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구하는 시인들


그들을 만나기 전에 이미 나는, '책임감 있는 시민'으로서 사회 문제들을 관찰하고, 그것들을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말하는 사회문제들은 '권력', '부', '성' 등의 불균형에 의해서 상대적 약자가 피해를 입게 되는 상황들뿐만 아니라, 친환경 적이지 못한 문제들까지도 포함한다. 고로,) 나는 거의 모든 사회의 문제들을 '나와 관련 있는 문제'로 여기며, 책임감을 갖는 사람이었다. 그런 나에게, '시민 됨'이란 거의 '정치인' 혹은 '운동가'와도 같은 위치였다. '시인들'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나는 '이런 내가 6명의 시인들을 만나면서 어떤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라는 우려와, '시민'이라는 정체성과 각자의 전문성을 동시에 갖고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에 많은 기대를 함께 했었다. 허나, 예정되었던 시인들을 만나면서, 그들은 내 쓸 때 없는 우려를 하나씩 지워나가고, 내가 갖고 있던 '책임감 있는 시민'으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인'이란 자기언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6차례의 연찬 동안 각기 다른 '시'와 함께 찾아와주신 '시인'들은 정말 말 그대로 그들의 언어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사회의 흐름을 구해(퍼뜨려)가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이 흐름을 구하는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자기 언어'와 섬세한 '문제 인식'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그들(시인)과 나의 다른 점들을 알게 되었고, '자기 언어'라는 것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자기 언어'란 내가 하고 싶은 말, 보이는 문제 상황들을 '어떻게'변화시킬 것인가를 질문하는 것과도 같다. 그들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문제 상황들을 자신들의 전문성으로 끌어와 사회에게 말을 걸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전문성으로 '그냥' 해버리거나 하는 식으로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하자의 언어인 '시인'들은 우리 사회에선 흔히 '선구자', '혁명가', '운동가', '대안 실천자', '문화 방해꾼'등으로 부를 수 있겠다. 그렇게 그들은 어찌 보면 '대안'이라고 할 수 있는 움직임들로 흐름을 만들어 간다. 내가 그들을 보며 느낀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세계를 구할 수 있는 것은 '눈'과 '손'을 훈련해가는 개인들의 흐름이라는 것>. 6차례에 걸친 시인들과의 만남은 이 개인들이 어떻게 세계를 구해가고 있는지를 내 눈 앞에서 확인하고 배우는 시간이었다.





나의 언어


사실 '시민 됨'을 고민하며, 계속해서 문제에 대안의 중요성을, 변화의 중요성을 느끼기에만 머물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문제 보기'만을 반복해왔다. '나는 아직 공부가 많이 필요하니, 움직일 수가 없어'라며, 움직임에 소극적이었다. 내 생각을 바깥으로 비추는 일에 대해서는 섬세하지 못했었다는 것을 시인들을 보며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난 이런 나를 '시민'과 '시인'사이의 '굼뜬 작업자'라고 생각하며, 자극받았다. 


 홍대의 김제닥은 '의료디자인'을 이야기하며, 아이들이 의료기기 앞에서 왜 울음을 터뜨리는지를 분석해 '인형청진기'등을 발명했다고 한다. 또 날개시의 민욱은 "너 이거 봐!"가 아닌, '너의 현실에 나는 어떻게 살아 갈 수 있을까'?라며, 서로 다른 일상과 꿈을 꾸는 '나'와 '너'의 현실을 함께 만들고, 스며들기 위한 물음을 던지며 접근하고 있었다. 민욱은 자신의 레이더에 걸려드는 것 '재개발' '이주'에 대한 이야기를 섬세한 관찰, 공부를 통해 정리되는 이야기를 예술이라는 것을 통해 한차례 돌려 말하고 있었다. 나 또한 그가 작업에서 다룬 '재개발'과 '이주'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이고, 한창 '에드버스터'라는 디자이너의 저항에 대한 책을 다시 읽고 있던지라, 문뜩 그 또한 '저항예술가인가?'라는 생각이 들어 물었었다. "당신이 말하는 반문하기를 저항이라고도 부를수 있을까요"라고. 그렇지만 그는 버럭 표정을 바꾸며, "저항이라고 하면 너무 딱딱하잖아요."라며, '반문하기'라고 다시 말하셨다. '반문하기'라고 말하는 것에도 그만의 관찰과 생각을 통한 제시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민욱은 계속해서 관찰하고 공부한다. 그런 뒤에 그것들을 자신과의 관계 혹은 그 문제와 사회와의 관계를 들여다봄으로, 좀 더 설득력과 호기심을 갖게끔. 정말 '생각 할 욕구를 일으키게끔' 예술이라는 것으로 전환을 시켜냈다. 그는 그래서 '예술'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미 너무 익숙해 식상한, 혹은 너무 새로워 낯선 것들을 '예술'이라는 것으로 지지기, 복기, 돌리기, 열기, 태우기, 날리기 등으로 우리에게 소개했다. 그렇게 그는 '예술'이라는 언어로 자신의 세상을 제시하고, 함께 만들어 가기를 원했다. 민욱 뿐만 아니라 다른 시인들도 마찬가지였다. 


