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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철 <바람그물> 붉은 실 가변설치 2009
수직으로 뻗은 대나무에 붉은 실을 감아 수평적 형태의 그물을 만들었다. 푸른 숲 속의 붉은 실타래는 마치 자연 속에서 이는 바람을 형상화한 것 처럼 보인다. 자연과 환경 문제를 시적으로 해석한 작품이다.

자연과 환경 그리고 미술

글|임재광·미술평론, 공주대 교수

‘자연’이나 ‘환경’ 또는 ‘생태’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엇이 연상될까? 자연보호운동이나 환경운동 또는 지구 온난화, 환경 파괴, 생태계의 교란 등과 같이 오늘날 익숙한 상황들이 떠오를 것이다. “오늘날 가장 근본적인 사회운동은 생태환경운동”이라는 주장에 반박할 여지가 없을 만큼 자연과 환경의 중요성은 확고하게 인식되고 있다. 
르네상스 이후에 형성된 인본주의 정신과 과학기술의 발달로 정복의 대상이 되어버린 자연은 이제 심각한 수준의 파괴로 인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무차별적인 자연 파괴로 인한 생태계의 교란, 지구 온난화로 인한 재앙이 점차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현실이다. 따라서 과학이나 철학에서뿐만 아니라 예술에서도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렇듯 높아지는 관심에 따라 환경이라는 말 또한 과거에 비해 사용 빈도가 높아지고 있는 언어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미술의 영역에까지 확장되어, 이제는 낯설지 않은 용어가 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환경미술’이나 ‘자연미술’이라는 말은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가 아니라 미술가들이 단어를 조합하여 사용한 신조어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신조어가 넘쳐나고, 아직 이는 낮선 말에 불과하지만 대중들에게 쉽게 읽히고 친숙해질 여지가 충분한 용어임에는 틀림없다. 
최근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은 죽음의 징후를 체감한 인류의 살아남고자하는 거의 본능적인 행동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예술은 당대의 거울로서 시대적 요청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적응해 왔다. 날카로운 직관으로 보다 나은 세계에 대한 비전을 누구보다도 앞서 예시한 것은 예술가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경이라는 문맥에서 미술을 본다는 것은 곧 인류의 생존 문제를 성찰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동시대적인 당위성을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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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스케이프 <메디컬 허브맨 카페 프로젝트> 25×20m 2009
건강에 좋은 약초로 대지에 누워있는 인간 형상을 만들었다. 우리 몸 각 부분에 좋은 약초들이 허브맨의 신체 부위마다 자라고 있다. 퍼포먼스와 워크숍 등을 함께 펼친 프로젝트.

환경미술(environmental art)이란?

