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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웅 산 수 치에게 있어서 1988년은 운명의 해였다. 15살 때부터 시작된 30여 년에 이르는 외국 생활 동안 그녀는 학자로서, 평범한 주부로서의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운명의 1988년 어머니 킨 치 여사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영국에 머물던 아웅 산 수 치는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조국으로 돌아왔다. | |
| 그리고 그 해 8월 버마에서는 8888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버마의 국민들은 건국의 아버지 아웅 산의 딸 아웅 산 수 치가 자신들을 위해 행동해주기를 소망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그녀의 운명이자 의무였다. 그저 ‘평범한 여자’의 인생을 살고 싶었을지도 모를 40대 중반의 아웅 산 수 치는 안온했던 삶을 뒤로 한 채 가시밭길 같은 자신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웅 산 수 치는 버마 국민에게 희망의 이름이자 민주화의 상징이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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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88년 8월 민주화 운동에 뛰어든 이후 국민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아웅 산 수 치가 직접적으로 정치 일선에서 활동 한 것은 불과 7년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14년 세월 동안 그녀는 버마의 군부정권에 의해 가택연금 되어 자유를 박탈당했다. 최근에는 그마저도 불안했던지 군부는 그녀를 버마에서 악명 높기로 유명한 인세인 교도소로 옮겨 수감하고 있다. 현재 버마의 정권을 잡고 있는 군부세력이 말하는 아웅 산 수 치의 명목상 죄목은 내란죄이다. 그녀가 획책한 내란이라는 것은 바로 군부독재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이다. 버마 전체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아웅 산 수 치가 한번 움직일 때 마다 군부정권은 위협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군부는 쿠데타라는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자신들과 다르게 국민적 지지를 얻고 있는 아웅 산 수 치의 존재는 그 존재만으로 치명적이다. 그러기에 군부는 아웅 산 수 치가 자유롭게 정치 활동을 하는 것을 내버려 둘 수가 없다. 그렇다고 아웅 산 수 치를 여타 정치범처럼 함부로 죽일 수도 없다. 아웅 산 수 치는 버마 건국의 아버지이자 군대를 창설한 국민 영웅 아웅 산의 딸이다. 군부 내에서도 아웅 산 장군에 대한 존경심은 드높다. 군부정권 자체의 뿌리이자 명분일지도 모르는 아웅 산의 딸 아웅 산 수 치는 군부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자유롭게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제거할 수도 없는 존재, 아웅 산 수 치는 그렇게 버마 군사정권에 의해 정치활동 기간의 2/3를 감금당한 채 보내야 했다. 감금은 그러나 그녀의 정치 인생의 끝이 아니다. 아웅 산 수 치의 감금은 그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버마 국민들의 더 강한 지지와 세계적인 명성을 이끌어 내고 있다. | |

| 아웅 산 수 치의 아버지 아웅 산 장군은 버마 국민들에게는 국부와 같은 존재이다. 버마는 1824년부터 영국과의 세 차례 격렬한 전쟁 끝에 패배하여 1886년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아웅 산은 버마의 독립투사로 영국과 일본에 무력 항쟁하여 버마의 독립을 이끌어낸 사람이다. 그는 1940년대 영국을 몰아내기 위해 30명의 동지들과 함께 일본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 일본과 손잡고 일단 영국 세력을 버마에서 몰아낸 아웅 산 장군은 이후 다시 연합군과 손잡고 버마에 세력을 뻗친 일본을 몰아내고 독립을 획득했다. 그는 60여 년에 걸친 버마의 식민지 역사를 끝낸 버마 건국의 아버지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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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 산 수 치는 1945년 6월 19일 아웅 산과 그의 아내 킨 치 사이에서 세 번째 아이이자 고명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이름은 아버지 아웅 산의 이름과 할머니 수 그리고 어머니 치의 이름을 골고루 딴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 버마의 독립을 획득한 치 산은 채 정부가 구성되기 전에 정적에 의해 암살당하고 만다. 32년이라는 짧은 인생 동안 오로지 버마를 위해 살았던 아웅 산은 그 투명한 삶과 업적으로 인해 버마의 국민 영웅이 되었다. 아웅 산의 유족들은 영웅의 유족으로 추앙 받았고 영웅의 유족답게 살아야만 했다. 1962년 네 윈에 의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까지 아웅 산의 미망인 킨 치는 중앙 정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아웅 산 수 치는 1960년 인도 대사로 부임하게 된 어머니를 따라 인도로 건너갔다. 