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정리 더 하고 있습니다. 

    강진에선 짧게 워크숍을 하러 합류한 ‘이동학습’을 했었다면 이번 정선에선 탐사하고 보고 배우는 ‘이동학습’ 을 진행하였다. 우린 미리 겨울을 느꼈다.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신이 났던 것인지 낯선 동네로 떠나서 학습을 한다는 게 내 몸과 정신을 맑게 해줘서 신이 났던 것인지 하여간 마음은 팝콘처럼 통통 튀기고 있었다. 매우 추웠지만 낯선 동네로 떠나서 학습한다는 것에 대한 ‘나의 기대’는 ‘새로운 환경에서 내가 새롭게 알 게 될 것들, 새로운 공기, 조금은 낯선 사람들, 학습방법들, 새롭게 생각해볼 문제들’이었다.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한 감도 많지만 'art in village' 이 프로젝트가 마을과 어떻게 공감되고 있으며 우리가 갔을 때 어떤 환경일지, 분위기가 어떠할 것이고 그 안에서 내가 무엇을 탐사하고 리뷰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준비물에 적혀있던 ‘카메라’. 죽돌들에게 카메라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판돌들을 보면서 그러고 보니 한동안 핸드폰으로 밖에 찍지 않았던 ‘사진’을 중심적으로 찍어보아야 겠다는 마음이 들었고 어떤 사진을 내가 담게 될 것인가 한참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마구잡이로 찍을 것인지 아님 내가 그곳에 갔을 때 과연 찍고자 하는 주제가 있을 것인지. 게다가 카메라라는 매개체에 대해 내가 조심스러워져야 할 부분, 혹은 다른 죽돌들이 고민하는 ‘카메라를 들었을 때’의 부분에 나 또한 같이 고민했다. 그래서 주민들, 혹은 사람들이 보일 때 최대한 사진을 찍지 않았다. 내가 사진을 찍는 의도가 ‘나쁜’ 것이 아님을 그들도 알겠지만(모를 수도 있겠다) 거꾸로 내가 그 입장이 되었을 땐 ‘나쁜’ 의도가 아니었다 한들 나의 집, 나의 동네, 내 친구들을 찍는 건 불쾌할 것만 같아서였다.

     제임스, 강제욱, 윤주경 작가님들의 작품을 보고 그들의 이유, 그들의 해석, 그들의 표현을 듣고 느끼며 나도 나만의 이유, 해석, 표현을 찾고 싶었다. 제임스에게서 놀랬던 부분은 그는 정말 세심한데 그 세심함은 준비성에서도 나오지만 과정, 그리고 자신이 하나하나 빠짐없이(빛의 구도, 각도, 대비까지) 연출한다는 것이었다. 어떠한 것에 포인트를 맞추는 사진을 많이 봤고 나도 가끔 사진을 찍을 때 종종 그래왔던 것 같은데 그 모든 것들을 연출하고 작품 안에 의미를 더했기에 전체적인 화면이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다 (어떤 면으론 시선이 분산되기도 하다). 얘기가 하나의 작품에 많이 들어갈 수 있는 것 같으면서 한 편으론 ‘그 의미나 모든 것의 연출에 대한 의도를 설명을 듣기 전엔 모르고 넘어갈 수 있지 않나’ 라는 생각도 했다. 그럼 난 작업을 하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하고자 하는 얘기가 있을 때 어떤 매체를 뚫고 어떤 틀을 잡고 어떤 방식으로 나타낼 것일까? ‘사진을 찍기 전에 구상(아이디어)을 하고 거기에 적합한 장소를 찾아간다. 내가 한 구상과 현실이 맞아야 그게 하나의 사진(작품)이 되는 것이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 자신의 일에 대한, 혹은 모든 것에 대한 세심함이 ‘준비자세’를 통해 나오는 것인가? 하며 놀랬다. 15년 동안이나 어떤 카메라를 사용할지 어떤 필름을 사용할지 체크하고 공부했으며 그래서 선택한 것들로 작업을 하고 있는 제임스의 모습을 보곤 나도 저런 ‘준비성’이 있어야 할 것이며 그만큼의 ‘끈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내 요새 커다란 주제인 ‘준비성’. 이 녀석이 나에게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 내가 주저하고 자책하는 게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festeza로서, 죽돌로서, 작업자로서 나만의 ‘기본’, ‘기준치’는 무엇이며 그것들에 대한 최소한의 나의 준비는 되고 있는 것인가. 제임스가 조리개를 줄여 사진을 선명하게 만든다고 했는데 난 무엇을 줄여 ‘기본’, ‘기준치’를 좀 더 뚜렷하게 만들 것인가. 이번 부딪힌 일이 ‘공연’에 대한 태도를 의심할 회의가 크게 들었지만 단지 그 뿐이 아닌 ‘준비성’을 건드린 문제였다. 공연을 할 마음도, 정신도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마음으로 어떤 공연을 할지가 나오지도 않은 채 마구잡이로 악기를 쳐버렸기에 사인도 맞지 않고 부실했던 공연에 부끄러웠다. 기초적인, 아주 기본적인 이 부분을 체크하지 않고 엉뚱하게 시장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서로 얼굴을 붉혔던 것인가. 어떤 것이 문제인지도 파악하지 못했다는 게 스스로 바보스러웠다. 준비성을 중요하게 여기고 고민하다가 한번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내 준비성은 뭘 의미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의구심을 떨치고 싶다.

