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온 뒤, 맑은 어느 날

 

#1. 리라의 원룸 안 (낮)

아이보리색 커튼 사이로 밝은 햇살과 함께 선명한 나뭇잎 그림자가 보인다.

모든 게 멈춘 것만 같은 방안. 여러 가지 옷가지들이 널려 있다.

침대 옆 구석에 선풍기만 윙윙. 돈다.

식탁에는 컵라면에 젓가락이 꽂아져 있다. 어디선가 알람시계소리가 들린다.

침대 위에 누워 있던 리라(24.여) 벌떡 일어나 앉는다.

머리를 두 번, 배를 두 번 긁적인 뒤 안경을 찾아 쓴다.

다시 누우려고 하다. 시계를 본다.

 

리라

어, 늦었다. 늦었다!!

 

 

#2. 리라의 원룸 감나무 매미 (낮)

강한 햇빛이 감나무 잎을 통해 눈부시게 빛난다.

나뭇잎 그늘이 드리워진 감나무 몸통. 매미 한 마리가 시끄럽게 운다.

 

 

#3. 리라의 원룸 건물 앞 골목 (낮)

반장아줌마(56.여)가 평상 위 앉아 부채질을 한다.

하늘을 보고 한번, 앞을 보고 한번.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둘러보며 연거푸 부채질을 한다.

현관문을 통해 부산댁(38.여)이 음식물쓰레기 봉투를 가지고 나온다.

부산댁은 봉투를 내려놓고, 애기를 업은 포대기를 한번 추킨다.

이마의 땀을 닦다가 얼굴을 찡그린다. 코앞에 손바닥을 갖다 대고 킁킁 냄새를 맡는다.

일그러지는 표정의 부산댁. 신경질적으로 평상에 앉는다.

 

부산댁

(손바닥을 포대기에 문지르며) 세상에 원 참, 날씨가 변덕도, 변덕도, 이런 변덕이 없지 않아요? 날씨가 이러니 집안에 온통 곰팡이들 천지지 천지.

 

반장아줌마

(짜증난다는 듯) ... 이제 장마는 끝났지, 아주 지독하게 덥구마. 차라리 눅눅하더라도 비오는 게 낫지 사람하나 잡겠다. 이것 참. (부채질하던 손을 멈추고) 킁킁, 근데 이것은 무슨 냄새래?

 

부산댁

(수줍게 웃으며) 아이구, 장마통에 이 어린것을 들쳐 매고 우산을 받칠 수가 없어서 묵혀놯더니 ...

 

반장아줌마

쯧쯧. 행동거지 하고는, 아차! 오늘 아침에 방송 들었지? 때마침 오늘이 그거 되는 날

이래잖아! 그거!! 잊지 말고 (쉬고 힘주어) 이따 시간 맞춰서 확인해둬.

 

부산댁

아 맞죠! 맞죠. 내 정신 좀 봐. (뒤돌아 현관으로 들어감) 형님 지는 올라 갈께요.

 

반장아줌마

(보지도 않고)그려! 킁, (현관을 보며) 이것아! 쓰레기는 버리고 가야지!!!

 

부산댁

(소리만) 아이구! 형님 쪼까 버려주세요~~

 

 

#4. 리라의 원룸 안 (낮)

화장실에서 나와, 방 안을 서성이는 리라.

침대 옆에서 조용히 돌고 있던 선풍기에 다가선다.

한 쪽 손에 있던 빵을 입에 물고, 책상 의자에 걸쳐져 있던 옷을 다른 한 손으로 입는다. 동시에 엄지발가락을 세워 선풍기의 강풍스위치를 누른다. 선풍기가 무섭게 돈다.

허리를 숙여 선풍기에 얼굴을 댄다. 선풍기의 회전 방향을 따라 종종 걸음.

무릎으로 앉아서 얼굴을 선풍기 가까이에 댄다. 눈을 지그시 감은 모습.

얼굴에는 땀인지 물인지 앞머리가 적셔있다.

다리를 아빠다리로 바꿔 앉는다. 옷을 입은 후 손으로 나머지 빵을 입안으로 구겨 넣는다.

 

 

#5. 길가 (낮)

중년 부부가 운동복을 입은 차림으로 파워워킹을 하며 걷는다.

영지아빠(55.남) 숨이 차는지 헥헥 거리지만 영지엄마(49.여)는 한 번 째려 본 후 빠른 걸음으로 간다. 영지아빠는 절망적인 표정.

영지엄마를 따라잡기 위해 달린다.