환경미술의 의미는 넓게 보면 상당히 광범위하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더욱 그러한데, 20세기 미술의 전개와 확장 과정에서 여러 징후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예로 뒤샹을 비롯한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공간 인식, 팝아티스트들의 현실 인식, 그리고 해프닝과 이벤트, 총체적 환경 인식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환경미술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60년대 말이었다. 삶과 유리된 모더니즘에 대한 회의가 등장함에 따라 자연적 사회적 환경의 일부로서 미술에 대한 의식이 표면화된 것이다. 도시의 시각적 환경을 형성하는 공공조각이나 벽화와 같은 것은 사회적 환경의 일부로서 삶과 밀착한 형태의 미술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하드웨어적 환경미술뿐만 아니라 백남준의 비디오 위성중계와 같은 소프트웨어적 환경미술이 나오기까지, 패러다임의 변화가 진행된 것이다.
환경미술 중 가장 주목 받는 것은 대지미술(earth art, land art)이다. 그러나 대지미술은 환경 보호보다는 예술 자체를 우선시하는 태도로 인해 생태계와 관계된 여러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대지미술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모더니즘적 시각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볼 수 없다. 이들에게 예술이란 자연을 부리는 영웅적 행위이며 행위의 대상이 캔버스에서 자연으로 확장된 것에 다름아니다. 
이와 달리 자연에 대한 외경심과 환경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에서 출발한 작가들도 있다. 예술가의 개입은 최소화하면서 자연과 융화된 풍경을 연출하는 리차드 롱이나 앤디 골드워시가 그 예이다. 이들의 예술은 생태학적 세계관에서 출발한다. 동양의 무위자연적 노장사상과도 일맥상통하는 이러한 경향은 한국에서 특화된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금강 유역을 근거로 사계절 연구를 통해 개념적 작업을 진행해 온 ‘야투’ 그룹은 자신들의 작업을 ‘자연미술’이라 칭한다. 환경미술이라는 용어에서 진일보한 자연 친화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일부에서는 더 나아가 ‘생태주의미술’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하는데 자연과 생태계에 대한 근본적인 연구와 접근을 통해 환경 보호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용과 모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한국의 현실에서는, 특히 용어의 정의가 마땅치 않은 경우가 많다. 오늘날 환경미술 또는 자연미술 생태주의미술로 불리는 미술의 형태는 엄밀히 분석하자면 실상 그 내용이 대체로 비슷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제로 현장에서는 이런 용어들이 별 구분 없이 혼용되어 사용된다. 심지어는 야외설치미술 자연현장미술 공공미술 등의 용어도 뒤섞여 사용되고 있다. 
여러 면에서 비슷하지만 사용하는 명칭에 따라 지향점이 달라진다. 〈태화강국제설치미술제〉의 경우 중공업의 메카인 울산의 도심 중심부를 관통해 흐르는 태화강 둔치 일원에서 열리는 행사로 ‘설치미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현대 사회의 과도한 물질적 팽창에 대응하는 미술의 형이상학적 탐구 방식을 제안”한다는 기획자의 표현에서 짐작되듯이 도시의 하천이라는 환경적 요인을 중심에 두면서도 작업의 방향은 좀 더 작가주의적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환경미술의 요체는 내용에 있다. 환경이라는 말이 내포한 의미가 가장 중요한 관점이다. 인터넷 사전 브리태니커에 의하면 환경(環境, environ-ment)이란 “생물체와 생태 군집에 작용하여 궁극적으로는 이들의 형성과 생존을 결정하는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요인들의 복합체”를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생물학적 해석이며 좀 더 확장된 의미를 적용한 사전에 의하면 “생물을 둘러싸고 밀접한 영향을 맺고 있는, 자연적 사회적인 조건과 상황” 즉 생물에게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주는 자연적 조건이나 사회적 상황을 말한다. 보통 자연환경을 가리키지만 사람에게는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사회적 심리적 교육적인 환경 또한 중요하다. 따라서 환경은 인간 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치며, 반대로 인간이 환경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이렇듯 환경은 우리 인간의 생활과 너무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과 연관이 있다. 따라서 미술도 예외일 수 없다.
환경미술은 내용적으로 자연과 환경에 대한 인식과 이에 따른 언급 또는 발언이 뒤따르므로 교훈이나 계몽적인 내용 또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거나 경고의 메시지를 담는 작품이 많다. 이렇듯 환경미술은 ‘미술을 통한 일종의 사회운동’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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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남희 <조용한 세계, 양평> 혼합재료 가변크기 2009 
강변 곳곳에 표지판을 제작했다. 간략한 형상과 함축적인 텍스트로 공공적인 작품 내용을 자연 속으로까지 끌고 갔다. 소음이 넘쳐나는 현대 사회에서 침묵과 고요의 가치를 일깨우려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공공성, 공공의 영역으로 나오기

환경미술은 그 내용에 있어서, 환경이라는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기반에 대한 것을 다룬다. 설치되는 장소 또한 대중이 공유하는 공간이므로 무엇보다도 공공성이 요구되기도 한다. 따라서 환경미술은 공공미술의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현대미술은 고급화, 개념화의 길을 걸으면서 대중으로부터 분리되었으며 점차 소비와 수요로부터 소외되었다. 따라서 생존에 대한 문제 인식과 문화적 비평적 반성이 필요하였고,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순수 예술은 대중의 가치를 재인식하고 소통과 공공성을 다시 강조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생존을 위해 ‘아방가르드’를 ‘공공성’이란 전략으로 수정한 것이다.
최근 우리 미술계에서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는 용어는 ‘공공미술’이다. 그동안 환경미술이라는 테두리에서 행해지던 미술의 형태들이 공공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말만 바꾼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공공미술 프로젝트’라는 새롭게 유행하는 전시 형식은 빠른 시간 안에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환경을 개선하고 경관을 꾸미는 미술 행위가 일반화되었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미술의 위치를 삶의 현장으로 끌어내림으로써 대중적 친밀감을 형성하는데 공헌하였다. 이는 정치 사회적인 관점의 변화에도 한몫하고 있다. 언론의 경우 신문이나 방송과 같은 대중매체의 관심을 끌면서 미술전문지와 같은 미술계 주류 매체를 당황하게 하고 있다. 아울러 지역의 정치인이나 행정책임자에게도 매력적인 이벤트로 부상함에 따라 재정적 행정적 지원을 이끌어내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이는 향후 미술 활동의 새로운 지평을 예고하는 것으로, 주민과 함께하는 미술이라는 모토 하에 지역 사회에 일정한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그 존재 의미가 더욱 확고해질 것이며 영향력 또한 높아질 것이다. 
한편 환경미술이 환경예술품, 환경조각품, 건축물 부설 장식품으로 치부되는 것은 공공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개인적인 작업을 단지 외부로 이동하여 건축물의 부속품으로 전락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한 공공의 이해와 소통에 대한 사회적 요구에 직면하게 되었다. 건축비의 일부를 예술장식품으로 사용하도록 되어 있는 현행 제도가 공공예술의 지원으로 전환되지 못하고 상업적 작품을 장소적 맥락 없이 억지스럽게 갖다 놓거나 일부 업체들의 사업적 전유물로 유지되어 오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미술의 공공성에 대한 의미를 찾는 것은 더욱 절실한 시대적 요청에 의한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할지라도 대안적 방법으로 공공미술프로젝트가 탄생한 것은 바로 그동안 존재해 왔던 환경미술운동 덕분이라 할 수 있다. 미술의 공공성은 생태주의적 거대 담론, 구체적이고 분명한 수혜자가 있다는 점, 무엇보다 실천적인 내용과 함께 발전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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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사코와 토모야 수기우라, 쇼와 여대 수기우라 실험실 <눈 속의 눈> 폴리프로필렌 시트, 줄 10×20m 2009 
스티로폼으로 2000개의 눈송이를 만들었다. 마치 하늘에서 거대한 함박눈이 쏟아 내리는 풍경을 떠올린다. 한여름에 눈과의 만남과 그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작품. 에치고는 세계 유수의 호설지역이다. 평균 적설량은 3m.

