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언급한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레너는 디자인과 저술, 교육을 통해 문화 형성에 이바지하려 했다. 그는 물질적, 정신적 형태를 망라해 새로운 삶을 조형하는 일에 미적, 지적 능력을 쓰고자 했다. 그가 말한 "형태감성"은 사소한 유행이 아니라, 제1차대전 후 새로이 떠오른 사회관계가 겉으로 드러난 표지였다. /레너는 이젤 회화로 생계를 꾸리기보다 생애 대부분을 '응용미술'에 바치면서, 활자체나 책 같은 물질적 일용품에 높은 문화 수준을 적용하려 애썼다. 이와 관련해 그는 자신이 현대인의 원형으로 여긴 괴테의 충고를 학생에게 설파하곤 했다. "우리 자신이 아니라 바깥으로, 세상으로, 먼 곳이 아니라 우리 주변으로, 손이 닿는 것들로 시선을 옮겨야 한다." (p.18)

학생들은 본문 조판에 로마체, 산세리프체, 고딕체를 두루 썼고, 때로는 같은 표제지를 예컨대 동시대 양식과 보도니 식 고전 양식으로 모두 조판해 보라는 과제를 받기도 했다. 레너는 그런 형식을 익힌 다음에야 역사적 형태, 타이포그래피 형태를 비판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진실로 "현대적"인 사람이라면 "낡았지만 가치 있는"방식을 단순히 "비현대적"이라며 무시하지는 않는다고 믿었다. (p.63)

그는 기술자들에게 예쑬적 가식이 없으며, 그렇기에 그들은 순수한 기능적 해결책으로서 최신 재료를 이용했을 뿐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기술자들이 "전통이라는 포장을 얄팍하게 씌우는 일"에 현혹되지 않고 주어진 과제에 냉정히 반응했기에 "우리 시대의 양식"을 낳았다고 보았다. 레너는 그런 노력에서 일상생활에 '예술'을 다시 도입할 희망을 찾았다. 1926년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순수한 회화로 고상한 부르주아 생활을 꾸리기는 어렵다. … 물론 무척 슬픈 일이다. 그러나 이 몰락은 우리에게 더욱 새롭고, 폭넓고, 견고한 예술적 토대를 찾으라는 임무를 준다." 그는 "기술이 곧 예술인" 상황을 상상했다. (여기에서 그는 '기술'의 그리스 어원, 즉 '예술'을 뜻하는 '테크네'[techne]로 돌아간다.) (p.67)

…그러나 레너는 기하학적 원리에 따라 작도된 문자 사이의 주제적 유사성이 일관성을 부여해 줄 것이라 고집했다. "여러 개별 부호를 통일해 주는 것은 부분적 특징이 아니라 '정신적 유대감'이다." 일찍이 『예술로서 타이포그래피』(1922)에서 그는 대문자 획의 기능이 그 자체로 "방향을 가리키는" 일이 아니라 "표면적을 구획하는"데 있다고 설명했다. 결국 레너는 문자 자체를 이루는 부분뿐 아니라 문자 내부와 사이에 형성되는 형태의 균형도 다루었던 셈이다. 그는 자신이 살아 있는 문자가 아니라 활자체의 '관념'을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한 듯하다. (p.98)

"오늘날 서체가 객관적이고 보편적이어야 한다고 해서, 강한 개성이 아니라 약한 개성을 원한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자흘리히카이트, 봉사, 과업에 철저히 빠져드는 태도를 요구한다. 일반적으로 오직 강한 개성만이 이런 일을 감당할 수 있다." 레너는 푸투라가 독특하게 생긴 여러 '예술가 활자체'와 달리 조판가에게 활자체에 어울리는 양식을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현대 타이포그래퍼가 자신만의 예술 개념을 실현할 수 있도록 중립적 구성 요소를 제공"한다고 지적했다. (p.111)

레너는 모든 명사에 대문자를 쓰는 일이 문장 서두에서 마땅한 강세를 빼앗는 "낭비"라고 여겼다. 그는 독일어에서 대문자 남용이 '독재적'이라고까지 단정하기는 꺼렸지만 그것이 확실히 '민주적'이지는 않다고 인정했고, "'공동체'에 열광하는 젊은 층이 대문자를 전면 철폐하기 원하는" 이유를 이해했다. 그는 대문자 사용 제한에는 동의했지만 바우하우스인들이 대문자를 완전히 제거하자면서 내놓은 "비논리적 근거"에는 반대했다. 레너는 바이어가 주장한 대로 소문자만 타자하면 절약할 수 있다는 시간이, 결국은 쓰는 사람의 시간만을 뜻하지는 않는지 의심했다. 레너가 보기에 "표기법은 읽는 이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p.117~118)

