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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시민문화 워크숍글 수 603
<개인과제>
daily webzine : 기획서 - http://productionschool.org/board/42441 예술마을 사북·고한에 찾아간 일시적 이주자와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작가들, 그리고 원주민을 이어주는 매개 역할을 위해 만들어진 일간 웹진이다. 본 웹진을 통해 하루하루 죽돌들의 작업물과 생각, 개인적 추적물을 올릴 계획이었으며, 하자로 돌아와 후작업을 한 뒤 마을의 공공 웹진으로 기능을 강화할 계획이었다.
작업자로서의 내 정체성 찾기 : 사북·고한의 정체성이 바뀌면서 마을 주민들의 정체성도 바뀌었다. 전직 광부, 전직 광부의 아내, 전직 광부의 아이들. 과거 마을 주민들의 정체성을 찾고, 현재 마을 주민의 정체성을 조사한다. 그리고 story teller가 내 작업자로서의 정체성인지, 나에게 ‘작업자’가 무엇인지, 지금 하자에 있는 나는 왜 ‘story teller’인 나를 필요로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다. 그리고 19살에 갖게 된 개인적인 고민을 해결하고자 선택한 과제다.
<사색에서 이야기로>
거울을 당당히 마주할 수 있는 이유 내가 정선에 있을 때 ‘거울’이라고 표현한 것은 모두 ‘own’이다. 신념이나 주관 없이 작업을 하고 삶을 사는 건 구멍 난 풍선에 바람 불기만큼 한심하고 소득 없는 짓이다. 때때로 확신에 차서 거울도 챙겨보지 않고 달리다간 큰코다치고, 거울을 보는 게 두려워 거울을 피하는 건 자신을 속이는 짓이다. 그만큼 거울은 삶에서 뺄 수 없는 중요한 존재다. 동원탄좌는 광부들이 쓰던 사무실과 탈의실, 샤워실, 세탁실 등이 거의 그대로 보존된 전시공간이다. 간혹 어떤 공간에는 작가들의 작업물도 있다. 내가 그 공간에서 가장 오래 머문 곳은 탈의실이다. 더러운 옷을 벗어 세탁기에 넣고 샤워실로 들어가 석탄 찌꺼기를 씻어낸 후, 다시 옷을 갈아입으러 가서 잠깐 보게 되는 작은 거울. 나는 그 거울에 의미부여를 하게 된다. 윤주경 작가의 두 번째 검은산 프로젝트에서 본 다큐는 사북·고한이 석탄마을로 변하기 전부터 폐광되기까지의 사실을 담은 영상이다. 탄광이 없던 시절에도, 있던 시절에도, 카지노가 있는 지금 이 시기에도 마을 주민들은 생계를 위해 떠나거나, 마을의 정체성에 맞춰 일한다. 놀랍지 않은 사실이다. 죽기는 싫고, 굶으면 죽으니까 어떤 상황에도 사람들은 일을 한다. 하지만 일하는 것에 어떤 의의가 있고, 어떤 기쁨이 있는지는 카지노가 생긴 이후 크게 바뀐다. 다큐에서 본 광부들은 모두 밝게 웃으며 일했다. TV를 보면서도, 잠깐 앉아서 쉴 때도. 폭탄을 터뜨리는 장치를 만질 때는 사뭇 진지했고, 카메라를 들이대면 멋쩍은 듯 웃었다. 야생화가 있던 곳에 크게 걸린 사진 중 광부들이 샤워하는 장면도 있는데, 나체임에도 민망한 사진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광부의 표정이, 석탄 찌꺼기를 벗겨내는 그 상황에서 보여주는 광부의 표정이 민망하다는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광부가 목숨이 걸린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웃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울을 보며, 집에 있을 아이들을 생각하며 웃고, 자신을 기다릴 아내를 생각하며 웃는다. 혹 무슨 일이 있을까 여러 미신을 만들고, 애써 밝게 살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주민들은 열악한 교육환경을 개선하고자 직접 학교를 세운다. 석탄마을이라는 공동체에 교육시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스스로, 자기 주도적으로 행복을 찾았기 때문에 거울을 보며 웃을 수 있던 것이다. 하지만 카지노가 생긴 이래 마을의 분위기는 ‘함께 굴 파러’가 아니라 ‘내가 돈 벌어야’가 된 것 같다. 생계유지가 목적인 건 마찬가지인데 사람들은 카지노를 애증으로 대한다. 공과 사가 따로 분리된 카지노 생활은, 하루 종일 정이 넘치던 탄광 생활을 그리워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3.3 항쟁의 그 함성과 메시지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거울을 건네주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는 거울을 마주볼 준비가 되었을까? 나는 아직 거울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거울 속에 내가 어디 있는지 찾고 있다. 내가 원하는 작업은 적어도 내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내 감정 중 가장 뚜렷하고 확실하게 뿜어낼 수 있는 건 ‘억울함’이다. 무엇으로부터 오는 억울함인지는 모르지만, 가장 알고 싶은 건 내가 이야기를 누구에게 하고 있으며, 그 억울함 외에 다른 이유이다.
