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업식이 끝나고, 집에 가기 전에 평소에 시간이 난다면 평소에 읽어보리라 하며 눈독들였던 책인 '오타쿠' 라는 책을 가져왔습니다. 저자가 '오카다 토시오'라는 분이신데, 이분은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가이낙스 Gainax] 의 창업자이시고, 동경대에서 -오타쿠 문화론- 을 강의하신 내용을 바탕으로 이 책을 펴내셨다는군요. 제가 좋아하는 작품인 '에반게리온'도 이 회사에서 나왔네요.
읽었는데, 아주 재미있어서 메모 올려요. 관심있다면 310호로 오세요, 책장 밑쪽에 있을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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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오타쿠'라는 말을 듣거나, 사용할 때면 어떠한 생각들이 떠오르나요?
아마도 '오덕' , 심하게 말하는 사람들은 '씹덕'이나 '집착하는 변태' 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저만 해도 오타쿠라는 존재들은 사회에 적응 못하고 딱히 뭐하는 것도 없이 집 안에 틀어박혀서 애니메이션을 보며 어린아이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고 심지어 '그들은 모두 안경을 끼고 살쪘을 것이며 입 주위에 항상 감자칩을 묻히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을 것이다.' 라는 외모적 편견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혹자는 '오타쿠'라는 단어를 '마니아 이상의 사람들을 일컫는 존재'라고 정의하는데서 그만두지만, 사실 오타쿠라는 말은 그 이상의 진화를 거쳐왔습니다. 네이버 사전을 볼까요.

오타쿠-
'당신' 또는 '댁'이라는 뜻을 지닌 이인칭
대명사일본어에서 유래한 말로, 일반적으로 마니아보다 더욱 심취하여 집착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한국에서는 한 가지 일에 광적()으로 몰두하는 사람을 낚시광·바둑광·골프광 등으로 부르는데, 오타쿠는 이보다 더 깊이 빠져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1983년 일본에서 처음 사용되었는데, 원래의 뜻은 상대편이나 집안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만화나
애니메이션, 게임, 퍼스널컴퓨터(PC), 비디오 등 서로 관련이 있는 대중문화에 몰두하며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동호회에서 만나 서로 예의를 지키고 존중하는 의미에서 오타쿠라고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   .... 후략


생각보다 오타쿠의 역사는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의 1970년대, 아니 그전부터 등장했다고 하는데, 그때는 비디오 데크도 출시되기 전이어서 가령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마니아들은 그저 칼같이 방영시간에 집중해서 노트에 빼곡히 기록하는 것에 주력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작품의 '거의 모든 것'을 뜯어보는데, 예를 들어 보면,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때는 원작 만화의 화풍을 따라가긴 하지만 1초를 구현하는데 적어도 8프레임, 많으면 24프레임의 컷이 들어가기 때문에 단체작업을 요하게 됩니다.
그림을 그리는데에도 여러명의 작화감독(이하 '작감')이 붙게 되는데, 어쩔 수 없이 이들의 화풍은 서로 조금씩 차이가 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좀 더 동글동글하게 그린다든지, 어떤 사람은 몸매를 글래머러스하게 그린다든지, 눈의 크기가 더 크다든지 하는 식으로요.
누구나 알 수 있을 것 같은 예를 들어보면, 시즌이 지날 수록 변모하는 짱구의 생김새를 생각해보면 될 것 같습니다.
처음 등장했던 짱구와 지금의 짱구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정말 다르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으니까요.
오타쿠들의 눈은 이런 차이점들조차도 모두 잡아내어 체크하고, 뒤에 엔딩크래딧을 보며 각 작화감독과 스태프들과 맞춰보며 쾌감, 보람을 느꼈다고 합니다. 일반인들이 볼 때 어떻게 애니메이션에서 그런 것을 느끼는지 이해가 안 갈 수 있겠지만요.  
그러다가 80년대에 들어서서 '비디오 데크'라는 것이 나오고 애니메이션의 녹화 그리고 재생, 빨리감기, 일시정지가 가능해지는 시대가 옵니다. 이 기록장치의 값은 그 당시 꽤 비싸서 많은 오타쿠들은 먹는 것보다도 비디오 데크의 구매를 우선시했고, 그럼에도 구비하지 못한 오타쿠들은 비디오 데크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무조건 친분을 맺는 것을 중시했다고 합니다.
이 때 즈음에 '일본 SF 대회'나 '코미케'(매년 여름과 겨울에 개최되는 일본 아마추어 만화 축제 정식 명칭은 Comic Market. 줄여서 Comike라 부른다.) 등의 장이 열리고 많은 오타쿠들이 모여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고 교류하기 시작했습니다.
'오타쿠'라는 말은 이때 모인 사람들이 '처음 만난 사람에게 실례가 되지 않기 위한 호칭' 이라는 의미에서 경어로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오타쿠라는 말은 이미지로만 한정되는 경우가 많은데, 일반적으로 '로리콘(Lolita complex의 줄임말. 어린 여자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 때문에 오타쿠들의 이미지가 그렇게 고착된게 아닌가 싶습니다. 1989년 고베에서 4명의 유아가 연쇄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살인범의 방을 매스컴이 취재하면서, 일방적으로 '오타쿠식 범죄'로 단정짓는 바람에 불경스럽게 해석되어 수난을 겪었던 오타쿠들인데, 이는 오타쿠라는 단어의 뜻을 '집에 틀혀박혀서 밖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히키코모리에 가깝죠.

