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기를 마치며


...............................................3학기, 디자인팀, 주님(김해주)



1. Intro

에세이를 쓰려고 동네도서관으로 향하던 길에, 시원한 허브티 한 잔 하고 가세요~ 라며 뱃살 빼는 마사지 홍보하던 아주머니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정수리에서 지글지글 소리가 나는 것 같은 날씨지만 어색하게 웃으며 거절하고 계속 걸어갔다. 아주머니를 막 지나치는 순간에, 손에는 생수병을 들고 있으면서 ‘종이컵을 안 써서요’ 라고 말한 것도 좀 웃기단 생각이 들었다. 아직까지 생각과 행동이 어긋나는 내 모습을 순간순간 발견한다.

어긋나는 건 내 안에서뿐만 아니라 상대와의 관계에서도 자주 생긴다. 이번 학기 첫 행사였던 310은, 작년 후쿠시마 사건 이후 1년이 지난 중요한 시기의 행사이기도 해서 그만큼 많은 사람의 참여가 필요했다. 나는 인맥이라곤 간디중학교를 통해 이어져있는 사람들밖에 없는지라 이젠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 중학교 카페, 엄마아빠가 살고 있는 마을의 카페, 간디학교 학부모 카페, 그 외 얼마 되지 않는 전화부의 이름을 뒤적거리며 나름대로 열심히 홍보했다. 결과는, 예상했지만, 썰렁했다. 함께해요~ 라며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하는 후배들에게 착한 척 해봤자 아무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것이다. 더군다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참여해야 하는 이유를 모를 것이다. 나라도 그렇겠다. 작년엔 그저, 무관심한 사람들 반응에 나 하나로는 주변에 조그만 영향도 줄 수 없다는 실망과 자괴감에 빠졌었다. 내가 더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는 걸까? 하고 고민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잘 홍보한들 결국 참여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가 찾아내는 이유와 의지다. 그걸 알고 나니 왠지 기운이 빠졌다. 아무리 봐도 그 정도로 사람들 마음을 움직이는 건 나는 못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막상 내가 그렇게 제 풀에 지쳐 꺾이면 그제서야 누군가가 좀 관심을 보인다. 이런 행사가 있었냐며, 혹은, 갑자기 니가 전에 얘기했던 것들에 관심이 생겼다며 슬쩍 손 내민다. 하지만 한 줄기 따사로운 빛으로 다가와야 할 것 같은 그 손이 난 오히려 짜증만 났다. 이미 함께하고자 하는 내 열정은 식었고, 결국 나는 그들 마음을 움직이는 동기가 될 수는 없었던 걸까 하는 생각도 들고, 사실 조금 원망스럽기도 해서 다시 마음을 내어 그 손을 잡고 싶지가 않았다.

타인과 어긋남을 이번 학기엔 특히 자주 느꼈다. 메솟 현장학습을 다녀오고 living together라는 키워드가 새로 머릿속에 떠올랐고, 디자인팀도 더 이상 개인 작업에만 열중하기보다는 팀 작업도 제대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걸 느끼고 있었는데 그 생각들과 반대로 잦아지는 어긋남에 오히려 내가 지쳐서 마음을 닫고 보냈던 것 같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조차도 개인 작업만으로 벅찰 때가 많아서 ‘함께’하는 것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이번 학기도 나는 내 앞가림 하는데 바쁘게 보낸 것이다.


2. 자공공 마을 _ 현미네홉+3만엔 비즈니스

작년, 비전력 공방 이야기를 해주셨던 후지무라 선생님을 다시 만나 3만엔 비즈니스 이야기를 들었다. 요즘은 타임스퀘어나 빵집이나 백화점이나 어디를 가도 물건의 값이 비싸다. 많은 물건들이 생산되지만 갈수록 물건의 값은 오르기만 한다. 터무니없는 가격표에 둘러싸여 있다 보면 알맞은 가치가 어느 정도일까를 생각하는데도 무뎌지게 된다. 3만엔 비즈니스는 소비자를 생각한다. 판매자의 이익을 챙기려 하는 비즈니스가 아니라, 소비자의 필요를 생각하는 비즈니스를 후지무라 선생님은 상생의 비즈니스라고 말하신다.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한 달에 3만엔 이상의 수입을 얻을 수는 없다. 3만엔, 한국 돈으로 45만 원가량의 돈으로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후지무라 선생님은 그럼 3만엔 비즈니스를 여러 개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답하신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수입으로 자신의 모든 소비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는 양을 줄이는 것에 있다. 소비를 줄이는 방법은 자급률을 높이는 것이다. 3만엔 비즈니스는 스트레스 받지 않고 여유롭게 일해야 하기 때문에 일주일에 이틀만 일한다. 그리고 5일의 휴일동안은 농사를 하고, 집을 짓고, 에너지를 만든다. 힘없는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성이 있는 소비자가 되는 것이다.

