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독 밀리어네어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영화는 숨김없이 솔직하게 인생을 표현했다. It's written! 자말은 그저 시나리오대로 인생을 살아간 것뿐이다. 나는? 내 인생은 이미 설계되어 있는가?
이것은 철학이나 뭐, 밤에나 하는 망상 얘기가 아니다. 이미 나는 학교를 뛰쳐나왔고, 집도 나와 있다. 그래서 나는 근접한 거리에 나를 도울 수 있는 보호자가 없다. 영등포에서 한 시간 반가량 차를 타면 나의 보호자가 있다. 하지만 그 외에 롯데마트 주변을 거니는 내게 어떤 사회가 주는 혜택이란 없다. 나는 부모님이 있고, 집도 있고, 알바도 뛰고, 하자작업장학교에서 공부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
학교와 가정에 포함되어 있다고 느끼면 영원히 그렇게 느끼게 된다. '나는 언제 어른이 될까?'라는 질문, 나는 이 질문을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했다. 10대가 되면서 어서 빨리 중학생이, 고등학생이, 대학생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돈도 스스로 벌고, 멋지게 혼자 살고, 주민으로 등록되어있다는 증명 카드 하나로 세상에 있는 모든 걸 마음대로 누릴 수 있다는 판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19살인 지금의 내게 어른이 되고 싶냐고 물으면, 어른의 기준부터 물을 것이다. 어른이 뭐지? 어른이란? 성인? 성년? 구분은 필요 없다. 이미 나는 학생이 아니다. 그냥 청소년이다. 그렇다면 나와 다른, 또 다른 청소년들은 어디에 있는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욕구가 커짐에 따라, 그 판타지를 빨리 이루고 싶고, 그 판타지 하나로 세상에 있는 모든 불만을 견디고 있던 아이는 집을 나오고, 학교를 나온다. 학교와 집이라는 하나의 안전한 안식처에서 벗어난 아이는 갈 곳이 없다. 어딜 가야 하지, 일단 돈을 구한다. 돈이 있어야 살 수 있으니까. 돈, 당장 잘 곳을 구하기 위해서 10대가 갈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벌써부터 자신의 존재와 위치에 대한 고민이 커진다. '나는 누구지', '나는 왜 여기에 있지'라고. 돌아갈 가정이 있다. 다시 돌아가면 그 굴레 안에서 벗어날 순 없지만 안전하게는 살 수 있다. 선택이다. 뉴스에 나오는 사건이 벌어지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유를 택할 것인가, 집과 학교로 돌아가 과거의 추억으로 만들 것인가.
자말은 선택이 없었다. 굳이 선택하지 않더라도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를 자유로 만들어주었다. 자유라는 사치를 누리고 싶어 하지도 않았던 자말은 선택 없이 사회가 만들어낸 틀에서 굴려 지고 굴려 지고 굴려 지고 굴려 지고, 굴러간다. 하지만 그는 솔직하고 정직했다. 정직한 만큼의 보답, 이것이 권선징악인가? 사실 정말 뿌리 뽑혀야 하는 악은 뽑히지 않았다. 퀴즈쇼는 모순이다. 백만장자라는 기회를 주지만, 정작 그 기회를 잡은 사람을 몰아붙여 중간에 포기하게 만든다. 아니면, 마구 부추겨 답을 대충 찍게 만든다. 사회자인 남자,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는 자말을 무시하고, 몰아붙이고, 만들어진 그의 지위를 뭉개고 짓밟고, 답마저 거짓으로 제시한다. 정직하고 솔직한 청년, 선 자말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제 의지로 답을 찍는다. 끝내 그를 막아서고 싶던 사회자는 자말을 저지하지만, 정직한 자말은 또 살아남고, 결국 백만장자가 된다. 하지만 자말은 정말 말 그대로 쓰여 진 시나리오대로 움직인다. 자말 덕분에 퀴즈쇼는 정말 선량한 시민을 돕는 프로그램이라는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각인될 것이고, 인도의 순수한 소시민들은 그 유행에 맞들려 계속해서 일확천금을 노릴 것이다.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너무 불안하고, 치졸하고, 졸렬하고, 냄새나서 상상하기 두려운 이야기뿐이다. 나는 정직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다. 하지만 하자를 벗어나(라는 표현, 웃기지만 참아주세요) 더 넓은 사회에 발을 담그려고 하면 마치 뜨거운 탕에 발을 담갔다가 자동반사로 빼버리는 것처럼 겉모습에 겁을 먹게 된다. 계속 이 끝없는 고민을 해야 한다. 나는 나의 인생을 설계한 '무언가'에 의해 인생을 살고 있다. 그 무언가는 입에 담기도 무서운 자본주의가 될 수도 있고, 내가 될 수도 있다. 아. 어렵다. 감독 나쁜 사람.. 언젠가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고 나서, 나이를 더 먹은 뒤에 또 읽겠다는 독후감을 쓴 적이 있다. 이 영화도 비슷하다. 언젠가 내가 좀 더 공부를 하고, 사회라는 뜨거운 욕탕에 익숙해서 숨 쉬기 힘들지만 떼를 빼기 위해 계속 있는 그 상태가 되면, 그 때 다시 한 번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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