오타쿠의 진화

앞에서 이야기했는데, 초기의 오타쿠들에게는 비디오 데크나, 애니메이션 잡지 같은 것이 없었죠. TV 보급이 겨우 끝났을 무렵이었는데, 결국에 이들은 방영시간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고 그 시간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애니메이션의 스탭리스트를 깨알같이 공책에 적어놓고, 대조해보며 즐거움을 찾는거죠. 비디오 녹화는 생각도 못하던 시절이라 믿을 것은 눈밖에 없었죠.
'원오타쿠'라 불리는 이들은 세세한 움직임이나 스토리의 전개에도 집중을 놓지 않았고 작품의 모든 것을 체크하려했습니다.
그 결과 놀라운 시각을 갖게 된 이들은 작품에 대한 칭찬이나 비판을 중시했고, 이 끊임없는 관찰로 점차 발전을 거듭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비디오 데크가 출시되었고, 방영 애니메이션의 녹화, 재생, 일시정지가 지원되고 화면단위로 캐치가 가능해지자 이들은 더욱 세심한 체크가 가능했고 한편을 몇십번이나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디오의 값이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비디오 한 개당 1시간밖에 녹화할 수 없다는 제약이 있어서 이들은 작품의 모든 편을 녹화하기가 힘들었고, 고육지책으로 '좋아, 12화는 별로였으니까 30번만 보고 지우자'하는 식으로 놀라운 집중력과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제약이 있었기 때문에, 한 편을 수십번보는 것은 당연한 일들이었고 각 오타쿠 집단마다 '건담의 대사를 모두 외우는 녀석', ''루팡에 나오는 총기류를 순서대로 모두 외우는 녀석'들은 흔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스타워즈'의 대사와 배경음, 효과음을 모두 외우는 능력까지 있었다고 하니... 이렇게 영상에 목을 매는 오타쿠들은 덕분에 몇번씩 정지화면이 없어도 1초에 24프레임인 컷을 한 프레임 단위로 포착할 수 있는 시력까지 갖게 되었다니 가히 초인적이라고 할 수 있겠죠. 
비디오 데크와 진화한 이들은 '근대적 오타쿠'라고 불립니다.

백과사전적인 지식창고  

저는 에반게리온을 좋아하지만 오타쿠라고 불릴 수는 없습니다. 마니아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지만 에반게리온 관련 상품을 모두 모은 사람일지라도 '오타쿠'라고 불릴 수 없을 지 모릅니다.
오타쿠들은 그저 한 장르에만 몰입하는 마니아의 차원 이상의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간단한 사전적 정의로 명료하게 나와있기도 하지요.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오타쿠라면, 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기만 하는 '팬'에서 그칠 뿐만 아니라 파고들면 파고들 수록 점점 다른 오타쿠 장르에 대해 무관심해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애니메이션은 오타쿠주의의 본고장이 분명하지만, 게임에도, 특촬에도, 외화에도, 만화에도 수준 높은 오타쿠적 작품은 얼마든지 있고 또한 그런 작품들은 서로에게 상당한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런 장르를 넘나들며, 간파하고 즐길 수 있는 것이 '오타쿠적 태도'인 것이죠.

이런 예들은 너무 방대하고 심도있어서 저로서 서술하기도 힘들지만, 이것은 예전에 즐겨보았던 '쿠루쿠루'라는 작품으로도 설명가능합니다. 여러분도 '쿠루쿠루'를 꽤 아실 겁니다.
쿠루쿠루는 용사와 마법사가 여행을 떠나는 기본적인 스토리이지만, 이 작품이 참신한 것은 RPG게임의 요소를 끌어와서 개그적 용도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라고들 합니다. 감상하면서도 도중에 나오는 게임 인터페이스 창과 나레이터의 해설이 재미를 부각시켜줍니다. 사실 알고보면 이것은 RPG게임을 했던 이라면 누구든지 보면서 웃을 수 있는 것이지만, 전혀 RPG게임을 접해보지 못한 이라면 재미가 반감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수준있는 오타쿠적 개그라고 하는데, 이처럼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여러 태도를 가진 것이 '오타쿠'인 것이죠.

