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라는 단어에 가히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나는, "국가 안에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건 아니고, 태어나서 정신차려보니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소속되어 있더라, 나는 내 자발적인 의지로 국민 된 적 없다" 와 같은 말을 공공연하게 주절거리며 내가 어느 곳에 소속되어 있는지, 어느 나라의 '국민'인지를 의식하게 하는 순간순간들을 최대한 피해왔다. 어쩌면 권리가 아닌 의무로부터 국민에 대한 의식을 시작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우체부 아저씨가 건네준 나이가 찼으니 교육을 시키라는 나라에서 온 통지서를 기점으로 나의 의무를 통한 국가에 대한 인식이 시작되었다. 8살 아침조회 때 초등학교 운동장에 일렬로 서서 왼쪽 가슴팍에 손을 얹고 태극기를 바라보며 국가에 대한 맹세를 하는 것은 무궁한 영광이 무슨 뜻인지 알든 모르든 대한민국에 소속된 초등학생의 의무였으며,  9살 때 엄마아빠가 자비를 내며 직접 만든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어도 교육세 역시 국민으로써 당연히 내야하는 의무였다. 딸을 의무교육을 시키지 않은 죄로 부모님이 죄를 지은 것이냐 아니냐. 로 잠시 시끄러운 적도 있었다. 


국민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출생등록과 동시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의 정체성의 하나가 된 단어라고 생각했고, 의식하여 내 것으로 가져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애정도 없었다. 어쩌면 시간이 좀 지나 내가 투표권이 생기고, 투표를 하게 될 때쯤에는 '내가 만들어가는 나라' 라는 인식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때가 되면 국민이라는 인식을 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의 나. 정부에서 만든 제도권 교육을 받지 않고, 대안학교 학생이며, 투표권이 없는, 십대 청소년인 나는 국민이라는 단어 대신 시민이라는 단어로 나를 설명하고 싶다. 나는 시민이라는 단어가 좋다. 시민이라는 단어는 의식해서 자신의 것으로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을 거주민이 아닌 시민이라고 설명했을 때는 그에 따른 책임감이 따라온다. 시민이라는 단어를 가져오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한 조각으로써 어떤 시민이 되고자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어떤 시민인가는 세계와 공동체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나온다. 라고 市인께서 이야기하신다. 내가 지금 서있는 이곳에 초점을 잘 맞추고, 그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멈추어 서서 '인식'하며 움직여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세계와 공동체에 대한 인식을 하기 위해 나는 나에게 다시한번 초점을 맞추어본다. 여기 한조각인 나는 이곳에 살아있고, 다른 조각들과 함께 덩어리를 구성하고 있다. 결국 여러 개의 '나'들이 모여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내면을 구하는 것이 세계를 구하는 것이라고 詩인께서 이야기하신다. 시민 됨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선 시민으로써의 '나' 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먼저다. 


시민으로써의 나를 발동시키는 것은 감수성이다. 사람을 죽게 하는 재개발의 모습. 국가가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한사람을 고소하는 것. 북극의 빙하가 녹는 것을 보고 꿈의 항로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라 표현하는 KBS.....하나하나 가슴 아프지 않은 것이 없고, 나를 울컥거리게 한다. 단순히 세상일이 아니라 '내가 포함된 세상일' 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러한 감수성은 나를 멈춰 서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멈추어 서게 되는 것으로 끝나선  안 된다. 그것은 구경거리가 생겼을 때 잠시 가던 길을 멈추어 기웃거리는 것과 다를 것 하나 없다. 시선을 주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시선을 주었다고 하여 움직였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건이 그저 사건으로써 사그라지는 것들이 아니어야 하고, 단편 단편의 상처가 아니기 때문에 상처들의 연결고리를 맞추어 가는데 소홀히 하면 안 된다. 실제로 세상에는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많은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는 단순히 사건이 일어난 곳의 지역적인 문제가 아닌 전 지구적인 일들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생각을 지구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각은 지구적으로 행동은 지역적으로 해야 한다고 時인께서 이야기하신다. 


나르마다강 죽이기 다큐와 9월이여 오라를 읽으며 그것이 단순히 인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라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지금 4대강 사업을 하고 있는 여기와 너무나 맞닿아 있는 것이었다. 다큐 속, "우리는 땅에 기대서 살아 간다" 라는 말이 가슴에 박힌다. 우리가 기대어 살고 있는 땅이 흔들리면, 자연히 그 위에 있는 시민사회도 흔들리게 된다. 우리의 근원적인 기반에 대한 고민이 이제는 '해야만 하는 것'이 되었음은 지난학기 living literacy 시간에 이미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이제는 감수성을 넘어서, 내가 가진 입장으로 움직여야 하겠다고 時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한다. 


내가 가진 입장은 모두 다 잘 살 순 없나다. 뻔하다면 뻔하지만, 나에게 너무 절실하다. 이 입장이 '그거 원하지 않는 사람 어디 있겠냐' 라는 코웃음을 당하지 않으려면 방법이 중요하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라는 방법. 


방법을 찾기 위해선 본질적인 문제를 들여다보고 고민하며 해결하고자 해야 한다고 施인께서 이야기 하신다. 하나의 방법으로 기부를 제안하시며. 

