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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안에서 나오기 ...............................................1학기, 디자인팀, 나나(기나은) 인터넷 잉여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들어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컴퓨터를 켜서 인터넷을 하는 것이었다. 가족들이 집에 와서 컴퓨터를 사용하기 전까지 계속할 정도로 내 삶의 유일한 낙이였다. 힘을 덜 들이고, 많은 돈을 쓰지 않고 최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고, 가장 효율적으로 놀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밖에 나가서 놀 애도 별로 없기도 했었고. 학교에서는 수업시간에만 열심히 집중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거의 잉여처럼 살았다. 집에서는 컴퓨터가 있으니 더더욱.. 처음에는 디씨인사이드같은 유머사이트에서 놀다가 포털사이트에 있는 뉴스, 블로그, 아고라 같은 곳으로 눈을 돌렸다. 사회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가끔마다 보면 북한과 이주노동자 같은 민감한 문제들에 대해 무작정 비난하면서 온갖 욕을 쓰는 무개념 누리꾼들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떠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논리적이고 심도 깊은 포스팅이나 뉴스 밑에 달린 댓글 토론들을 보면서 감탄했다. 인터넷을 통해 한국 사회의 어두운 이면과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인터넷은 10대의 끝자락에서 불안하게 버티던 나에게 10대의 전환기를 제공해준 중요한 매체가 되었다. 다른 죽돌들과 달리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 특히 부모님을 비롯한 친척들은 “진보”, “대안적인 삶”이라는 키워드와 거리가 먼, 한국 사회의 흐름을 그대로 영향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보통의 대한민국 사람들처럼 경기도의 어느 위성도시 속에서 “평범하게” 자랐다. 빈부격차에 의해 계급이 형성되는 시대에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 얻어지는 수많은 자료들을 접하면서, 운이 좋게도 인터넷을 통해 “어설프지만” 보통의 또래와 다른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고, 이러한 문제의식이 대안적인 삶에 대한 관심으로 이루어졌다. 결국은 트위터를 시작하면서 대안적인 삶은 내 삶에서 중요한 키워드가 됬다. 트위터 덕분에 청소년 인권 운동을 하는 아수나로라는 단체를 알게 되어 청소년 인권 운동을 하게 되었다. 인권운동을 하면서 학생으로서 사회를 살아가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일반학교를 다니는 청소년은 항상 미래를 담보를 잡아서 공부에만 시달릴 수 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많은 청소년들이 자유와 표현할 권리, 주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기게 된다. 이러한 억압이 이 시기에 당연한 것 인줄 알고 꾹 참고 살았지만, 잃어버렸던 청소년으로서의 권리에 대해 인식하게 되고나서 일반학교에 있는 것 자체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인권에 대한 인식도 거의 없고, 지켜지지도 않는 환경에서의 배움은 그렇게 와 닿지도 않았다. 우물 안에서 하는 공부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기 전인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처럼 좋은 국어선생님이 되어서 자기계발서가 범람하고 있는 요즘 시대에 인문학을 통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기술과 문명이 개발됨에 따라 인간성이 예전에 비해서 많이 사라졌지만, 많은 이들이 다시 인문학을 접하게 되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 같았다. 국어교사였던 이계삼 선생님이 저술하신 “삶을 위한 국어교육”을 읽고 확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회는 여러 가지 문제로 얽혀있는 복잡한 세계이기 때문에 한 가지 솔루션을 제공한다고 해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기 때문에 인문학 하나로 다른 사람들을 계몽할 수 있다는 생각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학교 생활에 거의 흥미를 잃고 있을 때 유일하게 학교에 다니면서 즐거운 시간이 방과 후에 하는 논술 수업이었다. “세상 모든 삶을 향한 시선”, 이하 세모시 논술이라는 이름에 맞게 공정 무역, 안락사, 역차별 문제, 연예인 노예 계약, GMO 농작물, 반값 등록금 등등의 현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이슈들을 주제로 삼아 수업을 했었다. 배운 내용을 토대로 학생들끼리 찬반을 나눠 토론을 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처음에 토론을 할 때 숨겨져 있던 승부욕이 발생해서 열심히 참여했었다. 말할 때 수습이 안 되서 결과가 그렇게 좋지는 못했다. 이 때의 경험이 지금의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됬다. 하지만 논술 수업은 대학 입시 전형을 위해 만들었던 수업이였으므로 2학년 2학기 때 성적이 낮아서 짤렸다. 학교에서 하는 모든 공부들이 내게 의미 없고, 시간만 죽이는 시간으로 전락해버렸다. 결국 일반학교에서의 공부를 완전 놓아 버렸다. 트위터를 통해서 반 fta 집회, 한진중공업 노동자 해고 문제에 대한 희망버스 등등의 많은 집회들을 알게 되었고, 시간이 되는데로 집회에 참여하면서 나름대로 세상을 배우려고 노력을 했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도록 노력을 했다. 인터넷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정보 및 소통의 격차가 많이 줄어들었다. 1인 1휴대폰 시대는 21세기를 본격적으로 지배하는 자본주의에 의한 빈부격차(계급사회)를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매체가 되었다. 일반학교에서는 이에 대한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휴대폰을 걷어가고, 학생들을 가둬서 업데이트도 느린 공부나 가르치려고 하니 원.. 그나마 업데이트를 잘해주는 것은 대학입시요강뿐이었다. 이런 환경 덕분에 부천에 있는 학교 중에서 가장 대학교를 잘 보낸 학교로 이름을 날렸지! 일반 학교를 다니며 느낀 회의감 다들 열심히 공부를 하더라도 등수는 매겨지고 등수에 따라서 대학교가 결정이 되는데, 뭔 소용일까? 어떻게 노력하던지 간에 승리자와 패배자는 나온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유를 박탈당한 채 스트레스를 받으며 학교와 학원에 얽매이며 바쁘게 생활한다. 각고의 노력 끝에 수능이 끝나고 나서 3년 동안 공부하는데 쓰인 수많은 교과서와 참고서들이 한순간에 버려진다. 12년의 교육은 대학 입시가 끝나고 빛을 잃는다. 대학교 이후에는 또 다른 공부를 새로 시작해야하는 것이다. 취직되기 위해 전공공부를 하면서 취업공부도 따로 해야한다. 수능이란 거대한 산을 넘으니 취업이라는 거대한 산이 “뙁!”하고 등장한다. 또 다른 경쟁의 시작이다. 