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업을 통해 배운다.

1 하자와의 첫 만남
 5년 전 나는 내 가슴을 불쏘시개처럼 뜨겁게 만드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당시 내가 억압당하고 있는 것. 이해할 수 없는 아빠의 행동과 학교 안에서 두발자유냐 두발자율이냐 혹은 체벌문제가 옳으냐 그르냐에 분노를 표하며 집과 학교 안 밖으로 집회를 하러 다녔다. 그것을 통해 만났던 운동 판의 20대, 30대들과 혁명이란 단어를 서슴없이 쓰며 지금 생각해보면 단편적이고 욕지거리에 그쳐버리는 대화를 일상적으로 나누었다. 이때의 경험을 단순화시켜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빠와 학교, 선생님에 대항하며 짧은 시간 동안 굉장한 에너지를 발생시킨 시간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면서는 더 이상 일반학교나 선생님은 필요치 않으니 다른 교육을 받고 싶다고 말하면서 내게 ‘도망치는 거냐?’ 라고 반문하던 운동판을 떠났다.
 그렇게 오게 된 하자센터는 나에게 별천지였다. 공존과 배려에 대한 일곱 가지 약속과 멍석방의 멍석을 보면서 가슴 떨리면서도 학교라면 당연히 이래야지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하자센터가 지키고 있었던 약속과 문화들이 얼마만큼의 노력과 기다림이 요구되는지 짐작하지 못했다.
 하자작업장학교에서의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무대나 공연을 중심으로 협업을 요구하는 작업들을 해왔으며 때마다 positioning을 달리하곤 했다. 내가 작업장학교로 입학을 할 때에는 희망 전공을 적는 칸이 있었다. 꼭 하나 정해서 들어가야 하는 줄 알고 중학교 때 잠깐 연극부 했던 것이 떠올라 연극이라고 썼었다. 그 때 이후로 마치 물살 타듯이 공연 작업이 계속 되었다.

2 공연단 - 촌닭들 첫 팀 활동 [독불장군]

 길찾기 시절 처음으로 들어가게 된 팀은 공연단이었다. 당시 담임 뮤즈와 부담임 도를 주축으로 이루어졌던 우리 팀은 싸우기도 많이 싸우고 울기도 많이 울며 6개월 동안 여러 파티나 공연을 기획하며 보냈다. 뮤즈는 우리 안에서의 파트너십과 끈끈한 정이 만들어지기를 바랐지만 생각처럼 그것들이 잘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휘는 그것을
  하자야 원래 언제나 변화가 오고 그 변화야 말로 역동성을 설명하는 것들 중에 하나지만 특히나 내 기수와 한 세대 후 기수는 이른바 낀 세대로 학교가 어느 정도 안정기에 돌입할 때까지 죽/판돌들마다의 다른 가치들과 말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것은 다양하다면 다양할 수 있는 개성들의 혼합과 의외성을
 그렇지만 죽돌들 스스로가 다양함을 발견하고 어떤 논제들이 토론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냐는 질문에 나는 부정적이라고 답하고 싶다.
 
 촌닭들은 밤낮 관계 이야기하는 것보다
팀장을 하게 된다는 것, 게다가 담임이 없다는 것은 당시 나에게 큰 부담이었다. 설레기도 했지만 두려움이 더 컸다. 책임감이 막강한 것처럼 느껴졌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얼마나 큰 것을 놓치고 있었나?
왜 그 공연을

3. 이야기꾼의 책공연 [그 때 그 사람을 재조명하다]
 2008년 겨울부터 이야기꾼의 책공연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되었다. 내가 몸을 담았던 소리 위 2.0, 촌닭들안에서는 또래친구들을 만나며 진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니어에 접어들면서는 구도가 조금 바뀌면서 내가 가장 어린 사람이 되면서 나보다 앞서나간, 경험이 많은 '선배집단'을 만날 수 있었다. 선배들을 만난다는 것은 나의 과거-미래와 계속 만나는 과정이었으며 이 시간들은 나에게 굉장히 특별했다. 특히 선배집단들은 이미 하자 밖에서 프로페셔널한 판에서

 약 6개월간의 인턴십을 끝내고 2009년 여름 6월에 정식 직원으로 계약하게 되었다. 생각 ‘타협’ 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잊은 것이 아니라 내가 계속
그것은 내가 셀러리맨이 아니라 작업자로 불리려 하는 의지이며
작업을 사랑하는 아마추어

 나의 인턴십과 맞물려 2009년에 접어들면서 하자센터의 메인 사업이 하자작업장학교에서 사회적기업을 인큐베이팅하는 ‘창프로젝트’ 로 변하게 되었다. 하자센터 안에 예비 사회적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는 움직임으로 사업 설명회가 열렸다. 이야기꾼의 책공연 팀에는 약 삼십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였다. 각자가 이곳에 왜 오게 되었는지, 어떤 바람을 갖고 있는지 자유롭게 이야기가 오가면서 나는 새로운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고민이 들었다. “하자는 이미 십년 정도의 역사를 갖고 있고 그건 대부분 십대, 이십대들의 문화인데 그 문화는 어디로, 어떻게 가는 걸까?” “과연 성공적인 실험일까?”

