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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음악글 수 566
포크 음악은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민속음악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런 식의 질문을 증오했고 무시해도 된다고 느꼈다. 빌리는 나를 불신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래서 오히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나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고 싶지 않았고, 누구에게 어느 것도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p. 14)
그는 가족에 대해 물었다. 나는 우리 집에서 함께 살던 외할머니 이야기를 했다. 외할머니는 고상하고 훌륭한 분이었는데 언젠가 내게 행복은 뭔가 얻으려고 가는 길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길 자체가 행복이라고 말했다. 또 내가 만나는 사람이 모두 힘든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에 친절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p. 28) 나는 음반을 내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지만 라디오에서 틀어주는 싱글 음반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포크 가수, 재즈 가수, 고전 음악인들은 홈에 많은 곡을 넣어 길게 재생할 수 있는 LP음반을 만들었다. 그 음반은 정체성이 있었고 더 크고 생생한 음을 나타낼 수 있었다. LP판은 사람을 끄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앞과 뒤 커버를 몇 시간이고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나는 45s 싱글 음반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어찌됐든 자신의 아이들을 물에 빠뜨린 어머니들, 1갤런으로 겨우 8킬로미터를 가는 캐딜락, 홍수, 구빈원의 화재, 어둠과 강바닥에 있는 시체들을 노래한 것은 라디오 앻가들을 위한 곡이 아니었다. 내가 부르는 포크송에는 편안한 것이 없었고 친절하거나 부드러운 맛도 없었다. 노래가 평온하게 들리지도 않았고 상업적이지도 않았다. 뿐만 아니라, 내 스타일은 너무 변덕스럽고 냉정해서 라디오에서 분류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나에게 노래는 가벼운 오락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노래는 나의 개인교사였고 현실의 변화된 의식으로 가는 안내자였고, 해방된 공화국이었다. 음악역사가 그래일 마커스는 약 30년 후에 그것을 '보이지 않는 공화국'이라고 불렀다. 어느 경우가 됐든, 나는 안티 대중문화와는 거리가 있었고, 대중을 선동하려는 야망도 없었다. 주류 문화를 대단히 시시하고 큰 속임수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것은 마치 창밖에 펼쳐진 얼음 바다 위를 어색한 신발을 신고 걷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었다. 나는 우리가 어떤 역사시대에 속하는지 몰랐고 시대의 진실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것을 고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실을 말한다면 아주 잘하는 일이고 좋은 일이다. 진실이 아닌 것을 말한대도 그것 역시 잘하는 일이고 좋은 일이다. 포크송은 내게 그것을 가르쳤다. 어느 시대든 항상 새벽이 시작되었고, 나는 몇 국가의 국민과 역사에 대해서, 그리고 역사가 언제나 같은 패턴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고대의 어떤 시기에 사회가 성장하고 발전하고 번영했다. 그리고 모범적으로 성숙한 지점에 도달한 후, 노력하지 않는 게으른 시대가 뒤를 이었고 퇴폐가 모든 것을 붕괴시켰다. 나는 미국이 어느 단계에 있는지 몰랐다. 확인하려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거칠고 투박한 리듬이 미국을 흔들고 있었다.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완전히 틀린 생각일 수도 있었다. (p. 43~44) 우리는 삶보다 위대한 노래를 만들고 싶어 한다. 자신에게 일어났고 자신이 보았던 이상한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을 이해해야 하고 고유의 언어로 나타내야한다. 옛 사람들이 노래를 부를 때 그 안에는 대단한 절실함이 들어 있었다. 가끔 노래를 들을 때 마음이 앞서서 뛴다. 사물에 대해 생각할 때도 비슷한 패턴을 볼 수 있다. 나는 노래를 '좋다', '나쁘다' 로 보지 않고 오직 종류가 다른 좋은 노래들로 보았다. 