이때 시작한 외국 생활은 그녀가 1988년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버마로 돌아오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1962년 아버지의 동료였던 네 윈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로 조국은 버마식 군부사회주의 독재정권으로 바뀌었고 아웅 산 수 치는 망명 아닌 망명상태로 외국을 떠돌았다. 그녀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정치와 경제, 철학을 공부하고 뉴욕에 있는 유엔에서 일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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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웅 산 수 치는 국적을 미국으로 바꾼 오빠 아웅 산 우처럼 떠나 온 조국 버마와는 상관없는 인생을 살아갈 것만 같았다. 게다가 그녀는 버마인이 아닌 ‘영국인’ 아시아 연구자 마이클 에어리스와 결혼하면서 조국 버마에 대한 아웅 산의 딸로서의 부채의식을 완전히 벗어버린 듯 했다. 그녀는 남편을 따라 부탄과 영국에서 살았다. 아버지 아웅 산에 대한 책을 쓰려고 자료 조사차 일본 교토에 머문 1년 외에 그녀는 영국인 남자와 결혼한 아시아계 주부로 두 아들을 키우며 평범하고 행복한 일상을 가꾸어 나갔다. 그러나 운명은 그녀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평범한 여인이 가질 수 있는 행복 따위는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어머니가 쓰러지고 조국 버마가 그녀를 불러 들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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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버마는 26년간 계속된 군부독재와 이에 따른 경제파탄과 인권유린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아웅 산과 함께 독립 운동을 했고 독립 후 군부의 수뇌가 된 네 윈은 1962년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군부정권의 최고 권좌에 앉아서 젊은 날의 순수한 의기를 잃어버리고 탐욕스러운 독재자로 변했다. 네 윈과 그를 둘러 싼 군사 독재정권은 식민지 기억에 대한 지나친 강박증으로 1960년대 새삼스럽게 대외적으로 쇄국 정책을 폈다. 온전한 사회주의라기보다는 동양적 가치관과 불교가 습합된 버마식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표방하였으며, 서방사회를 적대시하며 제 3세력의 중립외교정책을 표방하였다. 시기 적절하지 않은 정책들과 독재 권력의 부정부패는 경제 파탄을 가져왔다. 버마의 국민들은 폭압과 가난 속에서 질식사할 상태에 이르렀다.
대학생들이 먼저 나섰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 영국에 대항해 독립운동을 하던 때부터 자유와 인권과 독립의 상징이던 공작새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군부는 평화적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많은 학생들이 군부의 총칼아래 희생되었다. 꽃다운 젊은이들의 희생에 그 동안 잠자코 있던 버마 국민들은 분노했다. 1988년 8월 8일 8시 수도 양곤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불교 승려와 시민들이 대거 참여한 8888항쟁이 일어났다. 군부는 언제나처럼 이들을 총과 칼로 진압하려 하였다. 그러나 진압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시민들의 분노는 그 이상으로 강해졌고 시위대의 규모는 커져갔다. 시민과 학생, 승려들까지 수 천 명의 사람들이 군부의 총칼 앞에 죽어갔지만 시위는 진압되지 않았다. 사태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누군가 나서 잔혹한 군부에 경종을 울리고 선량한 국민들의 대변인이 되어 주어야만 했다.
그 해 4월 버마로 돌아와 오로지 어머니의 간호에만 힘쓸 뿐 정치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아웅 산 수 치는 8888항쟁을 지켜보면서 더 이상 자신이 버마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민중들은 그녀를 원했다. 국민영웅 아웅 산의 딸이 나서 군부를 꾸짖고 새로운 세상을 국민들에게 가져다 주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8월 15일 아웅 산 수 치는 정부에 국민들의 요구에 응할 것을 촉구하는 ‘화평안’을 제안했다. 그리고 8월 26일 희생당한 시민 시위대의 시신이 안치된 양곤의 종합병원 앞에서 몇 십만의 남녀노소 버마 국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민주화를 위한 연설을 하였다. 이로써 버마민주화의 상징, 아웅 산 수 치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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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 산 수 치가 정치 일선에 나서자 버마 국민들은 열렬히 환호하며 그녀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다. 군부도 국민들의 민주화 의지에 어느 정도 양보를 하는 듯 한 제스쳐를 보였다. 일당 독재를 폐지하고 다당제 정치와 선거를 약속했다. 시민들이 승리한 듯이 보였다. 아웅 산 수 치는 군부정권에 맞서 민주지사들과 함께 민주민족동맹(NLD)를 창설하고 사무총장직을 맡았다. 그녀는 전국을 돌며 새로운 버마에 대한 희망을 연설하고 군부 독재의 종식을 촉구하였다. 아웅 산 수 치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수 천 수 만의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은 그녀에게서 버마의 장밋빛 미래를 보았다.
