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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음악글 수 566
이런, 자려고 누워도 한시간 째 눈만 말똥말똥이다.
낮에 쓰려고 했지만 지금 해야겠군. ------ 루시드폴과 마종기 시인이 주고 받은 편지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이 나눈 시간들이 아주 '긴 만남'이었던 것 같이 느껴진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그들이 주고 받은 편지의 시작부터 끝의 날짜를 확인했더니 놀랍게도 2년이 채 안되더라. '무엇'에의 공허함과 그리움으로 지샌 숱한 이국의 밤을 보내왔던 이들이기에 진심을 나눌 수 있는 서로에게 서로를 이야기할 수 있었던 2년 조금 안되는 그 시간이 어느 만남보다도 긴 만남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어느새 편지를 주고받으며 이야기하는 그들이 부러워졌다. 사실 어찌보면 소통이라는 것은 정말 자연스러운 것이고 즐거운 것이었을지도 모르는데, 왜 지금에 있어서 나에게는 때로는 버겁고 힘든, 고통스럽기까지 할 수 있는 모양새로 만들어져있는지는 모르겠다. 서로의 공백을 이야기하고, 채울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 어쩌면 그 행운이 가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한다. 그치만 역시 진심은 어렵지. 어려운가? ------ 2007.8.24 fri 05:47 From. Lausanne 中 ...중략...2002년 12월이 생각납니다. 선생님은 처음 이국땅에 짐을 풀었던 그날을 기억하시는지요. 눈이 많이 내리던 1월의 첫날이었습니다. 약간의 두려움과 기대로 스물 두 시간의 비행을 거쳐 도착한 스톡홀름의 첫날 밤엔 피곤함조차 느끼지 못했습니다. 왠지 모르게 우리말과 멀어질 듯한 두려움에 무작정 구겨 넣었던 시집들 중에, 처음 펼친 시집이 바로 선생님의 「이슬의 눈」이었지요. 한국을 떠나기 몇 달 전쯤, 작은 클럽에서 공연이 끝난 뒤 어느 착하고 소심한 팬이 저에게 직접 건네주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맡겨놓았던 시집이었습니다. 고백하자면 한국에서는 그 시집을 펼쳐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차갑다고밖에는 표현할 길 없던 낯선 12월의 첫날, 저를 지도하기로 한 박사님은 각오 단단히 하라며 잔뜩 겁을 주셨지요. 달랑 6개월짜리 비자를 손에 쥔 저에게 그는, 반년 뒤 연구 실적이 좋지 않으면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날이 바로 선생님의 시를 처음 만나게 된 날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 날의 기억은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답니다. 하지만 북구의 겨울 낮은 무척 짧아서 스톡홀름의 거리는 오후 세 시면 어김없이 해가 지고, 24시간 켜두어야 한다는 자동차의 불빛만으로 가득했지요. 이른 저녁, 아니 밤에 홀로 아파트의 식탁에서 처음 펼쳐본 선생님의 시집은 그날 밤부터 저에겐 백석 시인의 '멧세 소리'와 더불어,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던 이국의 거리, 지하철역, 버스 정류장, 실험실, 심지어는 집 아닌 집에서의 텅 빈 시간을 밝혀주던 불빛이었습니다. 책장은 군데군데 접혀 있고, 나중에는 어느 페이지에 어떤 시가 있는지 다 기억할 정도가 되었지요. 그래서 마치 의사의 처방전을 찾듯 아플 때, 피하고 싶을 때, 위로받고 싶을 때, 웃고 싶을 때, 어디에 있는 어느 시를 읽어야 할지도 다 알게 되었답니다. 1년이 지나 스위스로 학교를 옮기게 된 후에도 그 시들은, 낯선 도시에서 아무리 마음을 독하게 먹어도 절망하던 고단한 하루의 샘물 같은 것이었습니다. 해가 늦게 뜨는 겨울 아침 강의시간, 창밖으로 들리던 눈 녹는 소리나 아침 햇살에서도 받지 못하던 위로를 선생님의 시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의 시와 산문을 모조리 다 찾아 읽고, 늘 되새김질하는 저와는 달리 선생님은 아마도 저를 모르시겠지요. ...... ----- 2007.8.30 thu 09:54 From. Florida 中 조 군의 첫 메일을 보니 외국에 처음 도착했던 날의 마음 풍경이 새삼 황량하게 그려져 있네요. 그래요. 환경이야 달랐지만 나의 처지 역시 비슷했지요. 나는 1966년 6월 중순에 미국에 도착했어요. 물론 그때는 직항 비행기가 없어 하와이와 로스앤젤레스를 거쳐 왔습니다. 아시아 사람이라고는 거의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었던 미국 오하이오 주의 중소도시인 데이턴이라는 곳이었어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3년간 군대 생활을 마치고 제대한지 한 달 만이었지요. 내가 일할 병원에서 선불로 보내준 비행기표로 간신히 데이턴에 도착한 그날, 나는 밤을 꼬박 새우며 인턴 의사로서의 첫날을 보냈습니다. 아마 조 군보다는 조금 더 힘들지 않았나 싶네요. 그날 어디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그 큰 병원에서 나는 밤새 여섯 환자의 죽음을 겪었습니다. 물론 나는 단지 그날 하루 환자들에 대한 책임을 맡은 것이고 대부분은 내가 아니었더라도 죽었을 거에요. 그중에서도 70대의 점잖은 백인 할머니가 아직도 생각납니다. 그때 익숙하지 않았던 심전도를 잘못 읽고 시술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떨쳐지질 않아요. 벌써 40년이나 지난 일인데.... 