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취를 읽어내기.


정선에서 유독 무언가의 흔적과 자취들이 계속해서 눈에 들어왔다. 특히나 그 자취들은 흔적을 남긴 대상을 너무나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는 것들이었고, 이상한 기분이 들 정도로 인위적이며 인공적이었다. 나는 그 자취들에서 자연의 흔적을 발견해내기 보다는 계속해서 그 곳의 광부들과 마을 사람들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듯하였다. 작은 개개인, 미미한 존재들이 만들어낸 흔적은 시각적으로 너무나 크다. 검은 재가 묻어있는 벽들, 빈 집들, 그리고 거대한 그러나 흔적밖에 남지 않은 산. 그렇게 나는 사람의 흔적을 계속 담아내고 쫓고 있었다. 흔적에 의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판단 할 수 없지만, 분명 흔적을 남긴 행위에는 의식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그 공간, 물건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자신의 정의와 판단 후 우리는 움직이고 흔적을 남긴다. 흔적은 존재하는 것의 자취이며 그래서 흔적을 남긴 대상이 있었다는 것을 오감으로 증명해주는 열쇠가 된다고 생각한다. 


흔적을 통해 그들을 바라보던 나는 그들의 흔적이 묻은 그 곳을 나의 방식으로 사용해 다시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노동의 터였던 그곳에서 걷고, 사진을 찍고,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공간의 재사용, 그것은 어쩌면 그곳이 화석화가 되지 않게 흔드는 움직임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사실 쓸쓸하게 빈 것처럼 보이는 그 공간이 우리의 움직임으로 인해 약간 덜 외로워하는 느낌도 받았더랬다. 흔적에 대한 추적이 시발점이 되어 나는 그것을 매개로 그들을 불러낸다. 불러내어 재 주목 하고, 시간의 기억들을 끄집어낸다. 나는 그곳에서 분명 의식적으로 기록을 하였다. 이 의식들을 계속 붙잡아 이어나간다면, 공간은 계속해서 움직일 것이다. 분명히 시간은 흐르고 있고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들 역시 흐르고 있으니. 이것을 흔적은 계속해서 쌓여간다는 말로 표현 할 수 있을까.  


정선은 여러 흔적들이 굉장히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곳이었기 때문에 사진을 '찍고 - 싶다' 라는 생각이 들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눈에 비치는 것들을 붙잡고 싶다는 마음과 그 순간을 소유하고 싶다는 마음이 동시에 발동하며 반사작용과도 같이 카메라를 집어 들고 셔터를 눌러 그 순간과 자국들을 담게 되었다. 그렇게 처음 몇일 동안에는 그저 그 공간들의 시각적인 힘과 느낌들에 취해있었다. 무언가에 이끌린다는 것은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하지만 이끌림은 단순히 이끌림에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시작과 계기의 의미를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내 안에서의 질문들을 끊임없이 이어나가야 했다. 나름의 판단과 정의도 내려 보아야 했다.


신호를 읽어낸다는 뜻의 de - sign 은 어쩌면 눈 안에 들어오는 흔적들을 추적함으로써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선은 '구경'을 하러 간 곳이 아니었고, 흔적에 대한 이끌림에서부터 시작된 추적으로 이야기를 읽어내어 느낀 것을 담아간 곳이었다. 때문에 흔적을 담은 사진들이 시각적인 외관만을 담는 것이 아닌, 읽어낸 이야기들을 담을 수 있기를 바랬다. 정선을 가서 담아온 이미지들을 가지고 후에 작업을 하는 것은 그러한 이야기를 담고자 하는 움직임이었다. 이미지를 통해 어떤 말 걸기를 할 것인가에 대해선 좀 더 섬세하게 고민되어져야 하는 것임을 알고, 고민하고 싶다. 내가 만들어낸 이미지는 또 다른 흔적이며, 그러므로 이야기와, 기억을 또 다시 추적하게 하는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렇게 하려면 내가 쥔 매체에 대해 자세히 알아가야 한다. 장악해나가고 싶다. 


2. 꼭 필요한 사람이 되자.


동원탄좌의 닫혀있던 문틈을 벌려 살짝 들여다보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자" 라는 문구가 강렬하게 공간 한 가운데에 걸려있었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꼭 필요한 사람이 되자' 라는 문구가 보여주듯 광부들은 탄좌에서 꼭 필요한 '구성원' 들이었다. 근대의 분업화된 노동의 톱니바퀴 같은 존재. 톱니가 하나 빠지면 그에 걸맞은 역할을 하는 톱니를 새로 끼우면 되었다. 대체연료들이 등장하며 연탄의 수요가 줄고 점점 필요 없게 된 탄광은 결국 폐광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생계수단이었던 탄광이 없어진 이 마을이 다시 굴러가기 위해 필요한 카지노가 들어섰다. 꼭 필요한 것들로 구성되어있던 동네에 지금 또 다른 필요에 의해, 별 필요 없는 것처럼 비치는 매체들을 쥔 예술가들이 들어왔다. 


사북- 고한의 예술가들을 보는 것은 나에게 어떤 감동과 생각거리들을 계속해서 던져 주었다. 그들은 이곳의 구성원으로서의 자신의 작업을 하며 마을과 어떻게 소통하고 관계 맺을 것인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분들이셨다. 이동인구가 많고 관광을 지금의 가장 큰 사업으로 가져가는 이곳에서 예술가들이 정착하고 작업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치유처럼 비춰지기도 하였는데, 예술가들이 작업을 하며 자연스레 이 지역에 관심을 갖고 집중하고, 힘을 쏟고 고민하는 행위자체가 대체해버린 톱니바퀴들에 대한 꼭 필요했던 재조명 같다고 생각했다. 마을에 필요한, 마을의 예술가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의 구성원인 것일까. 어디에 필요한 사람인 것일까. 자신이 커다란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것을 인식한 다음부터 나의 필요와, 역할에 대한 고민을 계속 하고 있다. 나는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시민이며 또한 작업장학교를 구성하고 있는 죽돌이다. 필요한 구성원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면 이 곳에서의 나의 존재를 계속 상기하고, 고민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야기 듣기와, 후에 파생되는 시각적인 흔적들을 역 추적함으로써 지금의 흐름을 읽어내려고 노력한다. 읽은 이야기, 읽는 과정에서 생겨난 이야기들을 누구에게, 어떻게 전달하고, 말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계속해서 이어나는 것이 이곳에서의 나의 포지션을 다듬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어떻게 소통할 것인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