살기 위해 다른 경쟁자들과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입시공부를 하면서 다른 아이들의 공부를 도와주면서 이타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을까? 말의 앞 뒤가 안 맞지! 내가 속했던 반은 다른 반에 비해 공부를 하는 아이들이 거의 없다보니 공부에 흥미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수업시간 내내 무기력 하게 쳐져있는 학생들이 많았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등수는 정해져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서 체념한 거 같았다. 선생님들의 목소리만 교실에 고요히 울려퍼졌다. 가끔은 몇몇 아이들의 수다와 함께. 답답한 교사들이 수업의 20%이상을 학생들이 의지가 없다고 닦달하는데 허비했다. 학생과 선생님의 모습이 아닌 의지를 상실한 말에게 채찍질하는 기수의 모습같았다.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패배자가 되는 것일까? 엄청 노력했는데도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조금 노력했는데도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각자 잘할 수 있는 것이 다 다른데 같은 기준에서 줄맞춰서 학생들을 평가하고 학생들의 의지와 재능은 상관없이 성적만으로 대학교 입학을 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대학교에 가서도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에만 열심히 매진하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어처구니없게 비싼 등록금을 대기 위해 알바를 하거나, 대학 공부로만으로 미래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취직공부를 동시에 하면서 공부를 해야 한다. 게다가 10년 전 사학법이 개정되기 전과 비교해서 학생들의 수입으로만 대학교 수시 등록비를 시작해서 등록금을 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이런 비싼 등록금을 낸다고 해도 ‘소위 말하는’ 인서울 대학교와 몇몇 특성화 대학교를 제외하면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기란 하늘의 별이다. 밖에서는 이러한 대학교 말고 다른 대학교를 나왔다고 하면 우습게 본다. 한국 전쟁 직후에는 대학교는 들어가기도 쉬웠고, 졸업하기만 해도 안정적인 직장은 쉽게 잡을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믿고서 너도나도 따라하게 되다보니, 더 좋은 대학교를 가기 위해 경쟁을 하게 되고 학교는 전쟁터가 되어버렸다. 더 이상 신성한 교육의 장이 아니게 되어 버린 것이다. 작업장학교에 다니면서 중장년의 어른들과 얘기를 할 때, 일반학교를 나왔다고 얘기하면 다들 한숨만 쉰다. 이러한 배경을 얘기해도 어른들은 못미더워하는 분위기이다. 학교만 믿어라, 부모님만 믿어라 해놓고 성인이 되면 학비하고 생계는 “성인이 되었으니 네가 알아서 다하렴“하고 나몰라라 방관하거나, 결혼 할 때까지 부모 손을 벌릴 수 밖에 없는 무기력한 청춘들..! ‘아프니까 청춘이다?’ 그럼 병원에 있는 환자들이 아프니까 청춘이겠네..? 국가에서 정해놓은 의무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최소한의 삶과 인권은 보장되어야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12년 동안의 학교 공부가 인간이 삶을 사는 데에 필요한 것이 아닌, 대학 입시에서만 효과를 발휘하게끔 교육을 받게 되어있다. 그 쪽으로 효율화만 되어있다보니까 인권 같은건 쉽게 무시할 수 있는 것이다. ‘효율적’이라는 이름은 인권을 짓밟고, 이를 합리화 시키기에 좋은 단어이다. 많은 기업들이 ‘효율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노동자들을 착취해서 이용하다고, 갑의 입장에서 을의 입장인 노동자들에게 온갖 횡포를 저지르다가 돈이 안되니까 해고시켜버리고, 취직율이 낮은 상태에서 일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이전보다 저렴한 가격에 인턴과 비정규직으로 채용해서 착취하고, 값 싼 재료들을 온갖 포장을 해서 비싸게 소비자들에게 팔아먹지 않는가? 전체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그건 정말로 비효율 적이다. 노동자를 자원으로서 대하고, 소비자를 돈으로서 대하니 그것이 효율적으로 보일 뿐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의무교육인 고등학교를 졸업해도 할 수 있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않다. 하지만 학력위조만 해도 대우가 달라지는 세상이다.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몇몇 직종을 제외한다면 실질적으로 학력을 필요한 일은 그렇게 많지 않다. 기업에서 충분히 교육을 시키고 나면 가능한 일이다. 학교에서는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저 순응하며 ‘열심히’ 노력해서 자리를 잡으라고 강요할 뿐이다. 물론 몇몇의 일부 선생님들은 이런 분위기를 걱정했지만, 인권적이지도 못하고 그저 엄격하고, ‘경고성’ 벌점을 주기 위한 교칙들과 교실의 분위기를 본다면 수긍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학교는 이미 예전에 끝났어. 돈 때문에 하는거지. 젠장, 그러니까 들어갈 때 비싼 등록금이랑 교재비를 내라고. 학생들아!’ - 어느 대학교 총장 ‘L'씨 (원작의 어감을 살리지 못해서 아쉽다.) 삶이란 그렇게 힘든 것일까? 특성화고 입시에 실패했을 때의 겨울에 중상위권의 성적을 빼고 내게 남는 것이 없었다. 내 자신이 너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자연스럽고 쉽게 할 수 있는 일들이 내게는 너무나도 어려웠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 원인이 사람이 성장하면서 반드시 거쳐야하는 과정들을 겪지 못하거나 시기에 맞는 배움을 배우지 못한 채 성장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다만 국가에서 지정한 의무교육만큼은 충실히 이행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꽤 오랫동안 쭈구리 생활을 했다. 이 말은 즉슨, 꽤 오랫동안 온갖 쓴 소리를 들으며 고립된 채 지냈다는 의미다. 고등학교 들어가면서 친구들을 예전보다 많이 사귀기는 했다. 소통의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 시점보다 “아주 많이” 나아진 편이지만,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기에는 여전히 불안한 존재였다. 이러한 생활을 지속한다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다. 인문학과 철학을 본격적으로 배우게 되면 내 삶의 빈 부분을 채워줄 수 있을거 같아 관련 책을 열심히 탐독했다. 학문의 기반이 제대로 닦이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이론과 실전은 달랐다. 소프트웨어가 아무리 좋아도 이를 실행하는 하드웨어의 성능이 낮으면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이러한 시도를 통해 어떠한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한 방향을 정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자아에 대한 고민만으로도 머리가 아팠지만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내 주위를 둘러싼 현실이였다. 