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쳐보기는 때로 질투에서 비롯된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에서 한물간 향수 제조사 주세페 발디니가 경쟁자의 향수를 몰래 사다가 비슷한 향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것도, 그루누이의 ‘향’을 훔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한 것도, 나보다 잘난 것을 바로 보아줄 수 없다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있는 사람에 대한 시기. 그 모난 마음을 어루만져주기 위해 <정글>이 대신 나섰다. 북디자이너의 서재, 건축가의 수첩, 코드아티스트의 컴퓨터, 패션디자이너의 옷장, 문구디자이너의 서랍, 그리고 하다 하다 쓰레기통까지 샅샅이 훔쳐보고 돌아왔다. 그대들이 훔쳐보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모르니 마음껏 즐길 수 있기를. 훔쳐보기는 때로 크리에이티브의 힘이 되기도 하니까. 

기획 및 진행 | 월간 정글 편집부, 사진 | 스튜디오 salt, 디자인 | 이가영
제1회 이승욱의 서재를 훔쳐보다 (2009-10-19) 


열린책들, 문학동네, 작가정신의 공통분모로 꼽히는 북디자이너 이승욱. 열린책들에서 펴낸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초판과 『향수』의 북디자인을 가장 사랑하는 에디터에게 이승욱은 꼭 한번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었다. 실은 ‘북’디자이너이니 책도 엄청나게 많을 거라는 단순한 추측 때문에 이승욱을 만나는 것보다도 그의 서재에 발도장을 찍고 싶었다. 부러워하면 지는 거라고 주먹을 부르쥐었건만, 안 부러운척하느라 실눈으로 서재를 훔쳐 볼 수밖에 없었다.

에디터 | 정윤희(yhjung@jungle.co.kr), 사진 | 스튜디오 salt

최근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프리랜서 간판을 새로 내건 이승욱은 작업실을 따로 두지 않고 집안에 서재 겸 작업실을 만들었다. 북디자이너로서 살아온 세월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세 개의 크고 작은 책장마다 책이 가득하다. 이나마도 이사하면서 반 이상이나 덜어낸 것이라니 그러지 않았으면 온 집안이 책으로 발 디딜 틈도 없었으리라. 책들은 제가 앉고 싶은 자리를 마음대로 골라 앉은 것처럼 두서 없이 꽂혀 있다. 디자이너답게 디자인 관련 책자가 가득할 줄 알았는데 소설부터 과학, 인문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어떤 책은 누워있고, 또 어떤 책은 다른 책의 뒤에 숨어있는 모습이 마치 선생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소란스러운 교실 풍경을 연상시킨다. 설마 되는 대로 꽂아두는 거냐는 물음에 ‘불량 선생’ 이승욱이 멋쩍게 웃는다. 한때는 정리하기도 했지만 디자인한 것과 하지 않은 것을 포함해 한 달에 책이 7~80권 가량 쌓이다 보니 그냥 되는대로 두게 됐다고.
한 권 건너 두 권, 다섯 권 건너 한 권씩 그가 디자인한 책들이 고개를 내미는 책장 옆으로는 이승욱이 고등학교 때부터 수집했다는 LP판이 가지런히 꽂혀 있다. “LP 수집하시나 봐요.” 한 마디에 이야기가 판 튀듯이 튄다. “아, 저… 채, 책은….” 에디터가 쭈뼛쭈뼛 뱉은 대사가 허공으로 흩어지기도 전에, LP판을 손에 든 이승욱은 앤디 워홀이 디자인했다는 비틀즈의 음반이야기나 롤링 스톤즈의 음반을 판매 국가별로 수집한 이야기로 건너가서는 돌아올 기미가 안 보였다. 화색이 만연한 얼굴을 외면할 수 없어 듣다 보니 없던 호기심이 절로 솟는다. 디자인이 불경스럽다는 이유로 스페인만 다른 버전으로 출시된 이야기며, LP 판마다 새겨진 고유의 시리얼 넘버에서 숨겨진 내막을 짐작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홀려 그의 서재를 샅샅이 뒤지겠다던 포부는 그만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원반’ 너머의 진실에 대한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그가 보여주는 음반 디자인은 가히 예술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승욱이 LP 수집의 늪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던 것도, 음악을 듣기 위해 책을 보고 작업을 한다고 말했던 이유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광적인 수집은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리고서야 다시 북디자인 이야기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안드로메다에서 서재로 돌아오니 그의 얼굴에 아쉬움이 역력하다. 그 아쉬움을 애써 외면하며 어디서 크리에이티브를 찾느냐고 묻는다. 이베이를 뒤져 수집한 음악을 ‘걸고’ 손에 잡히는 대로 디자인잡지나 외국서적을 보며 소스가 될만한 것들을 수집한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늘 음악을 들으니 음악에서 연상되는 이미지에서 힌트를 얻을 때도 있다고. 하지만 그의 관심이 온통 음악에만 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신문방송학과를 전공했으니만큼 전공 분야에 대한 것은 기본이고 북디자인을 하면서 필요에 따라, 혹은 단순한 호기심에 따라 관심사는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관심사가 바뀔 때마다 그의 “집요한 구석”이 크리에이티브 수집 목록을 늘려온 것이다. 그렇게 찾아낸 크리에이티브를 ‘기획’하는 것은 다시 책이다. 그는 “인문학적 소양을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디자이너라면 디자인으로 접근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디자인 체계를 잡으려면 내용을 파악해야 하고,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인문학적 소양이라는 얘기다. 타고난 미감은 갈고 닦아 개발하면 그만이어서 굳이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도 얼마든지 디자이너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공부’는 더 중요하다. 특히 이승욱은 북디자인을 자칫 데코레이션으로 혼동하고 시각적으로만 접근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장 주의해야 할 부분이라고 지적한다. 책은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예술이긴 하지만 단지 디자인을 입혔기 때문에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디자인은 책의 요소이며 북디자이너는 이것을 기획하는 사람이기에 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하고 이를 시각화하려면 다양한 지식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좋은 디자인을 하기 위해 보는 것도 책이고 디자인하는 것도 책이니 질릴 만도 한데, 그로 하여금 또 책을 집어 들게 한 것은 호기심이고 관심이었다. LP 판을 수집하게 된 것이 음악에 대한 관심이었듯이.
* 최근 프리랜서로 전향한 북디자이너 이승욱은 지금까지 열린책들, 문학동네, 작가정신 등의 출판사에서 일하며 천 여권이 넘는 책을 디자인해왔다. 『향수』『고산자』『열정적인 너무나 열정적인』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디자인하며 ‘이승욱식’ 북디자인을 만들고 있다.

이름짜한 출판사의 디자이너들이 꼭꼭 숨겨두었던 크리에이티브를 보내왔다. 책장 한 귀퉁이에 모셔두고 감이 떨어질 때마다, 신선한 자극이 필요할 때마다 꺼내보던 책과 잡지를 보내온 것. 백지장은 맞들어야 좋지만 내 라이벌의 크리에이티브는 훔쳐 보는 맛이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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