지역성, 지역으로 돌아가기

환경미술은 특정 지역의 환경적 요인을 기본으로 삼는 장소특정적 미술(Site-Specific Art)이다. 1980년대 초반부터 야외 자연 현장에서 작업해 온 ‘바깥미술회’의 초기 명칭은 활동 장소의 지명인 ‘대성리’였다. 야투의 활동 근거지인 공주의 연미산에는 ‘연미산 자연미술공원’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이곳은 자연미술비엔날레가 열리는 장소로서 공주시에서 자연미술공원으로 지정했다. 따라서 비엔날레에 설치되는 작품들은 이곳의 장소적 특성을 벗어날 수가 없다. 물론 이는 작가에게는 표현상의 한계가 되기도 한다.   
장소특정적 미술은 갤러리나 미술관 같은 화이트큐브에서 벗어나 자연과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기존의 미술과 분명 차이를 갖는다. 특히 자연을 중요시하는 작가들에게는 자연 현장에서의 작업이 핵심 요소가 된다. ‘야투’의 ‘사계절 연구’는 계절마다 열리는 자체 워크숍을 개최하여, 관객이나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순수하게 자연과 대면하여 자연 현상에 주목하는 작업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경우, 장소는 작업의 향방을 결정짓는 절대적 요소가 된다.    
자연 현장뿐만 아니라 도시의 환경 또한 환경미술의 주요 무대로서 특정적 장소가 된다. 환경미술은 도시민들에게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면서 지역의 문화와 역사적 특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지역성을 부각시키는 좋은 수단으로 볼 수 있다. 경기도 안양시의 〈공공미술프로젝트〉나 서울의 〈도시갤러리〉 같은 예를 도시 지역의 환경미술로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구도심이나 도시 변두리의 재개발과 관련해서 국제적으로 관심을 끌고 있는 대전의 〈무지개 프로젝트〉 또한 마찬가지다.
지역성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곳은 일본의 에치고 츠마리 지역의 예술행사이다. 안양의 공공미술 추진단에서 벤치마킹했고, 최근 양평에서 있었던 양평환경미술제의 경우 정치인이나 행정담당자들까지 이 행사를 현장조사하면서 참고했다고 한다. ‘대지의 예술제’라는 명칭의 〈에치고츠마리트리엔날레(Echigo Tsumari Art Triennial)〉는 인구 고령화로 인해 문제화되고 있는 농촌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고 새로운 지역적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 2000년부터 3년에 1번씩 개최되는 미술 축제다. 숨겨진 지역 특유의 다양한 가치를 미술 작품 안에 담아내고 보여줌으로써 지역 재생을 도모하는 것이 이 행사의 목적이다. 이렇게 기력을 잃어가던 시골 마을이 예술 축제로 인해 활력을 되찾고 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관심을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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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오 호리카와 <하늘 포획기 09> 거울, 철, 페인트, 유리, 돌 2009
하늘을 반사하는 거울을 만들었다. 프레임 속의 하늘은 시시각각 변하는 ‘움직이는 회화’다.