영지엄마와 영지아빠는 따라잡힐 듯 말듯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6. 리라의 부엌 (낮)

나갈 준비를 마친 리라. 부엌에서 밥그릇에 우유를 들이킨다.

입에 묻은 우유를 소매로 닦고 설거지통에 그릇을 넣는다.

그릇이 없는 선반. 그것과 대조적으로 설거지통에 불규칙 적으로 쌓여있는 그릇들.

리라는 몸을 돌린 후 경쾌한 걸음으로 책상에 다가감.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막막하다.

책상 위에 있는 물건을 가방에 능숙하게 쓸어 담는다. 방을 나선다.

 

 

#7. 리라의 원룸 건물 현관 (낮)

강한 햇빛에 눈을 찡그리는 리라. 손 가리개를 하며 하늘을 본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뛰어 올라간다.

 

 

#8. 리라의 원룸 (낮)

텅 빈 방안 멀리서 쿵쾅대는 소리가 들린다. 거칠게 문을 연다. 리라의 모습이 보인다.

잠시 망설이다가 신발을 신은 채 무릎을 꿇는다. 넘어질듯 말듯 한 모습으로 들어옴.

책상 서랍을 거칠게 열어젖힌다. 여러 번 뒤지며 물건들을 뒤로 던진다.

붉은 종이봉투를 하나 찾아낸다. 입에 물고 다시 뒤뚱대는 리라의 뒷모습.

현관에 다다라, 일어선 후 무릎을 탁탁 턴다.

리라가 나간 후 닫힌 현관문. 다시 쿵쾅대는 소리.

 

 

#9. 길가 (낮)

도보 블록에서 리라의 모습이 보인다. 경쾌하지만 빠른 걸음.

귀에는 이어 폰을 끼고 있다. 약간 상기된 두 볼.

맞은편에는 개를 끌고 나온 심씨 아저씨(45.남). 얌전하던 개들이 리라를 보고 엄청나게 짖는다. 리라 모른다. 개 짖는 소리로 주위가 굉장히 시끄럽다.

 

심씨 아저씨

아니, 이녀석이 존, 조용히해!

 

컹컹 컹컹컹!!! 컹!

 

 

 

#10. 우체국 (낮)

사람이 북적이는 우체국. 수시로 딩동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이 등받이가 없는 긴 회색의자에 옹기종기 앉아 있다.

꽃분할머니(88.여)신바람할아버지(70.남)가 말다툼을 하는데,

그 사이 번호표와 빨간 봉투를 손에 쥐고 경직된 자세로 앉아 있는 리라.

슬쩍 눈치를 살피려다 꽃분할머니의 목소리가 커지자 다시금 전광판으로 시선을 고정.

 

꽃분할머니

...

(삿대질을 하며)야이, 자식아. 어저께 니가 광팔아 묵고, 내삐부렇지에. 아따 요놈.

니 자슥이 4년제 대학나왔스봐짜. 명절에 한번 찾아오기나해 뭣해. 고스톱은 원체 외상이란게 없는 거여, 아들이름 수도 없이 들었지만 돈이 한번이라도 갚은적 있수? 뺀질나게 여기서 꽁짜 코오피나 얻어 묵고 있제? 니는 챙피스럽지도않나.

 

신바람할아버지

(발끈)이 할망구가 노망났나! 남이사 남의 광장사에 뭔 시비여! 그리고 저번에 언제여 저번에 한번 내가 갚았잖아! 허참. 내가 여기서 코오피를 마시던 쌍화차를 마시던 뭔 상관이여! 그리고 남의 귀한 아들 (멈칫) 함부로 말하지 마쇼. 그리고 어제 그것은 꽃분할멈 니가 내돈 떼먹고 간것이잖어!

 

꽃분할머니

아이고, 아이고 여기 아기씨. 이놈 좀 보소. (리라의 옷을 부여잡으며) 서울에서는 눈뜨고 코 베간다더니 그게 참말이구먼, 내가 저그 부여 시골서 올라와서 시방 내 손주새끼 고추하나 보겠다고 이럼서 있는구만. 이긋이 이긋이 내 속을 박박 긁어대!!!

(두 팔을 걷어 부치고 벌떡 일어서며)

한 판 부텨 볼텨!

 

#11. 우체국 우편 창구 앞 (낮)

꽃분할머니가 일어서면서 팔에 매달린 가방이 리라의 뒤통수를 가격한다.

리라, 아프지만 내색하지 않고 꿋꿋이 전광판을 향해 시선고정.

