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와 프로의 사이에서 일을 대하는 태도를 갖다.

‘당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은 취미로 놔두어라. 당신이 두 번째로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정하라.’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말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주위에는 서점에 빼곡히 쌓인 일, 취미의 자기계발서 만큼이나 하고 싶은 일과 먹고 사는 것이 다른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사람 또한 빼곡하다. 그런가하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사람도 더러 있다.
나는 하자작업장학교에서의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무대나 공연을 중심으로 협업을 요구하는 작업들을 해왔으며 때마다 positioning을 달리하곤 했다. 이 position에는 팀 안에서 나의 역할에 관한 스스로의 정의도 있지만 내가 어떤 태도로 일을 대할 것인가에 관한 내용도 담겨있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사이에서 일을 대하는 태도를 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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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협동의 중요함 = 다양성의 힘
- 하고 싶은 것 하면서 먹고살기
-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일하느냐?

  오년 전 나는 내 가슴을 불쏘시개처럼 뜨겁게 만드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당시 내가 억압당하고 있는 것-이해할 수 없는 아빠의 행동과 두발자유냐 두발자율이냐 혹은 체벌문제가 옳나, 그르냐에 의견을 표하며 집과 학교 안 밖으로 집회를 하러 다녔다. 그것을 통해 만났던 운동 판의 20대, 30대들과 혁명이란 단어를 서슴없이 쓰며 지금 생각해보면 일회적이고 욕지거리에 그쳐버리는 대화를 일상적으로 나누었다. 뒤돌아보면 이런 경험들이 모아져 깊은 수준의 공부와 사유를 할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저 일상적 자극으로만 남게 되었다. 이 경험을 단순화시켜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찌 되었든 아빠와 학교, 선생님에 대항하며 짧은 시간 동안 큰 에너지를 발생시킨 시간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면서는 더 이상 일반학교나 선생님은 필요치 않으니 다른 교육을 받고 싶다고 말하면서 내게 ‘도망치는 거냐?’ 라고 반문하던 운동판을 떠났다. 그렇게 오게 된 하자센터는 나에게 별천지였다. 공존과 배려에 대한 일곱 가지 약속과 멍석방의 멍석을 보면서 가슴 떨리면서도 학교라면 당연히 이래야지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하자센터가 지키고 있었던 약속과 문화들이 얼마만큼의 노력과 기다림이 요구되는지 짐작하지 못했다.

길찾기 시절 들어간 공연단은 나에게는 처음으로 ‘같은 팀원’이라는 누군가가 생기는 경험이었다. 당시의 공연단은 자시의 미래가 얼마나 불안한지에 대해 재확인하며 서로의 애정과 관심에 목말라 있었다. 울기도 많이 울고 실랑이도 많이 벌였다. 그러면서도 -대견하게도- 약 반년 동안 여러 파티를 기획하고 공연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마스 파티>나 <합숙 깜짝 공연> 등의 파티는 누군가와 함께 즐기는 공연이라기보다는 소리 위가 학기 동안 갈고 닦았던 것을 뽐내는 것에 집중되었다. 뮤즈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공연단 안에 파트너십과 끈끈한 정이 만들어지기를 바랐지만 생각처럼 그것들이 잘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찰나의 위로가 있을지언정 그 다음 단계로의 진행이 힘들었던 것이다.