어떤 노래는 실제로 일어난 일일 수가 있다. '나는 꿈에서 조 힐을 보았네' 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조 힐 (Joe hill)이 실제 인물이고 중요한 인물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 확실히 몰랐으므로 민속학 센터에서 이지에게 물어보았다. 이지는 뒷방에서 조에 관한 팸플릿을 꺼내와서 읽어보라고 주었다. 내가 읽은 것은 추리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조 힐은 스웨덴 출신의 이민자로서 멕시코 전쟁에서도 싸웠던 사람이었다. 그는 소박하고 검소한 삶을 살았는데 1910년 노동조합을 조직했고, 자본주의의 임금 체제를 폐지하려고 했던 메시아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기계공이고 음악가인 동시에 시인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를 노동자의 로버트 번스 (Robert Burns, 평등하고 믽적인 공동체의 실현을 사회적 이상으로 삼았던 스코틀랜드의 민족 시인)이라고 불렀다. (p. 61~62) 몇 년 전 위버스의 멤버인 로지 길버트는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나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 여기 그가 있습니다...그를 가지세요, 여러분은 그를 잘 압니다. 그는 여러분의 것입니다." 나는 그 소개하는 말에 들어 있는 불길한 조짐을 느끼지 못했다. 엘비스도 그런 식의 소개는 받은 적이 없었다. '그를 가져라, 여러분의 것'이라니! 나라는 사람은 그때나 지금이나 누구에게 속해 본 일이 없다. 내게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을 지키고 먹여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는데 잘난 체하는 인간들이 언론에서 나를 대변자라느니 심지어 시대의 양심이라느니 하면서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다. 웃기는 일이었다. 내가 한 일이라곤 새로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고 강하게 표현하는 노래를 부른 것뿐이었다. 나는 내가 대변하게 되어 있다는 세대와 공통적인 것이 별로 없고 잘 알지도 못했다. 불과 10년전에 고향을 떠났고 누구에게도 큰 소리로 내 의견을 외친 일이 없었다. 앞날의 내 운명은 삶이 인도하는 대로 가게 되어 있었고, 무슨 문명을 대표하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솔직히 이런 상황이었다. 나는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보다는 목동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명성과 부가 권력으로 바뀐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영광과 명예와 행복을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따금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자신이 상처받기 쉬운 상태로, 보호해야 할 가족과 함께 우드스톡에서 꼼짝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언론에는 내가 엉뚱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었다. 거짓말이 얼마나 심한지 놀라웠다. 세상은 로마 제국으로 쳐들어갈 대군을 인도하기 위해 늘 희생양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미국은 로마 제국이 아니고 누군가 그것을 자청하고 나서야만 했다. 나는 실제로 눈물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어슴푸레한 안개를 응시하며 지적인 몽롱함 속에 떠도는 노래를 작곡하는 포크 뮤지션 이상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엉뚱한 일들이 일어나서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나는 기적을 일으키는 설교자가 아니었다 이 상황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이었다. (p. 127~128) 그의 노래들은 너무나 대단해서 그 책을 읽지 않은 사람도 노래를 통해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내게 있어서 그의 노래는 모든 것이 비명을 지르며 멈추게 만들었다. 나는 즉시 그 자리에서 거스리의 곡 외에 다흔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다른 선택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옥수수빵과 고기와 당밀', '베티 앤 튜프리', '목화를 따요'와 같은 내 래퍼토리를 나름대로 좋아했다. 하지만 당분간 그것들은 뒷전으로 미루어 놓아야 했다. 다시 부를 수 있을지 어떨지도 알 수 없었다. 그의 음악을 통해서 나는 예리하게 초점을 맞추며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거스리의 가장 위대한 제자가 되겠ㄷ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그것은 가치 있는 일로 보였고, 내가 그의 인척관계라도 되는 것 같았다. 