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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기 에세이 ...............................................1학기, 공연음악팀, 핑두(이지윤) 2009년 여름.( 만 16세 ) 2010년 지하철 시청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며 나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는다. 이내 전화에 대고 대꾸하는 내 목소리가 올라간다. ‘견딜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윽고 승강장에 벨이 울리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차가 들어온다. 지하철 문이 더운열기를 뿜어내며 ‘쒹-’ 하고 열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안으로 밀려들어간다. 다른 사람은 신경쓰지 않겠다는 양 높다랗게 올라가 소음이 되어버린 내목소리에 열차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본다. 전화기 너머로 어머니는 입시학원이야기를 하셨다. 입시학원에 들어가서 수능준비를 해서 대학을 가라는 말. 그 당시에는 ‘대학’,혹은 ‘입시학원’이라는 단어만 들어도-가슴이 콱 막혀 답답하다 못해 눈물이 났다. 그 당시, 난 입시학원에도 대학에도 갈 생각이 없었다. 대학에 대한 내 의사를 표현 하다보면 어느새 나는 울고있었고 부모님께서는 그런 내가 답답하셨다. 내가 그렇게 대학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것을 ‘거부’했던 이유중 첫 번째는 뭐니 뭐니 해도 입시학원에 들어간다면 그 끔찍하게 외로운 시간에 또 홀로 잠시되어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15살에 자퇴를 하여 내 상태를 추스르기도 전에 나는 아버지가 하라는대로(죄책감이 들었다. 내가 자퇴를 함으로서 부모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고 생각했다.)검정고시와 중학교공부를 홀로 했었다. 그 시간이 자퇴를 기점으로 1년 정도의 시간이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굉장히 외롭고 괴로웠던 시간이었다. 그렇게 ‘인간은 혼자서는 절대 살수 없구나’라는 사실을 그런 식 으로 깨닫게 된 뒤에야 공간민들레(출판사 ‘민들레’의 탈학교 아이들의 사랑방.)라는 공간에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내말에 귀기울여주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따뜻함에 놀라며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반 억지로 해 나가다보니- 어느새 알을 깨고 나오는 내 모습을 어머니를 비롯한 민들레의 사람들이 알아봐주었다. 공간민들레에서 사람들과 부딪히며 치열하게 이루어졌던 배움의 시간을 통해 내가 품고 있어 고통스럽기 그지없던 아버지를 향한 분노도 어느새 많이 해소 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현실의 상황이 변하지 않더라도 과거의 좋지않은 감정들로 벗어나겠다는 내 의지와 노력으로 나 자신을 자유로 구출할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간민들레를 만난후, 나의 계획은 공간민들레 같이 청소년들이 배움을 이어나가는 공간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며 내 배움을 꾸준히 이어나갈 생각이었다. 처음 민들레를 만나고그곳에서 한학기를 보내고나자 17살이었다. 그리고 그해 나는 고입 검정고시와 고졸 검정고시시험을 보았다. 고졸 검정고시도 아버지가 보라고 해서 보았던 시험이었다. 하지만 나또한 ‘고졸 검정고시 시험을 봐두면 내가 학교밖에서 공부하려는것들에 대해 하버지도 크게 반대하지 않겠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졸검정고시 시험을 본지 얼마되지 않아 부모님께서 내게 수능을 준비해서 대학에 빨리 가는것이 좋지 않겠냐는 말을 하신 것이다. 그 때 나에겐 대학이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배움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배움을 이어가고 싶은 청소년들이 모인 공간에서, 내가 새로 맺게 관계 속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스스로 내 배움을 일구어 나가는 것이 ‘좋았다.’ 자퇴를 하고 난후 1년동안은 아버지와의 갈등, 외로움, 그리고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막막함으로 결국엔 ‘내가 왜 자퇴를 했지? 이 생활은 더 이상은 못해먹겠어, 고등학교에 진학해야겠다.’ 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공간민들레에서 학교를 나왔을 뿐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제 배움을 이어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 이런식으로 내 배움을 이어나가면 되는 거구나’라는 생각을 하였다. 다시금 나도 내 배움을 즐겁게 이어 나갈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겨난 것이다. '배움‘에 대한 생각. 나는 자퇴를 한 후에 학교 밖에서 어떻게 내 학습을 이어 나갈 것인지, 뭘 학습할 것인지-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래서 자퇴를 하고난후의 생활이 너무 힘들어지자 ‘왜 내가 자퇴를 하게 되었을까’하는 생각에만 몰두하였다. - 좀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게 되었지만 내가 ‘자퇴’를 하는데에는 여러 요인들이 있었다. 지금도 말로 설명이 어려운 것들이 대부분이다. 왜냐면 자퇴라는 결정에는 나의 환경이나 내가 살아온 모습, 그런 것들이 모두 한 요인이 되었기에 내가 자퇴를 한 이유를 찾는다는것은 쉽기도 어렵기도한 것이었다. 그런데 공간민들레에서 학교 밖 청소년들을 처음 만나고 그들이 공부하고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정작 자퇴를 하고나서 ‘무엇을 배울것인가. 난 어떻게 배울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나의 ‘배우고자 하는 욕구’에 귀기울여 보지 않았던 것이다. 공간민들레와의 만남은 그러한 물음을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계기가 되었다. 민들레에서의 약4개월의 시기는 ‘나의 배움’이라는 것에 대해 처음으로 적극적으로 생각해보았던 시기였다. 민들레에서 출판 프로젝트를 하고 자서전을 만들면서 십대 중반까지 살아온 내 모습을 쭉 돌아보고 그것을 글로 썼다. 정리가 되지 않은 사건들에서는 눈물이 나기도 했고 그것을 글로 풀어내는 것에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책을 완성하였다. 민들레에서는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생각해보는 일도 많았다, ‘탈학교 아이들의 배움’에 대한 이야기부터 ‘부모님과 소통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십대 중반의 탈학교 아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고민들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스스로의 답을 찾아보기도 했다. 또 함께 배우고 싶은 것이 있다면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소모임으로 만들었다. ‘물리학 소모임, 힌디어 소모임. 철학 소모임등등’- 소모임을 이어가는것에 있어서는 새삼 아쉬움이 남는다. 또 앞마당같은 홍대거리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민들레에 있으며 자연스레 배움에 대한 내 생각이 조금씩 정립되어갔다. ‘배움이란것은 자발적으로 일어나야하며 그렇기에 배움에는 즐거움이 있어야한다. 배움은 지속적인 물음과 굳은 의지를 통해 이루어진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민들레에서 나의 배움과 생활을 계속 ‘일치’시켜 나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부모님께서 내게 입시학원이야기를 하셨을때 나는 내가 대학을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게 당장 대학이 필요한 이유를 생각해보려했지만 알수가 없었다. 대학이 내게 뭘해줄수 있을까? 배움의 부분에서 나는 대학에서의 배움을 원하고 있을까? 대학에서의 배움은 뭘까?민들레에서, 청소년으로서의 배움과 대학생이 되어서의 배움은 다른것일까? 질문투성이었다. 물론 대학에 가면 여러 가지 흥미로운 공부를 할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상상일뿐이었다. 나는 학교 밖 청소년으로서 자유로운 배움을 계속 이어나가고 싶었다. 또 나는 확실한 꿈도 정해져 있지 않았다. 대학에 가려면 가고싶은 과를 선택해야하지만, 어느 하나를 고를수가 없었다. 그때에 나는 해보고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하나를 고를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 ‘과’나 선택해서 대학을 가고싶지는 않았다. 또 ‘대학’을 목적으로 급하게 아무 ‘과’나 선택한다면 대체 내가 대학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알수가 없었으며 또 그것을 즐겁게 배울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내가 진정 대학에서의 배움을 필요로 할 때 그에 맞는 과를 목표로 입시 공부를 하고 싶었다. 2010년 여름. 17살의 후반부는 대학에 대한 별별 생각과 부모님과의 반복적인 대화, 그리고 ‘무력감’으로 이루어졌다. 나는 ‘나에게 아직은 대학교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을 앞서 말한 이유들과 함께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이러한 내 진로에 대한 말을 할때면 이상하게도 참 가슴이 답답했는데 특히나 아버지께서 “너 그럼 뭐먹고 살건데?!”라고 물으셨을 때는 뭐라 형언할수 없는 벽에 부딪힌것같았다. 나는 아무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왜 나는 내 생각을 부모님께 잘 전달하지 못할까. 부모님은 왜 이해를 못해주실까. 왜 나는 대학에 가기 싫을까. 왜 가고 싶은 과조차 선택 할 수가 없는 거지?. 난 좋아하는게 없나? 