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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의 Book...ing
[3월 23일] 실의에 빠진 사업가, 그린피스로 거듭나다 - 데이비드 맥타가트

생태학자 아르네 나에스

올 해 초, 1월 13일에 노르웨이의 등반가이자 철학자이며 환경운동가인 아르네 나에스가 서거했다. 향년 97세. 그는 '심층생태학(deep ecology)'이란 개념을 처음 제기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심층생태학'을 김우창 같은 사람은 '깊은 생태학'으로 번역한다. '심층'과 '깊은'은 엇비슷한 말의 정경을 가리키면서도 그 뉘앙스는 사뭇 다르다.

노르웨이 오슬로의 금융가와 사업가 부모 밑에서 태어난 나에스는 오슬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27살 나이로 최연소 교수가 됐다. 그는 1954년에 파키스탄의 7708m 티리크 미르산을 처음으로 등정하기도 하였다. 이 등반대의 리더였다. 이 등정이 어떤 '정복욕'이나 '루트 개척'에 있지 않음은 두말 할 것도 없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할링스카르베트 산속에 작은 집을 짓고 70여 년을 살았다. 높은 산을 오르는 것도 그런 맥락일 뿐이다. 그 산속 오두막에서 나에스는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을 더없이 귀중한 자연의 풍요로운 선물로 여기며 살았다. 등산화는 50여 년이 넘도록 신었다. 교수라는 사회적 신분이었지만 말이다. 그의 '최소한의 삶'과 경건한 태도는 5,60 서구 지식인들이 2차 대전의 폐허와 극단적인 산업화에 따른 비인간적 상황을 회복하기 위해 '자연과의 합일'을 강조한 경향을 보여준다. 이 목적을 위해 당시 서구 지식인들은 인도의 명상이나 불교의 선 철학에 몰입하기도 했다.

"자아가 확장되고 깊어져서 내가 편안하게 자연을 돌보는 행위가 우리 자신의 보호로 인식될 때, 모든 우려는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우리가 호흡할 때 어떤 도덕도 필요하지 않듯이. 만약 넓은 의미에서 당신의 '자아'가 다른 존재를 포용한다면, 당신은 우려를 나타내기 위해 어떤 도덕적 훈계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어떤 도덕적 압력도 느낄 필요 없이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노르웨이 할링스카르베트 산속의 아르네 나에스

이 짧은 인용에서 잠깐 느낄 수 있듯이 아르네 나에스는 정신적 수련과 지혜를 역설하였다. 그의 사상에 대해, 일종의 '마음의 생태학'이랄 수 있는 나에스의 문명 성찰에 대해 머레이 북친은 오늘의 생태 위기가 '사회구조의 산물'이며 따라서 사회구조의 변혁이 중요하다고 비판하였다.

김우창 선생도 '경향신문' 칼럼을 통하여, 나에스의 깊은 생태학 또는 생태적 자아실현의 ‘생태지혜학 (echosophy)’으로 오늘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고 언급한다. 그러면서도 '그의 철학이 오늘의 문제를 밝히는 큰 거울이 되는 것임은 분명'하다고 썼다. 왜냐하면 그의 우리 사회가 "더 넓은 삶의 지혜의 견제와 균형을 멀리 떠난 정치와 경제 계획의 허영에 사로잡혀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나예스는 1970년 교수 직을 마친 후에는 좀더 본격적으로 환경 생태 운동에 뛰어들었다. '심층(깊은) 생태학에 대한 논문을 마친 후 나에스는 마르달 폭포의 댐 건설에 항의하여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폭포 근처의 바위에 몸을 동여매고 투쟁했다. 1988년에는 그린피스 노르웨이 지부 초대 책임자를 맡았으며 노르웨이 녹색당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실의에 빠진 사업가에서 그린피스 운동가로 거듭난 데이비드 맥타가트

이 블로그의 취지에 부합되도록 좀더 오늘의 이야기와 직접적으로 연관하도록 살피면, 오늘 3월 23일은, 그린피스 운동에 커다란 기여를 한 데이비드 맥타가트가 2001년에 사망한 날이다.