다음 날 아침, 나는 허방을 짚는 듯한 착각을 하면서 오늘 당장 서울로 돌아가야겠다고 심각하게 고민했지요. 물론 내가 땡전 한 푼 없는 거지 신세라는 것을 자각할 때까지였지만요. 그 당시 외국 유학자는 1인당 최고 50달러를 가지고 나갈 수 있었어요. 한국행 비행기를 타려면 500달러가 필요했는데, 나는 지금도 왜 그 시절의 항공료가 그렇게 비싸야 했는지 모릅니다. 일주일 쯤 지난 어느 날, 귀국을 포기하고 깜빡 잠이 들었다가 '지옥이 바로 여기로구나...'라고 자각하며 눈을 떴습니다. 그때 쏴아아, 빗소리를 들었지요. 그 빗소리는 아버지, 어머니가 나를 부르시는 소리로 들렸어요. 그때 나는 미친놈처럼 웃다가 울다가 하면서 외로움과 무서움을 한꺼번에 느끼고 있었습니다. 10여 년전, 이런 시를 써서 발표한 적이 있지요. 첫날밤 마종기 일시 귀국을 마치고 돌아온 첫날밤, 지구 반바퀴의 시차 때문이었겠지만 새벽 세시에 잠이 깨었다. 밖에는 늦봄의 빗소리 들리고 다시 잠들지 못하는 몇 시간, 밤이 어둡고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내일 당장 돌아가서 살고 싶다는, 이제는 그만 끝내고 싶다는, 늙어가는 내 희망을 짓눌렀다. 그랬었다, 내가 처음 외국에 도착하던 삼십 년 전 밤에도 비가 왔었다. 사정없는 외국의 폭우가 무서워 젊은 서글픔들이 오금도 펴보지 못하고 어두운 진창 속에 던져 버려졌었다. 그렇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당신을 포기하던 첫날밤에도 나는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술을 마셨다. 시간이 타고 있는 불 속에 뛰어들어야 내 불을 끌 수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화상의 상처를 다 가릴 수는 없었지만 이제는 맨 마지막 장을 뒤집어야 할 때, 푸르던 희망은 창밖으로 날아가고 시차를 넘어서는 한 사내의 행방을 찾아서... -------------- 2007.12.18 tue 11:10 From. florida 미국에 와서 정신없이 의사 수련 공부를 하고 전문의 자격을 따고 취리히에 가서 비행기를 타고, 그러면 비행기에 타는 순간부터 한국에 와 있는 셈이라는 말이 너무 실감 나네요. 나도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값이 좀 비싸고 비행시간이 좀 길어도 늘 국적기를 타려고 하거든요. 고국행 국적기라는 말에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미국에 와서 정신없이 의사 수련 공부를 하고 전문의 자격을 따고 의과대학 조교수로 확정되자마자 갑자기 월급을 많이 받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 월급으로 비행기표를 사서 무려 5년 만에 처음으로 혼자 귀국을 했던 때입니다. 그때는 고국이 가난해서 국적기도 없었지요. 물론 직항도 없었고요. 고국이 점점 가까워오던 시간에 비행기 기내 방송에서 갑자기 '여기부터가 한국입니다. 30분 안에 김포 공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라는 한국어 안내 방송이 들려왔습니다. 반사적으로 비행기의 작은 창을 통해 밑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고도가 천천히 내려가는 비행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너무나 비참하게 헐벗은 모습 때문이었지요. 고국의 땅은 모두 헐벗어서 먼지가 풀썩거릴듯 민둥산 언덕뿐이었습니다.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가난하게 버려진 모습이었습니다. 착잡한 마음을 다스리려는데 기내 방송에서 갑자기 한국 동요가 들려왔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눈물이 쏟아지려고 해서 입술을 깨물며 기내 창문에 얼굴을 기대었습니다. 동요는 계속 들렸지만 아무리 보아도 나무 한 그루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막을 수 없던 눈물이 기어이 흘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아, 점잖은 의사가 이게 무슨 망신인가 하며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하는데 그때 내 귀에 나와 똑같은 톤의 흐느낌이 들려왔습니다. 여기저기에서 비행기 좌석에 그대로 앉은 채 모두들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서로 알지도 못하는 우리가 여기저기서 합창으로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해사 1971년이었습니다. ------------- 외국에 온 후부터, 그리고 어려운 수련의사로 외국 생활에 지쳐가지 시작하면서부터는 그런 욕망은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겨우 나 자신을 위로하고 나 자신이 깊이 침잠할 수 있는 영혼의 작고 따듯한 방을 마련하고 싶어서 시를 썼습니다. 볼품없는 시를 하나 마치고 혼자서 목소리를 죽여가며 울었던 날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시를 만드는 시인, 언어의 연금술사보다 골목길 장돌뱅이의 목소리를 더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고희의 나이가 되어 뒤돌아보면 그 길은 내가 피할 수 없던 운명이라고 믿어집니다. 내 시는 그래서 실체가 미처 보이지 않는 내 상실감을 채워주었고, 내게 깊고 아늑한 위로를 주었으며, 한 세월이 그렇게 지난 후에 주위를 둘러보니 내 시에서 나같이 작은 위로를 받고 있는 분이 제법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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