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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베티카>는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영화 감독인 게리 허스트윗(Gary Hustwit)의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로 타이포그래피, 그래픽 디자인은 물론 시각 문화의 글로벌한 양상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그 모든 서체 중에서도 가장 보편적인 헬베티카 체의 삶과 신화를 조명한다. 2007년 헬베티카 탄생 50주년을 맞아 제작된 작품으로, 미국, 영국, 네덜란드, 독일, 스위스, 프랑스, 벨기에 등 각국의 문화와 환경 속에 헬베티카가 어떻게 자리잡고 있는지를 탐색한다. <헬베티카>는 현재 후반 작업중에 있으며 2007년 초 여러 영화제를 통해 첫 선을 보일 예정이다.
아래 인터뷰는 디자인 비평가이자 저술가인 스티븐 헬러가 <헬베티카>의 감독과 나눈 인터뷰 전문으로, 미국 그래픽 디자인 협회(AIGA) 홈페이지에 실렸다.
헬베티카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드셨지요? 이러한 주제를 선택하게 된 이유라면요?
80년대 후반 출판과 책 표지 디자인, 인테리어 일을 했습니다. 타이포그래피에 매혹된 계기였지요. 90년대 중반에는 심지어는 몇 개의 서체를 디자인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아주 형편없었지만요. 그러다 한 5년쯤 전에 독립영화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몇 개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는데요, 대체로 음악관련 영화들이었습니다. 밴드 Wilco에 관한 <I Am Trying To Break Your Heart>같은 작품들이었죠.
프로듀서 일을 하면서 점차 영화를 만드는 법을 배우게 되었고, 그때까지도 여전히 저는 서체에 매혹을 느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타이포그래피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결심을 하게 된 거죠.
최초의 아이디어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서체 디자인 영화였지만, 이는 거의 모든 종류의 타이포그래피를 공정하게 다루어야 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게다가 연구와 촬영에 적어도 5년 이상 걸릴 만한 일이었지요. 대신 하나의 서체에 포커스를 맞추면 조금 더 쉽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헬베티카의 50년 역사는 서체 디자인은 물론 디자인계 전반에 드라마틱한 변화가 일어난 시기를 거울처럼 반영합니다. 헬베티카는 이와 같은 이슈를 다루기에 더 없이 좋은 구조를 갖춘 서체였던 셈이지요.
헬베티카는 아마도 20세기를 대표하는 서체라 할 것입니다. 중립적인(neutral) 서체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든 과정이 궁금합니다. 사실 어떤 사람들에겐 서체에 관해 이야기란 마치 물감이 마르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나 다름없을 텐데요.
영화의 시작부터, 저는 이 영화가 시각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작품이 되길 기대했습니다. 음악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서인지, 제게는 이 작품이 하나의 서체에 관한 음악 영화처럼 느껴졌어요. 하지만 서체에 관한 음악영화가 정확히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지는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대도시, 그러니까 사람들이 매일매일 교류하는 공간 속에서 활발히 기능하는 헬베티카와 마주치게 됩니다. 시각적으로 <헬베티카>는 도시 공간, 그리고 그 안에 거주하는 언어에 관한 영화입니다. 매일 마주치는 수천 개의 단어들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그려내는 것이지요.
영화 속에 등장하는 대화는 창조의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테크놀로지가 그래픽 디자인에 미치는 영향,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대결 등등 말이죠. 제 생각에 이는 누구에게나, 특히 디자이너들을 사로잡을 만한 주제입니다.
디자이너들과의 인터뷰 역시 작은 초상화처럼 기능하죠. 영화에서 만난 대부분의 디자이너들, 그러니까 빔 크라우벨(Wim Crouwel), 마시모 비녤리, 매튜 카터(Matthew Carter) 같은 사람들은 그야말로 놀라운 경력을 쌓아온 분들입니다. 이들 각각 한 편의 다큐멘터리감인 분들이죠. 그러한 내용을 영화 한편에 다 담기란 불가능한 만큼, 디자이너 개인에 관한 이야기가 헬베티카의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도록 노력했죠.
대부분의 다큐멘터리 감독들은 어떠한 전제에서 출발해 이를 뒷받침할 관련 진술자나 인터뷰 대상자를 찾곤 합니다.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헬베티카에 관해 조사를 진행했는지요? 또한 그 과정에서 새로이 발견한 사실들이 있습니까?
당초 영화가 시작된 전제는 단 하나의 질문으로 요약 가능합니다. 도대체 왜? 어째서 그리 유명하지도 않은 스위스의 디자이너가 50년 전에 디자인한 서체 하나가 이렇게 널리 일상 속에 스며들게 되었을까? 어느 도시에서나 문밖을 나서면 헬베티카를 발견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헬베티카에 다른 어떤 서체보다 우수하거나 더 적합한 특징이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탄생 당시 효율적인 마케팅이 뒷받침되었나?