어렸을 때만해도 매우 명랑하고 밝았다. 그러나 순종적이지 않은 편이였다, 이해가 될 때까지 귀찮게 누군가에게 질문을 하고, 다른 사람이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하지 않는 이상은, 주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현실과 부딪치는 일이 많았다. “너는 어리니까 어른인 내 말을 무조건 따라야해!” 현실과 갈등을 겪을 때마다 격렬하게 저항도 해보기도 하고 내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이해해보려고 온갖 방법도 강구해봤지만, 돌아오는 건 그저 순종하라는 폭언뿐이었다.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사람들이 없었다. 물어보면 네가 잘못했고, 네가 못났기 때문이란다. 이런 세상에 살아남으려면 강해져야 한다는 한결 같은 대답뿐이었다. 그 말만 믿고서 살아왔지만, 문제는 해결되기는 커녕 더 심각해졌다. 잘못된 시스템 속에서의 최선의 방법 일지라도 결코 좋은 해결방안이 될 수 없다. 결국은 나의 무능력과 내 주위의 환경을 탓하며 모든 걸 체념하고 현실로부터 도망쳤다. 도망갈수록 나는 무중력 상태가 되어 어딘지도 모르는 세상을 둥둥 떠다니며 보이지 않는 사물에 부딪치며 아파하며 울고 있었다. 시간은 시간대로 흘러가고, 나는 나대로 심신이 깎여나가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인정하기 싫은 또 다른 사실 혹은 현실이 태풍처럼 다가와 날 흔들고 지나간다. 그 후유증으로 혼란을 겪었다. 결국엔 고통에 시달리다가 자신을 파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설상가상으로 또 다른 태풍이 다가와 날 또 흔들었다. 끊임없는 악순환이었다. 땅에 내딛어 평화롭게 걷으며 인생을 살고 싶다면 나의 역사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지금 처지를 한탄하고 위로받으려고 해봤자, 그 때만 편안할 뿐 결국은 변하는 게 없다. 되짚어보는 과정이 괴로울 지라도, 이 과정을 다 거쳐야만 비로소 내 자신을 고통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준비가 되는 것이다. 어렸을 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참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경험해서 멋지고 훌륭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렇지 않은 어른들이 많았다. 그들은 어른이 되면서 얻는 ‘합법적인’ 권리를 남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에 걸맞는 책임감을 지키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에게 자기의 기분을 맞춰주길 강요하는 애보다도 못한 사람이었다. 사람이라고 부르기 싫을 만큼 이성이 통하지 않은 어른들도 있었다. 어렸던 예전이나 어느 정도 성장한 지금 다시 생각해도 똑같다. 권력을 당당히 행사했을 때의 불쾌한 표정이 모든 걸 말해줬다. 그러한 어른들은 일상에서 거의 행복함을 느끼지 못했다. 항상 재물이나, 비정상적인 사랑 등등의 무언가를 갈구했다. 그들의 이상적인 노선의 삶의 방식 방식으로 살다가는 땅을 치며 살아갈 거 같았다. 인터넷에서 그들과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확신했다. 그들의 행동과 사고방식을 싫어하면서도 어느새 그것을 답습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적잖이 충격 받았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교에 가면 지긋지긋한 생활 탈출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러나 좋은 대학교에 가서 성공한다고 해도 결국은 그들의 삶을 답습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성공과 실패 여부를 떠나서 “나의 인생”을 살고 싶었다. 그러나 계속 되는 현실과의 싸움은 쉽지 않았다. 그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경제난 나의 멘탈은 처참히 붕괴되어갔고 몸도 급속도록 나빠졌다. 우울증과 공황장애 그리고 무기력증이 절정에 있었을 때,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쳤다. 절벽 끝에서 떨어지기 직전에 많은 사람들이 손을 잡아줬다. 1년만 버티면 고등학교 졸업장이 나오기 때문에 가족들이 거세게 반대했지만, 나에 대해서 가장 잘 이해해주시고, 날 아껴주셨던 학교 선생님들 덕분에 ‘힘들게’ 가족들을 설득해서 자퇴를 하고 작업장학교의 죽돌이 되었다. 1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곳에서의 그토록 ‘원하던’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지구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세 “우리가 살 수 있는 삶의 최저 생계선은 어디일까요?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절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Slow is beautiful"의 저자이신 쓰지 신이치 선생님께서 강연 중에 질문을 하셨다. 의,식,주,돈,물... 등등 다양한 대답들이 나왔다. 대답은 의외로 단순명쾌했다. “인간의 삶의 최저 생계선은 태양과 사랑입니다.” ‘물리적인’ 삶의 최저 생계선에서만 생각하고 있었지, ‘정신적인’ 삶의 최저 생계선에 대해서 간과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태양이 삶의 최저 생계선이라는 것이라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먹을 것이 많아도 한 곳에서는 너무 많이 남아서 버리고, 다른 곳에서는 구매할 수 있는 돈이 없어서 굶어가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삶의 ‘최저’ 생계선이였다. 앞에 서술했던 문제는 최저 생계선 밖으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지.. 쓰지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인간은 동물과 식물을 양분으로 삼는다. 그 동물은 다른 동물이나 식물을 양분으로 삼으며 그 식물은 태양과 비를 통해 양분을 얻는다.” 이 전제는 자연이 존재한다는 조건이 없으면 성립할 수가 없다. 자연은 인간과 모든 생명의 어머니인 셈이다. 게다가 자연은 아무 댓가를 받지도 않고서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양분도 제공함과 동시에 삶의 터전도 제공하고 아름다움도 안겨다준다. 정말로 아낌없이 주는 존재다. 댓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 거룩한 사랑처럼.. 보이지 않지만 없으면 살 수 없는 공기처럼.. 하지만 모든 지역의 사람들이 자연의 혜택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로 들자면, 지구의 남반구와 북반구에 사는 사람들은 태양의 혜택을 거의 누리지 못하며 혹독한 추위와 싸우며 살아야하고, 적도에 사는 사람들은 1년에 2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에만 비를 맞을 수 있고 나머지 기간에는 후덥지근한 더위와 싸우며 살아야한다. 인간은 그렇게 자연이 주는 혜택을 누리면서도 동시에 불편함을 느끼고 살아왔다. 선조들은 수 백년간에 걸친 삶에 의해서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고, 자신들의 살고 있는 곳의 재료와, 자신들이 가진 기술을 이용해서 자연이 주는 불편함을 ‘극복’하고자 했다. 