소통, 주민과 소통하기

환경미술은 ‘소통의 미술’이다. 그동안 미술은 정치적 비판부터 민중 계몽까지 은유적으로 혹은 노골적으로 대중과 소통해 왔다. 더구나 작가가 개인 작업실에서 나와 공공의 장소로 이동했다면 대중과의 소통은 불가피하다. 공공장소에서의 미술을 추진하는 행위 주체로 예술가 문화기획자 지역주민 지방자치단체들이 참여하게 된다. 그러니 미술가가 독자성이나 창의성만으로 밀어붙일 수는 없다. 여기서 쌍방향의 소통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예술 행위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진정한 소통을 문제시하기 시작한 것은 그다지 먼 과거의 일이 아니다. 미술가들이 완전한 자유 의지로 작업을 진행하는 것은 불과 두 세기 내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르네상스 이전의 미술가들은 주문자 즉 수요자와 대화해야 했다. 독자적인 작업에 익숙한 오늘날의 미술가들에게는 낮선 상황이지만 공공장소에서의 작업에서 일방통행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미술장식제도에 의한 환경미술도 주민 의사를 무시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아파트단지와 같은 주거 환경에 일방적으로 설치되던 조형물이 주민들에 의해 철거되기도 하는 등 세태가 달라지고 있다. 주지하듯이 미국에서 미술장식제도는 작가보다는 공공장소, 도시, 그리고 주민을 위한 제도로 진화하였다. 즉 건축 속의 미술에서 공공장소 속의 미술로, 그리고 도시계획 속의 미술에서 새로운 장르의 공공미술로 발전하였다. 여기서 새로운 장르의 공공미술은 작품 설치가 목적이 아니라 주민들과 함께 하는 프로그램, 교육, 과정 중심의 작업, 미술 행동 등 비물질적인 미술 활동을 중심에 둔다. 또한 미술이 직접적으로 도시 경관에 기여하기보다는 심리적 문제, 소외 상처의 치유와 배려, 민주주의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도록 요구된다. 즉 도시를 이해하고 소통하고 참여할 뿐만 아니라 주민이 주도적으로 프로그램을 이끄는 단계까지 나아갔다. 오늘날과 같은 ‘거버넌스 시대’에 시민들의 참여가 강조되고 있다. 
환경미술은 정치적인 미술이다. 과거 민중미술이 독재에 대한 저항의 표현으로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섰다면, 환경미술은 현대의 가장 큰 이슈인 환경 파괴에 대한 경고와 아울러 환경 보호운동을 주창하는 정치적인 경향의 작업이다. 현재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대규모 행사들은 지역 사회와 정치권의 동의와 협력에 의해 실현되고 있다. 지역의 정치인들은 환경미술의 가시적 효과를 활용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으며 미술인들 또한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환경미술이 시작된 초기부터 작가들은 미술을 사회 개혁의 수단으로 보았다. 대표적인 예로 해리슨 부부는 대규모 농업이 사막에 미치는 영향이나 콜로라도 댐에 의한 생태계 변화, 공해로 인한 산성비 등 여러 환경문제에 대한 의사과학적 조사와 실험 결과를 그림 사진 모형 등 다양한 시각 자료와 텍스트로 보여주었다. 그들은 미술을 사회 개혁의 수단으로 본다는 점에서 요셉 보이스와 입장을 같이 한다. 그들의 작업은 사회적 사실주의인 동시에 자체로 환경보호운동이 된다. 이러한 예를 보더라도, 환경미술은 정치적인 예술이자 소통의 가장 적극적인 수단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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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화 <"Congratulation!"> 혼합재료 20×9m 2009
현대 중공업의 중장비와 임시로 세운 건설공사용 중장비 사이를 오방색 천으로 뒤덮었다. 마치 공연 무대에 기계가 주인공처럼 버티고 서 있어 산업도시 울산의 이미지를 압축했다.

창조성, 예술의 본질로 돌아가기

미술이 작업실을 나와 산과 들, 거리로 나섰다고는 하나 근본적인 속성을 버린 것은 아니다. 예술의 독자성이나 창의성과 같은 작가 정신은 아직도 유효하다. 반면 환경미술이나 자연미술 또는 야외설치미술이 집단적으로 자기 복제의 늪에 빠지고 있는 것은 우려할 만한 일이다. 어딜 가나 비슷한 형태의 작품들이 다른 작가에 의해 반복 제작되고 있다. 여기서 본 작품을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고 작년에 본 것을 올해 또 본다. 이것이 같은 작가의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몇몇 작가들이 그들도 모르는 사이 동어 반복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진정한 환경미술이란 단순히 환경에 대한 동어반복이 되어서는 안된다. 작업실 속의 개인 작업을 밖으로 옮겨 놓는 정도의 단순한 개념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자연과 환경에 대한 심도있는 탐구 속에 우러나오는 전문적이고 집중력있는 작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