     어떤 것이든 주제와 이야기들이 있고 그래서 연결고리가 있고 그것을 들여다보는 것도 발견하는 것도 찍어내는 것도 나에겐 모두 ‘예술’이다. 이번 정선에서의 나의 ‘예술’은 사진이었다. 패턴들이 좋았다. 특히 옛 동네에서의 패턴들을 발견하는 것이 그리도 기뻤다. 진하고 선명한 색들이 먼지 쌓이고 낡아진 벽돌 옆, 혹은 위에 놓여 있다는 게 꼭 경석산에서 본 ‘검은 돌 옆에 흰 돌 / 검은 광물 옆에 밝은 주황빛을 띈 단풍들’ 마냥 (조화롭다는 표현은 안 어울리지만) 그 곳에 같이 공존함으로써 어우러지는 묘함이 좋았다. 내 키워드는 ‘과거의 것(옛 것) 혹은 과거가 되어가고 있는 것. 한마디로 없어지고 있는 것 혹은 이제 자주 볼 수 없어지는 것’, ‘사람들이 지나간, 스쳐간, 머무른 공간의 흔적’ 이 두 가지이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에 대해 정선에선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흘러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없어지고 소멸될까봐 두렵다.’ 기 보단 내가 더 이상 그것을 보고 느끼지 못하고 그 곳은 내가 다시 찾아갔을 때 ‘날 기다려 주는’ 것들이 아니라 ‘재개발’ 된 상태로 내가 저것들을 기다리는 게 두렵다. 기다린다고 재개발 된 것들이 원래의 모습으로 탈바꿈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없어짐.
    
사북과 고한의 공간속에서 난 ‘색’이 주는 느낌과 분위기가 좋았다. 그러다가 선명한 색들이 내겐 세게 다가왔었고 색들이 반복되거나 어딘가에 슥 묻혀 있는 것들을 주위 깊게 봤다. 사진을 찍게 된 것은 ‘예쁜데?’ 해서 찍은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주는 묘한 느낌이 좋았다. 묘한 느낌. 예전에 자주 봤던 문양들, 담, 길, 바닥, 개, 문, 판자, 옛 교회, 옛집, 우편함 등 이것들을 사진으로 남기면서 내 시선에서 본 상과 사진에서 나타난 상이 어떻게 다른지 들여다보는 것도 좋았고 그건 사진을 여러 각도로 하나를 찍는 것과 같다. 여기에서의 묘한 느낌은 저것들도 그렇고, ‘다른 시선’을 보았을 때 신기하고 알지 못하던 것을 새롭게 알게 된 느낌, 내가 잠시 과거에 온 것 같은 느낌, 잊고 지냈던 것을 오랜만에 마주할 때의 느낌, 그것들이 반복됨으로서 기억에 장면 컷들이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런 느낌에서 ‘묘하다’라고 말했는데 지금에서야 아차 싶은 건 내가 계획하고 계획한 것을 봤을 때의 ‘묘함’은 없었다는 것이다. 개인 탐사를 하기 시작하면서 발견한 키워드이기에 계획한 것은 없었지만 적어도 이끌린다고 해서 계획 없이 움직인 건 아닌가 하는 ‘아차’가 생겼다.
    