 6명의 시인들은 '시민'에서 '시인'사이에 어중간하게 있는 나에게 찾아와 말했다. "정말 필요한 것은 혼자 시민으로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상으로, 자신의 언어로, 삶의 흐름으로, 가꾸어(구해)가는 겁니다."라고. 매일 밤 인정하고 동의했다. 나는 그들이 각자가 서있는 위치에서 말하는 방식을 보며, 예술가뿐만 아니라 모든 시인들은 자기 언어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 또한 혼자서만 외치고 제시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고민하는 것과 함께 그 이야기를 바깥으로 꺼내기 위한 가공의 '자기언어(어떻게)'에 대한 고민이 들었다. 


 그저 내 요구를 쏟아내고, 뭉뚝한 대중 앞에 들이대고. 이것은 쌍방의 '대화'를 거는 것이 아닌, 일방적 주입임을 안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일방적 주입의 대화를 하곤 했다는 것 또한 깨우친다. 서로의 이야기가 풍성해지기위해선 일방적 주입이 아닌, 쌍방의 오고가는 것이 있는 '대화'가 필요하다. 나는 <어떻게>또한 고민하여, 성의 있게 대화를 하는 말을 거는 시인이고 싶다. 나는 내 이야기를 듣는 이에게 '사회문제'들에 대해 생각해보고, 움직일 수 있는 계기를 주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민욱처럼 물음을 하는 것도 필요하다. 때에 따라 토론을 하기, 침묵을 하기, 쏟아 놓기, 눈앞에 현실을 직면시키기 등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오해의 여지를 최대한 줄일 수 있는 대화방식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효과적일 수 있다면, '매체'라는 입 외의 '언어'를 통해 말을 건내 보고 싶다. 



나의 '판' '마을'


사북고환의 '마을의 예술가'와 홍대라는 요상한 '마을의 의사'를 자처하는 '제닥'. 그리고 마지막 연찬에서 '날개 시'의 매력적인 '예술'이라는 언어를 갖고 세계를 마을로 삼는 민욱을 만난 후, <어떻게> 말을 거는 시인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어느 판에서'라는 '나의 마을'이라는 커다란 질문 또한 갖게 되었다. 베풀 시의 권혁일 시인이 만들어가는 '기부문화' 또한 인터넷을 매개로 '유저'들의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이였다. 돌봐줄 이가 없어서든 돌봄이 필요한 이들에게 전하는 '기부'. 그것을 개인인 나의 일상에서 생각해보았을 땐, 내 주변을 돌보는 것이 권혁일 시인의 뜻이고 내가 잃지 않고 싶은 '돌봄'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돌봄'이라는 것을 일상에서 기본으로 상호적 관계에서 지키고 싶어졌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마을'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유독, 이번 학기동안 '마을'이라는 단어가 자주 귀에 들어왔다. 나에게 '마을'이라는 개념은 귀에는 익숙하지만, 몸과 머리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내 눈이 특정한 대상에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뭉뚝한 바깥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성실하게 '나의 마을'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해보지 않았었던 것도 같다. 그렇지만, 정말 자신들의 전문성이 빛을 낼 수 있는 '마을(판)'에서 시작하고 살고 있는 시인들은, 다시금 '마을'이라는 것을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처음에 '나의 마을'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리고 사실은 하자가 아닌 하자 밖의 어떤 전문성들이 모여 있는 거리의 판을 상상했었다. 그치만, 그 질문을 쪼개어 현재의 나와 정말 가까운 관심과 돌봄(우정)의 공동체인 '마을'이라는 것과 각자의 마을에서 나오는 '자기언어'가 제시하는 힘을 느끼곤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언젠가 모교수의 '다시 마을이다'라는 책을 읽으며 '요즘 같은 경쟁사회에서 개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마을인거 같아.'라며 마을을 경쟁이 아닌 우정과 돌봄으로 상호적 성장의 공동체로 이해했던 기억이 스쳐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언어'를 고민하게 되면서, 그 이야기를 듣고 반응 해줄 대상을 고민하게 되었었다. 그렇게 조심스럽지만 내 일상의 공간인 '하자작업장학교'로 눈을 돌리게 된다. 나만의 '시민 됨'과 '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개인이 섞인 '우리'라는 것이 떠오른다. 그리고 나의 학교이자, 일상인 이곳의 눈과 입들 중 하나가 되고 싶다. 이것이 市하승창 시인이 말씀하신 '시민사회'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지 싶다.