오타쿠의 바탕

오타쿠들은 좋아하는 작품의 OST 음반이나 피규어 등, 관련 상품들을 모두 사야지 직성이 풀립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친다면 마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죠. '쿠루쿠루'와 유사 작품인 '빨간 망토 차차'의 엔딩 크래딧을 비교하면서 스탭 리스트를 체크하고, 더 나아가서 중세의 마도서에 대한 서적들을 찾아보고, 실제 취재를 위해서 유럽의 성곽까지 가보는 열정, 그리고 작품을 감상한 뒤에  동인지를 내고 사이트를 개설하여 그것을 통해 나름의 평론과 비판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그들이 오타쿠인 것입니다.
이것은 '재능'이나 '취향'만으로는 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만한 자금적, 시간적 투자와 과시의 욕망과 향상심, 그리고 나름대로의 열정이 바탕이 되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타쿠에 대한 오해

보통 생각하기를, '오타쿠란 작자들은 집안에만 틀어박혀서 화면 속의 여주인공 캐릭터를 사랑하고 실제 친구도 없이 음침하게 어린 아이들이 보는 프로그램만 보고 컴퓨터만 하면서 폐인생활을 할 것이다.' 라고 합니다.
실제로 일본의 어떤 광고에이전시의 의뢰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오타쿠는 다른 사람에 비해 이성친구가 월등히 많으며, 또 남녀를 불문하고도 친구의 수가 월등히 많아 무척 사교적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또, 일반인들과 비교해서 의외로 TV 시청 시간이 짧고, 관심분야가 많으며, 타락이라는 단어를 무척 싫어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지금까지의 오타쿠의 이미지와는 너무나 다른 통계 자료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래도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어린이 프로나 보는 어른이 될 수 없는 불쌍한 녀석'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왜 오타쿠들은 나이를 먹어서도 어린 아이들이 보는 프로들을 보는 걸까요?
이유는 그들은 이미 TV프로에 대해서 남다른 분별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른들 프로라고해서 아이들 프로와 대체로 다른 게 없고, 아이들 프로들 중에서도 수준 높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이지요.
자신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기 때문에 어른처럼 보이고 싶고, 그래서 어른들 프로를 본다는 사고 방식을 택하지 않은 것 뿐입니다.
매스컴에서 부추기는 '촌스러운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고, 선도되어지는 유행, 획일적인 젊은이 문화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어린이일 때도 어른문화에 대한 동경 따위는 없으며 사춘기가 되어서도 젊은이 문화라는 고정 형태에 얽메이지도 않습니다.
'맞춤 문화를 좇는 소비자'라고 볼 수도 있는데, 그렇기에 마케팅 담당자들이 분석할 수 없는 집단이기도 한 것이죠.
이렇기에 오타쿠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고 봅니다. 역시 패션이나 유행에도 휩쓸리지 않죠.
'오타쿠들의 패션은 촌스럽다'라고 보여지는데, 사실은 그따위 매스컴이 만드는 멍청한 유행을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지금에 와서, 오히려 오타쿠들은 문화를 주도하기까지 하고 있다고 합니다.
니미야 카즈코 作의 「오타쿠 소녀의 경제학」을 보면,
"오타쿠 소녀는 볼륨 존(Volume Zone,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을 선도한다. 이 말이 이 책의 주제이다. 볼륨 존이라고 불리는 층은 오타쿠의 뒤를 따라가기만 할 뿐, 스스로 무언가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 만회, 게임, 패션,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런 현상이 뚜렷하다. 의류업계에서 볼륨 존이라고 부르는 층, 즉 세상에서 그저 보통 사람이라고 불리는 충은 이제는 스스로 가지고 싶은 것이 없는 층을 말한다. 즉, 자기 스스로 무엇을 가지고 싶은지, 무엇이 즐거운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지 못하는 계층을 뜻한다. 그 증거로 그들이 입버릇처럼 내뱉는 말인 "뭐 재미있는 것 없어?"가 있다. 세상이 별 볼일 없어졌다는 것은 아니다. 주된 유행이 없어졌을 뿐이다. 지금까지는 조금만 주위를 돌아보면 아무나 즐기고 있는 '즐거운 일'이라는 것이 반드시 있었다. 디스코, 서핑, 테니스 등. 하지만, 이제는 '이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어느 것 하나 예르르 들어도 반 이상의 사람들은 '흥미없어'라고 말할 뿐이다. 매스컴에서까지 '가치관의 다양화'라고 해서, 유행을 잡기도 하고, 앞서가기도 하고, 만들어 내기도 하던 이전의 작업들을 포기하고 말았다. 다른 사람이 하고 있는 '재미있는 일'을 흉내내온 볼륨 존의 사람들은 길을 잃고, 누구라도 좋으니 '이것은 진짜 재미있다!'고 말해 주는 사람에게 달라붙고 싶은 심정들이다."
이와 달리 오타쿠들은 사회 적응력이 없다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자신만의 재미에 민감하고 충실합니다. 그들은 언제나 재미있는 것을 스스로 찾아내 즐깁니다.