난 하고 싶은게 없나? 나는 뭘 잘하지?’ 부모님께서 나에게 했던 질문들이었지만 명확한 대답을 할수가 없었기에 그 질문들은 끊임없이 내안에서 되풀이되었다. 부모님도 나 자신도 납득할만한 확실한 대답을 찾고 싶었다. 내가 어른이 되었을때 뭘로 먹고 살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내가 해왔던 배움이나 내 미래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생각들이 너무 많이 부딪혔다. ‘로드스쿨러’로서 내 청소년시기를 보내도 되는 건가? 부모님말대로 굶어 죽지않고 뭔가를 하고 먹고살려면- 꼭 대학에 가야 하나? 하는 의문도 들었다. 그런 와중에 민들레에 있으면서 내가 해오던 일들, 이어나가려 했던 배움, 누군가 내게 ‘해보지 않을래?’하며 제안해주는 것들이 쓸데없는 일이라 여겨지기도 했다. ‘쓸데 있는 일은 또 뭔데? 대학에 갈 때 도움이 되는 일? 아니면 대학에 가는 거? 내가 민들레에서 하는 것들은 결국 어디에도 쓸모없는 일인 걸까?’등등의 생각이 들었다. 내가 누군지도, 누구에게 말하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생각이 부딪혔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니 뭔가를 선택하기도 어려웠다. 어떤 것을 선택 할 때에도 ‘정말? 정말 하고 싶은 거야? 이게 꼭 필요한 일일까? 이걸 하면 내가 뭘 얻지? 그만큼 중요한 일일까? 누가 시켜서 하는 건 아니고?’ 뭔가를 선택할 때 필요이상으로 신중해졌다. 내가 뭘 필요로 하는지, 뭘 배우고 싶어하는지 알수가 없었다. 선택을 할때 고려해야할 질문들은 많았지만 뚜렷한 기준은 사라진지 오래였고 어디서부터 하는 질문인지도 뭘 겨냥한 질문인지도 흐릿해졌다. 좋은것과 싫은것의 구분이 없어지고 선택하는 순간이 두려웠다. 내가 그때 왜 그랬던 걸까하고 생각해보니 그 때에는 내 미래를 상상한다는 것이 꼭 ‘비가 거세게 오는 곳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저쪽 건너편에 있는 뭔가를 애타게 찾는 것처럼 느껴졌다. 건너편에 있는 것을 볼수 없기에 볼 수없는 것에 대한 그건너편에 있는것에 대 이상한 두려움이 생겼다. 내가 지금 한 선택이 미래에 안 좋게 되돌아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을 했고 겁을 냈다. 나는 나를 믿지 못했고 어떤 것에도 확신을 내릴 수가 없었다. 노리단을 만나기까지의 과정. 지금은 과거를 회상하며 글을 쓰면서 그때의 내모습을 좀더 거리를 두고 바라볼수 있지만 그때에는 그럴수가 없었다. 그 답답한 시간에서 내가 빠져나올수있었던 계기가 된것이 인도 여행이었다. 기대하지 않고 떠난 여행에서 난 몇 가지를 깨달았다. 언젠가 부터인지 내 고민에 내가 잠식되어 어떤 일을 해도 뚜렷하지도 않은 기준으로 이게 나한테 쓸모가 있을까, 없을까를 따지고 있었다. 진짜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모르는 척 가려두었다. 그러다보니 뭘해도 진짜 그것이 마음이 동해서하는 일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점점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하게 되고 스스로를 믿지 못했다. 늘 중요하게 여겨왔던 가볍게 시작하는 방법을 잊어버렸었다. 여행을 하면서 서서히 몸이 풀리듯 정신이 자유로워짐을 느꼈다. 복잡하게 만 생각했던 것들이 여행에서는 무척 단순해 졌다. 먹고, 자고, 만났다가 떠나고. 여행에서 본 세상은 넓었다. 할 일도 많고, 할 것도 많고,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하게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었다. 난 건강하고 가능성이 무척 많구나.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뭉게 뭉게 피어올라서 뭐든 시작할수 있을것 같았다. 한국에 돌아가서 ‘뭐든 못하랴’ 싶었다. 푸르고 드넓던 하늘의 풍경, 달리는 릭샤에서 내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던 바람, 인도인의 피하지않는 검은 눈동자, 추위에 더 따뜻했던 작은 불꽃과 내 곁의 사람들, 어둠을 뚫고 올라간 산정상에서 보았던 히말라야의 산봉우리, 깃발을 쓰러트리고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며 갑작스레 몰아치던 그 비바람. 그 것들에 나는 경탄하고 감동했다. 동시에 그것들에서 ‘자유’를 느꼈다. 나를 재촉하고 억누르고 몰아붙인 것이 나 자신이었음을 깨닫는 것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in 노리단. (2011년 봄~2012년 봄) 노리단을 알게 된것은 여행에 가기 한두달 전이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혼자 강변을 따라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려왔고 그소리를 따라가 보니 그들이 있었다. 환한 웃음과 형형색색의 그들. 그들은 사회적기업 노리단이었다. 짧은 순간, 그들의 시너지를 관객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그순간, 나도 그들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그들은 누굴까? 그들은 무척 행복해보였고 그들에 궁금했다. 그들은 어떻게 공연연습을 할까? 그들의 일상은 어떨까? 그들의 미소를 보았던 그 짧은 순간은 그들속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꿔보기에 충분한 시간었다. 여행에서 돌아온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을때 마침 노리단과 인연이 닿았는지 노리단 청소년단원 입사지원서 마감일 날, 노리단의 단원모집 포스터를 보고 노리단에 지원서를 냈고, 면접과 쇼하자를 거쳐 노리단의 단원이 되었다. 꿈을 꿨던 일 치고는 어쩌면 너무도 쉽게 이루어진 일이었다. 노리단에 들어가서 내가 했던 것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 ‘처음’ 해보는 것들 뿐이었다. 악기 채를 잡는 것부터 물품을 패킹하고, 아침에는 몸 풀기를 하고, 지루한 스틱연습을 하고, 편안한 관계를 위해 띠 동갑 나이차이에도 존댓말을 쓰지 않고. 창고를 청소하고 트럭에 악기 차, 자전거 악기, 물품을 상차하고, 또 하차하고, 비오는날에는 우비를 쓰고 악기 옮기고 뙤양볕에서 공연준비 하고, 지하에서 연습 또 연습을 하고, 전국으로 공연을 하러가고, 워크숍 강사로서 사람들을 만나고, 같이 퍼레이드를 하고, 육체훈련을 하고, 대형인형 자그라가 되어 관객과 만나고- 땀을 뻘뻘, 비에 축축하게 젖었던 나날이었다. 하하, 불과 5개월 전일인데도- 마치 오래된 기억같기도 하고 ‘꿈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꿈이라고 하기에는 노리단의 일상이 너무도 생생하다. 하나부터 열가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랬기에 더 빠르게 익히고, 노리단 생활에 빨리 적응하려고 애썼던것 같다. 그 과정에서, 아니 노리단에 들어간 순간부터 나는 ‘몸을 쓰는 것’을 익히게 되었다. ‘몸을 쓰는 것’에 대해 배웠다는 것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로 몸을 쓴다는 것은 ‘배우는 자세,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서서 일하는 것을 익혔다고 할수있겠다. 더불어 상황판단력이 생기고 실전에서 쌓는 경험이 나를 더 책임감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노리단에 들어가기 전까지 뭔가를 배울때의 내 모습은 조금 소극적이고, 내 마음이 가는데로 하는것이 많았었지만, 노리단은 회사였고, ‘학습’의 개념보다는 실전의 ‘일’을 해야했고 때문에 머리로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보다는 먼저 몸으로 움직여야할때가 많았다. 특히 일을 할때 ‘일을 찾아서 하려는 마음가짐’이 중요했다. 그 마음가짐에 더해 꼭 필요한것이 ‘책임감’이었다. 나서서 일을 하는 것을 몸에 익히는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었지만- ‘책임감’이라는 것은 여러번의 실수와 계기를 통해 알게 되는 것이었다. 일을 하다보니 노리단에 오기전까지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책임감’이라는 단어의 크기가 얼마나 작고 여렸던 것인지를 깨닫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계기 중 하나가 ‘여수 국제 청소년 축제’라는 곳에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악기제작워크숍을 하게 되어 몇칠 간 그 준비를 했었다. 뙤양볕에서 재활용품을 줍다가 탈이 나고, 회의하고, 악기제작연습하고, 물품을 사고, 여러명이 참 열심히 준비했었는데- 막바지에 다다라서 박스에 최종적으로 물품을 넣을것을때 내가 실수를 했다. 물품을 챙길때는 ‘나름대로’ 신경써서 잘 했다고 생각하고 ‘다 되었다’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업무를 마치고 돌아온 다른 단원에게 물품박스를 확인받고 혼이 났다. 실수 첫 번째는, 물품 수량을 여유있게 챙기지 못한 것 이었다. 물품을 챙겨서 여수로 떠나서 워크숍을 할때-할때마다 인원이 넘칠지도 모르고, 혹시라도 부족 할수도 있는데 거기 까지 생각하지 못하고 넉넉히 챙기지 못했었다. 두 번째로 박스에 물품을 넣은것에 문제가 있었다. 챙길 물품의 종류는 많은데 한 박스에 모두 챙겨넣어야 했기에 물품의 수량에만 신경을 쓰며 박스에 넣었었다. 그런데 나중에 확인을 한 단원이 이렇게 말했다. “만약에 차에서 물품을 내렸는데, 네가 아닌 단원이 그 물품을 챙긴다고 생각해봐. 그랬을때 그단원이 이안에 물품이 정확히 들어있는지 알수 있을까? 급하게 물품을 찾아야하는데 그걸 빨리 찾을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었다. 어떻게 보면 지나친 생각일수도 있지만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다른 사람이 그 물품을 보게 되었을때 ‘난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실수를 알게 되었기에 그 순간 조금 ‘멍’해 졌던 것이 떠오른다. 나는 정말 배울 것이 많았다. 여수의 물품 챙기기 일은 ‘정성’이 부족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일 통해 혼쭐이 나면서 들었던 생각은 ‘일을 할 때 나에게는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욱 신중히 고려해야 해야 하는 능력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 이었다. ‘이 정도면 되었다’라는 생각에 모든 문제가 있었다. 나에게는 더 깊은 책임감과 정성이 필요했다. 