우리가 사는 새 시대는 모든 일이 이미 일어났다는 명제에 둥지를 틀어 준다. 그러나 여기 독일에서조차 여러 겹으로 쌓인 사건에서, 전례 없이 새로운 흐름과 그에 대항하는 흐름 사이에서, 우리 시대가 다른 시대와 어떻게 다른지를 확언하기는 무척 어렵다. 이는 우리가 여전히 세계대전의 그림자 안에서 산다는 사실에 기인하다. 전쟁은 여전히 너무나 가까운 경험이기에, 우리는 전에 일어난 일을 평가할 능력을 잃어버렸다. 전쟁이 낡은 시대와 새로운 시대를 나누어 주는 균얼이라도 되는 양, 우리는 전전(戰前)과 전후(戰後)를 운운한다. 전전에 일어난 일은 심연 속으로 가라앉아 버린 듯하다. 19세기의 목소리는 무덤에서 울리는 소리처럼 먹먹해졌고, 18세기에 대해서는 이제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어졌다. 그 결과 지난 14년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일어난 일이 마치 지나치게 가까운 곳에서 촬영한 물건처럼 잘못된 원근감을 주게 되었다. (p.129)

1934년 2월 16일, 바이에른 주지사 프란츠 폰 에프는 공산주의 활동이 아니라 단지 "국가가 믿을 수 없는 인물"이라는 근거로 레너를 마침내 장인학교 직위에서 영구 해임했다. 훗날 레너는 자신이 "정치적으로 믿을 수 없는 인물"로 불렸다면서, "나치스의 전투 방식은 언제나 독일어를 조금도 거리낌 없이 왜곡했다"라고 지적했다. (p.136)

고딕체는 나치 정권의 문화 선전 활동에서 일부분을 이루었고, 공공기관은 고딕체 사용을 부추겼다. 고딕체는 오직 독일에서만 쓰였고, 나치스는 고딕체가 본디 독일적이라는 대중적 인식을 강조함으로써 그 상황을 이용하려 했다. 오직 '독일 서체'만이 독일어에 어울리는 서체라며 홍보하는 구호들이 스티커에 찍혀 나왔다. (p.148)

…기술적 조건과 미적 조건을 만족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의뢰인의 목적에도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문은 잠재적 독자를 무시하지만, 레너가 본문에 적은 구절들은 독자를 깊이 배려하는 접근법을 분명히 암시한다. 예컨대 레너는 목록을 읽는 독자의 전략과 시선 ㅇ동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해석했음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런 경험을 일반화하려 노력했다. 공감을 상상하는 연습이었다고도 볼 만하다. 이런 측면에서 그가 복잡한 정보를 디자인하는 일에 쓴 접근법은 1960년대에 일부 디자이너가 수용해 '정보 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사용자 중심 접근법을 예견했다. (p.154)

"단순한 형식주의 타이포그래피는 공간을 장식적으로 분할하는 일로 시작한다. 반대로 유기적이고 의미 있고 목적에 맞는 타이포그래피는 표면을 분할하기보다 글을 분할한다." 레너는 그런 요소들을 조화로이 통합하는 고전적 예술가의 임무를 재차 강조했다. "그렇지만 실제 예술적 과제는 전체에―실용적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분할했음에도―형태(Gestalt)를 부여하고, 그럼으로써 어떤 부분도 고립되어 보이지 않게, 모든 부분이 서로 연관 뱆도록, 모두가 조화를 이루도록 정돈하는 일이다." (p.156)

레너가 보기에 두꺼운 책을 선호하는 태도, 즉 무게와 가치를 동일시하는 태도는 독일 민족성에 숨은 결점을 드러냈다. "히틀러에게도 악명 높은 동기가 된, '위대성에 대한 치명적 욕망'"이 그것이었다. 레너는 기념비를 좇은 호화 장정판을 경멸했는데, 나치스도 그런 경향을 보이자 그의 혐오감은 더욱 깊어졌다. 그는, "사람에게 필요한 바가 사물의 척도로 쓰이지 않는 순간, 야만이 시작된다."라고 사려 깊게 지적했다. (p.183)

그가 보기에 타이포그래퍼의 임무는 모든 타이포그래피 변수를 질서 있게 조절하는 일이었다. 활자 크기, 활자체, 간격 같은 요소를 "명쾌하게 위계 잡힌 대비 효과"로써 조화하면, 이질적인 타이포그래피 형태들을 "유기적 총체"로 결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 시각 현상을 이해하는 데 기하학적 질서가 근본ㅇ 된다는 믿음을 고수했다. 여기에서 그는 장식적인 기하학적 형태가 아니라 단순한 형태로 이루어진 밑바탕 그래픽 구조를 뜻했다. (p.190)

레너가 디자인에 접근한 방법에는 글쓴이와 읽는 이 모두에게 봉사한다는 개념이 있었다. 활동 초기부터 그가 한결같이 견지한 이 개념은 그 나름의 현대적 타이포그래피 접근법에서도 핵심을 이루었다. 레너는 디자인인 척하지만 실제로는 무절제한 예술적 자기표현에 그치는 작업을 무책임의 극치라고 보았다. 그는 추상미술과 비재현 회화를 의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그는 세잔의 작업을 미술사에서 정점으로 여겼다), 쓸모를 무시하는 디자인도 인정하지 않았다. (p.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