자연이 주는 불편함을 극복하면서 자연이 주는 혜택을 잘 이용해서 문명을 이룩한 인간의 생존 능력에 대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의 자연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는 후대에 가서는 자신들의 터전을 파괴해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연이 주는 혜택을 당연하게 여겼고, 자연을 공존하는 존재로 보지 않고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자원으로서 대했기 때문이다. 근대화를 겪으면서 사람들은 자연은 돈만 있으면 무한하게 사용할 수 있는 ‘거래 가능한’ 재화로 전락해 버렸다. 산업혁명 전까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연의 한계에 대해 인식하지 못했다. 그 당시의 생산 수단으로 노동력을 최대로 사용해서 생산하더라도 자원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편리하게 살고 싶은 인간의 욕구에 따라 기술은 끊임없이 발달되었고, 산업혁명이 발생했다. 교통의 발달함에 따라 자원의 소비량은 많이 늘어났고, 인간이 재화를 소비하고 난 후의 찌꺼기들은 자연이 자정할 수 있는 한계를 훌쩍 넘기게 되었다.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곳에 쓰레기가 쌓이고 있었지만, 더 행복하고, 더 잘 살고 싶었던 인간의 욕구는 끊임없는 개발을 불어 일으켰고, 결국은 생태의 순환고리가 깨졌다. 지구 곳곳에서는 기존 생태계의 흐름을 배반하는 기후변화와 같은 이상 징후들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실 지구의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지는 오래 되었고 이 사실에 대해 학자들도 경고했지만,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기후변화를 직접 체감하기 시작한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자연과 공존을 추구하면서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조차, 근대화를 열심히 전파하고 다니던 침략자들에 의해서 억지로 “계몽”당했고, 소박하면서도 행복했던 그들의 삶은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그 곳은 종교 박해를 피해서 이주한 유럽인들의 새로운 식민지가 되었다. 삶의 부유함을 추구하는 그들의 욕망 때문에 식민지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점차 세력을 넓혀가기 시작했고 결국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인디언들의 땅은 현대 자본주의의 중심인 미국이 되었다. 현대문명은 그렇게 수많은 희생을 낳으며 형성되었다. 작년에 일본에서 일어난 쓰나미로 인한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와 한국에서 최근까지 지속된 폭염과, 한국 전역에 있는 강에서 일어난 녹조현상은 지구의 위기 상황을 잘 대변해주는 이상 징후이다. 도시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지구가 병들어가는 것을 실감나게 느끼게 된 것이다. 이 상태에서 지구가 위기 상황까지 가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TV에서 전쟁과 무분별한 전쟁 등의 이유로 지구의 시간은 5분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고리 1호기 핵발전소가 전력공급이 중지 된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몇 번 더 사고가 일어난 지금, 이 시기를 놓치면 지구는 회복할 새도 없이 영영 회복할 수 없는 길로 들어갈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인들이 지금의 상황 바라보는 태도와 5분 밖에 남지 않는 지구의 시간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의 태도는 Radiohead의 Idoteque (Idiot+teque; 바보같은 기술)라는 노래의 일부분을 보면 나타난다. Ice age coming Ice age coming Let me hear both sides Let me hear both sides Let me hear both Ice age coming Ice age coming Throw *it in the fire Throw it in the fire Throw It on the We're not scaremongering This is really happening Happening We're not scaremongering This is really happening Happening “빙하시대가 도래하고 있어, 빙하시대가 도래하고 있어. 양쪽의 소리를 듣게 해줘, 듣게 해줘. 빙하시대가 도래하고 있어, *빙하시대를 불구덩이에 던져버려, 던져버려. 우린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것이 아냐,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야, 일어나고 있는 일이야.” * 노래가 워낙 추상적이여서 'it'이 무엇을 가르치는 지 애매한데, 노래의 맥락을 고려해서 앞에서 지칭했던 빙하시대로 해석함. 어렸을 때, tv나 책에서 환경오염에 대해서 많이 접해서 내가 살고 있는 환경이 많이 훼손된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비눗물이 가득한 썩은 강물위에 죽어있는 물고기라던가, 페트병 같은 쓰레기들이 둥둥 떠다니는 바닷가,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쓰레기등등의 지구가 파괴된 모습은 세상이 아름답기만 한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것 같았다. 나중에는 이러한 문제들을 계속 보다보니까 적응이 되어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뭐, 애초부터 인간에 의해서 죽어가는 동물이라던가 오염된 자연을 보면서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했으니까. 뭐, 사는 데는 별로 지장이 없기에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이가 먹으면서 인간의 이기적이고 무한한 욕망으로 인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파멸하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다는 허무주의적 사고를 하면서 정작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 낸 문제에 대해 회피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일 때, 웰빙(Well-being; 참살이) 열풍이 불었다. 그 때 패스트푸드와 가공식품의 유해성이 사회에서 논란이 되어서 화학조미료를 넣지 않고 자연 본래의 재료로 정성스럽게 천천히 만들어 내놓는 슬로우푸드 열품이 불었다. 건강을 위해서 자연친화적으로 살고자하는 사람들이 늘게 되었고, 이를 노린 기업들이 소위 ‘웰빙’ 혹은 ‘유기농’ 제품들을 많이 내놓게 되었는데, 터무니 없는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불티나게 많이 팔렸던 거 같았다. 지금은 하나의 트렌드를 넘어서 하나의 카테고리로 자리 잡았다. 이런 현상을 지켜보며 ‘자연친화적’인 삶은 여유로운 사람들 밖에 누릴 수 없는 건가 생각하며 체념하게 되었던 거 같았다. 예전에 지하철 같은데서 잔디밭에 어린애들이 누워있는 사진에 핵 발전은 친환경적인 에너지라고 홍보하는 광고를 봤다. 