이번 '시인들'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며, 물리적으로 나와 가까웠던 하자 죽돌들 또한 자신들의 흐름과 하자 밖의 거대한 흐름(제도) 대한 말 걸기와 질문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작 커다란 사회를 이야기하고자 했던 나는, 내 주위에는 너무 무심했다는 것을 깨우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자기언어'의 필요성을 깨우치며, 조급하게도 큰 흐름(제도)에게만 말을 거는 것만을 상상해왔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인, 내 옆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기후변화'나 '사라짐'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의미를 만들어가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동시에 '작업자'로서 나누는 이야기가 담긴 작업물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큰 흐름을 보는 것과 동시에 내가 서있고 몸이 있는 내 주변에서 시작하고, 성의를 쏟아야 한다는 것도 알아간다.





난 섬세하게 보고, 손도 움직이는 '시인'이 되고 싶다.



일단에, 내가 흐름을 구하고 싶다면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방식인, 보이는 문제 상황을 인식하고, 뱉어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뱉어내기 이전에 인식된 문제의 원인, 근원을 섬세하게 분석하는 단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현재의 문제들은 너무나 복합적인 고리들에 연결되어 일어나고 있는데, 그 속도에 비해 나는 많은 시선을 갖지도 발맞춰 공부를 하지도 못했었다. 때문에 문제 상황에 대한 분노와 다소 막연한 비판이 주를 이루는 섣부름을 범하기 쉽상이었다. 그래서 문뜩, 입을 열어 말을 하는 것이 두려워지기도 했었다. 한 동안 입을 다물며 생각해보니. 더 진득하니 문제를 들여다보고, 주변과 이야기를 해보며 내가 보지 못한 고리들을 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부분은 柴으로서 진행했던, 정선이동학습 때 또한 몸으로 느꼈던 것인데, 쉽사리 섣부름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도 막연하지만, 나에겐 더 섬세한 관찰과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것이 정말 필요하고, 적절한 새로운 흐름의 기초를 다지는 일인 것 같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로, '자기 언어'를 혹은 '사회에 <어떻게> 말을 걸 것인가'라는 훈련을 통해 기존의 흐름에게 말을 거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2가지의 단계는 사실 나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허나, 이 2가지를 함께하기엔 아직 나에겐 훈련되지 않은 눈이 있기에, 매번 움직임이 굼뜨지만, 나에겐 항상 '움직임'이 필요하다. 지금 내가 관심 있는 일인 사회의 문제 있는 흐름을 바꾸는 일은 생각도 중요하지만 그들을 보며 같은 크기의 '어떻게'에 대한 노력도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시민'이상으로 그들이 '시인'으로 소개되었던 것도 계속해서 움직임과 실험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시민과 시인 사이에서 '굼뜬 작업자'로 어중간하게 살아가고 있는 나'와 확실한 '시인'인 그들과의 '차이'이고. 지금까지 내가 해온 굼뜬 움직임들 또한 소중했다. 그렇지만 앞으론 더욱, 머리만 커가는 것이 아닌, 내가 지키고자 하는 것을 고집만하지도 잃지 않고, 계속 제시하고 키워나가는 확실한 '시인'이 되고자 노력하고 싶다. 



난 정말로 '시인'이 되고 싶다. '언어'를 갖은. 머리와 입, 그리고 손이 따로 놀지 않는 것이 '시인'이다. 더 이상 내 주변에 있는 이들과 과제들을 해야 하는 일로 만들어 유예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그 대상은 누구인지까지도 명확히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난 지금 나의 언어와 그 각기 다른 언어들의 '마을'을 상상하고 있다. 내가 살고 싶은 사회를 향한 흐름을 만들기 위한 작은 흐름들이 있는 공간. 그 공간에서, 차차 '우리'의 흐름을 상상하고 만들어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기 위해선 난 내 몸을 온전히 담아, 흐름을 트는 지속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어쩌면, 서로 힘을 내고, 체크 할 수 있는 '상호적 고랑트기'의 마을을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하는 삽질의 흙이 거대한 MB가 하고 있는 삽질의 구멍을 덮어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조원규 시인이 선물한 '톱니바퀴'라는 언어로 정리를 하자면, 나의 톱니바퀴 중 '시민'이라는 톱니는 계속해서 기름칠해야 할 테지만, 이제는 '기본 톱니'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기본 톱니 포함해 아직까지는 뭉뚝하지만 내 머릿속의 '다 같이 잘사는 세상'을 제시 할 '나의 언어'라는 톱니와 그것을 '어느 판에서 굴릴 것인가'라는 '판'에 대한 과제를 계속해서 풀어 갈 것이다. 일단에 이미지를 만지는 것을 좋아하고 작업 중인 나는, 이곳 하자에서 서툴지만 '이미지'라는 언어로 시작하여 계속 훈련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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