그린피스 상징 로고

외 신 뉴스를 통하여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린피스의 ‘게릴라식 비폭력 행동’은 20세기 후반의 뜨거운 몸부림이었다. 그 시작은 1969년 10월 암치카 섬에서 미국이 지하핵실험을 실시한 날이 된다. 지진으로 인한 해일 피해를 겪었던 지역 주민들이 미국과 캐나다간의 국경을 막고 ‘해일을 일으키지 말라’는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시위를 무시하고 1971년에 2차 핵실험 계획을 발표하게 되는데 이것을 막기 위해 5명의 평화운동가들이 ‘해일을 일으키지 말라 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로써 그린피스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971년에 저항 시위를 위한 항해를 준비하는 중 창립 멤버의 한 사람이 '녹색 지구와 반핵 평화'의 뜻으로 그린피스라는 용어를 쓰게 되었다. 활동용 소형 어선 ‘필리스 코맥’호의 이름을 그린피스호로 바꾸는 과정에서 그린피스가 굳어졌다. 미국 정부는 1972년 암치카 섬에서 핵실험을 포기한다는 발표를 하였다.

그리고 1972년. 그린피스의 이름을 전세계에 널리 알리는 사건이 벌어진다. 남태평양의 작은 섬,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뮈뤼로아 환초에서 프랑스 정부가 핵 실험을 갖기로 하였는데 이를 그린피스가 저지한 것이다. 그린피스 활동가들이 핵 실험 반대를 위해 뮈뤼로아 환초까지 항해를 도와줄 사람을 찾는다는 광고를 뉴질랜드의 은퇴한 사업가가 본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데이비드 맥타가트이다.

작은 보트에 몸을 실은 맥타가트와 동료들이 핵 실험에 반대하는 해상 투쟁을 벌이고 있다

'은퇴'한 사람이지만, 그는 이제 막 마흔을 넘긴 사람이었다. 1932년에 캐나다에서 태어난 맥타가트는 샌프란시스코 동부의 스키 휴양지 베어밸리 개발 사업 도중에 큰 사고를 겪게 되어 전 재산을 팔아버리고 뉴질랜드로 이주한 상태였다. 그는 오로지 바다에 의지하고 바다를 사랑하고 바다에 모든 것을 맡기며 살고자 하였다. 그런데 멀지 않은 곳에서 핵 실험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그리고 그것을 저지하기 위한 활동에 도움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의 요트 ‘베가’를 제공하는가 하면 함께 참여할 선원까지 모집했다.

1972년 6월, 맥타가트와 동료들은, 이날 이후로 우리가 수많은 그린피스 투쟁에서 자주 본 대로, 작은 요트 '베가'에 타고 뮈뤼로아 환초 실험장소를 지키는 프랑스 해군 소해정과 순양함, 헬기에 맞섰다. 탄탄한 방어벽을 향해 돌진하던 맥타가트의 요트 베가는 소해정에 부딪혀 부숴졌다. 이듬해 8월, 맥타가트와 동료 선원 그리고 그린피스 대원들이 또다시 저항하였다가 프랑스 수병들에게 두들겨 맞았다.

일본의 거대한 포경선 사이에서 그린피스의 작은 요트가 멸종 위기에 처한 고래를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

이것을 은폐하려다 발각이 나자 1975년에 프랑스 정부는 일단 대기권 핵실험을 포기했다. 하지만 1985년에 다시 핵실험 재개를 발표하자 그린피스는 ‘평화의 선단’을 조직해 본격적인 해상시위를 벌였다. 이 격전의 세월 끝에 프랑스는 1995년 9월부터 1996년 5월까지의 실험을 끝으로 남태평양에서의 핵실험을 전면중단했다.