그 당시에는 그런가 하고서 넘어갔지만, 작업장 학교에서 탈핵에 대해 공부하게 되면서, 핵 발전은 광고에서 홍보하는 거와 달리 사고의 위험이 매우 크고 안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방식의 발전보다 많은 양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어서 매우 효율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발전소를 안전하게 유지하는데 많은 비용이 들고, 핵 발전 하고 난 후의 폐기물을 처리하는 비용을 생각해보면 절대로 효율적이지 않다. 완전히 거짓된 홍보였던 것이다! 일본 정부도 또한 후쿠시마 참사가 일어나기 전에도 국민들을 기만했고, 일어난 후에도 기만했다. 2차 세계 대전 때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투하 된 원자 폭탄으로 인해서 방사능에 대한 공포와 상처는 아주 깊게 파였다. (‘겐지의 봄’이라는 만화책이 이 시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는데, 피폭당한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잊혀지지가 않는다)그 때의 트라우마가 거의 잊혀질 때, 후쿠시마에서 일어난 사고로 인해서 또 예전의 악몽이 재현 된 것이다. 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그 힘의 위력을 깨닫고서 폭력으로서 부흥을 꾀할려다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한국 정부가 이웃 나라인 일본이 이 사고로 인해서 전 지역이 패닉에 빠진 사실도 인식하면서, 몇 분 동안 전력 공급이 중지되어서 하마터면 큰 재앙이 일어날 뻔한 고리 1호기 핵발전소 사고를 덮으면서까지 핵 발전을 지지하고 홍보하는 것이 의아했다. 그저 일본은 쓰나미 때문에 운이 없어서 사고가 난 거라고 생각을 한 것일까? 한국은 해외에 원자력 기술을 수출할 정도로 우수하니까 안전하다고 생각을 한 것일까? 핵발전소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한국 정부는 인식하고 있지만 현재의 경제체제를 지속시킬려면 “핵발전소”에서 생산 되는 많은 양의 전기는 필수다. 많은 사람들의 편안한 생활에는 전기 에너지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과도한 전기 사용으로 인한 작년 여름에 일어났었던 정전 사태는 사람들이 얼마나 전기에 의존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이런 상태에서 “‘핵에너지’는 위험하고 안전하지 않아요! 그러니 핵발전소를 없애야 합니다!”라고 반핵 운동을 전개를 한다는 것은 전기에 의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핵에너지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인식시킴과 동시에 공포감을 조성시키는 결과만 낳는다. 앞에서 내가 느꼈던 허무주의적 사고를 하게 되는 거와 같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탈핵 공부를 하면서 ‘탈핵’의 단어 뜻을 알고 나서 지구에 대한 희망을 느꼈다. ‘반핵’을 한다는 것은 기존의 사고방식과 사회 내에서 ‘핵에너지’를 반대하고 부정하기만 하지만, ‘탈핵’을 한다는 것은 ‘핵에너지’와 “원전”을 존재하게 했던 기존의 사고방식을 벗어나서 핵에너지 대신에 지속적으로 순환이 가능한 에너지인 태양열 에너지와 같은 대체 에너지의 사용을 대안으로 제시함과 동시에 전기 에너지에 의존적이었던 삶의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를 갖게 되는 것이다. 핵발전소를 줄이기 위해 도시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이 전기를 적게 쓰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인 줄 알았다(그래도 전기 소비를 줄이는 것은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꽤 다양한 방법이 있었다. 첫 번째로, 직접 전기를 생산하는 것이다. 전에 tv에서 어떤 사람들이 시골에 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태양열 발전기’를 가지고 사기치는 것을 봤기에 직접 태양열 발전기를 통해서 전기를 생산하는 것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가졌다. 성대골 도서관에서 ‘소규모 태양열 발전기’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되었을 때 내내 그 생각이 나면서 불편했다. 기존의 태양열 발전기는 주택가의 옥상이나 넓은 노지에 크게 설치해서 발전을 하는데 ‘소규모 태양열 발전기’는 아파트 베란다에 설치할 수 있다. 크기가 작고 위치 특성상 태양열이 비교적 충전이 덜 되기에 실생활에 쓰이는 전기의 양을 감당하기엔 적은 양이고 생산하는 양에 비해서 설치비와 기계 값을 상환하려면 오랜 세월이 걸린다.(기술이 발달되고 상용화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쓰게 된다면..) 솔직히 적자인거 분명한데 설치를 꼭 해야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문은 강의 말미에 이 한마디를 듣고 바로 수긍을 했다. “실생활에 쓰이는 전기를 대체할 수 있을 만큼 많이 생산되지 않고, 부담이 가겠지만, 조금이라도 원전으로부터 자립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의의를 둘 수 있습니다.” 유럽의 어느 나라(정확히 기억이 안난다)에서 주민들이 섬에 많이 설치되어있는 풍력 발전기의 주인이 되어서 발전기에서 생산된 전기를 전력 회사에 되판다는 사실이 꽤 흥미로웠다. 두 번째로, 전기를 쓰지 않는 것이다. 솔직히 21세기에 전기를 쓰지 않고 사는 삶은 산 속에 칩거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발명가 후지무라 야스유키 선생님의 ‘비전력 공방’ 이야기를 듣고 나서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전기 대신에 순환 가능한 자연의 에너지로 가동되는 제품들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전기를 사용하는 제품들보다 성능은 차이가 많이 나겠지만, 어디서나 사용이 가능하고 직접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였다. 전기를 쓸 수 없는 지역이 라던가 전기를 쓰지 못하게 되는 상황(전쟁이라던가 자연 재해에 의해서)에서도 불편함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나비문명’을 알게 되고 꿈꾸게 된지 얼마 안 되었지만, 내 삶에 기분 좋은 변화가 느껴진다. 나의 위치에서 지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 많고 내 삶의 일부로서 스며들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기만 하다! 지행합일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 삶에서 큰 보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공부 다운 공부를 추구하는 이유기도 하고. 예전에는 세상에 대해 알아갈 수록 절망하기만 했는데, 요즘에는 공부를 더 할수록 희망이 뚜렷해지는 것 같아서 더 열심히 공부를 하고 싶다. 가끔은 내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 같아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지기도 하지만 변화하고 있는 과정의 일부로서 인식하니 괜찮아진다. 작업장학교에서 공부한 것들이 내 삶의 일부가 되어가는 것 같다. 길가의 건물이나 광고 대신에 나무나 풀 같은 것을 보고 걷게 된다. 아직 나무와는 대화는 할 수 없지만, 서로 알아가는 과정에 있다.(아직 그들이 너무 어렵다. 