노리단은 회사였고, 모두들 자신의 역할을 책임감있게 해나가고 있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다시금 나또한, 내 몫을 똑바로 해내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같다. 두 번째로 몸을 쓰는 것을 배웠다는 것은 노리단의 공연팀을 말하는 것이다. 노리단의 공연에서 어르신들이 손뼉을 치고 아이들이 춤을 추고, 술에 취한 아저씨가 코 앞에서 휘청휘청 춤을 추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주고받음이 있는 것이다. 공연을 하기전에는 무표정하던 어르신들의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게 하는 것은 언제나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이야기 중에 해와 바람이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내기를 해서 결국 해가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데에 성공했다는 이야기처럼- 공연이라는 것은 대화가 아닌 소리나 행동으로 사람들의 표정을 바꾸고 사람들의 몸을 움직이게 하는 신통한 소통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러한 소통을 하는 공연자가 된것이 무척 좋았다. 한사람을 춤추게 하는 일은 쉬운 일일수도 어려운 일일수도 있다. 공연자로서 나는 누군가를 얼씨구나하고 춤추게 하고 싶었고, 노리단 단원으로서도 질 좋은 공연을 해야 할 의무가 있었기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공연연습을 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멜로디 구성도 익히는 것도 어려웠지만 무엇보다 몸을 움직이면서 연주를 한다는 것이 어려웠다. 멜로디가 빠르고 구성을 익히는것에만 집중하다보니 악기를 치면서 몸을 움직이는 것이 어색했다. 처음에는 손과 발을 따로 움직이는것도 어려웠다. 또 노리단 공연에는 ‘몸벌레’라는 바디퍼커션 퍼포먼스가 있는데 이름이 몸벌레인 것은 방아깨비나 귀뚜라미, 사슴벌레등등의 벌레들이 자신의 몸을 두드려 소리를 내고 소통을 하는 모습에서 본 딴 퍼포먼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몸벌레는 자신의 몸의 소리를 두드려서 소리를 낸다. 처음 몸벌레를 배울때에는 자신의 몸의 소리를 찾아보는 것부터 시작하고, 몸 소리를 정확하고 크게 내는 연습을 한다. 그것을 소리 찾기라고 하는데 정확하고 좋은 소리를 내는 것이 몸벌레의 기본이다. 그후에 리듬과 동작을 익히고 그 다음부터는 같은 것을 반복해서 더 나은 모습을 찾는 연습의 연속이다. 연습은 보통은 정직해서 연습을 한만큼 보여졌다. 하지만 연습의 양이 중요한 만큼 연습에 제대로 몰입하는 것이 중요했다. 하루의 대부분을 연습을 하면서 보내다 보니까 연습의 양은 많은데 연습을 하는 게 점점 즐겁지가 않았다. 대부분의 다른 단원들은 각자의 개인 업무들이 있어서, 나는 거의 혼자 연습을 해야하는 시간들이 많았다. 지하연습실에서 혼자 연습을 하다보면 가끔은 ‘여긴어디고 나는 누구지?’하는 생각이 드는 때가 여러 번 이었다. 보통은 물방울이 떨어지는 맑은 울림을 가지고 있는 멜로디 악기 ‘은몽’을 연습했는데 은몽을 포지션으로 공연에 서는 것을 목표로 연습을 했다. 노리단 공연팀에서는 공연이외에도 다양한 사람을 대상으로 교육 워크숍을 하였다. 남녀노소의 다양한 사람들과 수강생과 워크숍 강사로서 만난다는 것은 그때 그때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것들이 있어서 어떤 언어를 쓸 것인지, 어떻게 수강생들을 만날것인지, 생각해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무척 중요했다. 가끔은 워크숍 퍼레이드를 할때 쓸 동작들도 만들어야했는데- 몸을 쓰는 것이 익숙하지 않고 워크숍도 막 배워나가는 상태였기에 퍼레이드 때 쓸 동작을 구상해 오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그런 부분도 그렇고 워크숍강사로서 수강생들을 만나는 부분에서도 배울것이 많았다. ‘어떤 식으로 다가가야할까.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어야할까. 어떻게 알려줘야 더 쉬울까’ 이런것들을 생각해 두었다가 다른 단원들에게 물어가며 워크숍 을 할 때 마다 시도해보려 했다. 워크숍이란것은 어려움을 느끼고 알고 싶은 것이 많다고 느꼈던 만큼 공연이랑은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특히나 교육 사업을하는 노리단에 있다보니 더욱 그런 교육 사업 아이템이나, 워크숍들에 관심이 많이 생겼던 것 같다. 한창, 대학에 대한 압박과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머릿속이 가득차 있었을때, 한강둔치에서 노리단의 악기소리와 그 경쾌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신기하고도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일상이 궁금했기에 노리단에 들어갈수 있었고, 그 안에서는 내가 궁금했던 부분이 아닌 예상치 못했던 것에서 부딪히고 고민하기도 했다. 그리고 조금씩 몸을 깨우고 몸의 감각으로 일을 하는 것을 익혀나가기 시작했다. 또 나를 드러내고 소통 하는 것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다만 한가지 안타까운 부분은 상황이 개선되지 못했던 내 생활의 반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개인연습부분이다. 공연자로서의 개인연습은 당연했지만 혼자 하는 연습은 어느순간부터는 인내가 많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고민을 하게 되었었다. 그때마다 노리단의 단원들에게 내가 겪는 어려움, 고민들을 말했던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게 그저 고민으로 끝났던 것, 내가 느끼는 문제점들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사적인 자리에서 끝나는 고민이 되어버렸고 회사의 사정상, 그리고 다른 이유들로 올해 초 노리단을 나오게 되었지만 내가 느끼던 문제의 대안이 만들어지지 않은것이 무척 아쉽다. 아마 나의 개인연습에 대한 대안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려는 태도가 많이 부족했거나 사람들과의 공개적인 소통이 부족했기에 일어났던 일이 아니었나 싶다. 내가 상상했던 노리단은 작은 규모의 음악 작업장같은 곳이었지만 들어와보니 노리단은 ‘회사 노리단’이었고 여러 톱니바퀴들로 커다란 기계를 움직이는 모습에 가까웠다. 그래서 더욱 뭔가를 배우거나 할 때 적당한 긴장감을 가지고 열심히 했던 것일수도 있지만, 대신 내 목소리를 내는 것이 더 조심스럽기도 했다. 소통의 부재가 일어났던 걸까? 그래서 그런 식으로 일이 흘러갔던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문이 남은채로 노리단을 떠나게 되어 생각하면 마음한구석이 저렸다. 언젠가 한번쯤 노리단에 대한 생각을 글로 써볼까하는 생각이 있었지만 막상 쓰려고 하니 이곳저곳에서 기억 뭉치들이 두서없이 뭉텅뭉텅 튀어 나왔다. 기억뭉치들을 정리하는 것이 더 어려웠고 그것을 다 털어내기엔 너무 자잘한 부분까지도 적절하게 묘사하고 싶어서 그런것은 기억속에 담아 두기로 했다. 일과 청년과 삶 십대의 후반에 접어 들면서 슬슬 내가 어른이 된 모습을 떠올려보게 되었다. 청년이 된 내 모습을 상상해보니 청년이 되면 나는 경제활동을 하고 사회의 어느 한 부분에서 나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무래도 사회에 미치는 내목소리의 영향도 더 커질것이고 나의 행동이나 목소리에도 더 큰 책임감이 요구될 것이다. 막연하게 나마 청년이 되면 목소리의 크기가 커지니 만큼 내 목소리를 드높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의 부조리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사회에서 소외받는 사람들을 찾아서 위로를 해야하고 도움을 주어야한다는 생각에서 였다. 그러나-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이러한 일들은 나의 직업과는 별개인 일이 되는 것일까. 만약 내가 일자리를 찾지 못해 실직자가 된다면 내가 사회운동을 할 시간이라던가 누군가를 도울수 있을까. 결국 사회 기여는 나의 삶과는 별개인 것이 될 수 도 있지 않을까. 나의 삶과 타인의 삶이 이어져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정작 내가 이사회에서 타인을 생각하면서 살 수 있을까. 타인과 함께 산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그런 와중 노리단에 오게 되었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자부심과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들을 만났다. 돈은 필요하지만 돈을 위해 회사를 다니고 있는 것이었다. ‘관심을 가지고 일구고 싶은 일을 해보다 보니 돈이 따라왔다, 그래서 난 이걸 하는 거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과 즐거움이 넘쳤다. 그중에 사회경험이 풍부한 어떤 단원은 나에게 말했다. 일을 할때 즐거우려면 그 목적이 분명해야한다고. 그들의 목적은 일반 시민들중에서도 문화에 취약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교육과 문화예술사업을 여러방식으로 시도하여 다양한 시민들이 보다 삶을 재미나고 풍요롭게 살아갈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데에 있었다. 그래서 다양한 시민층을 대상으로 워크숍을 하고, 자신의 재능이나 자신의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건강한 몸이 필수이다. 자신의 몸뚱이를 제공하며 시민들이 예술과 문화, 교육을 자신의 삶과 접하며 살아갈수 있도록 돕는것이다. 자신이 좋아서 하는일이니 업무가 가끔 골치아파도 그뿐이다. 그또한 놀이이고 일상이다. 자신의 일을 가지고 있어도 일을 하는 이유가 돈을 벌기 위해서이고, 그 돈으로 자신의 일에서 느끼지 못했던 충만감, 즐거움을 사야만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것을 알게 되면서 왜 홍대근처에 유흥가가 더 많아지고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한 사람의 소비형태의 삶이 지속된다면 그 사람의 삶에서 돈은 더욱 더 중요해 질것이고, 만약 돈이 없다면 어떻게 놀아야하는지, 어떻게 즐거움을 얻을수 있는지조차 알수 없을것이고 큰 외로움과 소외감을 느끼게 될것이다. 