 나는 하자의 문화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대안적인 문화를 원하는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그리고 그 만큼의 긴 시간을 통하여 만들어진 독특한 문화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문자만으로 정의내리기도 힘들고 쉽사리 표현할 수 없는 문화도 있다. 예를 들면 별명 문화나 각자의 Boundary를 존중하여 주기. 또한 무리 안에서의 나의 정체성과 경험들을 스스로 정의내리기.

 나는 내가 하자작업장학교에 있었던 그리고 지금 있는 죽돌, 판돌처럼 하자의 문화를 지켜가는 사람이라는 생각 하고 있었는데 하자센터에서 그것이 없어지면 어떻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슬프면서도 화가 났다. 예비 사회적 팀마다 하자 판돌들이 인큐베이터의 역할로 들어간다 할지라도 하자의 문화가 제대로 뿌리내려질 수 있을까?

 때문에 더더욱 내 태도나 위치에 관한 고민이 들었다. 지난 하자의 문화를 모르고 이곳에 온다면 어떤 문화가 만들어질지 걱정이 되면서 적어도 우리 팀 안에서의 문화는 잘 형성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특히 나이, 계급에 관한 일반적인 관습, 습관은 스스로 알아차리기도 힘들뿐더러 제도적으로 개인이 초월하기 힘든 문제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가장 민감한 부분으로 다가올 것 같았다.
 내가 보기에는 하자작업장학교에도 나이에 관한 미묘한 일들이 많다. 그런데 그것은 나이라기보다는 ...? 예를 들면 시니어들과 주니어들의 차이. 길찾기들이 해주어야 하는 선과 시니어들이 해야 하는 선이 다르다. 어쩌면 시니어들이 조금 더 많은 책임감을 갖고 일에 임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나이, 계급에 관한 차별 아닌 차별 예를 들면 아주 사소하게 팀에게 음식이 오면 나이 많은 사람부터 챙겨준다던지, 내가 어리기 때문에 어떤 것을 양보 받는다던지 하는 것이 나쁘다고 볼 수 는 없지만 그것이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알게 되었다. “~는 어리니까 좋겠다.” “젊은 나르샤” 등 쉽게 오가는 말들이 나의 위치를 구속시켰다고 느낀다. 때때로 나를 좀 더 낮게 positioning하거나  라는 생각이 들게 되더라.
 프로젝트가 하나 진행될 때도 거기에 참가하는 모든 이가 동등한 개체로 프로젝트를 꾸리고 가게 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유연하게 대처할 것인지,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 모습이 어떻게 보여 졌으면 좋겠는지 고민을 해야 한다. 내 이미지를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윗글에 선배에 관한 얘기를 잠깐 언급했지만 인턴 초반에는 팀 안의 이십대에게 많이 실망했다. 아마 십대로서 이십대에 갖고 있었던 로망이 있었나보다. 이십대는 열정적이고 자신의 분야를 열심히 하는, 굉장히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갖고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지식도 많고 꿈도 큰 삼십대, 사십대에 비해 이십대는 너무 초라해보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야기꾼의 책공연 멤버들과 실제작업을 하게 되면서 더욱더 깊게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내 생각과는 달리 다들 자신만의 노하우와 시선이 있었다. 말이 멋들어지거나, 뽀대 나지 않아도 몸에서 풍겼다. 그건 오랜 시간 동안 일상에서의 꾸준한 훈련에서 나오는 오로라 혹은 노하우였다. 또래 집단들과 있을 때는 아이디어가 많아도 실제로 그것을 구현하는 하는데 많이 애를 먹고는 했다.

 사회에서는 꾸준함에 관한 평가가 어떻게 매겨지는지 알 수 있었고 내가 괄시했던 부분 중에 하나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4. 자기 동력 찾기
 프로페셔널과 아마추어도 대체 아마추어 프로페셔널로 넘어가는 그 경계는 뭘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어 보았다.

같이 일하는 것에
기업이 기업으로서 존재하며 안으로 얼마나 좋은 모습을
진짜가 무엇이냐.

 이때부터 학교에 대한 ‘첫사랑’을 느끼게 되었다. 
인턴십을 나가는 사람은
뒤돌아 보면
공동작업을 통하여 나의 판을 짜기.
 내게는 매체가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어떤 것을 잘 설명하기 위해서
때문에 나는 학교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으며 지금 일어나고 있는 각자의 가치에 관한 토론,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의 문제로서 어떤 것을 더 추구할 것이냐, 취미나 지식에 관한 공유가 아니라 지혜에 관한 이야기가 오간다는 것은 나에게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자기 작품
다양함
옳고 그름

 사회적으로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프로페셔널한 판에서 추구하는 가치들과 협상해야 하는 것들. 그 중에서 하자작업장학교를 거치면서 형성되었던 나의 신념(어떻게, 누구와 를 중요시 하는 것, 손쉬운 해답을 좋아하지 않는 것, 삶에서 대안을 고민해보는 것)을 어떻게 지켜나갈지 고민했다.

 수전손탁

 자기 동력 찾기 : 나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판돌에서 같은 작업 동료- 죽돌로 넘어갔던 과정. 그리고 선배들을 만나 멘토를 갖게 되었던 과정이었다. 그것은 내가 판돌들과 멘토들 그리고 나와 함께 학습의 여정을 거쳐온 죽돌들이 있는 학교가 있기에 가능했다.

든든한 뿌리가 있으니 마음에 품고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