색이 있고 그 색이 끊기는 경계선이 있는 것인데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홍조의 표현에 동감하는데) ‘레고’ 같더라. 내가 갔던 고한의 초등학교도 그러했는데 분명 학교의 건물은 꽤 시간의 흐름을 탄 것 같았으나 운동장의 모습은 레고의 세계였다. 말 그대로 ‘덩그러니’ 놓여있는 놀이기구, 모래가 아닌 바닥, 색깔의 경계선, 넓디넓은 운동장이지만 놀이기구는 구석에만 있었다. 하지만 마을에서의 색의 경계선은 달랐다. 너무도 다른 것, 혹은 물질이 변화되는 과정 속에 ‘함께 있는’ 느낌이었다.

     답답하고 빡빡한 것에 대해 항상 숨막혀하는데 이번엔 골목골목간의 답답함과 빡빡함 그리고 좁음을 즐겼다. 언제 재개발이 될지 모르고 넓지 않은 공간 속에서 여러 사람이 산다는 것은 참 갑갑하기도 할 텐데 그러면서 서로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이곳이 재개발된다면 어찌할 것인가 괜스레 내가 거기서 사는 마냥 굴었다. 그런 면에서 내가 자책했는데 그런 면이라는 것은 내가 궁금한 것에 대한 질문을 혼자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리뷰를 하면서 히옥스의 코멘트를 받고 그제야 ‘마을 주민들과의 교류, 대화’에 대해 난 생각하고 있지 않았고 놀러온 마음으로 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질문이 있어도 안하고 키워드에만 집중하고 주위를 둘러보지 않은 것이 그저 관광객마냥 여기저기 둘러보고 ‘좋다’ 거렸던 것 같아서 마음가짐에 대해 스스로 회의가 들었다.
    
도시에서의 시장은 시골에서의 시장 같은 한 데 어우러진 분위기도 아닐 뿐더러 ‘이곳이 아니면 안 돼’라는 심정이 들어있다. 잠깐 내가 했던 영등포프로젝트에 대해 생각이 났다. 난 문래동을 탐구했는데 그곳엔 올려다보기도 힘든 에이스타워 바로 앞에 조그마한 상회들이 줄지어 있고 그 옆엔 커다란 마켓이 있다. 문래동도 이 지역처럼 예술마을이기도 하고 모텔, 성매매, 판자촌, 철광소, 예술, 재개발이 존재하고 있다. 고한에서보다 사북에 갔을 때 문래동이 더 많이 생각났었는데 사북 번화가에 레일을 만들기 위해 공사하고 있는 모습이 재개발을 떠오르게 했고 모텔이 많고 얼큰한 음식점이 많았을 땐 문래동 동네를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 예술마을과 철공소. 여긴 예술마을과 탄광촌. 사정은 달라도 없어지고 있어나 없어진 것들의 모습이 닮았다. 고한과 사북은 대립관계, 즉 경제적인 성장, 발달에 대해 예민한 지역이다. 한 동네였던 곳은 어디가고 두 동네로 분리된 것인가. 좀 다른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이 마을 사람들에겐 서로간의 어떤 예민함이 있을 지 궁금해졌다. 나 또한 어떤 것에 대해 예민함이 있고 그것을 겨누는 가. 난 모든 것들을(판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떻게 읽었는지, 그럼 그 느낌이 어떻게 읽혀지는지 구체화 해보는 작업이 필요하고 각자의 생각을 정리하는 자신의 언어를 만들어’ 가야겠다는 생각이 한 번 더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도 중요한 것이지만 문제는 그 생각들이 어떻게 밖으로 표출 될 것이며 그것들을 인용해 내 무엇을 대신한 표현을 할 것이고, ‘언어’라는 것을 이용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는 것인지, 행동으로 들어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의민데? 무슨 맥락에서? 무슨 비전이 있는데? 내가 하자에 와서 제일 많이들은 질문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이 문장들이 이 곳 에서도 적용되고 있었다. 작가들의 의미가 어떤 의도로 마을 사람들에게 읽힐까. 마을사람들의 반응과 태도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작가들의 위치에서 자신들이 느끼는, 의미, 비전, 맥락속의 중점을 최대한 표현하려 하고 있고 10년이라는 시간의 계획만큼 신중하고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작가들이 부러웠다. 난 아직 이렇다고 결정 난 것들이 없고 표현된 것도 없다. 아직 걸어가지도 않고 내가 걸릴 돌들에 대한 걱정부터 앞서기 때문에. 마을과의 소통, 교류가 되길 원하는 이 공공미술프로젝트, 예술마을이 시범사업으로 지금까지 2달 정도 벌여지고 있는데 그 사이에 무언가 일이 잘 해결되고 있지 않음을 감지할 수 있었고 그랬기에 그들도 더 움직이고 더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이겠지.
    