또 자신의 하고 싶은 일을 하기위한 돈의 가치가 더욱 커져서 돈으로 뭐든지 할수있다는 가치관을 가지게 되고 순간의 즐거움을 추구하게 되어 다른 사람을 소외시키며 많은 사회의 문제들을 만들게 되는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내가 했던 고민처럼 일과 자신의 가치관, 즐거움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내 행복은 커녕, 타인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기조차 굉장히 어려운 일이 될 것 같았다. 이렇게 일과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일치하는것이 한사람의 일상의 행복도에 무척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양한 어른들의 일하는 모습들을 보게 되다보니 일이라는 것이 개인의 관심사랑 별개가 될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 사람들에게는 일이 일상이로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고 실제로 노리단에서 일하는 나에게도 노리단은 일터이기도 하고, 배움터이기도하고, 중요한 인간관계를 쌓는 곳이기도 하였다. 청소년이기에 느끼는 것인줄 알았는데 하는 일이 달랐을뿐 노리단에서 일하는 어른들도, 청년들도 내가 느끼는 노리단과 같겠다는 생각은 조금 뒤늦게서야 들었다. 사회의 경쟁하는 시스템, 돈과 권력을 위해 위로 올라가기만 하는 사회시스템, 그 와중에 낙오되고 소외되는 사람들, 몸을 쓰는 것이 하찮게 여겨지는 사회. 노리단같은 사회적기업은 이런것들에 의해 생겨난 대안적 형태의 일터였을 것이다. 일하며, 놀며, 배우는 어른들을 보면서 나또한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들의 일터 노리단을 생각해보기도 하고, 다양한 사람들의 가치관을 엿보게 되다 보니 막연하게만 보였던‘하고 싶은 일을 하며 세상을 바꾼다’는 노리단의 슬로건이 조금씩 이해가 되었다. 감을 잡기가 어려웠던 노리단에서 하는 일들의 목적과 그것들의 연관성이 조금씩 그려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문화, 지속가능한 교육, 일상의 예술을 제공받는 대상자들 뿐만아니라 그일을 하는 기획자, 진행자들도 새로운 문화와 지속가능한 교육, 일상의 예술안에서 살기를 원하고 그렇기에 공부하고 있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그런 노력이 그들의 일상이고 결국 그들은 그들이 하고 싶은 것을 일상에서도 하고 있구나-하는 것을 매번 알 수있었다. 그런 관찰은 결국 나의 미래를 생각하게 되었는데- ‘앞으로 내가 뭘하면서 살것인가?’하는 질문을 자연스레 하게 되었다. 사실 16살 때부터 노리단에 들어오기 전까지 내 꿈은 좋은 어른이 되자는 것이었다. 누가 기대도 끄떡없고, 늙은 등나무 같이 완벽한 그늘을 만들어 줄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되어야 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노리단에 들어와서 다른 사람의 삶을 이롭게 하는 것에 가치를 두고 사는 청년들을 보다보니 나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청년이 된 나는 ‘어떤 가치관으로 무엇에 귀 기울이며 살것인가, 어떤 삶이 지향해야할까, 5년뒤, 10년뒤에 어떤사람들과 일을 하고 있을까,’하는 생각들이 그 쯤 나의 화두였다. 그러던 와중 노리단을 나오는 일이 생겼고, 마침 이런 것들에 대해 책을 보고 공부하면서 연극공부를 하거나 천천히 대학입시를 준비해볼까- 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또 하자에 있는 학교들을 알고 있었기에 그곳에 들어가서 내가 공부하려 하고 있는 질문들에 대해 공부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하며 생태와 기후변화, 함께살기가 키워드인 것 정도를 알고 있었던 작업장학교에 가보기로 결심했다. ‘함께 사는 삶’에 대해 공부하고 싶었던 시점이었고 사회에서 일어나는 이슈를가지고 배운다면 어쩌면 내 나름대로 어떤 것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야하는지- 실마리를 찾을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또 생태와 기후변화는 어떤 키워드일까- 추측할 뿐이었는데 학교에 들어가서야 하자작업장학교에서 말하는 ‘함께 산다’ 는 것은 인간들 끼리의 함께 사는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의 자연, 인간, 동물과 식물,그리고 어쩌면 인간의 문명을 말하는 것임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탈핵 작년 3월 10일, 후쿠시마에서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했다. 난 몸이 무척 안 좋아서 집밖에도 나갈수 없었다. 연일 텔레비전에 후쿠시마 속보가 흘러 나오는데도 나는 사고에 관심이 없었다. 실시간으로 조회 수가 올라가는 ‘후쿠시마 사고’의 검색어를 클릭해보기는 했었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기사를 보면서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사건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가기는 했다. 초등학교 때 히로시마에 투하되었던 원자 폭탄 사건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것에 대해 조사하다가 방사능에 피폭된 사람들과 동물들의 처참한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게 되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건의 무서움이 그 안에 담겨있었다. 하지만 핵폭탄 투하 사건과 원자력발전소의 사고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엄청난 피해는 다시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안심했고 곧 후쿠시마에도 다시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작업장학교에 들어와서 보았던 첫 번째 영상의 이름은 ‘꺼지지 않는 불’이었다. 인간에 의해 발견되어 사용되었지만 인간의 힘으로는 끌 수 없는 불에 대한 내용이 담긴 영상이었다. 그 불의 원료가 되는 물질은 퀴리부인에 의해 발견되어 과학자들의 오랜 연구대상이었고, 인간의 문명을 더욱 빠르고 편리하게 만들어주는 엄청난 에너지원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과학자들은 그것을 발전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이 시대 인간들의 삶 속에 꼭 필요한 것이 된 전기를 공급해 줌으로서 우리의 생활 속 깊이 뿌리를 내려왔다. 이것이 원자력 발전이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되었지만 이원자력 발전이라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것이었다. 발전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방사능물질이 생기는데 그 방사능 물질에 피폭이되면 사진에서 보았던 원자폭탄의 희생자들처럼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무서운 것은 방사능이라는 것은 한정된 지역에 한정된 기간 동안 퍼지는 물질이 아니라 생물의 체내에 흡수되어 생태계를 파괴하고 공기로도, 물 로도 퍼져나간다. 또한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소멸되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원자력 발전소에서 방사능이 누출되면 누구라도 방사능에 노출 되고, 지구 어디를 가고 안전할 수가 없다. 결국 방사능물질은 사라지지 않고 지구 곳곳에 잔류하게 된다. 방사능물질은 우리의 몸 속 세포 하나, 하나에 축척 되어 미래의 우리의 후손들의 모습이 어떠할지도 짐작을 할 수가 없다. ‘꺼지지 않는 불 온칼로’라는 영상에서는 쓰고 남은 방사능 폐기물의 처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방사능 폐기물을 처리하는 일은 무척 위험한 일이다. 작업을 하는 도중 방사능의 위험에 노출되어있으니까 말이다. 핵 폐기물은 없앨 방법이 따로 없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방사능 물질 덩어리인 폐기물을 콘크리트로 둘러친 다음 땅속에 묻어 버리는 일이다. 그런 식으로 폐기물을 처리 한다 해도 그안의 방사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폐기물 자체가 땅을 오염시키고 생태계를 파괴할 것이다. 그 근처의 야생동물이 돌아다니다가 방사능에 노출된 뭔가를 먹고 배설물을 남긴다면 이미 생태계의 파괴는 시작된 것이고 지금도 생태계의 더 오밀조밀한 부분에 방사능이 침투하여 그 피해가 확산되고 있을 것이다. 방사능은 결코 정화되거나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영영 사람들의 접근을 막아야 하지만 핵 폐기물처리장도 언제 사고가 일어날지 모르니 아무리 숨기려 해도 핵폐기물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영상을 보면서 계속 들었던 생각은 후손들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나를 빗대어 우리가 얼마나 이기적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누군가의 행복을 빼앗고 누군가의 삶에 고통을 주면서 살아가고 있는지가 보였다. 탈핵공부를 하기 전 내가 생각해왔고 공부하려고 했던 ‘함께 살기’란 것은 현 시대 안에서 나와 소통이 가능한 사람들에 한한 것이었다. 그런데 탈핵에 대해 공부하게 되다보니 내가 살아오던 생활방식으로 인해 나무, 씨앗, 두더지, 바다, 물고기, 북극 곰, 내 자손의 삶이 이제껏 파괴되고 있던 중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에게 있어 ‘함께 살기’의 대상은 더 이상 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한한 것 아니었다. 내가 사는 지구는 나무도, 인간도, 물고기도 함께 사는 곳이었고 우리는 내가 상상한 것보다 더 가까이 연결되어있었다. 함께 살기? 함께 살기의 대상이 지구로 넓혀지니 ‘지구와 함께 사는 것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들었다. 그래서 질문을 바꾸었다. ‘물고기와 함께 산다는 것은 뭘까, 지렁이와 함께 산다는 것은 뭘까. 이웃집 가족과 함께 산다는 것이란 뭘까.’하고 생각하다보니 그들과 함께 살기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콘센트에도 신경이 쓰였고 불을 끄는 것에도 신경이 쓰였다. 