신바람할아버지도 참지 못해 일어선다. 둘의 싸움 소리는 점차 커진다.

건너편 의자의 꼬마아이가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다말고 멀뚱히 쳐다본다.

아이의 엄마가 아이의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버린다.

우체국안 사람들의 시선 모두가 리라를 향한다.

주위의 눈을 의식한 리라는 일어서서 둘 사이에서 싸움을 말리려고 쩔쩔 맨다.

 

리라

(꽃분할머니를 보며)할머니이이, (뒤를 돌아 신바람할아버지를 보고) 할아버지이이.

...

 

딩동.329번 손님. 5번 청구로 오십시오.

딩동.329번 손님. 5번 청구로 오십시오.

 

모두들 행동을 잠시 멈춘다.

다들 자신의 번호표를 한번 확인 한다.

그리고 리라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하던 일들을 한다.

리라는 주섬주섬 자신의 짐을 챙기고 일어나려는데, 신바람할아버지의 지팡이에 이마를 맞고 쓰러진다.

 

 

 

#12. 우체국 바닥 (낮)

대리석 바닥에 대자로 누워있는 리라의 얼굴.

잔뜩 열이 올라 벌게진 뺨 색깔과 똑같은 색깔이 혹이 이마에 나있다.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인다. 웅성웅성 소리.

리라의 눈이 핑글핑글 돌다가 멈춤. 고개를 왼쪽으로 떨어진다. 기절한 모양.

 

#13. 우체국 앞 길가 - 우체국 점심시간 (낮)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앰뷸런스 한 대가 지나간다. 우체국의 모습이 보인다.

유리문을 열고 나오는 리라. 리라를 시작으로 하여 모든 사람들이 제각각 쏟아져 나온다.

리라는 어안이 벙벙한 채 반창고가 붙은 이마만 쓰다듬는다.

 

 

#14. 리라의 원룸 (낮)

이마에 새하얀 반창고가 햇빛에 눈이 부시다.

얼굴은 더위에 익어 벌겋다. 손에는 구겨진 빨간 봉투. 어깨는 축 쳐진다.

신발을 벗고 방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터벅터벅. 가방을 힘없이 내려놓는다.

벽을 잡고 선채로 오른쪽 양말을 벗는다. 잘 안 벗겨져 양말이 주욱 늘어난다.

늘어난 양말을 붙잡고 아슬아슬한 묘기를 선보인다.

오른쪽 양말이 벗겨짐과 동시에 왼쪽 발이 밟고 있던 옷가지가 미끄러진다.

리라. 뒤로 미끄러지면서 벽면에 있던 보일러 스위치가 맨 위로 올라간다.

꽝!

 

 

#15. 리라의 꿈 - 사막의 음식점 (낮)

노래: 아라비안 나이트

눈을 감고 있는 리라. 누군가가 리라를 움켜쥐고 있다.

자세히 보니, 리라는 손수건이다. 거인에 손에 들려 있는 손수건.

리라를 쥐고 뜨거운 라면을 먹는다. 거인의 입김이 뜨겁다.

점점 얼굴이 빨개지는 리라 손수건. 눈을 뜨고 거인을 바라봄. 깜짝 놀람.

거인은 신바람할아버지. 신바람할아버지가 침을 튀기며 이야기한다.

모든 게 천천히 움직임. 이마의 흐르는 땀을 리라 손수건으로 닦는다.

손수건이 흠뻑 젖는다. 축 늘어진다.

 

리라

(절규) 몸이 무거워어어어

 

거인신바람할아버지

(늘어진 목소리)과~앙~프~~아라아아아

 

흐르는 땀을 두 세 번 더 닦는다. 거인 신바람할아버지가 손수건을 짠다.

손수건에서 나오는 물이 신바람할아버지에 팔목을 따라 흐른다.

 

#16. 리라의 꿈 - 길거리 (낮)

정신을 잠깐 잃었던 리라. 눈을 뜬다. 이번에 리라는 손수건이 아니라 아이스크림이다.

아이의 큰 혓바닥에 아이스크림이 닿자 녹아 버린다.

또 한 번 아이가 혀를 내밀어 가장자리를 빙 돌려 핥는다.

 

리라

(절규)녹아내리고 있어어어!!!!

 

아이

(늘어진 목소리) 어으~음~마아~아~이스으~크으으리이임 마아앗 있으우워어

아이스크림이 된 리라가 푹 숙였던 고개를 든다.