기부란 돈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에서 나에게 어렵게만 다가왔던 일이었다. 언젠가, 내가 구경만 하고 있다는 것에 참을 수 없어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에 조그만 물건들을 만들어 경륜장에 나가 팔았던 적이 있었다. 기부를 한다고 했을 때, 나는 커다란 돈을 생각했고, 그만한 돈이 없었으므로 돈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20만원에 가까운 돈을 모아 유니세프에 보냈다. 그러나 그때 이후로 나는 그런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지 않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그러한 방식은 나의 일상으로 가져오기엔 너무나 벅찬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연례행사처럼 움직이는 것은 단기적이며 그리 효과적이지 못한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기부문화를 시민의 일상으로 가져오게 하는 움직임은  施인께서 그 방법에 대해서 얼마나 주도면밀하게 생각하셨는지를 보여주는 듯 했다.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오래 움직여야 하는 것은 자신의 일상이다. 밥을 남기지 않는 것, 종이컵이 아닌 개인 컵을 쓰는 것, 불필요한 에너지를 쓰지 않는 것.... 아주 사소한 약속들이지만 그런 것들이 몸에 배고, 차츰 쌓여간다면 커다란 것이 된다고 생각하고 믿으며 행동하고 있다. (게다가 사소하나 일상으로 가져오기 위해선 꽤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 기부를 연습을 통해 일상으로 가져왔을 때 훨씬 더 지속적인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처럼. 그러나 혼자 입 꾹다물고 행동한다 해서 내가 꿈꾸는 만큼의 큰 변화가 일어나진 않는다. 나 혼자서 종이컵 안 써서야, 혼자 고기 안 먹어서야, 이 지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이 고민이 '나하나 쯤이야..' 로 가서는 절대로 안 된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자신의 움직임을 넘어서 남들까지 움직이게 하기 위한 관찰이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요즘엔 어떤 전략적인 사고 역시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전략적인 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지금의 상황에선 적절한 것 같기도 하다) 움직임을 유도하기 위한 새로운 접근, 아이디어들이 필요한 것이다. 

<이번 TCK, TCK, TCK 영상을 만들며 움직임을 유도하는, 우리의 뜻을 전하는 것을 만드는 과정이 얼마나 많은 고민이 필요한 것인지를 배웠다. 누구를 움직이려 하는 것인지, 나는 어떤 말을 전하고 싶은 것인지 더 깊고 섬세하게 생각되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캠페인이 아니더라도 내가 무언가를 전달하고자 했을 때는 놓치면 안 되는 것이다.>


다른 사고, 다른 움직임들을 반영하는 의식적인 일상을 만들어가는 것은 기존의 인식을 바꾸고,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가는 것 이라는 걸 視인께서 보여주셨다. 그런 인식을 바꾸는 것은 지금의 자신을, 우리를 직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그러나 그 순간 나는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나를 인식하고 직면하고자 '왜' 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나에게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視인께서 이야기하신 것은 오히려 인식 후 그것을 바탕으로 한 관점을 만드는 일에 대한 것이었는데 말이다. '왜'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는 것은 나를 너무 괴롭게 했다. 실제로 쓰게 되는 글들도 나눌만한 글들이 아니라 자기정리와 답을 찾는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런 글들은 블로그에나 담아둘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아침. '어떻게' 라는 단어를 듣게 되었다. 듣는 순간 머릿속이 쏴 해졌다. 그 순간 어떻게 라는 단어는 나에게 너무나 절실한 것이며 꼭 필요한 것이었다. 혼자 생각하며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실제로 '왜' 라는 질문은 기동성을 갖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나누고, 확장하고 싶으니 더 이상 왜 라는 질문으로 나를 고립시킬 필요가 없었다. '어떻게'를 동반한 움직임을 시작해야 했다. 그 움직임들이 쌓이고, 깊어지면 자연스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세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시민으로써 필요한 사람, 필요한 조각이 되고 싶으니 '하고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함께 움직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끊임없이 날개를 움직이고 있는 翅인께서 너의 현실에 나는 '어떻게' 살아갈까에 대해 이야기하신다. 다수나 대중과 같은 모호한 단어가 아니라 '너'라고 용기 있게 깊숙이 표현하려면 그 만큼의 관찰과 고민이 필요한 것 같다. 그렇게 '너'에 대해 공부하고 대화를 시도하는 것, 개입하는 것. 그리고 제약을 안고 같이 나는 것.  자신의 이야기를 혼자서가 아니라 밖으로 끄집어냈을 때는 당연히 그에 대한 반응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나는 그것이 두려워 두리 뭉실 모호하게 나의 뜻을 내비칠 때가 있다. 또한 남에게도 그런 이야기가 두려움으로 받아 들여질까봐 그렇게 이야기할 때가 있다. 그런 두리 뭉실한 관계맺음을 하면 서로에게 득이 될 것이 없다는 걸 이제 안다. 비판적인 순간을 두려워하지 않는 협업이야 말로 나를, 너를 성장시키는 것 이란 걸 여러 시인을 통해, 그리고 이곳 하자에서 배워나간다. 


요즘 들어 자신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뿐만 아니라 '어떻게' 표현할 지에 대해서도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 그저 쏟아내는 게 이야기를 걸고,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한 바를 남에게 전달하는 것 사이에는 내가 있다. 나를 매개 삼아 대화를 하려면 표현 방식 역시 중요하다. 내가 생각해온 과정이 상대방에게 파일을 전송하듯 곧바로 전해지면 좋으련만, 아직 우리에게는 그런 기능이 없다. 때문에 어떻게 '잘' 전달 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이 생기는 것이다.  


6명의 시인들을 만나 '시민됨' 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냥 이야기가 아닌, 자신들을 매개로 자신을 매개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말을 걸며 서로 엮여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2달간에 거쳐 시민문화에 대한 생각을 이어나간 지금, 나는 자연스레 어떤 말 걸기를 하려고 하는 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시민으로써, 또한 마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