일회용품은 의식하기가 어려웠지만 순간순간 사용하다가도 깜짝 놀라곤 했다. 쓰레기를 만들지 않으려다 보니 슈퍼에서 과자나 빵을 덜 사먹게 되었고, 에스컬레이터의 사용도 줄이게 되었다. 아, ‘에스컬레이터 같은 것은 내가 사용하지 않아도 절약이 되는것이 아니니까 사용해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은 행동의 문제였다. ‘내가 얼마나 지구의 생명들과 함께 산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나, 내가 진정 자연과 함께 산다는 것을 내 생활 속에서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때면 걸어서 계단을 올라갔다. 또 집에서 쓰는 전기도 의식을 하게 되었다. 집에 있다보면 내가 얼마나 전기를 낭비하고 있었는지 의식이 들었고 가족들에게도 원자력발전소에 대한 말을 해서 전기를 조금씩 줄여나가자고 했다. 실제로 원자력 발전소를 없애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이 에너지를 절약하는 것이었다. 원자력 발전소는 우리의 생활에 필요한 전기를 공급해준다. 만약 우리가 에너지를 절약하지 않는 상태로 원자력 발전소가 폐쇄 된다면 기존에 사용해온 만큼의 전기가 공급되지 못해서 사람들의 불편이 더 크게 느껴질것이다. 그렇기에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에너지의 사용을 줄여나가는 연습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자전거 공방의 선생님께서 자전거 강의 중에 하셨던 말이 떠오른다. ‘어느 정도는 불편에 익숙해지는 노력도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지구를 망가뜨리지 않고 자연과 공존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제껏 누려왔던 편안함의 일부는 버릴 수 있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기후변화 문제,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 기온 상승, 식량난 , 에너지 자원의 부족, 먹거리의 문제 등 지구와 인류의 위협하는 내용의 기사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고 이런 것들에 대한 사람들의 걱정도 높아지고 있다. 인류 전반에 걸친 인간문명에 대한 회의가 담긴 반성이 일어나고, 사회 곳곳의 문제들의 대안으로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목소리들이 모여서 더 커지고 있는 중이다. 그런걸 보면 지금까지의 인류의 문명의 형태를 짐작을 할수도 있을 것같다. 하자작업장학교에서 나비이야기에 대해 알게 되었을때 나는 나비이야기가 어떤 의미인지, 어째서 문명을 바꾸려는 것인지, 나비문명은 어떤 문명일지 상상이 되지 않았었다. 아직은 모르겠지만 언젠가 나비문명이야기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하고 하자작업장에서 4개월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뭔가 생각이 많았었는데 해남으로 고정희 추모여행을 떠났을때 조한 교수님과 산책을 하던 기억이 난다. 그때도 나비 문명도, 나비이야기도 잘 그려지지 않는 상태였는데 산책을 하던 도중 내가 나비이야기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을 했더니 '애벌레에서 나비로 변화하는 것은 한 차원이 바뀌는 것‘이라고 하셨다. 차원이 바뀌기에 그전에 살던 나무를 바라보는 눈과 나비가 되어 나무를 보는 눈의 위치도 바뀌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비는 애벌레의 시절을 기억하고 살아 갈것이라고 했다. 그말을 듣다보니 나는 지금 애벌레의 단계일까 고치의 단계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아마 고치로 되는 단계로 들어서야 할것 같았다. 그리고 나비가 되어 자신의 집 터인 나무가 죽어 '모두 죽어버리는 게 아닐까’하고 걱정하는 애벌레들에게 나무가 말했던 것처럼 내가 속삭여 줄 수도 있을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나비 문명일까. 우리가 살던 차원에서 한차원이 바뀌는 것. 생각해보니 내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지구를 걱정하고, 사회에 있는 문제들을 변화시키기위해서 글을 쓰고 시위를 하고 강연을 하고, 일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함께 살기’라는 것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치의 시간을 보내는 중일지도 몰랐다. 작업장에서 나비문명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서 나에게 참 많이 들었던 생각은 나에게는 지금의 문명이 변화해야 한다는 근거- 뭔가 스스로 납득하고 변화해야 한다는 절실한 마음 같은 것 말이다. 그런 것들이 결국 공부를 하게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같다. 그리고 나만의 나비문명을 그려보는 것이 필요했다. 탈핵에 대한 공부를 시작으로 ‘함께 산다는 것’에 대한 내 생각이 인간주의였음을 알게 되고 환경주의로 바뀌게 되었을 때, 나비문명에 대한 상상이 조금씩 가능해졌고 지속가능한 삶의 형태, 함께 살기가 일어나는 일상의 방법들에 대한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던 것 같다. 자공공 마을 공동체 마침 그때 후지무라 야스유키 선생님의 삼만엔 비즈니스라는 원고를 읽게 되었다. 삼만엔 비즈니스는 시간, 친구, 체력이 있으면 가능한 월 3만원 정도의 돈을 벌수 있는 사업인데, 원고를 읽으면서 낯설지가 않았다. 자연스레 노리단에서 함께 했었던 ‘땡땡은 대학’이라는 청년 사업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역과 작은 공동체를 기반으로 아이디어를 생각한다는 점과 한 달에 네 개의 사업을 진행하여 돈을 벌고 그것을 지역 공동체를 활성화 시키는 데 사용할수 있다는 것이 더욱 땡땡은 대학을 생각하게 했다. 여기서 포인트는 공동체 인데, 공동체 안에서의 교육과 문화를 활성화 시키는 일을 도시의 청년들이 만들어 간다. 그렇기에 아이디어와 그것을 나누고 보완할 친구랑 일을 할 체력이 필요하다. 작은 공동체에 들어가서 마을의 사람들과 만나면서 그들의 놀거리와 배울거리를 찾는다. 이부분이 제일 중요한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수업을 만들어 일주일에 한번정도 기간은 상관없이 수업과 동아리가 진행이 된다. 예를 들면 춤추기를 좋아하는 장어집 아저씨가 있었는데 당연히 그지역에 사는 사람중에 그것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요즘은 남의 취미생활에 별로 관심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장어 집 아저씨의 특기를 살려서 삼바 강의를 만들었다. 그리고 종이에 홍보를 하고 장소와 시간을 적어두었다. 물론 비용은 저렴했다. 나는 노리단 쪽에서 그것을 알게 되고는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내가 사는 곳에서는 너무 먼 지역이라서 일주일에 한 번씩 가서 배우기에는 내가 너무 지칠것 같았다. 포인트는 거기에 있는것 같다. 마을이라면 자신의 집이 있는 곳에서 반경얼마 되지 않는 거리, 자신이 편한 복장을 하고 마음 편히 쏘다니는 동네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집이 있고 움직임이 편하고 자유로운 공간이기에 마을에서는 뭔가를 창조할 가능성이 많이 잠재된 공간이다. 의정부에서 가방을 매고 멀리까지 내 배울거리와 놀거리를 찾아서 다녔던 것은 내가 사는 곳에는 소비를 하지 않고도 사람들이 모여서 뭔가를 할만한 문화공간이 없었고 돈과 흥미가 적절히 맞아 떨어져서 배울 만한 거리가 없었다. 그래서 친구를 사귈만한 공간도 없었던 것같다. 의정부에서 내가 가는 유일한 공간이 도서관인데 도서관에서는 개인 공부나 각자 책을 보기 때문에 사람이 모여도 이야기를 나눈다던가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하자에 오면서, 만약에 하자같은 공간이 의정부에 있었거나 땡땡은 대학같은 마을 프로젝트가 의정부에 있었다면 나는 멀리까지 고생스럽게 ‘그 무언가’를 배우러 가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할만한 동네 어르신들도 생겼을 것이고 친구들또한 많이 생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땡땡은 대학과 비슷한 마을 프로젝트를 우리지역에서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 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동안 생각했더 일중에서 제일 의미있는 일인것 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곧 깨달은 것은 나에겐 지역 친구가 없다는 것이었다. 재밌는 마을을 의정부에다 만들기 위해서는 의정부에 살고 내말에 흥미를 가지고 의욕적이고 시간도 많고 몸도 가벼운 친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며 진심으로 아쉬워했던 기억이 있다. 아파트 단지들을 보면서도 그런 결심을 했다는 사실에 스스로 잠깐 벅찼을 뿐 마을 만들기는 시도도 해보지 못했고, ‘내 마을에서 놀고 먹고 배우고싶다’는 마음은 지금도 간절하게 남아있다. 그런 경험으로 삼만엔 비즈니스를 하려면, 친구, 시간, 체력이 필수 라는 후지무라 선생님의 말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게 삼만엔 비즈니스라는 것은 마을 공동체와 연결되어있다는 것 자체로도 매력이 있었지만 돈을 벌고 남는 시간에는 공동체 안에서 마을을 위한 일을 하거나 텃밭을 가꾸고, 대안에너지를 만드는 등, 자급 자족의 생활을 유지해 나간다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마을 공동체를 살리고 대안에너지를 만들고 적정 기술을 배우거나, 생명을 키워내는 마을안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굳이 학교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지구에 대한 존엄성을 느끼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자연스레 터득하고, 기술을 익히며 자라나게 하는 것이 나비문명의 나비를 키워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난민 청소년 학교에 들어 온지 중반쯤 되었을때 글로비시 시간을 통해서 접하게 된 단어가 ‘난민’이었다. 