강제욱씨와 저녁메뉴인 짜장면을 먹으며 ‘예술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 당신의 ‘초점’, ‘뉴스’가 아닌 ‘어떤 얘기를 할 것이고 처한 환경을 보여주며 마음에 와 닿는’ 사진을 찍고자 한다는 여러 말씀들을 듣고 강하게 내 피부로 와 닿았다. 난 사진을 전문적으로 찍는 사람은 아니지만 ‘예술가’에 대한 말을 언급하셨기에 모든 것들이 ‘아 저 사람은 사진을 하는 사람이니까’ 가 아닌 ‘내가 하고자 하는 것 또한 연결고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더 귀 기울여 들었다.

     광부들의 모습. 광부들은 ‘산업전사’라는 자신들의 위치가 있고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물론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이지만 일터 자체가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안전에 대한 부분에서 보장되지 않는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일을 하는 그들은 아내와 아이들을 바라보며 그리고 자신들의 좀 더 나은 삶을 기대하며 노동하는 것이다. 나는 어떤 위치에 있을까. 나도 자부심을 느끼고 싶다. 살기위한 노동과 필요에 의한 노동은 절대 같을 수 없지만 내 노동은 필요에 의한 노동에 가까운 것 같다. 그 전에 어떤 것이 필요하기에 노동하는 건지가 나와야 하겠다. 무엇을 위해 일을 하고 어떤 것을 바라보며 살고 무엇을 캐내는 것인지 내게 목숨은, 생명의 위협 지점은 무엇인지.
    
복지아파트 사택이 날 소름 돋게 만든 장소였는데 발을 디딜 때마다 나에겐 주거하고 있던 사람들이 이젠 ‘이주한 사람들’이 아닌 무언가에 ‘쫓겨난 사람들’인 것 같아서 소름 돋았다. 대체 이사를 한 건지 도둑이 든 건지 불에 홀랑 타버린 건지 절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내가 아예 아무것도 모르고 갔다면 정말 도둑이나 사고가 있는 줄 알았겠다. 아님 사고가 있었던 건가? 어쩌다가 이렇게 유리창이 다 깨지고 모든 것을 들고 간 게 아니라 그곳에 엉망으로 엎어져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그 사람이 받은 선물, 간직해온 사진, 편지들이 왜 그 사람 곁에서 떨어져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건지 질문이 들자마자 소름이 돋았다. 정말 이건 이주한 것이 맞는가.

     리뷰시간에 하루는 시즌 1의 시작, 시즌 1의 마무리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서 대안학교와 일반학교의 얘기들이 오갔고 탈학교 학생의 대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그 때 들었던 제일 잊히지 않는 단어는 ‘수동적 사고, 수동적 태도’이다. 이곳까지 와서 수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건 싫었고 내가 그랬는지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어느 정도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누군가 내 앞에 놓아주기 전까진 고민만 하고 생각만 하고 쩔쩔매다가 말아버리는 것 같았기 때문에. 행동으로 표현으로 나가는 부분이 내 취약점이고 취약점인 만큼 잘해보고 싶다. 하면 되는 것을 너무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해서 스스로를 가둬버린다. 그렇담 내가 어떠한 포부와 생각, 계획을 세웠다 한들 아무것도 표현되지 않고 실행되기 위한 행동이 나오지 않는 데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분명 짚고 넘어갈 문제이고 나에게 있어 제일 마음이 불편한 문제이다. 생각. 생각을 옮겨보면 되는 것인데. 이리 어려운지. 이어져 나가지 않는 나. 수동적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게 들렸던지. 꼭 날 두고 하는 얘기 같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