서브 컬쳐와 오타쿠 문화

이 책의 저자인 오카다 토시오가 프랑스 예술가을 만나서 이야기하다가 물었습니다. "마리오나 소닉같은, 컴퓨터 게임도 예술이라고 볼 수 있는가?" 그러자 답은, "우리 애들도 게임을 좋아해서, 학교 갔다오자마자 줄곧 게임에만 매달린다. 그래서 게임은 일요일에 1시간만 하는 것으로 정했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아이들을 미술관이나 박물관으로 데려가 예술이 어떤 것인가를 제대로 가르쳐 주곤 한다. 게임은 예술이 아니다."

그렇다면 예술은 무엇일까요? 그 예술가에 의하면 예술이라는 것은 아이들이 스스로 자연스럽게 익숙해지는 '재미있는 것'과는 결코 다른, 필수 교양으로서 꼭 배워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재미와 소위 아카데믹한 세계의 예술과는 아무 관련도 없기 때문에, 예술은 교양으로서 배우지 않으면 몸에 붙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재미있어하고 즐거워하는 문화는 본격 정통의 예술문화와는 '다른 문화'일 수 밖에 없는걸까요?


-메인컬쳐

위에 나온 예술가가 주장하는 정통문화는 주류문화인 '메인컬쳐(Main Culture)'입니다. 이것은 미술, 문화, 과학, 역사, 클래식 음악과 같은 아카데믹한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하지 않은 사람은 '수준이 낮다'는 말을 듣게 되는데, 이런 계급 사회의 색깔이 강하게 남아 있는 유럽에서 메인 컬쳐를 익히지 않는다는 것은 자살 행위와 같다고 작자는 말합니다.
그런 사회에서도 '아이들을 위한 문화'가 존재하는데, 다만 이것은 '어린이가 재미있어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제대로 된 어른이 되도록 교육하는'  문화라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어른'이라는 것은 '자아가 확립된 시민'이라는 의미인데, 훌륭한 사람들 = 계급 사회의 시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즉, 교양이 있고, '사회적 신용도'도 높은 어른이 되어야 하고 이것이 훌륭한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메인컬쳐적인 생각이며, 그 목적을 위한 교육이 곧 어린이 문화라는 것이지요.
다만 이것은 유럽의 사고방식이고, 일본인의 사고 방식과는 다르다는 것이 작자의 견해인데, 유럽에서는 텔레비전 방송을 어린이가 선택하게 한다든가 TV게임을 사서 준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이른바 메인 컬쳐적 사고 방식이고, 그들에게 있어서 '아이들 문화'는 아이들이 만든 문화가 아니라, '어른이 부여하는 문화'일 따름입니다.

이러한 가치관으로 보면 애니메이션은 사람을 때리거나 깔보는 이른바 반교육적인 내용도 많이 포함되어있고 많이 본다고 해서 미술이나 음악적 식견이 깊어지는 것도 아니니, 이런 것은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그런 사람들에게 애니메이션은 그저 ''서브컬쳐'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어른에게 반항하는 문화인 '카운터컬쳐, 반문화', 훌륭한 어른이 될 수 없는 뒤처진 젊은이들의 문화 '서브컬쳐, 비주류문화'. 그러므로, 제대로 된 어른들이 아이들을 '메인컬쳐'로 인도하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는 것입니다.

-코스모스&카오스

메인컬쳐가 왜 그토록 억압적이고 엄숙한지 알아보려면 그 뿌리인 기독교와 그리스 철학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우선 그리스 철학은 '모든 사물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들은 모두 합리적이어서 인간이 노력하면 다 알아낼 수 있다'는 본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고 방식은 기독교에서 약간 수정되는데, 세상에는 확실한 질서(코스모스)와 불확실한 무질서(카오스)가 있으며, 코스모스는 즉, 신의 세계, 카오스는 악마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중세의 성곽도시 중앙에는 반드시 교회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교회 종소리가 들리는 데까지만 교회로부터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종소리가 들리는 범위는 코스모스이고, 들리지 않는 숲속은 카오스라는 것이지요. 숲속의 일에 신은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갑자기 영화 '빌리지'가 생각나네요.)
RPG게임에서도 마을을 벗어나서 숲으로 들어가면 배회하는 몬스터들과 마주치죠.