맥타가트는 그린피스의 '세계화'를 추지하였다. 북미, 유럽, 대양주 등으로 각 지부를 만들어나갔다. 1979년 10월 14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위치한 그린피스국제본부가 공식출범하였고 이 자리에서 맥타가트가 의장 겸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런던 히드로 공항 인근의 부지 일부를 '알 박기'로 매입하여 활주로 확장 공사 반대를 하고 있는 그린피스(사진 afp 멀티비츠)

현재 그린피스는 지구 곳곳에서 급박하게 터지고 있는 환경 재난 현장에 즉시 투입할 수 있는 ‘레인보우2’ 등의 선박 4척을 보유하고 있다. 게릴라식 저항 시위에만 머물지 않고 일정한 기반과 영향력을 지닌 다양한 국제기구 및 개별 국가의 환경단체들과 지속적이고 다채로운 공동 연대 운동을 펼치고 있다.

기후변화, 원시림 보호, 해양 보호, 고래잡이 방지, 유전자조작 반대, 핵 실험 및 확산, 독성물질 위협, 미사일 및 전쟁 반대 등이 그린피스의 활동 목표들이다. 이를 위하여 그린피스는 유엔환경계획,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생물 종의 국제 교역에 관한 국제협약, 자연과 천연자원 보호를 위한 국제 연맹, 유독물질의 투기와 처리에 관한 오슬로 및 파리 협약, 남극조약 체제를 위한 회의 등에 참여하고 있다. '알박기 투쟁'도 벌였다. 런던 히드로 공항의 제3 활주로 건설을 막기 위해 활주로 건설 예정 부지의 땅 일부를 매입하여 이를 '상징 투쟁'의 공간으로 쓴 것이다.

2008년 12월, 그린피스와 환경운동연합이 참치장례식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 환경운동연합)

우리의 생태환경 운동도 그린피스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1993년 동해에서 벌어진 러시아의 핵폐기물 투기 저항 운동이 그 시발이며 1994년에 그린피스 환경조사팀이 우리나라의 자연생태의 현황과 그 보호 상태를 보기 위해 그린피스호를 파견한 일도 있다. 이밖에도 1997년 대만 핵폐기물의 북한 반입저지, 1999년 일본의 플루토늄 수송 반대 시위, 2001년 러시아의 핵폐기물 수입저지정책 저지 운동 등이 지속적으로 펼쳐졌다.

다대포 앞바다에 쓴 그린피스 구호

2008 년 12월에는, 환경운동연합과 함께 그린피스는 부산에서 '참치 장례식'을 치르기도 했다. 당시 열린 제5차 중서부태평양수산위원회(WCPFC) 회의에 '참치 보호 의제' 제출되었는데, 이것이 상당히 미흡하다고 판단한 환경운동연합과 그린피스가 지난 12월 12일 부산 다대포 바닷가에서 '참치장례식' 퍼포먼스를 벌이면서 멸종 위기에 처한 참치 보호 캠페인을 벌인 것이다.

이런 점들을 두루 감안할 때, 그린피스의 '그린' 즉 '녹색'이 단순한 자연 보호나 생태 운동 차원이 아니라(물론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은 말할 것도 없고) 좀더 적극적인 의미의 평화 운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1970년대의 서구에서 '그린'은(예컨대 독일이나 노르웨이의 '녹색당'은) 환경 보호 보다는 반전 반핵 평화 운동의 의미가 더 컸다. 그린피스의 '그린' 역시 그러하다. '신성장 녹색산업'이라는 기묘한 조어의 시대에는 더욱 이 '그린'의 정치적, 문화적 의미가 각별하다.

평범한 사업가였다가 실의에 빠진 바다 사나이였다가, 남은 생애를 그린피스 운동에 바친 데이비드 맥타가트가 2001의 오늘 3월 23일에 사망했다. 그래서 한번 두루두루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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