난민의 일반적 의미는 생활이 곤궁한 국민, 전쟁이나 천재지변으로 곤궁에 빠진 사람들을 말하지만 최근에는 주로 인종, 종교, 국적, 정치적 견해, 혹은 특정 사람들로 인한 박해의 공포를 피해 조국을 떠난 후, 귀환하지 못하거나 귀환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학기가 끝나갈 무렵에 메솟의 heart school의 교사 라후라씨로부터 미얀마의 군부정치에 대해 듣게 되었다. 원래 미얀마라는 나라에서는 다양한 민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내전을 통해 군부정치를 하는 나라가 되었다. 군부정치는 말 그대로 군대인데, 나라에서 국민들에게 군부를 위한 강제 노동을 시키고 세금은 걷어 가면서 돈도 주지 않는다. 심지어 국민을 학대하는 사진또한 찍어서는 안되니 얼마나 심한 핍박을 받고 있는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고문을 하고 총 칼로 협박을 한다. 이쯤 듣다 보니, ‘저 나라에는 법이 없나?’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이쯤 되면 법 또한 국민의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저 나라의 법은 누가 손을 대고 바꾸고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군인들은 국민들을 학대하고 식량을 빼앗는 것에 모잘라서 마을을 불태우기도 한다고 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오갈데가 없는 사람들은 결국 피난을 가게 된다. 보통은 남자들이 싸워서 죽거나 없기 때문에 여자가 아이들을 데리고 정글을 이동하면서 피난을 간다. 미얀마의 난민들이 모인곳이 미얀마와 태국지역의 경계선에 위치한 메솟이라는 곳이다. 하지만 메솟에 가는 것은 운이 좋아야 가능하고 미얀마를 벗어나지 못하고 미얀마내의 난민으로 정글 속에서 살아야가야하는 사람들도 있다. 듣다보니, 정글에서 크는 아이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어디로 가야할까? 난민으로 자랐으니, 집을 짓고 정착해서 살아갈수 있을까?. 저 미얀마의 군부정치는 어떻게 되는 거지?하는 등등의 예측밖에 할수 없는 답답한 마음이 되었다. 강한 권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 권력을 깨뜨리기 위해 할수 있는 것이 없을까. 세상은 너무나 크고 문화도 언어도 살아가는 모습도 다르다지만, 그게 내 일이 아니라고 해서 이렇게 무관심 해도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하자작업장학교와 함께 메솟에서 지내고 있는 미얀마의 난민 청소년들을 대상의 학교를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메솟에 만들 학교의 이름은 일단 ‘따비에 학교’로 아직은 구상 중에 있기 때문에 난민포럼을 통해서 메솟난민청소년들의 처한 환경과에 대하여 듣게 되었고 그들에게 필요한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메솟의 아이들은 많은 NGO들의 지원으로 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학교마다의 질도 다르다고, 청소년들이 다니는 학교들이 대부분이 진학을 목표로 한 입시교육에 치우쳐 있어 난민 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게다가 실제로는 진학할 수 있는 대학이 거의 없어 '공부해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의식 또한 많다고 했다. 그렇다면 기술을 배우는 전문적인 학교를 만들어야할까? 하지만 그또한 그기술을 써먹을 기회가 없다면 결국 대안이 되지 않을것이다. 또 나중에라도 미얀마로 돌아갈수 있다면 그 기술로 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그 아이들이 미얀마로 돌아가는 것은 상상일 뿐이고 메솟 안에서 살아야한다는 것을 전제로 그 아이들의 배움과 자립을 생각해야했다. 마침 메솟에 있는 학교중 하나인 Heart school에서 오신 라후라 선생님이 하트스쿨에 대한 소개를 짧게 해주셨는데, 하트스쿨의 교육과정의 내용이 인상깊었다. 하트스쿨에서는 첫 번째로 지구의 권리나 인권에 대한 보다 정확한 공부를 하고, 두 번째로 건강과 인간이 환경을 파괴하는 일, 그래서 인권이 어떻게 침해가 되는지- 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하는 공부를 한다. 세 번째로 컴퓨터를 다루는 기술훈련을 하고 마지막으로는 자신의 공동체에 들어가서 자신이 배운것들을 기반으로 일을 한다. 또 졸업생들의 모임과 커뮤니티가 잘 짜여져 있어서 지속적으로 지구와 권리에 대한 일을 해나간다고 했다. 난민으로 자란 청소년이 인권공부를 한다는 것이, 그것도 지구의 권리와 자신의 권리를 함께 놓고 배우며,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하는 일을 한다니- 어딘가 이상한 느낌이기도 했고 감동적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쩌면 이렇게 난민 청소년들에게 적절한 공부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란 것도, 배움이라는 것도 자기 만족이 있어야 한다. “그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해주고 싶다.”라고 말하던 마웅저 선생님에게는 메솟 청소년들이 지금 보다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학교를 만드시려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마웅저 선생님이 ‘괜찮게 생각하는 삶’이란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마웅저 선생님은 메솟의 청년들이 배움을 이어나가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시는 것 같은데 그가 생각하는 ‘괜찮은 삶’이란 어떤 것 일지, 메솟의 청소년들에게 선물해주고 싶은 삶의 형태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어쩌면 한국의 청소년, 한국의 청년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고 계신 걸까? 메솟의 청년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들은 것밖에 없지만, 마웅저 선생님께서 한국의 대안학교같은 학교를 메솟에 만드려고 하는 것을 보면 일단 그도 기술을 가르키는 교육보다는 작업장에서 공부하는 키워드처럼 생태, 기후변화, 함께살기에 대한 공부가 메솟 지역의 청(소)년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신것 같다. 우리는 환경이 다르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소외 받는 사회문제나 환경문제에 주목을하고 공부를 하다보면 메솟에 있는 청소년들도 자신의 정체성을 바라보고 미얀마를 이해하는데 큰 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또 메솟의 하트스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더욱 강해진 생각이 있는데, 메솟의 공동체가 일어나서 그 안에서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안전하고도 보다 자유롭게 공부를 해나가고 지속가능한 삶에 대한 배움을 익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학교의 역할이 가능한 자신의 공동체 안에서 청년들이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 그리고 자신의 살고 있는 곳을 중심으로 한 환경에 대한 조사, 탐방 을 하고 마을 꾸미기같은 프로젝트를 하다보면 아이들은 자신이 살고있는 곳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깊어질것 이다. 길잡이가 되어줄 어른이 있다면 메솟의 청소년들 끼리도 소모임을 만들어서 지속적으로 배움을 이어나갈 수 있다. 또 좀 더 나이를 먹게 되면 하트 스쿨 처럼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지구의 권리와 인권, 인간의 건강과 자연, 함께 살기에 대한 공부를 진지하게 해나갈 수 있다. 또한 지속가능한 삶을 공부하고 적정 기술을 익히고, 대안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을 하면서 마을의 구성원으로서 공동을 위한 일을 하고 이웃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면 꽤 괜찮은 삶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동안 내가 꿈꿔왔던 마을 공동체를 메솟에 대입 시켜서 생각해 보았을 뿐이고, 현실적으로 일어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불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메솟이 어떤 교육을 선택하게 되고, 메솟의 아이들이 미얀마로 돌아가게 된다 해도 ‘자연과의 함께 살기’는 지구인 공동의 숙제이다. 또한 지속가능한 삶은 현시대가 주목하고 있는 대안적인 삶이다. 메솟의 청소년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삶에 즐거움을 느끼고 개인의 삶을 넘어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분위기가 감도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를 바란다. 현미 네홉 프로젝트. 처음 도시 농업에 대해 공부하게 되고 하자에서 농사를 짓게 되었을 때는 좀 갑작스러운 느낌이었다. 농사를 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해봤던 적이 없었고 왜 도시에서 농사를 지으려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먹는 음식들은 모두 마트로부터 사온 것들이고 어디서든 구입을 할수 있는데, 왜 도시에서 농사를 짓는 것이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된 현미네홉 프로젝트는 오창균 선생님과 함께 농사 수업을 기반으로 진행되었다. 프로젝트 하는 확실한 동기나 목적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더욱 농사 수업에 집중하게 되었던 것 같다. 내가 찾은 현미 네홉 프로젝트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었다. 첫 번째로 우리의 농사는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천연퇴비를 만들고, 액비를 만들어서 농작물을 키워보는 실험이었다. 오창균 선생님의 농사 수업을 토대로 적절한 작물들을 골라 심었다. 또 음식물 쓰레기들을 모아서 옥상에 퇴비 통을 만들었다. 음식물 쓰레기는 해가 있을 때는 햇빛이 비치는 곳에 두었다가 해가 없을 때는 이슬에 맞지 않게 안쪽에 밀어 두었다. 