과학은 이런 중세의 세계관에서 태어났는데, 원래 과학은 숲이라든가 바다, 식물 따위의 미지의 세계를 연구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질서를 발견하여 코스모스화 하는 행위였습니다. 카오스에서, 코스모스- 신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종교적 전쟁 개념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과학 중심의 메인컬쳐는 질서와 논리를 가장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개념에서 볼 떄, 자신의 감정 그대로 움직이는 아이들은 존재 자체가 카오스로서 좋지 않는 상태에 있는 존재이기에 빨리 코스모스적인 어른으로 성장해야만 하는 존재로 분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국인이 아이를 유모에게 맡겨 예절을 가르치는 것도, 아이의 무질서한 행동은 '악'이라는 메인컬쳐적 가치관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유모를 고용하는 것도 어느 정도 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메인컬쳐는 어느정도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 유지되어 온 문화일 수밖에 없었는데, 다시 말해서 특정계급의 증거이기도 했던 셈입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유럽은 부의 획득에 매진했고 그 결과 유럽 전체가 계급 평준화가 이루어졌는데, 이것을 '귀족문화의 대중화' 또는 '시민 문화의 확립'이라고 말합니다. 훌륭한 시민으로 되기 위해서 어른이 만든 어린이 문화를 모든 어린이들이 억지로 익혀야만했고, 이 억압들은 결국 '반항의 문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카운터 컬쳐에서 서브컬쳐로-

계급사회의 메인컬쳐의 억압이 커질 수록 반항이라는 반작용이 커졌는데, 이리하여 탄생한 것이 '카운터 컬쳐'였습니다.
"당신들이 아무리 훌륭한 시민을 외쳐 댔어도, 전쟁만 일삼지 않았던가! 그런 훌륭한 시민은 될 필요가 없어! 왜 그런 코스모스한 발상을 따라야 하지? 우리는 좀 더 카오스를 원한다!"
이것이 '카운터 컬쳐'의 본질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신대륙인 미국으로도 파급되어져 갔는데, 미국은 유럽과 같은 강한 계급사회의 요소를 찾아보기 힘들었고, 그리하여 그곳에서 카운터 컬쳐는 '서브 컬쳐, 비주류 문화'로 변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서브컬쳐를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고, 그저 단순히 젊은이들의 문화 정도로만 인식하였는데, 미국의 젊은이들 중에는 반항하는 계급이 없었고, 계급이 없어서 반항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어른이 되는 것 자체'에 반항하기 시작했습니다.  서브 컬쳐가 미국에서 탄생한 또 하나의 원인이 '소비자 문화'라는 주장도 있는데, 청교도주의에 대한 안티 테제로서, 대량 소비를 찬양하는 것이 서브컬쳐라는 주장입니다.
즉, 젊음과 소비인데, 그래서 서브컬쳐는 항상 그 시대의 소비자인 젊은이, 어린이들의 안색을 살피고, 메인컬쳐에서 부정하는 대상인 카오스의 대표 주자로 어린이를 주목한다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원래 일부 귀족이나 경제력이 있던 계급의 전유물이었던 '문화'가 농노들이 시민계급으로 격상함에 따라 모든 대중에게 개방되었고, 대중화된 귀족문화, 즉 '메인컬쳐' 를 습득했는지의 여부가 훌륭한 계급 시민의 여부를 가리는 결정적 요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에 이견을 가지고 반하는 사람들이 대항문화를 발생시키는데, 이것이 '카운터컬쳐'이며 연이어 벌어지는 세계대전에 대한 비판의식과 함께 전세계로 퍼지지만, 계급 사회 요인이 적은 곳에서는 '반항의 대상이 되는 계급'이 없었고, 이로 인해 카운터 컬쳐는 '어른문화에 대한 반항'으로 젊음, 소비 찬양주의로 이어졌는데, 이른바 '서브 컬쳐'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20세기말에 일어났던 서양문화의 기본 지도라고 합니다.
(요약하면서 인용하고 있는데 이런 부분은 세계사를 좀 더 공부해야겠네요...)

