵, 한 남자가 다가오더니 신씨에게 “오늘은 저녁 반이라 이제 출근하는데, 보이면 연락 좀 달라”고 인사를 건넨 뒤 사라졌다. 알고 보니 그 남자는 명동 관할 경찰서의 형사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보니 명동에는 소매치기가 활개를 친다. 노점 상인들이 높은 단 위에 올라가 장사를 하는 것은 손님들을 잘 관찰할 목적도 있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면 수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더 잘 잡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물건을 고르는 데 열중하는 손님들은 신씨와 눈을 맞출 일이 거의 없다. 눈이 맞는 사람은 십중팔구 수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거나 소매치기다. 또 손님들이 꼬인다 싶으면 소매치기도 들러붙는다. 신씨는 “최근에는 할머니 소매치기 조직이 명동에 자주 나타난다”며 “내가 붙잡아서 경찰에 넘겨준 것도 몇 차례 있었다”고 말했다.
퇴계로 건너 명동 진입 진풍경
| | » 장사를 위해 명동거리로 들어오는 노점상들. 약속한 시간을 정해 퇴계로를 막고 집단으로 도로를 건너는 것은 명동 노점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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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씨와 같은 노점은 명동에 모두 256개 있다. 이 가운데 128곳은 노점상 자치조직인 ‘명동복지회’에 소속돼 있다. 명동복지회는 노점상들의 친목 도모와 권익 보호, 행정기관과 다툼 해결 등을 목적으로 만들었다. 복지회가 중심이 돼 노점 수와 영업 위치, 영업 시간 등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 정해진
규격의 판매대와 정해진 위치에서 영업을 해야 하며, 주변 상점과 파는 물건이 겹치지 않아야 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 영업 시간도 오후 4~5시께 노점을 펴서 저녁 10시까지는 철수해야 한다. 영업 시간을 이렇게 정해놓은 데는 판매대 이동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대부분 노점들이 짐수레를 남산동 주변에 보관하고 있는데, 남산동에서 명동으로 건너오는 길에는 신호등이 없다. 그렇다 보니 약속한 시간을 정해 퇴계로를 막고 집단으로 도로를 건너는 수밖에 없다. 명동 노점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카더라 소문’에 시달려, 노점 양성화에 관심
대한민국 최고 상권을 차지하고 장사를 하다 보니, 노점을 둘러싼 온갖 ‘카더라성 소문’이 떠돈다. “자릿세가 억대라더라.”, “주인은 따로 있고 알바들이 한다더라.”, “한 사람이 3~4개씩 노점을 하는 기업형도 있다더라.” 이런 소문이 명동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들린다.
신씨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너무 속이 상하고 억울하다”며 “나만 해도 40평생 노점을 했지만, 아직 월세를 전전하고 있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명동복지회 관계자는 “하루에 100만명이 넘게 다녀가는 명동거리에서 혼자 노점을 운영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며 “최신 유행을 타는 아이템을 취급하는 노점들은 젊은 여성들의 취향을 따라잡으려면 어쩔 수 없이 젊은 사람을 써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덧붙였다.
선거철이 다가오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노점 양성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아직 노점 생존권을 보장하고, 거리 질서도 바로 잡으면서 주변 상가에도 이익이 될 수 있는 상생의 묘안을 찾기는 쉽지 않다. 명동복지회 관계자는 “우리도 양성화한다면 노점 수를 더 늘리지 않고, 판매대의 크기를 줄이는 등 자구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