멀리서도 그를 본 적이 없었지만 그의 얼굴을 또렷이 인식할 수 있었다. 그는 우리 아버지의 젊은 시절과 닮은 것도 같았다. 그런데 우디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아직 그가 살아 있는지도 확실할 수 없었다. 책을 보면 그는 나이가 많은 사람 같았다. 휘태커가 그의 근황을 알려주었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동부 어디엔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다음 몇 주일 동안 나는 그 음반들을 듣기 위해 린의 집을 들락거렸다. 린은 거스리의 음반을 많이 가진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는 하나씩 하나씩 그 곡들을 부르면서 모든 면에서 노래가 연결되어 있음을 느꼈다. 그의 노래는 광대무변한 우주였다. 확실한 것은 우디 거스리는 나는 본 적이 없고 나에 대해 들은 적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꼈다. "나는 떠나겠지만 이 일을 네 손에 맡긴다. 네가 믿을 만한나는 걸 알고 있어." (p. 262~263) 노래는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이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이 곡은 나를 위해 어떤 장벽을 무너뜨리거나 기적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거의 모든 것은 대게 옛날 포크송이나 우디의 곡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자유롭게 살다가 죽게 해주오'를 연주하기 시작했을 때 내가 썼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어디선가 슬쩍 끼워넣으며, 그것은 베짜는 사람들의 노래라고 말했다. (p. 290) 나는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이기적인 생각으로부터 자신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존슨과, 우디의 열광적인 노조 회합의 설교와, '해적 제니'의 구조를 가지고 순조롭게 앞으로 나갔다. 나는 모든 것이 변화하는 입구에 서 있었다. 곧 짐이 무겁고 생명력이 가득하고 속력을 내는 곳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었다. (p. 306~307) ----------------------------------- 밥딜런이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한 사람들이 그 안에서 마구 회오리치는 느낌이었다. 영화 아임낫데어를 보고 받았던 느낌과 같았는데, 그 밥딜런이라는 사람을 이루고 있는 것, 그리고 우리가 보는 그의 모습은 그 자신의 원천적인 영감으로부터 이루어진 모습 뿐만이 아니라, 그가 겪은 외부의 일들과 사람들로 보여지는 부분이기도 한 것 같다. 그의 음악과 삶이 사람들로부터 평해지고, 떠받들어진 것에 의해 왜곡되었다고 느꼈을 때라든지는 심지어 총까지 들었다는 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전까지 그에 대해서 내가 느꼈던, '저항과 자유를 노래하던 음유시인' 이라는 이미지와 함께 민중의 선두에 서서 전두지휘를 하는 사람일거라는 생각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그대로의 느낀 것을 노래하던 그의 음악 자체가 자유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를 저항가수라고 불러도 될런지 모르겠다. 평전도 읽어봐야지 생각을 일단락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싱어송라이터가 되겠다고 했을 때, 나는 모든 일의 전두에 서서 모든 것을 알고 그것들을 뛰어넘는 예견으로 대중들에게 어떤 대안을 제시해주는 그런 인도자를 생각했었다. 내가 노래하는 내 생각은 이러이러하고 당신들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나를 따르라- 하는 식 말이다. 그냥 그렇게 청와대같은 곳으로 행하는 시위대의 맨 앞에 서는 것이 '참여하는 뮤지션이고, 시대를 노래하는 뮤지션'이라는 생각이었다. 요즘은 조금 다른 생각이다. 내가 관심가지는 현상들이나 사건, 요즘 하고 있는 생각이나 어떻게 살고 있는지까지- 내가 속한 세계를 보고 느낀 것, 그 이야기들을 노래하며 공감을 가지게 할 수 있으며 각자의 목소리를 모을 수 있는 데에 힘을 보태는, 그렇게 좋아하는 음악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생각하는 중이다. 뮤지션으로서, 가장 좋아하고 잘 할수 있는 음악을 가지고 도움을 보태고 싶고, 설령 음악이 그 보탬이 아니더라도 힘닿는 데 까지 열심히 하고 싶다는 그런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 지금은 노래를 쓰고 있는데, 요 2년간 계속 관심가지던 4대강 사업이 드이어 착공되고 말았다. 그것에 대해 노래를 쓰려고 하는데, 더 무언가 나아가서 힘을 보태고 싶다. 이 헛짓거리를 어떻게 막을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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