일본적 서브컬쳐

태평양전쟁 패배 후, 일본은 전적으로 서양적인 사상, 문화를 수입했고 대체적으로 "지금까지의 일본적 사상과 문화가 전부 엉터리여서 태평영전쟁이라는 엉뚱한 일을 저질렀고, 그래서 완전히 패망했다"는 식으로 자괴감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메이지유신 시대에 아무 비판 없이 무분별하게 서양 사상과 문화를 수입한 결과, 기본적인 정책은 부국강병책으로 치달았고, 그것이 군국주의를 키웠다는 사실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미국적인 것이 좋은 것이고, 일본적인 것이 나쁜 것이라는 , 일종의 문화사대주의라고 하나요?
이러한 문화적 히스테리로 일본은 문화적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고, 50년 후 일본의 경제가 2차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을 능가했음에도 일본의 문화는 '미국적인 것, 그것은 너무 좋은 것'이라는 식민지적 발상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일본의 서브컬쳐에도 세계적인 뭔가가 있다'는 발상을 바탕으로, 일본에서의 성공을 배경으로 유럽이나 미국에 데뷔(=실패)하는 엉뚱한 뮤지션들도 있다고 합니다.
일본의 유행이나 서브 컬쳐는 모방의 수준을 아직 못 벗어나고 있고, 어른에 대한 반항 사상이 본래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서브 컬쳐는 겉핥기식 흉내 밖에는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서브 컬쳐계에서 일본은 제대로 취급되지도 못했지만, 단 하나 유일한 예외가 있으니 바로 애니메이션, 컴퓨터 게임, 만화 등 세계의 모든 이들이 열광하고 있는 '오타쿠 문화'입니다.
하지만 오타쿠 문화는 서브컬쳐가 아닙니다.
'귀족문화(메인컬쳐) → 카운터 컬쳐 → 서브 컬쳐' 와는 맥을 달리하여 진화한 것이기 때문인데, 그 기원은 '어린이라는 존재를 받아들이는 법'부터가 다른 것입니다.

일본 문화에 있어, 아이들은 미완성의 어른이 아닌 근원적인 인간상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아이들과 같은 순수한 상태를 좋아하고, 아이들과 놀아 주는 마음씨 좋은 사람들이 성인聖人으로 추대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예술면에서도 무질서하고 미완성된 존재지만, 그러나 관객은 그것을 인정하고 즐깁니다. 서양문화의 정점인 발레에서 어린 아이들이 무대에 서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지만, 가부키에서는 세 살 박이 아이도 배우로 대등하게 연기하고, 스승과 제자라는 차이는 있어도, 어른과 아이라는 차이는 없습니다.
아이들은 코스모스를 뒤흔드는 카오스가 아니며 아이들 모두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 가까운 존재로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어른 사회에 대한 반항 문화'가 일어나지 않으며, 이는 마을과 숲의 경계가 애매하고 어른과 아이의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이라고 작자는 말합니다. 일본에도 '귀족문화'라는 것이 있었지만, 그것은 단지 교토로 천도하게 되면서 꽃을 피운 고도의 소비 문화일 따름이었습니다.  

이러한 일본형문화의 원류가 오타쿠 문화 안에도 흐르고 있는데, 일본의 '아이들용 문화' 에는 아이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우합니다. 물론 연령에 따라 불가능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일도 있지만 처음부터 무시해버리는 처사는 하지 않습니다.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에서는 인간의 근본적 갈등을 그리기도 하는데, 로봇 애니메이션에서는 전쟁 때문에 고뇌하는 로봇 조종사를 묘사하는 것과 같은 것이죠. 물론 이것을 이해하지 못 하는 유아들도 재미있게 보도록 배려하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보고 있는 아이들 모두가 알지 못해도 열 두살이지라도 머리가 좋으면 알 것이고, 열 여덟살일지라도 머리가 나쁘면 모르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20~30대의 현명한 어른들 입에서 '앗!'소리가 나오게 하고 싶은 거죠.

오타쿠 문화는 종류를 가리지 않는 특수한 '아이들 문화'로부터 파생되고 진화했습니다.
헐리우드의 영화는 다민족 국가인 미국의 모든 민족,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배려하는 순수성이 있었기에 세계를 석권할 수 있었고, 그 때문에 범위가 무척 넓었지만 그 속에서도 깊이 있는 작품은 끊임없이 만들어져 왔습니다.
일본의 오타쿠 문화 또한 대상 범위가 넓은 아이들용으로 누구나 재미있어 하는 순수성에서 출발하였으며, 그 안에서도 깊은 주제나 드라마를 이입시키는 작업으로 세계를 석권하게 되었던 거죠.