퇴비 통에서 흘러나오는 액체들과 기어다니는 구더기들을 없애기 위해서는 매일 마다 물청소를 해주었다. 액비도 만들기로 하여 만들게 되었는데, 액비는 작물에게 주는 영양제이다. 액비로는 소변을 모아두었다가 물에 희석시킨 것과 깻묵으로 만든 액비가 있었는데, 두 가지에 구별을 두지 않고 사용했다. 오줌 액비는 떨어질 날이 없었고, 깻묵 액비는 그때 그때 물과 잡초들을 넣어서 양이 일정하게 충당되었다. 현미네홉 프로젝트는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천연자재로 만든 농약과 비료로 했던 농사였지만, 그런 것에 대한 개인적인 관찰 기록을 하지 못했던 것이 아쉽다. 개인적인 관심의 문제 였을까? 물을 주고 액비를 주는 것은 성실히 했지만, 작물들의 상태를 지켜보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냥 물과 햇빛만으로도 스스로 크는 작물이 아니라 ‘우리의 작물’ 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냥 물을 주고 액비를 주는 농사가 아니라 엄연히 도시 농사 실험이었다. 천연액비가 효과가 있나 들여다 보기도 하고 난화칼슘이 진드기들에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살펴보는 것들이 필요했다.그런데 작물이 우리의 ‘돌봄’에 의해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반응하는지, 충분히 살펴보고 만끽하지 못했다. 서로의 관심의 차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관리에 있어서도 소통이 잘 안된것이 아쉬웠다. 물을 주는 때나 액비를 주는 때를 몰랐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서로 말해서 정하면 되는 것이었다. 우리가 함께 정해야할 이야기들이 하려면 많았는데도 나는 그냥 넘어갔고 결국 액비를 주는 날짜도 쇼를 통해 전달 받게 되었다. 현미 네홉 프로젝트의 두 번째 의미는 공동의 농사라는 것이었다. 하자 마을의 사람들과 함께 작물을 기르고 수확한 작물은 밥상에 올려 나누어 먹자는 것이 취지가 있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 블루 패드라는 것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블루 패드는 바뀌는 부분과 바뀌지 않는 부분을 나누어서 만들게 되었다. 밭의 지도와, 여러명이서 밭을 관리할 때 꼭 알아야할 것에 대한 것은 바뀌지 않는 것으로, 그리고 그때 그때의 상황과 정보를 기록가 기록되는 농사일지는 사진을 찍어서 작업장의 홈페이지에 기록으로 남겨 두었다. 그리고 농사를 시작하는 시농제때는 하자마을 사람들과 함께 밭에 씨들을 심었다. 그때 까지는 반신 반의였다. 하자마을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하자의 농사에 참여해줄까? 하지만 시농제를 끝으로 사람들아 하자마을의 농사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어려웠다. 농사일지에 글을 남기는 것은 작업장학생들 뿐이었다. 어째서 마을 사람들이 하자마을의 농사에 참여하기가 어려웠을까. 하자 마을의 농사를 시작한다는 시농제가 작업장학교만의 잔치로 보였을까? 혹은 농사에 참여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졌을까? 하자작업장학교만의 농사로 보고 접근하기가 부담스러웠을까? 학교에서 이야기를 할때 하자에 있는 사람들이 작물에 물을 마음대로 준다는 말이 나왔는데, 어쨌든 물을 준 사람들은 작물을 키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마을의 농사에 참여하는 것과 작물을 키우고 싶은 것은 다른것일까? 왜냐하면 작업장학교 학생들은 도시농업 실험을 하고 있었고, 농사 수업을 하고 때를 봐서 물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물을 키우고 있던 사람들과의 소통이 중요했을까? 그 사람들을 우리가 하는 마을 농사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하고 같이 참여시켰으면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들이 마을의 농사에 참여한다는 것 또한 애매한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을의 농사라고 시작하긴 했었지만, 하자마을의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할수 있었던 것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때에 맞춰 액비를 주는 일? 작물을 지켜보는 일? 그것이 함께하는 농사였을까. 예전에 쓰지 신이치 선생님이 하자에 와서 강의를 하셨을때, bottom line이라는 말을 흥미롭게 들었었다. bottom line이라는 말은 내가 생존하는데 꼭 필요한 것을 말하는 단어였다. 선생님이 당신의 bottom line은 뭔 것 같으냐고 물으셨을때, 나는 돈을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의 bottomline은 돈으로 살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bottom line에는 물, 공기, 흙, 생명다형성, 태양에너지, 식물, 사랑이 들어갔다. 다른 것들은 예상할수 있는 답들이었지만 내가 먹고 살 수 있는 가장 밑바닥에 식물이 있다는 것은 좀 뜻밖이었다. 아무것도 없어도 식물이라는 것은 약간의 흙이 있다면 물과 햇빛을 받고 자라난다. 새삼 식물이라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지고 감사하게 느껴졌다. 현미네홉 프로젝트를 하면서는 음식이라는 것이 조금은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나는 밖에서 일을 할때에는 점시과 저녁을 사먹어야했다. 그래서 끼니를 해결해야 할 때마다 무척 괴로웠었다. 일단 먹고 싶은 음식이 없는데도 끼니를 때우기위해 먹을 때가 많았고 음식물을 먹는 것이 집에서 처럼 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속이 불편하고, 음식들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음식 재료의 건강함이나 안전함을 믿을수가 없어서 지금도 밖에서 음식을 사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현미네 홉 프로젝트를 하면서 밭에서 작물들을 길러내고 그것이 내 밥상으로 올라와서 그것을 먹는것에서 영양덩어리를 섭취하는 기분이 들었고 돈으로 채울수 없는 풍족함을 느꼈다. 하자에서 보았던 영상중에서 텃밭에서 유기농 농사를 짓고 중간다리 없이 신선한 채소를 사람들에게 싼 값에 파는 일을 하는 단체가 있는데, 그들이 하는 일은 빈민층의 사람들의 밥상에 건강한 채소를 공급하여 그들이 보다 건강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그것을 보면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경험에 따르면 밥상이 그 사람의 건강을 책임지고 일상을 움직이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돈이 없는대로 편의점에서 파는 저렴한 가격의 음식으로 끼니를 대충때우게 되는 생활이 반복된다. 밥을 먹는 것도 에너지를 만들기 위해 하는 일인데, 그런 음식에서는 건강함도, 든든함도, 얻을 수가 없다. 그래서 집에서 가끔 밥을 먹게 되면 따뜻한 밥그릇의 밥이 얼마나 뱃속을 따끈따끈하게 해주는 지, 왜 집 밥이 최고라고 하는지 알 수가 있었다. 나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그 안의 에너지들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지은 농사의 열매들을 하자사람들의 밥상에 올려놓을 때마다 뿌듯함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농사를 지으면서만약에 우리나라에 후쿠시마사고 같은 핵발전소사고가 일어났다면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이 되었을지 몰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있는 것이 없는 사람이 없고 나에게 닥친 상황을 받아드릴 수밖에 없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사능이나 무서운 기후변화앞에서는 돈이 아무리 많아도 나를 보호하고 살아나갈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부’들이 얼마나 존엄하고 존귀한일을 해내고 있는지 깨달았다. 무척이나 감사하고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도시농업실험’을 통해 알게 되는 이런것이 아닌가 싶다. 무엇인가를 믿는 다는 것이 쉽지 않은 세상이다. 믿어 볼수는 있지만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도시농업을 통해 생명을 키우는 것에 대한 존엄성을 느끼고, 스스로 키운 건강한 자연 밥상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지키는 것. 그것이 도시농업이 필요한 이유가 아닌가 싶다. 나에게 현미네홉 프로젝트는 도시속에서 내가 건강하게 자립하는 방법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한 실험이었다. 매체수업 매체를 선택할 때 고민을 했다. 영상팀으로갈까 디자인 팀으로갈까 공연팀으로갈까..하고 망설였다. 하지만 결국 공연팀을 선택해버렸다. 선택한 이유는 바투카다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과 나같은 경우에는 하자작업장학교의 10에 시작에 10시에 끝나는 일정을 소화해내기위해서는 맑은 정신만큼의 좋은 체력도 있어야한다고 생각했기에 공연팀에 들어가서 몸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공연팀에 들어가면 워크숍의 과제들이 부담스럽지 않을것같다는 생각도 있었다. 많은 과제를 집에도착에서 1시가 넘어서 해야한다면 그어떤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할것이라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워크숍을 선택하며 귓가에 쟁쟁하게 남아 있던 말도 떠올랐다. “좋아하는것과 잘하는것은 구별할줄알아야 돼.”라는 말. 저말은 내가 이해할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마음속에 박힌 말이기도한데, 내가 공연팀을 선택하며 이말을 떠올린것은 공연팀에서 ‘잘’버틸수 있을까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것과 잘하는것이 일치하는것 그게 매체일까..? 그렇다면 공연음악을 내 매체로 삼아도 될까? 작업장학교 공연팀 워크숍을 하면서 가끔씩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작업장학교 공연팀에서 우리는 삼바레게를 배우게 되었다. 