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보면 보통의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는 나에게 로제타의 상황은 그리 가깝게 다가오지 않았다. 쉽게 이해하고 받아드리게 되는 영화도 아니었다. 영화를 볼 때 나는 내 상황과 영화를 비교하게 되는데 로제타와 나의 상황을 비교하기에는 로제타의 상황이 너무 극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영화에서 음악 없이 들려오는 온갖 가지 소리 때문인지, 어느 정도 주변에서 듣고 알게 된 사실들 때문인지 영화 속의 상황이 나와 동떨어진 상황처럼 보이지 않았다. 또 동떨어진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까지의 내 생활을‘보통의 삶’이라 여기고 있었다. 엄마아빠의 수입 아래서 받고만 있는 나에게 내 생활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어쩌면 나에겐 나와 로제타를 비교하는 것이 터무니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내 스스로 금전적인 욕구를 채우려고 하거나 사람들 속에서건 집안의 경제사정에서건 절박함을 느껴본 적도 없다. 사람들마다 또는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서 삶의 이상이나 기준, 보통의 삶이라는 기준이 변해버리는 것 같다.나는 어렸을 때에 비하면 ‘보통의 삶’에 대한 조건이 많아졌다.

  열심히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약만료라는 이유로 직장에서 해고되고, 계속해서 일자리를 찾아다니는 로제타에게 직장은 생존의 조건이 되어버린 것 같다. 내가 보기엔 로제타의 삶에서 ‘보통의 삶’이란 어떤 잘난 삶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직장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해서든 이어가려는 이유면서, 직장에서 얻고 싶은 것은 돈보다 꾸준히 매진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또 어떻게 보면 직장이라는 현실 도피처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나 싶다.

  로제타는 자신의 삶에 너무 익숙해져버렸다. 그 속에서 로제타는 거의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인다. 영화 속에서 보이는 로제타의 표정도 거의 변함없었다. 마치 그런 여유도 없는 것처럼. 하지만 그 움직임 속에서 자신을 계속 억누르고, 자기 암시를 한다. 직접적인 한 장면에서 ‘네 이름은 로제타. 내 이름은 로제타. 넌 직업을 얻었어. 난 직업을 얻었어...’라고 암시하는 것처럼 자기 생활에, 암시에 익숙해져버린 것 같았다. 그 암시가 로제타를 지탱해주기도 했을까?
  마지막 장면에서 울어버린 로제타가 왠지 모르게 반가웠다. 터트려버린 울음 자체가 시원했다. 그 울음을 토해내기 직전까지 로제타의 삶에서 '울음'은, 현실만을 보여주던 영화에서 약간의 다음을 보여준 것 같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한 의자와 더불어 숨까지 쉬어지지 않는 코감기 때문에 머리가 띵했다. 오토바이 소리가 날 때 배속의 내용물이 회전하는 것 같은 느낌(이건 정말 속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 영화를 보는 눈에서도 느껴졌다. 코 때문에 숨이 쉬어지지 않았는데 영화 속의 절박함 때문에 답답함도 있었다.
 나는 영화를 볼 때 자꾸 나와 영화 속 인물을 비교해서 보게되는데, 로제타를 보면서는 그런 생각이 나의 어떤 한계를 만들어 버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