Daily webzine은 어디에? 데일리 웹진은 데일리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숙소와 먼 마을, 제한된 시간과 일정, 노트북의 부재 같은 이유가 있었지만, 환경적으로 좋은 조건이었다 해도 기사에 무엇을 넣을지는 미지수였다. 공공미술 프로젝트에서 죽돌들이 무엇을 보았는지? 작가를 따라다니며 하루 종일 취재? 마을 사람들 인터뷰? 나는 기사를 쓸 때 내가 가장 궁금한 부분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고 나서 인터뷰를 하고 취재를 하는데, 정선에서 내가 한 건 사진을 찍고 모노레일을 타고 경석산을 오른 것밖에 없다. 무생물을 취재한 것도 아니고, 사진을 작품성 있게 찍은 것도 아니다. 초심이 뿌리째 뽑혔다. 데일리 웹진은 어디에 있나? 웹진에 넣을 마음으로 쓴, 다듬지 못한 글을 먼저 적는다.
둘 다 지극히 감상적이고 추측뿐이라 기사로 만들 수는 없지만, 좀 더 시각을 달리 해서 수정할 예정이다. 하지만 데일리 같은 형식 보다는 하자작업장학교 사이트에 리뷰 중 하나로 올리려고 한다. 사북·고한에 일주일동안 머물며 웹진의 목적과 목표가 마을에 적합한지 고민했다. 강원도 깊고 깊은 골짜기에 사는 아는 분의 집에도 컴퓨터가 있는 걸 본지 8년이나 지났으니, 정선의 사람들도 컴퓨터와 인터넷을 알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인터넷을 아는 이상 대부분은 자주 이용할 것이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서로의 이야기를 알고 싶어 할까? 좁은 마을이므로 서로 직접 얼굴을 보고 얘기하는 걸 더 원하지 않을까? 물론 사북·고한을 아는, 방문했던 사람만을 위한 웹진이 아니기 때문에 필요할 수는 있겠지만, 왜 필요한지에 대해 묻는다면 대답하기 힘들다. 이때부터 조금씩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내 작업자로서의 정체성. 그것은 story teller였다.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그리고 질문을 만들어간, 하지만 내 삶과 떨어져있지 않은 이야기들을 나는 내 목소리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 중에서도 나는 정말 뚜렷하고 확고하게, 직설적으로 제대로, 가로질러서 말하고 싶고, 나에게는 그것이 매체언어다. 데일리를 과거에는 놓고 있었지만, 지금부터 데일리를 다른 방식의 후작업으로 가져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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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뭐가 본론이고 뭐가 에필로그인지 모르겠고, 나에게 그런 질문을 했다가는 하루 종일 에필로그와 본론을 두고 고민할 게 뻔해서 되도록 ‘나는’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리뷰를 쓰려고 했다. 물론 내 생각을 담은 리뷰이기 때문에 ‘나는’이 필요한 부분에는 넣었다. 하지만 쓸 수록 지쳐서 결국 ‘나는’ 투성이 리뷰가 되었다. 페차쿠차는 ppt보다는 슬라이드쇼와 낭독으로 할 생각이다. 정선에 가서 얻은 게 정선에서만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닌 것이 슬프고 힘들다. ![]()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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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고^^
정선은 우리나라하고도 강원도하고도 정선의 고한이라는, 혹은 사북이라는 하나의 소읍이지만
넓고 크게 보면 우리나라(과연?)의 모습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포커스가 되기도 하지.
그러니 많은 사람들에게 너의 스토리를 들려주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