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규 시인께서는, "시인께선 시를 쓰기 위해 찾아다니는 것이 있으신지"라고 질문했을 때 "없었습니다. 이제 생겼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조원규 시인께서 말하신 이제 생겼다는 것은 강의 중에 큰 비중을 차지했던 문학 공동체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문학이 죽었다라고 말하는 시대에서 기존과는 다른 문학을 상상해 보는 것, 시민으로서 시민에게 돌려주는 문학, 문학상에 연연하지 않고 삶의 장면들을 문학이라고 말하는 것, 공동체적 가치로 대응하는 문학. 그리고 이렇게 공동체에 대한 생각, 혹은 '말을 걸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기 까지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하셨다. 

내가 '말을 걸고 싶다는 생각이 창작하는 사람들한테 자연스러운 것인지 어느 순간에 의식하게 되는 것인지'라는 질문을 한 이유는, 부자연스럽게도 나에겐 항상 내 영상으로 말을 걸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무엇을 말할 것인가' 보다 말을 걸어야 된다 라는 생각이 먼저 온 듯하다. 조원규 시인께서, 서른살이 넘고 갑자기 말을 걸고 싶다는 것을 느끼고는 2년 동안 하루도 안 빼놓고 가슴이 아팠고, 심지어 20대 때 감정을 차단한 것에 대한 복수를 당했다라고 표현한 것을 듣고는 '말을 거는 것'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시인에게는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서 상대방을 치유하는 것, 세상이 치유되지 않으면 내가 나을 것 같지 않은 기분. 처음 치유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는 어색함이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아픔을 느끼고, 치유를 하고, 이런 것이 시인과 세상의 관계라고 표현한 것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나는 말을 건다는 것이, 사람들이 못 보고 있는 것을 감지한 예술가가 소개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매번 '시'라던가, 예술작품을 볼 때도 그것이 나에게 끼치는 영향, 세상에 끼치는 영향만을 생각했다. 그걸 만든 사람 또한 세상의 일부로서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조원규 시인께서 말씀하셨던 세계를 구한다는 것은 내가 나의 내면을 구하는 것. 내가 세상 혹은 다른 사람들을 말할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닌, 서로 끊을 수 없는 협조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이 인상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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