사람도 아직 어려운데..)텀블러를 갖고 가는 것을 깜빡해서 일회용품을 ‘어쩔 수 없이’ 쓰게 되었을 때 죄책감이 들게 된다. 아직까지 부족한 것이 많긴 하지만... 뭐, 채워나가면 되지! 자립이 가능할까? 고등학교 때 친구가 읽어보면 재밌다고 ‘가난뱅이의 역습’이라는 책을 추천해줬다. 2년 전에 읽은 책이었는데 꽤 흥미로운 책이었다. 나름대로 이렇게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충격받기도 했고.(사실 읽다가 이해하기가 좀 어려운 부분들이 있어서 넘겨가면서 읽었다.) 대략 줄거리를 회상해보면 어떤 일본 대학생이 도시에서 일을 하지 않으면서 돈을 쓰지 않고(!) 즐겁게 살아가는 방법을 기술한 책이었다. 기발하기도 하면서도 책을 보고 따라하다가 운이 없으면 ‘벌금’을 물 수 있을 만큼의 대담한 방법들이 많았다. 돈에 대해서 살게 된 계기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서 대다수의 시간을 일하는데 쓰지만, 행복하지 않은 모습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거의 모든 것을 자급자족 하던 예전과 달리 현대에서는 돈을 지불하기만 하면 대다수의 생산품과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다. 돈을 지불하고 서비스와 생산품을 구매함으로서 자급자족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시절보다 편리하고 여유로워졌다.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면서 황금만능주의라는 말이 생겼다. 돈을 벌기 위해 많은 시간을 노동을 하는 데에 할애하게 되었다. 즉, 사람들이 돈에 의존하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의 논리대로 일한 만큼 벌고, 노력한 만큼 벌면 좋지만 그렇지 못한 게 오늘 날의 현실이다. 뛰어난 경영 수완을 발휘하거나 엄청난 노력을 하거나 혹은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아서 1%의 CEO이자, 갑의 입장이 된 그들의 입장에서는 더 많은 자본을 축적을 하고자 할 것이다. 자본은 곧 권력을 의미한다. 기업은 최대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는데, 흔히 볼 수 있는 방법이 ‘을’의 입장인 노동자들을 착취하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극심한 취업난 속에서 많은 시간을 스펙을 쌓는데 투자하고 힘들게 취업에 성공했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계속 받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불공정한 대우 속에도 일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뉴스에서 비정규직, 인턴의 이야기를 접하고 나서 비인간적인 대우에도 무기력하게 대응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매우 답답했고, 화가 났다.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에 가더라도 소위 말하는 부모 “빽”이 있거나 하지 않는 이상은 저렇게 될 것이 분명한데.. 돈의 노예가 되어 자유롭지 못하고 종속되는 삶을 산다는 것은 분명히 행복하지 않은 삶이다! 어떤 것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행동과 생각이 어느 정도 제약을 받게 된다는 것이니까. 풍요롭게 살려고 하면 자유를 포기하라? 그것이 진리라면 너무 슬프다. 조금씩 자립하기 1년 전 겨울, 나를 지치게 하는 도시를 떠나 지리산에 내려가 살고 싶었다. 삶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한참 고민을 하며 ‘인터넷’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공지영 작가의 에세이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를 발견하게 되었다. “지친 도시 사람들이여 지리산으로 와라” 이 멘트가 어찌나 내 마음에 와 닿았는지.. 문제집을 사러 엄마하고 서점에 갔을 때, 엄마를 졸라서 책을 구매할 수 있었다. 이 책은 꽁지 작가가 도시의 삶이 지칠 때마다 지리산에 내려가서 친구들과 같이 놀면서 겪은 에피소드 및 지리산에서 사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담았는데 ‘월’이 아닌 ‘연’세로 50만원하는 집에서 살 수 있다는 점이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앞마당에서 개도 기르고. 도시에서 돈 때문에 바쁘게 살아가며 상처받고 외롭게 사는 것보다, 사람 냄새가 나는 이 곳에서 조선시대의 선비처럼 자연과 어울리며 글이나 쓰며 평화롭게 살다가 농사를 조그맣게 지어서 수확한 작물로 맛있게 밥반찬으로 만들고 남는 것은 친구들에게 주고, 가끔씩 사람들과 만나서 즐겁게 살고 싶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돈을 많이 벌지 않아도, 아니 돈을 많이 벌고 사는 것보다 더 즐겁게 살 수 있을 거 같았다. 어느 정도의 자급자족만 가능하면 돈에 크게 의존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생활은 정말 자유로울 거 같았다.“사람으로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부터 치유할 수 있다”는 꽁지 작가의 말이 기존의 도시문명에 회의감이 들던 내게 확신을 가져다 주었다. 지리산으로 도피하고자 하는 계획은 “교통비”가 없다는 핑계로 머리 속에서 멤돌다가 흐지부지 되었다. 그래도 이 때를 시작으로 돈에 의지하지 않는 ‘자립’할 수 있는 삶에 대해 고민했다. 작업장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도시 농부 수업인 ‘현미 네 홉’을 한다는 사실을 듣고 깜짝 놀랐다. 농사를 지을 만큼의 큰 땅도 없는데 어떻게 여기서 농사를 한다는 거지... 약간 의아감이 들면서도 농사를 배워보고 싶기에 기대가 됐다. 처음에는 내가 소중히 키운 생명들을 먹는 다는 것이 죄책감이 들었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죄스러웠다. 인간은 그저 쓰레기 생산자 같았다. 쓰지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나서 자연 덕분에 내가 누린 혜택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자연을 지키는 것으로 속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넓다란 큰 땅에서 농사하는 것만 상상했는데, 도시에서 쓰지 않는 짜투리 땅을 이용해서 조그맣게 농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생계로서의 대규모 농사가 뿐만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서의 소규모 농사가 가능하다는 것이 신기했다. 도시에서 꽃을 키우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햇빛만 잘 들고 좋은 흙을 구할 수 있다면, 아파트에서도 농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농사를 어디에서든 할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1년 전에 한겨례21에서 빈부격차에 따른 식사에 대한 특집 기사를 봤었는데 읽고 나서 우울했다. 잡지에 소개된 대다수의 잘 사는 사람들은 영양가 있고, 신선한 야채들이 가득한 식사를 하 건강하고 몸매도 좋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영양불균형적인 식단에, 가공식품들인 위주인 식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건강하지도 않고 비만인 사람들도 많았다. 