처음 내 악기 선택은 까이샤였다. 까이샤를 선택한이유는 까이샤의 소리가 좋았고 그동안 기본 스틱 연습을 해왔던 시간이 있어서 스틱으로 치는 악기를 연주하고 싶었다. 또 까이샤같이 다른 악기들의 박자사이사이를 메꾸어준다는것이 좋았다. 워크숍때 까이샤의 느낌을 표현 했던 동녘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까이샤 소리는 쉬지않고 밀려오는 파도소리같다고. 까이샤연주의 포인트는 악센트였다. 스틱연습을 더해야했는데도 그전에 비해스틱연스을 별로 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철쭉제때는 까이샤가 아닌 땀보린을 연주했다. 철쭉제를 하기 전. 악기가 땀보린으로 바뀌었다. 까이샤로 철쭉제를 나가게 될줄 알아서 좀 놀랐었지만 무엇보다 바투카다 데뷔공연이 일주일 남았던 상황에서 악기가 바뀐것은 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일단 바뀐것- 다른 손악기들에게 잘 맞춰줘야 하니까하는 생각으로 맞췄다. 땀보린 박자. 손악기 브레이크, 손악기신호 알아보는것, 손악기 춤.. 땀보린을 잡는것도 어색했지만 표정 굳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열심히였다. 철쭉제가 끝난 뒤에도 땀보린으로 연습을 하다가 악기를 다시 정하는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 까이샤에게 돌아가려다가 땀보린에 머무르게 되었다. 땀보린은 소리가 날카롭다. 콕콕 찌른다. 강하고 정직한 소리라고 생각했다.. 뻔뻔하기까지 한 높고 큰 소리를 내는 이악기는 까다로웠다. 땀보린을 돌리는것이 어려웠다. 딱 달라붙는 느낌같은것이 없고 계속 빗나가고 안맞는느낌이었다. 언제쯤 잘 돌릴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워크숍 횟수가 늘어나면서 조금씩 나아지더니 종강 쇼하자를 준비하면서 오랜만에 땀보린을 잡았는데 어느순간 땀보린을 돌리는것이 어렵지 않고 초반에 땀보린을 잡으며 느껴왔던 손의 무리도 덜 느껴졌다. 손 과 땀보린이 제법 잘 맞아가나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공연팀 워크숍을 하면서 디자인 팀과 영상팀같은 시각으로 보이는 팀과 다르게 악기연주로 우리의 생각을 전달한다는것이 가능할까하는 질문이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공연을 할때 어떤것을 전달할것인가..하는 질문이 먼저였다. 이 두 질문은 작업장에서 공연을 할때마다 늘 해오던 질문이다. 공연팀이 어느자리에 가서 어떤 공연을 하는것은 공연팀전체의 마음가짐과 연결되어있다고 생각했다. 하자작업장학교에서 공부하는내용과 우리가 공연을 하러 가는 자리는 대부분 연결되어있었다. 그런곳에서 단순히 공연을 하기위해서- 작업장학교 공연팀만의 규칙처럼 ‘나를 위한 공연은 하고 공연을 위한 공연은 하러 연습을하고 공연을 하러 가는것이 아니었다. 함께 살기와 생태와 평화에 대한 행사에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공감하는것. 그러한 공감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도 작업장에서의 공부에 집중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누군가가 왜 공연 쪽의 길을 선택했어요? 라고 물어보면 여러이유가 있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단지 그게 재밌어서요 라고 대답했었다. 또 공연의 매력은 사람들의 마음을 미세하게나마 움직이게한다는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자작업장 공연팀에 들어와서는 내가 공연을 하는 관객부터가 바뀌었다. 생 판 서로 모르다가 공연을 통해 잠깐 만나는것도 매력이지만 작업장학교에서 갔던 행사장의 사람들은 잠깐 봤다 헤어지는 사람들이아니었다. 3.10 시위때, 내가, 작업장학교가 그곳에 갔던 이유는 피폭된 자연환경과 생태계를 위로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원자력발전소의 위험성을 알리고 탈핵에 한발더 다가서기위한 운동을 하러간것이다. 우리뿐만아니라 그곳에 모인 사람들도 뚜렷한 마음을 가지고 그곳에 모였을 것이다. 작업장학교에서 갔던 행사들은 아닌것들도 있었지만 뚜렷한 목적이 있는 행사들이었고 지구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모인자리였다. 그런 곳에서는 악기를 연주하지 않고 노래만 불러도 그대상이 자연스레 인간을 넘어 숲, 비, 새, 땅에게 부르는 위로와 감사의 노래가 되었다. 3.10에서 퍼포먼스를 하며 바투카다 행진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며 환경파괴에 대한 경각심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전달해주었다. 그날 수녀님들이 춤 추시는 걸 보면서 공연이라는것이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것만은 아니구나. 같이 주고 받아야 축제구나.. 라고 생각했다. 슬픔을 넘어서는 축제라는 말이 새삼 떠올랐다. 보았던 영상중에 일본의 핵반대 시위에서 사람들이 목이 터져라’‘원전 반대!’를 외치던 모습도 보았고 거리에서 사람들이 온갖 끼를 부리고 뭔가를 두드리고 악기를 두드리며 시위하는것을 보았다. 둘다 같은 것을 요구하는 핵반대 시위였음에도 분위기와 사람들의 표정부터가 달랐다. 후자는 노란 카드들과 반핵 문구만 없었다면 힘겨운 시위라기보다 일본 거리의 축제라 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마을 축제나 마을의 커뮤니티에 관심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많은 시위들이 남녀노소 노래하고 외치고 춤을 추는 마을축제같은 시위를 할수 없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시위를 할때는 서로잘 모르는 사람들이 한데 모이지만 거기서 시위의 분위기를 이끌수 있는것이 공연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또 얼마전 삼척에 희망버를 타고 원자력 발전소 유치 반대시위를 하러갔다가 밀양의 주민 할머니,할아버지들을 보았는데 그분들 심정을 생각하니 마음이 안좋고 어떻게든 힘이 되고 위로가 되어드리고 싶었는데 마침 그분들이 가시기전에 바투카다 공연을 했더니 마침내 그분들 얼굴에 웃음 꽃이 피는것을 볼수 있었다. 시위를 하시다보면 대부분 좋지 않은 이야기만 하시게 되시고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인 부분에서도 시위가 힘들고 고되실텐데 조금이나마 그분들을 위로하고 또 힘이 되도록 어르신들과 우리들이 신명나는- 마을 축제같은 분위기의 시위를 할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이야기를 덧붙여서. 작업장에 들어와서 내가 선택한 나의 시는 시간 時 였다. 그것을 선택한 이유는 하나- 작업장학교에서는 아침의 시간을 지키는 사람이고 싶었다. 나는 내가 작업장학교를 다니면서 무척 피곤해하고 힘들어 할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체력에 져서 아침마다 지각하고 소중한 시간을 날리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지치지 않기를 바랐었다. 작업장학교에 들어올때의 마음-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고 내가 나의 삶에 던져본 그 질문을 잊지 않고 작업장학교에서의 배움에서 실마리를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함께산다는 것에 대한 생각을 했고 공존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지속가능한 삶을 이루는 방식에 대해서는 더 공부하고 싶고 특히 실제로 존재하는 공동체들에 대한 사례에 대해 공부해 나가고 싶다. 사실 지금은 어떠한 질문을 가지고 어떤식으로 자공공을 배워나가야 할지 막막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아는 부분이 무척 적어서 그런 것일수도 있으니 일단 공부를 하다보면 알게 되는 부분들이 있지 않을까 싶다. 이번학기에서 했던 것중 가장 어려웠던 것은 ‘인권’에 관한 것이었는데, 특히 여성인권에 관한 것이 어려웠다. 여성의 인권 대해 공부하는 것이 낯설었고 이것에 대해 어떻게 접근을 해나가야 막막함을 느꼈다. 인권에 대해 공부하는 것은 몹시 어려울 것 같다. 19살 반이 되었다. 문제가 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너무 덤덤해서 문제다. 청소년기를 너무 다이나믹하게 보내서 인걸까. 혹은 진짜 ‘아무생각이 없는’ 건가. 몇칠동안 지진하게 생각해보았다. 이제까지의 삶을 되돌아보는 글도 써봤다. 나오는 대로 써보기도 하고 한 뭉텅이씩 지워내기도 했다. 어쨌든. 그런데 앞으로 내앞에 너무 많은 날들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니까 오히려 하얀 안개 속에 서있는 것 같다. 겁이 나지도 않고 신나지도 않는다. 그냥 지금을 살아가는 것 같다. 20대에도 나는 참을성이 많은 아이이니 굶어 죽지는 않을 것 같고, 외로우면 먼저 사람을 찾는 아이이니까 외로워서 죽지는 않을 것 같다. 오개월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라는 물음들을 가지고 학교에 들어왔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나 20대는 어떻게 살아야하지?’의 질문이기도 했다. 난 미래를 상상하기가 어렵다. 피하고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직 구체적인 라이프스타일이 정해지거나 직업을 선택해서 전문적으로 배워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허나 함께사는 삶에 대해 공부해보기로 마음먹은 만큼, 지금은 나비 문명에 대한 상상을 좀 더 해보고 싶다. 오개월동안 나는 어렵고도 생소한 단어들을 접하게 되었다. 함께살기, 지속가능한 삶, 마을공동체, 인권, 메솟, 난민, 농사, 여성운동 등등. 그동안 내가 알고 사용한다고 생각했던 단어들에는 너무도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었다. 단어들의 사이사이에도 내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들이 무척 얽혀져 있는 것같았다. 나는 앞으로 이 단어들에 대한 공부를 해나갈 것이다. 그러다 보면 단어들 사이에 있는 빈 공간들이 조금씩 메꾸어져 나가지 않을까. 또 그러다 보면 나비문명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상상이 이루어질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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