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랑 - 고정희
- 절망에 대하여
황혼무렵이었지
내 외로움만큼이나 흰
망초꽃 한아름을 꺾어 들고 와
하느님을 가진 내 희망이
이물질처럼 징그럽다고 네가 말했을 때
나는 쓸쓸히 쓸쓸히 웃었지
조용한 밤이면
물먹은 솜으로 나를 적시는
내 오장육부 속의 어둠을 보일 수는 없는 것이라서
한기 드는 사람처럼 나는 웃었지
영등포나 서대문이나 전라도
컴컴한 한반도 구석진 창틀마다
축축하게 젖어 펄럭이는 내
하느님의 눈물과 탄식을
세 치 혀로 그려낼 수는 없는 것이라서
그냥 담담하게 전등을 켰지
전등불 아래 마주 선 너와 나
30대의 불안과 외로움 너머로
유산없는 한 시대가 저물고 있었지
그러나 친구여, 나는 오늘밤
오만한 절망으로 똘똘 뭉쳐진
한 사내의 술잔 앞에서
하느님을 모르는 절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이쁜 우매함인가를
다시 쓸쓸하게 새김질하면서
하느님을 등에 업은 행복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맹랑한 도착 신앙인가도
토악질하듯 음미하면서, 오직
내 희망의 여린 부분과
네 절망의 질긴 부분이
톱니바퀴처럼 맞닿기를 바랐다
아프리카나 베이루트나 뱅글라데시
우울한 이 세계 후미진 나라마다
풍족한 고통으로 덮이시는 내
하느님의 언약과 부르심을
우리들 한평생으로 잴 수는 없는 것이라서, 다만
이 나라의 어둡고 서러운 뿌리와
저 나라의 깊고 광활한 소망이
한몸의 혈관으로 통하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