굉장히 붉은 두 뺨. 곧 터질 것만 같다.

 

리라

(건조한 목소리) 시원한 생각을 해봐!! 시원한 생각!

 

 

#17. 리라의 꿈 - 북극 (낮)

펭귄과 북극곰이 얼음 위에서 사이좋게 썰매를 탄다. 빙하가 된 리라.

썰매 타는 모습을 훈훈하게 지켜본다. 시원하다. 라는 만족스러운 표정.

하지만 뺨에 핀 홍조가 고장 난 신호등처럼 깜빡 깜빡 깜빡 거린다.

 

리라

(눈물을 흘리며) 왜 이렇게 눈물이 나지?

 

펭귄

(빙하를 쳐다보며) 펄쩍 펄쩍, 눈물으을!! 눈물을!!

 

북극곰

(빙하를 쳐다보며) 흘리고! 있어, 울고, 있어. 울음이 엄청나. 우리는 곧. 우리는 곧. 아악

쿠루루룩. 썰매를 타던 펭귄과 북극곰은 가라앉고 빙하도 녹아 부서진다.

 

리라

(절규) 지구 온난화아아!!! 대중교통을 이용합... 쿠루루룩

안돼 쿠루룩 이것.. 은 ...꿈이야 꿈.!!!!! 꼬로록

 

 

 

#18. 리라의 꿈 - 수영장 (낮)

하나 두울 셋. 하나 두울 셋. 음 파. 음 파.

긴 레일이 펼쳐진 수영장. 킥판을 잡은 하얀 손등이 보인다.

발을 모았다가 쭈욱 피고 모았다가 쭈욱 피는것을 반복.

음파. 수영 모자를 쓴 시뻘건 리라의 얼굴.

물속에 반쯤 잠겨 있는 얼굴. 푸쉬시식. 소리와 함께 수영장 물에서 김이 피어오른다.

리라

(열심히) 음...부글부글...파, 음...부글부글...파.

 

찰싹 찰싹. 소리와 함께 옆 레일에서 버터플라이를 하는 노란 수모를 쓴 사람이 보인다.

점차 빠른 속도로 팔을 휘 젖는다.

노란 수모는 수영장 하늘을 무서운 속도로 나른다.

리라는 정면을 보고 있지만 앞으로 일어날 상황을 알고 있다는 듯 표정이 일그러진다.

리라

(허둥지둥) 음...꿀꺽꿀꺽...켁켁 파 꿀꺽 켁켁..

 

스텝을 넣던 구령이 꼬인다. 곧 거대한 물살에 휩쓸린다.

 

 

#19. 리라의 원룸 (낮)

방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서서히 사라짐과 동시에, 엉망이 된 방안이 보인다.

아침에 있던 옷가지, 책, 이불, 모든 것들이 물에 떠다닌다.

떠다니는 침대에 엎드려 누워있는 리라. 잠에서 깬다.

천장에 스프링클러가 쉑쉑. 소리를 내며 물을 뿌리고 있다.

점차 바깥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몸을 일으켜 세우는 리라.

침대 위에 앉는다. 스프링클러를 향해 눈을 감고 입을 벌린다. 볼을 타고 흘러 입안으로

들어온다. 한번 삼킨다.

고개를 내려 방안의 풍경을 본다. 이마의 반창고를 뗀다. 초점을 잃은 눈.

 

리라

(한숨) 아.. 꿈이 아니었구나.

 

 

#20. 리라의 원룸 복도 (낮)

리라의 원룸에서부터 물이 졸졸 흘러나옴.

 

 

 

#21. 영지네 집 (낮)

베란다에서 쭈그려 담배를 피우는 영지아빠. 영지엄마가 호들갑 떠는 목소리가 들린다.

 

영지네 엄마

(오두방정)이게 무슨 난리래. 무슨 난리. 물난리네 물난리 홍수네 홍수!!

 

영지아빠 담배를 문채로 베란다로 고개를 내민다. 쾌청하기만한 하늘.

 

 

#22. 리라의 원룸 건물 현관문 (낮)

여러 가지 광고물들이 붙여있었던 자국들 위로 하얀 종이 하나가 보인다.

햇살이 내리쫴 종이가 빛난다. 매미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린다.

 

 

-공고-

 

장마철 눅눅한 방안의 습기 조절을 위해서 오늘

낮 12시부터 난방을 가동하오니 이점 양지하여 주시고

필요한 세대께서는 적절한 온도를 맞추어

습도 조절을 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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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we meet a desert, make it a gard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