이번 학기부터 농사수업인 현미네홉을 시작했다. 처음엔 왠지 도시와 농사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농사를 생각하면 시골이 생각나고, 그래서 친환경적인 삶과 농사를 연결 지어서 생각했기 때문에 도시와 농사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었다. 하긴 그렇다고 해서 내가 시골에서 했던 농사를 좋게 기억하고 있지는 않다. 중학교 다닐 때도 농사시간이 있긴 했었는데, 일주일에 한 번, 땀도 나고 짜증도 나는 두어 시간이었다는 것 밖에 기억이 잘 안 난다. 그 때는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도 왜 농사를 지어야하는지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 즐겁지 않았을 수도 있다. 작업장 학교에 들어와서 1년 동안 핵에 대해 공부했고, 지금도 여전히 공부하고 있다. 현미네홉은, 핵을 넘어선 문명의 삶을 살기 위한 실험이자 공부이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나비우화를 듣고 나비의 삶을 상상하고 공부하며 생각한 중요한 키워드는 바로 ‘자급률’. 3만엔 비즈니스의 키워드와도 같다. 아마 3만엔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이 갖는 5일의 휴일동안, 자급과 관련되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농사-먹거리와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농사는 삶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 낑겨 사는 지금, 그들은 농사를 ‘언젠가의 귀농’과 함께 먼 미래의 일로 만들어놓는다. 어쩌면 농사는 시골에서 지어야 한다는 생각이 오히려 그들을 농사가 있는 삶에서 멀어지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시골로 내려갈 것만을 생각한다면, 당장 우리들이 있는 도시는 아무도 가꾸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히옥스가 말했던 것처럼 예술처럼 하기에는 우리의 생명과 너무나 많은 연결이 되어있는 것이 농사이고, 첫 수업 때 본 겐지의 봄에서도 그 전까지는 농사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무거움이 보였기 때문에, 가끔은 내가 너무 쉽게 농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깻잎 하나하나 다 뜯어서 1200장을 한 박스로 2500원에 파는 사람들에게 농사는 무엇일까. 여름철 장맛비와 폭풍우에 1년 농사가 허망하게 꺾여버린 사람들에게는? 겐지는 소중히 기른 작물을 결국 먹음으로서 그 생명을 빼앗는 것이 아니냐며 먹는 것조차도 괴로워했다.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나물 조금 먹는 겐지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 풍성하게 재배하고 나누어 먹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고 농사를 무겁게 받아들이기엔 그 생명력과 농사를 하면서 느끼는 즐거움들이 크지만, 다시 또 농사가 마을의 자급과 풍요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최소한의 검소한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인지를 생각하다 보면 다시 또 혼란스러워진다. 탈핵과 연관해 갈수록 배움의 폭은 넓어지고 있지만 내가 스스로 공부하는 양은 여전히 적다. 이제는 머리로 배우는 공부뿐 아니라 직접 내 삶을 만들어나갈 것들을 체험하고, 실험하고 있는 만큼 더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농사라는 행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생각할 것인지는 앞으로도 계속 고민해야 할 것 같다.