다음 년도 봄, 공연단은 휘의 Directing 아래 브라질리언 스타일의 음악과 공연을 하는 팀 ‘촌닭들’로 다시 탄생했다. 공연을 대하는 방식도 바뀌었다. 더 이상은 학예회를 하는 학교 공연단이 아니라 돈을 받으면서 일하는 ‘프로페셔널’한 팀으로 변화하는 것이 초기의 목표였다. 하지만 그 ‘프로페셔널’ 한 것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일을 처음 접하는 십대로서는 정확히 알기 어려웠다. 팀이 결성될 당시 휘는 몇 가지의 룰과 키워드를 제안했다. 어느 정도 이상의 실력을 위해 주 2회씩 보컬/퍼커션 워크숍을 통해 훈련 할 것, 출석부를 만들어 지각/불참을 몇 회 이상 하는 팀원에게 패널티를 줄 것, 아침마다 정해진 책을 읽고 이야기 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 등이었다. 출석부 같은 반강제적 체크 도구가 과연 긍정적인 도구일까? 라는 회의가 들었지만 공연단의 지지부진한 경험을 다시 하고 싶지 않아 일정 기간 출석부 제도가 존재하는 것에 동의했다. 공연단 때와는 달리 휴식을 허락지 않는 스케줄과 엄격한 페널티 부여는 생각보다 더 효과가 있었다. 지각과 잠수타기가 일과였던 기존 공연단 멤버들은 예전과는 다른 필사적인 몸부림을 보였던 것이다. 그 즈음 촌닭들의 첫 번째 외부 공연 제안이 들어왔다. 바로 인사동에서 진행되는 <영덕군 홍보 공연>이었다. 약 30분의 공연을 채우기 위해 촌닭들은 갖고 있던 노래들을 총 동원하여 레파토리로 만들어야 했다. 이렇게 body-change 프로젝트는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으나 그렇지 않았다. 얼마안가 다시 예전 수준만큼은 아니지만 지각문화가 만연해졌고 우리의 공연 수준도 더 이상 나아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때맞춰 급작스럽게도 촌닭들의 담임이었던 제리와 후일 팀장을 하려던 팀원 테리가 촌닭들을 나가게 되면서 예기치 못하게 내가 팀장역할을 맡게 되었다. 준비되지 못하고 무담임 체제로 바뀐 십대 공연단의 팀장을 맡기 위해서는 나도 팀도 작정하고 몰입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과연 촌닭들이 프로페셔널한 팀이 될 수 있을까? 존속 가능할까? 라는 의문이 끊임없이 들었지만 생색내지 않고 아침모임, 연습, 워크숍 등을 이전 학기와 다름없이 진행하기 위해 노력했다. 시간표를 짤 때는 최대한 -쉬는 시간 없이- 빡빡하게 짰다.
2009년에 접어들면서 하자센터의 메인 사업이 하자작업장학교에서 사회적기업을 인큐베이팅하는 ‘창프로젝트’ 로 변하게 되었다. 하자센터 안에 예비 사회적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는 움직임으로 사업설명회가 열렸다. 이야기꾼의 책공연 팀에는 약 삼십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였다.
지금까지 내가 몸을 담았던 소리 위 2.0, 촌닭들안에서는 또래친구들을 만나며 진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니어에 접어들면서는 구도가 조금 바뀌면서 내가 가장 어린 사람이 되면서 나보다 앞서나간, 경험이 많은 '선배집단'을 만날 수 있었다. 선배들을 만난다는 것은 나의 과거-미래와 계속 만나는 과정이었으며 이 시간들은 나에게 굉장히 특별했다.
2009년 상반기에 접어들면서 팀이 본격적으로 조직화되었다. 이야기꾼의 책공연 팀에는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이 모이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연출, 연기를 이미 해오던 사람으로 이십대들은 보통 대학을 졸업한 후 이 팀에 바로 오거나 또래 사람들끼리 자발적으로 팀을 이루어 작업 및 프로그램을 해오던 분들이다. 30~40대 분들은 노리단 단원이나 대안학교 선생님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작업을 해오던 사람들이었다. 또한 팀 안의 프로그램도 틀을 갖추게 되었다. 이야기꾼의 책 공연 안에서는 하루에 한 번씩 꾸준하게 훈련프로그램이 돌아갔다. 크게 분류하자면 몸 훈련과 즉흥훈련에 관한 프로그램이다. 몸 훈련에 관해 빠삭한 분들이 많아 '생'이나 '핑' 같은 팀원 분들이 메인 훈련을 진행시켰는데 몸의 근력과 유연성이 요구되는 프로그램이었다. 부끄럽게도 열 명이 넘는 팀원들이 참가하여 다리 찢기 등의 스트레칭을 하면 그 중에 내가 제일 몸이 뻣뻣했다. 땀 뻘뻘 흘리며 이 악물고 해도 내 손이 저 바닥까지 닿지 않았다. '생'과는 삼년 전 '소리 위 2.0' 마임 프로그램에서 만났었는데 그 때 나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몸은 3개월만 투자하면 바뀝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삼년이 지나 다시 만난 생은 어째 전보다 몸이 더 안 좋아진 것 같다며 혀를 차셨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나름 무대 위에서 활동하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몸 훈련을 지속적이게 해오지 못한 것이다. 지금은 몇 달 전부터 짧은 시간이든 길 시간이든 스트레칭을 해오고 있다. 처음에는 스트레칭을 하면 아파 죽을 것 같던 것이 이제는 조금 수월해졌다. 하루에 한번씩 하지 않으면 뻐근하다. 기본에 충실할 것, 그리고 그것을 꾸준히 실천할 것. 그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 일은 누구도 지켜봐줄 수 없고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자신과의 싸움인 것 같다. 얼마든지 나태해질 수 있고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