오타쿠 문화와 장인 문화 

감상에 있어서 오타쿠적인 재미는 장인의 예술감상의 재미와 다를 게 없다고 합니다. 장인의 기술을 사랑하고, 감독과 작품의 문맥을 읽고 그 안에서 재미와 유래를 확인하며, 그 세련됨을 감상하는거죠.
아무리 좋은 담뱃대라도 볼 줄 모르면 평범한 담뱃대에 지나지 않지만, 볼 줄 아는 사람은 재질의 차이라든지, 색깔을 입히는 장식의 세공의 어려움과 기술의 대단함까지 그 담뱃대를 통하여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이키'라고 부르는데, 만드는 사람도 '이키'라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만들며, 관찰합니다.
역으로 엉터리로 만들면 '이키'들로부터 엄하게 비판받습니다. 이렇게 만드는 측과 그것을 받아 보는 측의 주고받는 암호, 즉 야구에서의 '캐치볼' 같은 관계죠.
서양 예술에서 크리에이터는 가히 신神입니다. 아티스트는 받는 측의 의견을 묻지 않으며 들을 필요도 없죠.
역으로 받는 측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라도 하는 날에는, 대중에게 꼬리친다 하여 천대를 받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이키'에서는 만드는 측과 받는 측이 탄탄한 관계를 유지하며 진화해 나갑니다. 그럼, 받는 측이 만드는 측과 대등한가? 잘못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그것은 '작품의 좋고 나쁨을 이해하고 말할 수 있는 측', 즉 봐주는 사람들이 훨씬 위대하다고 말합니다.

정점은 감상하는 사람

오타쿠 문화의 정점에 서 있는 존재는 교양 있는 감상자, 엄중한 비평가들, 그리고 진지한 후견인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작품의 미를 발견하는 '세련된 시각'과 장인의 기술을 평가할 수 있는 '장인의 시각', 작품의 사회적 위치를 파악해 내는 '통달의 시각'을 가진, 극도로 세련된 사람들입니다. 훌륭한 오타쿠는 분명한 오타쿠적 지식을 가지고 확실하게 작품을 감상하고, 자신이 찍은 크리에이터의 작품에 대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지만 대충 만들어진 작품이나 장인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비평합니다. 이런 행동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크리에이터를 기르기 위해, 나아가 오타쿠 문화 전체에 공헌하기 위한 마음에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요리사를 마구 추켜세우면 그 음식점은 망하고 맙니다. 정확히 자신의 혀로 자신의 음식을 평가해야만 더 맛있는 요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지, 자만하고 칭찬만 해준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장인의 예술은 제대로 평가해야만 건전하게 문화로 이어지고 , 큽니다. 이렇게 심오한 오타쿠의 세계를 이야기하면, 이것을 '오타쿠학'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학學이라는 것은 발전성이 있고, 연구 대상이 바깥에 존재할 때만 가능하지만, 다도나 검도는 그 완성도를 자기 안에 둡니다. 그래서 도道라고 합니다. 작가는 자신의 강좌를 '오타쿠학'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오타쿠도 '도' 에 가까울 뿐이라고 말합니다.

앞으로의 변화의 흐름

앞에 나왔던 도의 세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타쿠는 경쟁하지 않습니다. 
고도 경제 경쟁 사회에서 고도 정보 사회로 변하고 있는 세상에서, 오타쿠는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작가가 이 책 이 전에 쓴 저서, '우리들의 세뇌 사회'에서 거론하기를, "우리는 곧 자유 경제 경쟁 사회로부터 자유 세뇌 경쟁 사회로 옮겨가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귀족 등 일부 특수 계급만 독점하던 경제 활동이 이제 민중에게도 자유롭게 개방된다는 얘기이며,자유 세뇌 경쟁 사회는 지금까지 정치가나 매스컴에게만 독점되었던 일반인에 대한 세뇌 활동이 일반 민중에게도 개방되는 사회이다.".
물론 현재 이러한 움직임 밑에는 디지털 혁명을 중심으로 한 네트워크의 사회운동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변화로 합리주의, 민주주의라고 하는 서양중심의 가치 체계는 무너질 것이며, 그 현상 중에는 메인 컬쳐의 퇴진도 당연히 포함된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메인컬쳐적 가치관은 점차 감소하고 있고 카운터, 서브컬쳐가 그 뒤를 잇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본래 메인컬쳐에 대한 반항심으로 반발한 에너지를 원류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한계가 올 것이라고 합니다.

