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스크랩글 수 39
라디오하자 인턴 보고서 (2001. 6. 16 / 원, 디제이, 19세) 제의: 얼마 후, 나는 205호에 초대되었다. 그 방에는 기획부장 종휘, (당시) 대중음악 판돌이었던 고기, (당시) 정보기획팀의 양양, 꼴레지오의 판돌이면서 내 담당 판돌이기도 한 히옥스가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인터넷 라디오 방송국의 개요를 설명하고 나에게 정식으로 메인 디제이의 자리를 제안했던 것 같다. 하지만 사실 잘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뚜렷이 기억하고 있는 부분은 나에게 디제이를 맡기려는 방송에 관한 것인데, "사쿼터"라는 낯선 제목아래 장르가 다른 네 명의 뮤지션들과 내가 10분씩 얘기를 나눈다는 컨셉이었다. 그들은 내가 방송을 통해 나의 얘기를 들려주기를 원했다. 나중에 양양에게 센터의 아이들 중에서 내가 선택된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건 다음과 같다. 센터장 조한네 집. 아무튼 그러저러한 이유로 나를 메인 디제이로 쓰는 것이 적합하다는 결론이 나왔고, 프로그램에 대한 꽤나 구체적인 아이디어와 디제이로서 지켜야할 계약조건이 첨부된 기획서를 가지고 나를 불렀다. 따라서 내가 제안을 받았을 때는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혀있는 상태였다. 우리 팀의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 제리의 글을 읽어본 사람이 있다면 이상하게 생각해볼 대목이 바로 여기다. 전부터 대중 음악 작업장에서 일해왔던 제리의 경우, 고기모씨가 전화를 걸어 "재식아 니가 인터넷 방송국 엔지니어 좀 해야겠다"라는 한마디로 내가 겪었던 이 모든 섭외의 과정을 결정했다고 한다. 여기에 대한 내 담당 판돌 히옥스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나를 메인 디제이로 쓰기로 결정했던 판돌들(종휘, 고기, 양양..?)은 먼저 히옥스에게 찾아가 설명했다. 그에 대한 히옥스의 의견은 "자기 얘기를 풀어놓는 10대" 포지션으로 접근하는 일이기에 나에게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다 풀어내놓고 나서, 더 이상 들려줄 새로운 이야기가 없게 되면 더 이상 누구도 나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그러니까 히옥스는 그 무렵의 내가 내 안으로 내공을 쌓을 때지 다 퍼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었던 거 같다.(하긴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담당 판돌인 히옥스가 반대하고 나서자 휘, 고기, 양양은 나를 직접 설득하자. 쪽으로 분위기가 몰아졌고 그래서 나에게 그토록 정식으로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 때의 하자는 정말 이랬다. 와.. 감개가 무량하다. 하자의 죽돌이들은 정말 많이 성장했나보다. 아무튼. 제안을 받는 자리 내내 나는 내가 (어른)판돌이들과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한 떨림과 두려움, 선택받았다는 얄량한 기분 좋음, 이 상황에 똑똑하고 의젓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강박, 디제이라는, 심심할 때 한번 해보는 상상 속에서도 계산에 없었던 일에 대한 호기심과 걱정이 뒤섞인 잡탕 속에서, 한마디로 제정신이 아니었다.(세상에.. 이때는 정말 이랬다!!) 그 짬뽕같았던 자리를 벗어난 후 나를 둘러싼 고민의 초점은, '아직은 너를 그런 식으로 드러낼 때가 아니며 안으로 쌓아야 할 때다'라는 의견과 '이 경험자체가 배움이며 안으로 쌓는 작업일 수 있다'라는 의견의 대립이었다. 나도 고민 비슷한 것을 해보긴 했다. 하지만 그때 나를 감쌌던 흥분의 길을 내가 걷지 않으면 웬지 평생 후회할 것 같은, 더 솔직하게 말하면 나에게 올 수 있었던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아 잘 나가는 꼴을 보면 속이 쓰릴 것 같은 그런 기분에 그냥 하기로 했다. 나의 이런 성향은 요즘엔 많이 고쳐졌다. 제안이 왔어도, 그때 같이 그런 기분에 확 해버리지는 않는 것 같다. 하고 싶은 마음이나 기분과는 별개로 내 스케줄이나 일하는 능력따위를 고려해서 거절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게 말은 쉽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은 정말 다르다는 것은 기억해 달라. 