헬베티카가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 이유에 관해 수많은 의견을 들었습니다. 헬베티카가 소개되던 당시 활동했던 디자이너나, 또 60년대 초의 마이크 파커처럼 헬베티카의 초창기부터 이 서체를 지지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헬베티카와 함께 성장해온 디자이너들도 있죠. 가령 네덜란드의 디자인 팀 ‘Experimental Jetset’에서는 헬베티카를 거의 종교적으로 사용하는데, 미국의 디자이너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 과정에서 무엇을 배우게 되었는가 하면… 그 대답은 영화를 보시면 알게 되실 듯 합니다.
라스 뮐러(Las Muller)는 헬베티카에 바치는 송가와도 같은 책을 한 권 내놓았습니다. 당신의 영화 역시 그러한 송가인가요? 사료적인 가치가 있는 영상 자료나 문헌들을 발견했나요?
설명하기 조금 까다로운데요. 제 영화는 그 두 가지 경우 중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습니다. <헬베티카>는 도시 공간에 관한 한 편의 예술 영화입니다. 놀라운 디자이너들의 프로필이 연속해서 나오죠. 또한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지나쳐버리는 타이포그래피라는 예술에 관한 소개이기도 합니다.
제 생각에 이 영화의 시각은 라스의 책보다는 넓은 듯 해요. 그의 책은 지난 50년간 사용된 헬베티카의 예를 담고 있는 카탈로그에 가까우니까요. 저는 헬베티카의 성공에 기저한 어떤 이유들을 보다 깊이 탐색하고 싶었고, 영화속에 등장하는 디자이너들이 서체를 이용하는 방식 뒤에 숨어있는 전략과 미학에 집중했습니다.
보다 대중적인 관심사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들 조차 제작비 마련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헬베티카>처럼 어필 대상이 제한적인 소재를 다루는 영화를 만들면서 겪었던 어려운 점이라면요? 또 이 작업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제작비는 저 스스로 충당했습니다. 꼭 주택 구입 할부금을 선납하는 기분이었는데요. 하지만 몇 년 동안 배운 교훈이 있다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마찬가지로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분명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이 분명 있다는 신념이 있었어요.
영화를 발표하고 웹사이트에 이를 올리고 난 후 마주친 반응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세계 곳곳에서 수백만의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반응을 보여왔어요. 하지만 그 동안 그래픽 디자인을 다루는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어 개봉된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단 한편도 없어요.
시사회 후 반응은 어땠나요?
지난 8월 보스턴의 TypeCon에서 약 3분 정도의 예고편을 상영했는데요, 반응은 대단했어요. 하지만 그럴 만한 관객층이었다고 할까요? TypeCon을 찾는 관객이라면 아무래도 우리에게는 ‘너무 친절한’ 사람들이죠.
문제는 전문 디자이너들에게도 어필할 만큼 편집 상에 균형을 찾는 일입니다. 게다가 아직 일반 대중에게는 시사하지 못한 단계이기도 하고요. 내년 2월쯤 영화의 완성본을 여러 영화제에서 공개할 예정입니다. 과연 좋은 반응을 얻을 지 두고 봐야겠죠.
수많은 동시대 디자이너들을 인터뷰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듣게 된 예상치 못한 이야기들이 있었나요?
가장 놀랐던 점은 영화에 등장한 디자이너들 모두가 우쭐하는 자의식이 없다는 사실인데요. 물론 그들 모두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이른바 행운아들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요. 이 사람들은 제가 헬베티카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즐거워했어요.
또 하나 제가 깨닫지못했던, 혹은 예상치 못했던 사실이 있다면 모더니스트와 포스트모더니스트를 가르는 날카로운 대립입니다. 이 부분을 깨닫게 되고 나서 디자이너들의 작업과 철학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게 됐어요. 디자인에 접근하는 개인적인 시각에 변화가 생긴 거죠.
스위스에서 헬베티카는 여전히 우세한 서체입니까?
그럼요. 취리히는 아예 헬베티카에 물들어 있죠. 하지만 헬베티카가 독일에서 얼마나 많이 쓰이는지를 알게 되고는 좀 놀랐습니다. 스위스보다 더하죠. 하지만 우리가 촬영한 모든 도시에서, 헬베티카를 발견하는 건 사실 일도 아니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헬베티카를 벗어날 수가 없달까요. 그래서 그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용법을 찾아내야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수많은 촬영분 덕분에 운좋게도 흥미로운 경우를 많이 담아낼 수 있었는데요. 가령 베를린을 운전하며 다니는데, 10피트 정도 크기의 헬베티카 체가 쓰여진 빌보드에 어떤 남자가 매달려 있는 장면을 보기도 했어요. 몇 달간 영화를 촬영하면서 이와 비슷한 경우를 자주 경험했지요. 우리는 그런 순간을 ‘행복한 사건’이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이제 헬베티카라면 충분히 경험했다 싶겠는데요.
영화를 편집하면서 충분히 경험했어요! 하지만 여전히 거리를 지나거나 할 때 헬베티카에 사로잡혀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합니다. 저걸 찍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헬베티카들이 계속해서 나타나니까요. 전 분명 영화를 시작할 당시엔 헬베티카 광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서체는 헬베티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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