잡지에서 아무런 대안도 내놓지 못한 채 특집기사를 마무리 지었다. 화학첨가물이 많을수록 성격도 난폭해지고, 건강에 진짜 큰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가난해서 그러한 상황에 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분했다. 국가의 복지 정책에만 의존할 수 없고.. 하지만 도시에서의 자투리 땅을 이용해 농사를 통해 식품을 자급할 수 있다는 사실은 희망을 느꼈다. 직접 도시농사를 하면, 건강하고 안전한 식재료(직접 길렀기 때문에 밖에서 구매하는 식품보다 신뢰할 수 있다! 물론 화학비료 대신에 천연비료를 작물들에게 줘야겠지.. )를 안정적으로 얻을 수 있게 되고, 식재료에 드는 어느 정도 줄일 수 있게 된다. 가난할 수록 전체 생활비 중에 식비가 높은 비율을 차지하기에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처음에 아빠한테 농사한다고 자랑했을 때, 아빠가 버럭 화를 냈었는데, 학교에서 다른 죽돌들과 같이 기르고 수확한 채소들을 가져다가 아빠한테 드리니까, 아빠가 맛을 보더니 “맛있네”하면서 좋아하셨다. 새로 이사 간 집의 테라스에 어느 정도 여유 공간도 생겼으니 스티로폼 박스에다가 흙을 넣어서 쌈 채소부터 길러보고 싶다. 그렇게 조금씩 자립을 시작하는 것이다. 차를 끓여 마실 수 있게 민트 같은 허브도 심고, 신선한 채소로 맛있는 나물을 만들어서 밥과 함께 맛있게 먹는 것이다! 상상만 해도 즐겁다. 도시의 농사도, 잡초를 뽑지 않고 자연의 법칙 그대로 하는 농사도 내게는 다 새로웠다. 제일 새로웠던 것이 ‘화학 비료’를 넣지 않은 유기농법이였다. 도시에서의 ‘유기농 제품’은 꽤 비쌌기 때문에 결코 섭취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유기농을 해서 먹게 될 줄이야.. 직접 농사를 한 작물들을 바로 수확해서 먹으니까 기존에 먹던 채소들과 다른 새로운 맛이 느껴졌다. ‘신선함’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가지와 피망을 그대로 먹어도 맛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고진감래를 빠른 시간 내에 느낄 수 있다! 가지를 생으로 섭취했을 때, 바로 뱉기 그래서 몇 초간의 울렁거림만 참았더니 신세계가 펼쳐졌다. 정말 감동이었다) ‘현미 네 홉’ 수업은 정해져있는 것을 그저 수행하는 것이 아닌 같이 고민해가면서, 만들어가는 수업이었고, 수업 초반에 어떤 작물들을 심을까, 밭을 어떻게 꾸밀까 회의도 하고 의견도 나눴는데 수업을 하면서 다른 죽돌들이 하자는 대로. 그저 수업이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겼던 것 같다. 수업 말미에 도시농업과 자립이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더 집중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쉽다. 농사를 하다보면 사람들과 더 친밀해질 수 있다는데 아직은 모르겠다. 농사의 진행 상황을 파악하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블루패드’를 만들었지만 관리가 잘 안되고, 비에 젖어 흐물흐물 해지기 십상이었다. 블루패드를 만들었을 때 고려했었던 점이긴 한데.. 다음에 블루패드를 개선할 때 적극적으로 대안을 마련해야겠다. (마음 같아선 방수가 되고 태양열 충전이 되는 아이패드를 갖다 붙이고 싶다. 아날로그는 참 어려워..) 본래의 기능과 달리 다른 하자 마을 주민들과 소통하는데 잘 사용이 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가끔마다 블루패드에 명시 된대로 본래 물을 줘야할 때 말고. 밭에 놀러와서 기분 좋을 때 물을 주고 그래서 ‘과다 영양 공급’이 돼는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많이 먹으면 탈나는데. 우리만의 농사가 아니고 하자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하는 농사이기에 ‘시농’이란 행사로 하자 마을의 농사의 시작을 알리며 하자마을의 사람들을 모아서 축하하는 파티를 했었는데.. 음. 누구나 부담없이 같이 농사해도 좋고 수확물도 가져가도 상관 없는데! 다음에는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밭에 데리고 와서 같이 하자고 해야겠다. Design team_화장실 개선 프로젝트 “현미 네 홉” 수업처럼 그동안 배우고 싶었는데 작업장학교에서 했던 공부를 표현할 매체로서 배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워크숍 처음에는 디자인에 대한 정의나 디자이너의 시선과 같은 이론적인 부분부터 시작할 거 같았는데 ‘화장실 개선 프로젝트’를 한다고 해서 약간 당황했다. 그래도 일반학교에서 수업 할 때 이론 위주의 수업에 질려있었기 때문에 직접 부딪혀서 디자인을 해보는 것이 디자인에 대해서 더 배울 수도 있을 거 같기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디자인팀 워크숍을 시작했다. 디자인팀 죽돌들이 같이 화장실을 돌며 겨울에 공사했던 화장실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하자마을 주민들에게 화장실이 개선 되어야하는 점에 대해 설문조사를 하고 이를 토대로 화장실의 어떠한 점을 개선해야하는지에 대해 회의를 했다. 화장실을 어떤 부분을 개선해야할 지 알게 되었을 때 약간 화가 났다. 화장실 구조를 바꾸면서 외부의 시선을 배려하지 않고서 설계도를 짰는지, 설문조사를 하면서 백발백중 남자들이 화장실의 노출에 대해서 불만을 표시했다. 물을 사용하지 않는 소변기로 인한 악취 문제와 함께. 이 때까지만 해도 디자이너로서 화장실을 어떻게 개선할 지에 대한 아이디어도 열심히 내고 적극적으로 참여했었다. 하지만 새로운 화장실 픽토그램을 디자인하게 되면서 스트레스와 부담감을 느끼게 되었다. 배리어프리를 기본으로 해서 세계에 있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아름다운 디자인을 하려고 했다. 각 다리마다 소수자를 상징하는 의미를 넣어서 부각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욕심이 과했는지 멀리서 보면 눈에 띄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았다(세계 인권의 날 행사 포스터를 제작할 때 아이디어로는 좋을 거 같다) 게다가 내 드로잉 실력이 부족해서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잘 나타나지도 않았다. 달갱의 제안으로 처음에 시안을 작업했던 거처럼 포토샵으로 콜라쥬로 작업을 했다. 남자의 다리와 여자의 다리를 잡지에서 찾아서 작업을 하려니까 제각각이던 다리들을 모아서 조화롭게 콜라쥬로 작업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V"”자 형태로 서있는 정장입은 남자와 원더우먼 복장을 한 여자의 전신사진을 구해서 나의 픽토그램 컨셉이였던 “안티배리어” 에 맞춰서 작업을 했으나, 컨셉은 좋았으나 이를 디자인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많이 부족했다. 결국은 하자 마을 사람들에게 화장실 개선 프로젝트의 진행상황을 알리는 자리에서 실시한 픽토그램 투표에서 내 픽토그램이 1표가 나왔다. 솔직히 멀리서 봐도 픽토그램의 색깔이 조화롭지 못했기에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색 보정을 해서 개선을 했지만, 결국은 하자센터보다 카페 같은 곳에 어울리는 복고풍의 팝아트적인 요소가 들어간 픽토그램이 되었다. 작업 말미에 여러 가지 힘든 일이 겹치면서 작업하는데 집중력이 떨어지고 뒷심이 떨어진지라 열심히 준비했던 준비과정에 비해서 완성이라고 하기엔 2%가 부족한 결과물이 나와서 아쉬웠다. 디자인을 하게 되면서 가장 신경을 쓰면서도 힘들었던 것이 에코로지컬한 디자인이였다. 작업장학교에서 공부를 화장실 개선 프로젝트 내내 디자인으로 어떻게 투영시킬지 고민했다. 