준비 1: 인상깊었던 두 번째 회의는 시각방에서 이루어졌다. 사이트 디자인에 관한 것이었는데 나는 이때도 뭐가 뭔지 잘 이해를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대충 디자인은 활이 하고 웹 작업장에서 만든다는 것이라고 생각했나보다. 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창재씨가 디자인을 했는데? 움.. 지금도 잘 모름. 이 회의가 인상깊었던 이유는 오로지 이 날 처음 모든 디제이들과 엔지니어가 다 모여서 얘기를 했기 때문이다. 좀 유감스러운 것은 다 모여 회의를 했던 이유가 이 날 한겨레 신문사와 인터뷰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만. 나중에 들은 말로는 내가 디제이를 하겠다고 말한 이후에도 107호에서 주로 노는 것을 맘에 걸려하던 고기는 나의 디제이에 대한 각오에 의심을 품고 있었는데 이 날 내가 한겨레 기자에게 말하는 것을 듣고 안심과 믿음을 가졌다고 한다. 이것은 내가 라디오 하자를 하던 동안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부분이다. 고기와 히옥도 나름대로 마음 고생이 있었으리라.. 맘 써주는 척 해보지만 사실 이때는 내가 너무 힘들어서 남 돌볼 여유 없었음. 예를 들면 고기의 불만은 왜 내가 밥을 304호에서 고기와 먹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고기는 이 말을 니 밥은 내가 산다.는 식으로 했단 말이오!! 물론 밥을 함께 먹는 커뮤니티의 중요성과 결속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그 당시에도 고기의 우려에 대해서 인정하고 있었고 내가 빨리 적응하지 못한 탓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기나 제리, 무린씨와 함께 밥을 먹을 때마다 내가 돈을 내지 않게 되는 것이 나에게는 또 부담이었다. 경제력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내가 누군가에게 밥을 얻어먹는 사이로 정해지는 순간, 그 누군가에 대한 나의 발언권과 위치 또한 밥을 얻어먹는 사이가 되는 것이다. 아무튼 밥을 304호에서 먹는 문제로 대표되는 나의 친밀도에 대한 의심은 내가 304호에서 일하는 것에 고통을 앉어준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이쯤에서 나무린씨를 이야기해야 할까. 이 사람의 원래 역할은 사이트 디자인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첫 미팅을 할 때 나무린씨는 느끼한 목소리로 전 나무린이고요, 지금은 라디오 하자 사이트를 위한 벤치마킹을 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무린씨의 가장 큰 문제는 라디오 하자가 오픈을 하는 그 날까지 혼자서 벤치마킹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한 일이 없다고나 할까. 세상엔 놀라운 사람이 참 많다. 결국 고기가 나무린씨에게 화를 냈고 싸우다가 나갔는데 이 과정이 너무 불투명했다는 것도 나중에 가서 문제가 되었다. 사이트 디자인에 대해서 내가 내놓은 의견은 영화 '벨벳 골드마인' 분위기로 했으면 좋겠어요.였지만 그 말을 듣고 나온 시안은 아인슈타인의 공책에 자주색을 칠해놓은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래서 결국은 고기가 내놓은 의견, 구형 라디오의 모양을 딴 심플한 느낌으로 가게 되었다. 이 일차 시안에 관해 웹 작업장에서 회의를 했었는데 나는 이 때 창재씨의 무서움을 처음 알았다. 고기가 몇 가지를 지적했더니 그걸 고치려면 내가 몇 시간을 고생해야 하는 줄 아냐며 웹 디자인에 대한 강의를 했다. 게다가 그 때 창재씨는 소매없는 티를 입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팔뚝을 흔들며 목소리는 또 얼마나 큰지 세상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 나는 그냥 쫄아서 가만 있었는데 고기는 화가 무지하게 났지만 같이 소리 지르지 않고 매끄럽게 잘 넘겼다. 그때처럼 고기가 훌륭하게 보인 적이 없었다. 가장 슬픈 것은 결국 창재씨는 몇 시간 동안 고생하지 않았고 덕분에 그 디자인은 초안에서 전혀 수정되지 못한 채 지금까지 남아있다는 점이다. 준비 2: 첫 시험 방송 이후 고기는 나에게 매일매일 방송을 할 것을 권했다. 