3. living together _ 따비에 하자

올해 초에 메솟 청소년들을 만나고 왔다. 그들을 만나고 나서 서로 다른 곳에 있어도 같은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면서 living together 라는 키워드도 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함께 살기는 그저 나와 내가 속한 공동체뿐 아니라 다른 지역이지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살아가게 될 사람들도 다 포함하는 이야기구나 하는 것을 느꼈었다. 이번 난민포럼 때 이야기를 들어보니, 당장 메솟의 청소년들에게 중요한 것은 교육문제란다. 대부분의 메솟 학교들은 그곳의 NGO와 연결되어 있다. NGO가 많은 만큼 학교의 수도 많지만 그 안의 상황은 실제로는 굉장히 열악하고 제대로 된 수준의 교육도 해줄 수 없는 곳이 많다고 한다. 메솟의 청소년들은 당장의 돈벌이가 되는 기술을 배우며 하나같이 언젠가 메솟지역을 떠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현재 하자에서 준비하고 있는 따비에 하자는, 그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미래를 꿈꾸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며, 그 준비 과정을 청소년그룹과 함께 한다고 했다. 그들이 정말 필요로 하고, 원하는 배움이 있는 장소는 어떤 모습일까. 자신이 뿌리내릴 수 있고, 친구를 만나 함께 일하는 지역과 그 지역의 지속가능함은 자공공 마을과 겹쳐보였고, 메솟의 청소년과 난 다른 지역과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지만, 아마 배움의 내용이 크게 다르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장학습을 다녀온 뒤 막연하기만 했던 형상의 공통의 미래가 조금 윤곽이 잡히는 것 같았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공간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어떤 공간을 필요로 하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를 생각한 뒤에야 그들이 바라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고, 함께 꿈꾸고 바라는 것들도 생겨날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들고 나니, 다시금 현장학습이 생각났다. 너무 아무것도 모르고 다녀온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저 그들의 막연한, 희망이 담긴 꿈을 듣고서 맞장구쳐주고 돌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같은 세대로서 분명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장학습을 가기 전, 이선재 선생님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3000만 원의 비행기 값을 내고 가는 만큼의 값을 해야 한다던. 우리는 과연 서로에게 3000만 원 만큼의 만남을 가졌던 걸까?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돈으로 어떻게 따지겠냐마는, 그들의 상황은 정말로 우리보다 3000만 원이 더 필요한 건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게 내가 그들에게 느끼는 거리감의 이유이기도 하다. 따비에 하자가 그들에게 필요한 공간임은 틀림없고, 그것은 현재 나의 배움과 미래와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앞으로도 내가 배우는 것들과 따비에 하자에 대한 생각을 계속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들을 찾아가고, 그들과 소통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더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4. Design _ Earth Hour+Workshop

이번학기 첫 행사였던 310 탈핵을 위한 공동행동 이후, Earth Hour, 지구를 위한 한시간의 전체 진행을 맡게 되었다. 처음에 히옥스가 전체진행 하지 않겠니, 하셨을 때 가슴에 낙석이 우르르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전체 진행이라는 것은 행사 전체를 감독하고 끌어나가는 역할이라는 것인데, 그거 너무나도 부담스럽다! 예전부터 이런 역할은 일부러 피해왔다. 힘들고 할 일 많고 책임져야 할 거 많고 그리고 무엇보다 남들에게 미안해지는 위치라는 것이 나는 정말 싫었다. 

다른 누군가가 진행을 하면 나는 조금 여유로운 마음으로 회의에 참여할 수 있고 뭔가 빠진 부분이나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것들도 눈에 잘 들어온다. 그러나 막상 그 진행자가 내가 되면 고작 두개 눈에 온갖 할 일이 다 보이는 거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 할 일이 보여 바쁘고 급한 마음이었다. 게다가 마무리가 되는 일도 없이, 모든 일이 거의 동시에 여기저기서 펑펑 일어난다. 나는 밥 먹을 때 반찬들을 한 종류씩 천천히 해치우는데, 마찬가지로 일도 하나가 완료되어야 안정되고 다음일이 손에 잡힌다. 그런데 마무리되지 않은 일이 너무 많아지자 더욱 초조해져서 어느 순간부터 일을 끝마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일을 끝내고 결과를 내야한다는 마음이 앞서다 보면, 중간의 과정을 누락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때로는 처음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후회스러운 결과를 보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이런 일이나 역할에 대한 제안에 있어서 한 번도 흔쾌히! 라는 기분이 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보다는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그리고 결과가 나쁘면 자책하게 되고, 결과가 좋으면 그제서야 기분이 나아진다. 디자인 프로세스가 중요하다고 그렇게 별표를 쳐놓고도 앗 또 과정을 하나 빼먹었구나! 깨달을 때면 늘 결과에 연연하는 내가 있다. 