친환경적인 것을 배려하지 않으면 쉽게, 더 아름답고 편리하게 디자인 할 수 있었을텐데 라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하고 노력하면 충분히 에코로지컬하면서도 아름답고 실용성 있는 디자인을 하는 것이 무리가 아니였다. 디자인이라는 것이 사람의 삶에 영향을 많이 끼치고 디자인에 따라서 사람들이 사는 환경을 많이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해야하는 것이다. 몇 년 쓰다가 버리고 다시 만드는 디자인이 아닌 지속 가능하게 오래 갈 수 있는 디자인이야말로 좋은 디자인인 것이다. 전시성 목적이 강한 오세훈 전 서울시장 시절의 서울시 디자인 정책이 아니라! 저번 주에 들었던 하자 허브 여름학교 특강에서 그린 디자인을 추구하는 디자인 회사인 ‘slowalk' 대표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디자인이라는 것이 디자인 의뢰를 하는 클라이언트와 디자이너의 신뢰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나는 과연 클라이언트와 의견을 조율을 통해서 나만의 개성이 살아있는 독특하고 편리한 디자인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특강을 들으면서 아름다운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을 배려하는 따듯한 디자인이 제일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데이북을 하게 되면서 다른 죽돌들이 하는 데이북을 보고 내 데이북을 보니까 자신감이 떨어졌다. 솔직히 디자인팀 워크숍 내내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기 때문에 그게 내 데이북에 드러나는게 두려웠다. 그걸 티내지 않고 하려다보니 생각나는 것도 별로 없었고 퀄러티면에서도 무척 떨어졌다. 다른 죽돌이 하는 걸 어설프게 따라하니, 정말로 쓰레기 제작만 하고 있었다. 내 데이북을 보면서 피드백을 해줄 사람들도 많았는데도 기회를 잘 활용하지 못했다. 달갱이 내가 찍고 편집한 사진을 보고 데이북에다가 꾸준히 스크랩을 하라고 했는데, 이번 학기 내내 거의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 데이북을 하는 내내 드로잉 지적을 받은 만큼 드로잉 연습을 해야겠지만, 내가 느낀 것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방식인 사진을 통해서 내가 느낀 감정을 예전에 블로그에 올렸던 것처럼 데이북에다도 꾸준히 기록해야겠다. 평소에 생활하면서 느낀 점들은 많은데 귀찮다고 기록하지 않고 지나가니 금방 잊혀지게 된다. 디자인에서도 마찬가지다. 데이북을 충실히 기록하다보면 분명히 내 디자인에 쓸 수 있는 컨텐츠도 풍성히 쌓이게 될텐데.. 데이북을 생활화 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 다들 작업한 픽토그램이 실사용할 만큼의 정도가 되지도 않아 다음 주까지 다시 픽토그램 작업을 하기로 하기도 하고, 서로의 데이북을 보다가 정해진 수업 시간을 넘어가기도 했다. 남자화장실 가림막 등등의 몇 가지 화장실 개선 아이템들이 1학기가 끝날 때까지 제대로 마무리 되지 못한 것이 아쉽다. 학교에서의 바쁜 스케쥴과 피곤함으로 인해서 디자인 워크숍 전날까지 밤을 새면서 디자인을 하고 지각한 일이 꽤 많았다. 작업의 퀄러티도 그닥 좋은 편도 아니였고.. 학교의 생활에서도 그렇고 특히 디자인팀 워크숍을 할 때마다 시간 관리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되었다. 시간을 잘 활용만 했어도 높은 퀄리티의 작업물이 나오고 디자인 워크숍을 했을 때 부담이 없었을 텐데.. 1학기 워크숍이 거의 다 끝나가면서 디자인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때의 초심을 잃은 것 같다. 내가 가진 아이디어를 좋은 디자인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컨텐츠가 별로 없었다. 갖고 있는 콘텐츠가 많았다면,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재밌고 전달하기 쉬운 디자인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일곱 살 나나의 뒤늦은 성장통 작업장학교라는 새로운 배움터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게 되면서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내 자신을 텅 빈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사람들과 만날 때 나의 태도라던가, 사고 방식은 내가 그토록 증오하던 전에 내가 속해있던 사회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내가 사람들을 대화할 때 다른 사람들이 어느 부분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지에 대해 알게 되었고, 고칠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크리킨디 이야기와 나비문명을 바탕으로 한 학교의 공부는 정말 재밌었지만, 다른 1학기 죽돌들은 벌써 서로 카톡을 신나게 주고 받으며 편한 사이가 되었는데, 나만 겉도는거 같아서 불안했다. 외부적인 문제와 더불어서 인간관계의 대한 불안함은 공부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다. 막상 다른 죽돌들과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기면 어색하고 불편했다. 분명히 좋은 사람들이라는 것은 인식하고 있지만, 그도 나도 좀처럼 마음을 열기가 어려웠다. 내외부적으로 힘들 때마다 다른 죽돌들이 상담도 해주고 많이 토닥여줬지만, 어디에 속해있지 않다는 불안함은 계속 되었다. 누군가 나를 괴롭히지도 않지만, 조금이라도 내가 혼자라고 느끼게 되는 상황에 놓일 때, 예전처럼 존재감이 거세되어버린 쭈구리가 되는 것 같아 괴로웠다. 타이트한 작업장학교의 일정으로 인해 피곤한 것보다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으로 인해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공부에도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문제로 힘들어했던 내게 히옥스가 “사회적으로는 어디에 속해있을지라도, 전혀 속해있지 않기에 너가 원하는대로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너가 왜 꼭 속해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하시면서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약속을 이행하게 된지 얼마 안 되어서 방학을 했지만, 히옥스와 대화를 하고 나서 예전과 달리 다른 사람들을 가벼운 마음으로 편안하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하니까 조금씩 대화가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결코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다. 나는 나 자신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성장이 멈춰버린 7살의 내가 그동안 심술궂게만 행동했지만, 작업장학교에서의 공부와 사람들과의 만남과 소통을 통해서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조금씩 변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에겐 당연하고 하찮은 일이나 현상이지만 내게는 아직도 모든게 새롭고, 두근거리기만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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