이것은 나에게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나는 다음날 방송부터 당장 스크립트를 쓰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스크립트는 좋은데 읽는 내가 너무 어색하다는 의견이 빗발쳤다. 뭐 반응이야 어떻든 나는 방송을 하면서부터는 즐거워했던 것 같다. 가장 멋졌던 것은 그 무렵에 내가 아이덱에 참가하러 일본에 일주일정도 가게 되었는데 이 기간의 나에게 고기가 md를 쥐어준 것이었다. 소리를 채집해오라는 것이었다. 인터뷰도 좋고 길가에서 들려오는 음악도 좋고 아무튼 소리를 담아와서 방송을 하라는 것. 나는 md를 일본에 가기 전 급하게 끝내야 했던 변영주 감독의 인터뷰(당시 내가 스텝으로 일했던 십만원 비디오 페스티발의 매뉴얼에 싣기 위한)를 하는데에 시험삼아 사용했다. 처음 md를 사용해서 했던 인터뷰도, 일본에서 했던 소리 채집도 나에겐 아주 재미있었다. 음.. 그리운 시절이여. md로 소리를 채집하자는 아이디어는 나중에 인터뷰 쇼로까지 발전했다. 덕분에 잘 하지도 못하는 인터뷰가 내 전문인양 인식된 면이 있었고 그 해 여름, 유스 페스티발 때도 몰려온 외국 밴드의 인터뷰 요원으로 열심히 뛰어다녔다.(하지만 인터뷰 내용은 별로 재미없었다.) 오픈: 외부적으로 봤을 때도 라디오 하자의 운영은 답답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일단 오픈을 했으면서도 제때 업데이트가 되지 않았다. 엔지니어 제리는 며칠 밤을 새워가며 일을 했지만 당시 웹마스터였던 친구(이름이 생각 안남)가 시험이라는 이유로 펑크를 내기 시작했던 것. 또한 방송이외의 부가적인 꼭지들, 틴즈 차트라든가 뮤직 뉴스 같은 부분은 아이디어를 냈던 겅민이 미국을 가버리면서 한 순간에 정지되고 말았다. 겅민이 소개시켜 주었던 힙합 디제이들도 그녀가 떠나자 하루아침에 제때 모이기도 힘든 오합지졸이 되고 말았다. 상황이 이러한데 적극적인 홍보란 생각할 수 없었고 따라서 청취자가 생기지 않아 반응이 느껴지지 않는 것도 디제이들의 힘을 뺐다. 나중에 내가 엠비시 스페셜에 나가고 나서 엉뚱하게 옛날 내 방송을 듣고 업데이트는 언제 하냐는 둥의 반응이 있었을 뿐. 중단: 디제이: 결국 지독한 어느 밤, 히옥스와 양양 앞에서 닭똥같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나는 이제 다 그만두고 엄마에게 돌아가 농사나 지을라요~했는데. 양양은 전염 효과인지(하품같이) 괜히 눈물을 한 방울 흘리더니 이건 눈물이 아니야, 분비물이야.라는 말을 남겼고, 히옥스는 그건 정말 최악이잖아. 잠깐 회의하고 올테니까 집에 가지 말고 기다리렴.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더니 회의를 하고 돌아와서는 내가 하자는 대로 할거니? 묻기에 끄덕끄덕. 그러면 내가 너의 어시가 될 테니 하자 일년 생일 파티를 맡아서 하려무나.라고 말했다. 그래서 시키는대로 양양과 히옥스, 꼴레지오와 함께 하자 생일파티를 했다. 생일 파티의 이름은 <DJ SHOW:하자에게 선물을 주자>였고 나는 디제이가 되어 기획을 했고 쇼의 시작부터 끝까지 무대에 나와 절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제리는 디제이 쇼의 총연출을 맡았고 오퍼레이팅이며 뭐며 하여간 세상의 모든 일을 다했다. 행사는 성공적이었고 성공적이어야만 했다. 잘난 척 좀 더 하자면 이것으로 나와 제리는 판돌의 서포트만을 받으며 10대가 직접 기획하고 연출하는 최초의 행사를 해냈다. 더 개인적인 의미로 들어가자면 라디오 하자에 대한 한풀이를 했다. 마지막으로 온 세상에 난 디제이 핑크 스파이더야!라는 말을 소리소리 질러댔던 내 슬램의 가사를 소개한다. 난 디제이 핑크 스파이더야! 이 날을 기다려 왔어. 니가 내 안에 자리잡은 하나의 나이길. 너무 많이 울었지. 하고 싶은 게 뭔지 찾는 법을, dON'T RUN AWAY! BABY! NO EXIT! 그래서 나는 이렇게 여기 서서, 그래서 너는 이렇게 여기 서서,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여기 서서, 밝은 웃음으로만 널 맞지 못하는 날 용서해. 나는 너를 사람처럼 느끼며, ..Happy birthday to haja! ---------
Please consider the planet before printing this post hiiocks (hiiock kim) e. hiiocks@gmail.com w. http://productionschool.org, http://filltong.net t. 070-4268-922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