디자인 프로세스는 Brain storming → research  →  concept(무엇을)  →  idea(어떻게)  →  critic  →  result 라는 과정이 있지만 꼭 그 순서를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작업의 의도와 의미를 생각하고, 그에 맞는 아이디어와 근거들을 생각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디자인 프로세스를 따르게 된다. 그래서 좋은 디자인에는 그만큼의 좋은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대개 사람들이 눈여겨보게 되는 것은 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나온 결과물일거라는 생각을 나는 갖고 있었다. 함께 행사를 준비하는 죽돌들끼리 마음이 잘 맞지 않았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지구를 위한 한 시간을 준비하면서 3학기 디자인팀끼리 자주 모이게 되었었다. 우리는 이때까지 개인 작업에 익숙했고, 공동 작업에 대한 감각이 부족해서 얼마만큼 같이 이야기하고 얼마만큼 일을 분담할 것인지, 공동 작업을 해야 하는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등의 판단을 잘 내리지 못했다. 할 일만 주르륵 늘어놓은 뒤 산발적으로 튀어나오는 아이디어와 틈만 나면 튀어나오는 잡담을 주워 담다보면 회의는 끝나있었다. 1년을 같이 해온 3학기끼리의 회의도 힘들었던 것은, 누군가 마음을 내어도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잘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3학기이기 때문에 마음이 맞을 줄 알았지만 우리가 하고자 하는 공동 작업에 대한 생각을 우리 스스로도 깊게 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3학기의 디자인팀 죽돌들이 모인 것도, 막 입학한 신입생들 보다 행사의 의미와 공동 작업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더 잘 알고 있는(있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3학기 죽돌들 안에서도 제대로 소통이 되지 않았던 것은, 공동 작업을 하기 이전에 각자가 행사에 참여하고 준비하는 자세와 의지가 다 달랐기 때문이었다. 신입생들에게 지구를 위한 한 시간은 입학을 하고 죽돌들끼리만 준비하는 첫 행사였다. 탈핵이라는 단어도 낯설었을지 모를 신입생들에게는 행사 자체의 진행보다도 마음을 내어 행사에 참여할 수 있는 동기가 생길 수 있게 같이 대화하고 서로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 필요했었지만 진행을 맡았던 나는 그 시간을 충분히 챙기지 못했다. 지구를 위한 한 시간의 현수막의 재료는 전부 누군가의 집에서 가져오거나, 어딘가에서 주워온 것을 사용했다. 제작은 팀 구별 않고 모두 같이 했다. 행사를 끝내고 난 뒤의 리뷰시간에, 현수막을 제작 할 때 자신의 역할이 뚜렷이 있어서 좋았다고 하는 죽돌들이 많았다. 그 말을 들으니 같이 준비하는 행사가 주어진 일을 하면 되는 행사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다 내가 잘못했기 때문이라는 자책과 함께 자신의 역할을 잘 찾지 못했던 죽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 미안함은 처음에 내가 우려했던 그 미안함이다.

이때까지 해온 행사들을 생각해보면 나는 별로 적극적인 입장이 아니었다. 가끔 의견이나 아이디어가 있다면 말하고, 정해지면 따르고, 맡은 일을 했다. 단순히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라, 한 발짝 떨어져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다. 처음 전체진행을 맡게 되면서 내가 느꼈던 부담감이나 책임감은 비단 전체진행이라는 역할 뿐만 아니라 모두가 갖고 있어야 할 마음일 것이다. 행사는 진행자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같이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진행자 한 명을 제외한 모두 속에 포함되어있을 때는 내가 몸을 사리고 있어도 일은 진행된다. 내가 그 한 명이 되었을 때는 나는 나설 수밖에 없다. 사실 부담스럽네 남에게 미안하네 이런 건 핑계였고, 내가 판에 뛰어들어야만 하는 것이 무서웠다. 판에 발을 들여 놓는 것이 무조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처럼 다가왔던 것 같다. 지구를 위한 한 시간을 준비하면서는, 계속 내가 맡은 역할의 책임감이 동기이자 동력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랬기 때문에 더욱 일을 완료시켜야만 한다는 생각이 컸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했지만, 왜 그 일을 하는지를 고민하진 않았다. 일이 나에게 의미가 있다면 책임감은 자연스럽게 따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일을 맡았다는 책임감이 그 일을 해야 하는 이유와 의미까지 될 수는 없다.