자유 경쟁 경제의 가치관에서는, 아이들은 하루 빨리 어른이 되어야 하고 하루 빨리 생산에 투입되어야 한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건전한' 사고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맞게 된 사회에서는 '어른은 20세부터'라든가, '대학을 나오면 사회인', '65세가 넘으면 정년'이라는 딱 부러진 변화를 강요하지 않을 것이고, 완만한 변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합니다.
선진국에서는 교육의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대학을 나와 대학원에 입학하고, 전문학교에 다시 들어가기도 하여 사회인이 되는 평균 연령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또 취업을 해서도 '문화 교실'에 들어갑니다. 그리하여, 성인이 되면 누구를 막론하고 '넌 사회인이다'라고 정의하는 시스템은 현실적으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오타쿠 문화는 이러한 사회에 딱 맞아 떨어지는데, 아이들부터 어른까지 다 즐길 수 있는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고도 정보화사회이며, 다수의 가치관이 뒤섞이는 사회는 오타쿠의 온상이 되기도 합니다.

기독교와 그리스 철학을 원류로 하는 서양의 메인컬쳐 그리고 그 후의 서브 컬쳐와  일본의 메인컬쳐와 후의 오타쿠문화가 일본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아니 세계에서 패권을 다투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 차세대의 주된 가치가 될지는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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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앞까지는 거의 책의 요약이군요.... 부끄럽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한번 요약하고 나니 내용이 좀 더 들어온 것 같긴 해요.
앞서 말했지만, 오타쿠라는 사람들이 이렇게 심도있는 존재들인지 모르고 깔보고 무시하고 간과했던 것이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짧게 감상 리뷰를 적자면....

Web 2.0과  서브컬쳐

보면서 문득 신영복 선생님의 Web 2.0과 촛불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제가 썼던 시민문화 워크숍 리뷰를 인용하자면,

'web 2.0세대의 촛불에 대해 신영복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적이 있는데, web 1.0 때의 중앙서버로부터의 송신을 네트워크를 통해 그저 수신할 뿐이었던 것과 달리 2.0에서는 중앙서버가 존재하지 않으며, 사람들은 지식in, 블로그, 위키피디아 등의 자기 표현과 소통을 위한 네트워크를 중시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개개인이 너무나 다른 이야기를 하고, 개별적인 움직임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촛불집회에 예를 들면, 80년대의 집회는 중앙의 집단에서 '무슨날 몇시, 어디에 모여서 어떤 구호를 외치면서 이렇게 할 것입니다.' 라는 통지를 하고 그에 맞춰져서 집회가 진행되었다면, 지금의 집회는 각자 생각과 할 말들이 있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동시 다발적 혹은 언제고 나가고 싶을 때 나가서 모일 수 있는, 그런 형태를 띄고 있다. 이것은 '다원화'로도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 같고 모두가 서로 다른 이야기와 생각을 가지고 움직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1.0의 '군중' 이라고 보기는 힘들지 모른다. 이제는 대동단결이 아니라, 연찬이 필요하다는 하승창 선생님의 생각처럼 중앙서버로부터의 일방적 신호에 의한 군중의 집단행동보다는 개개인의 , 시민으로서 각자의 촛불을 들고 공통분모를 찾아가면서 여러 방향으로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는 연찬이 필요하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메인컬쳐와 메인서버를 동일시하며 보았는데, '시민'의 기준을 제시하고 요구하던 메인컬쳐가 무너지고, 그 후에 따르는 서브컬쳐라는 2.0, 다발적인 촛불들이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에는 자신이 주시할 것을 스스로 찾아 움직이고 행동하는 '현명한 오타쿠적 태도' 가 필요하고, 메인컬쳐가 없는, 오타쿠들이 존재하는 서브컬쳐들만이 존재하는 모양새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면에 가치를 두는 오타쿠의 도道를 이야기하면서, 서로를 오타쿠라는 경어로 존중하면서 정보를 공유했던 이들처럼 서로 경쟁하기보다는 각자의 서브컬쳐를 바탕으로 각기 다르게 커가는 세대가 되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가끔 저는 척결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든지, 몰아내자, 촛불군중같은 제 세대와는 어쩐지 안맞는 것 같은 단어를 쓰기도 하고,
스스로 제도권에 대한 반항심같은 걸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었어요.
'학교는 시즌2를 이야기하지만 나는 그래도 내가 시즌1이라고 생각하는데....' 뭐 이런 생각도 해봤어요,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난 시즌2가 맞는 것 같지만.
반항할 대상이 명확하지 않은 카운터 컬쳐를 지향하고 있었다니, 딴 시대를 살고 있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요즘 저는 세계를 이야기하는 스케일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책도 나와는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궁금해서 읽게 된 책입니다. 
이제 오타쿠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새로이 알게 되니, 우리 모두가 오타쿠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오타쿠는 한 세계에서만 갇혀있지 않습니다, 많은 세계를 걸쳐 어떤 것들을 관찰하고, 스스로 재미를 찾습니다.
우리가 주시하는 것, 세계관과, 스타일.  우주를 논하기 시작해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