이번 학기 디자인워크숍에서는 화장실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공사 후 모습과 분위기가 차갑고 삭막해진 것 같아 더 좋게 바꾸고자 시작했다. 조명을 어떤 걸로 바꿀지 조사하고, 화장실 남녀 싸인과 입구에 쳐질 발의 도안을 만드는 작업을 하며 어느 순간부터 그저 시간 안에 정해진 작업을 하기에 바빠졌다. 점점 화장실을 더 좋게 만들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고, 숙제를 해가야 하는 마음으로 하게 되었고, 그럴수록 작업은 힘들고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되어갔다. 매주 화요일 쯤 되면 어깨를 짓누르는 과제의 압박의 시작은 어디였을까 곰곰이 되짚어보니, 아마 ‘잘해야 한다’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3학기로서 잘 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과 좋은 아이디어를 내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 갈 수 있다는 생각 등이 ‘잘’하지 못하는 나를 점점 힘들게 하고 있었다. 잘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분명 작업에 도움을 준다. 그러나 그 마음이 화장실을 좋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에게 기대하는 만큼을 해내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시작되어서 나는 어느 샌가 일을 맡아서 하는 ‘을’이 되어있었다. 갑을관계에서 디자이너는 의뢰받은 일을 할 뿐이다. 구슬땀을 흘리는 직업보다 식은땀을 흘리는 직업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내 등은 한 학기 내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즐겁게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지만 그 즐거움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건지 잘 몰랐었다. 작업을 하면서 늘 재미있을 수는 없겠지만, 내가 하는 일의 쓰일 곳을 생각했을 때 힘내서 더 할 수 있는 게 즐거운 작업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디자인‘팀’으로서 내가 해야 할 일들에 소홀해져 있었던 것 같다. 이제는 우리가 팀으로서 어떤 작업들을 해나갈 수 있는지 생각해야한다. 수요일 날 워크샵을 듣는 디자인팀 죽돌이 아니라 작업장학교 디자인팀 죽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 시작은 일단 104호에 블랙홀이라도 있는지 가져다 놓기가 무섭게 사라지는 가위를 비롯한 여러 물품들을 정리하는 것으로 해야겠다.


5. Player in field

이번 학기를 보내면서 많이 든 생각은 뭐든지 공부를 안 하면 할 수 있는 게 없구나, 였다. 아는 게 없으니 생각도 잘 되지 않고, 디자인 작업도 할 수가 없었다. 밀도 안 넣고 국수가락을 뽑을 수가 없는 것처럼 머리에 든 게 있어야 그 안에서 뭘 뽑더라도 뽑아낼 수 있는 것이다.

작업에 있어서나 배움에 있어서나 멈칫하는 마음들을 깨버리고 뛰어드는 과감함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공부도, 판에 뛰어들고자 하는 의지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1년 반이 지났지만 아직도 자신의 틀도 못 깨고 나오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늘 느끼던 불안함은 이것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안고 온 것들을 돌아보며 가끔은 남과의 공통점에 안도하고 다른 점에 불안해했다. 이렇게 견주어보기만 하다가는 끝도 없겠다, 이젠 내가 직접 필드로 들어가 경기에 참여해야한다고, 그렇게 하겠다고 이야기했다. 선수들과 함께 하려면 나도 선수가 되어 같이 뛰어야겠지. 작업장학교에서는 많은 공동 작업을 한다. ‘공동’의 작업은, 무엇을 위한 공동 작업인지, 왜 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이유가 있지 않으면 어느새 멀거니 바라볼 수밖에 없어진다. 일을 맡은 책임감이 아니라 일을 하는 이유로써 움직일 때, 마음을 내어 손 내미는 사람들의 손을 잡을 수 있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들과 같이 구슬땀을 흘리고 싶다. 경기는 혼자서는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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