잔혹한 진압에 대한 국제적 비난과 민주화에 대한 거센 국민의 요구에 잠시 주춤했던 군부는 아웅 산 수 치의 행보에 당황했다. 군부의 양보는 잠시 궁지를 모면하기 위한 임시방편이었을 뿐 추호도 정권을 내놓을 생각이 없었다. 과거 몇 차례 순박하고 평화로운 버마의 국민들은 때때로 군부의 이러한 조삼모사격 음모에 쉽게 좌절하기도 하였다. 군부는 이번에도 국민을 기만하려 하였다. 그러나 아웅 산 수 치의 등장으로 계획은 어그러졌다. 아웅 산 수 치를 따르는 버마의 국민들은 더 이상 총과 칼로 위협하고 몇 개의 당근정책을 내놓으면 거기에 안주하는 다루기 쉬운 사람들이 아니었다. 군부 정권은 아웅 산 수 치를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네 윈의 퇴진 이후 신군부의 소 마웅은 다시금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그 동안 소강상태였던 시위대에 대한 잔혹한 진압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1989년 7월 아웅 산 수 치를 가택 연금하였다. 아웅 산 수 치를 국민들과 격리시키면 시위는 사라지고 군사 독재가 가능 할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 |
| 그러나 그것은 군부의 커다란 오산이었다. 수도인 양곤이나 대도시의 식자층만이 자신들을 반대할 뿐 국민 전체는 아직도 군대를 믿고 따른다고 여긴 군사 정권은 8888항쟁 때의 약속을 지킨다는 명목 하에 1990년 5월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결과는 아웅 산 수 치가 결성한 민주민족동맹(NLD)이 82%의 지지를 받아 압승하였다. 그러나 군부는 엄연한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평화로운 정권이양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군부는 오히려 선거결과를 무효화 하고 민주 인사 수 백 명을 투옥하였다. 총과 칼이 설치는 군부의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선거 시기만 피해보자는 생각으로 1년 기한으로 연금한 아웅 산 수 치의 가택연금을 무기한으로 연장하였다. 한때 민주주의의 봄이 오는 듯했던 버마에는 다시 암흑이 내려 앉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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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의 승리도 좌절도 아웅 산 수 치는 가택연금 된 상태에서 맞았다. 그녀는 단식도 하였고 국제적인 청원도 하였지만 버마 군부는 아웅 산 수 치를 가둬 둔 채 총칼을 휘두르며 요지부동 지금까지 버마를 통치 하고 있다. 그 사이 아웅 산 수 치는 1991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버마 정부는 아웅 산 수 치의 가택 연금을 풀어주지 않았다. 결국 이 시상식에는 그녀의 남편과 아들이 아웅 산 수 치의 사진을 들고 대신 참석하였다. 1995년에는 국제적 압력에 못이긴 버마 정부가 아웅 산 수 치를 잠깐 가택연금에서 풀어주기도 하였다. 그녀는 이 시기 동안 여전히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운동을 계속하였다. 1999년에는 남편 마이클 에어리스가 사망하였지만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못했다. 외국으로 나가면 군부가 그녀를 버마 땅으로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을 염려해서였다. 결국 2000년에 버마 군사정권은 아웅 산 수 치를 다시 가택연금하고 양곤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였다. 2002년 국제 연합특사가 버마에 대한 경제 제재를 일부 풀어주는 조건으로 아웅 산 수 치를 가택연금에서 풀려나게 했지만 이듬해인 2003년 군사정권은 그녀를 또 집에 가두어 버렸다. 2008년에는 5년 시한이던 가택연금을 1년 더 연장하더니 최근에는 그녀의 집에 낯선 미국인이 잠입한 사건을 꼬투리 잡아 그녀를 인세인 교도소로 옮겨 구금하고 있다. 그녀의 죄목은 ‘공중보안법’ 위반이고 군부의 시나리오에 의하면 5년 형을 내릴 것이라고 한다. 세계는 아웅 산 수 치에 대한 버마 당국의 처사를 맹 비난 하고 민주화를 향한 버마 국민들의 소망을 무시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버마 정부에 대해 경제 제재까지 가하고 있지만, 버마 군사정권은 아직까지도 묵묵부답,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게 위해 오늘도 총칼로 무장한 채 버마를 통치하고 있다.
<필자 주> 버마의 공식 국명은 미얀마이다. 이 국명은 1992년 군부에 의해 정해졌다. 그러나 민주화세력들은 국민적 동의 없이 개칭된 미얀마라는 국명을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버마라는 국명을 쓰고 있다. 민주화 세력의 구심점인 아웅 산 수 치에 대한 글인 만큼 이 글에서는 미얀마라는 유엔 공식 국명을 쓰지 않고 버마라는 국명을 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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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 산 수 치의 인생과 버마의 현대사를 객관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일본인 AFP 기자 미카미 요시카즈가 쓴 르포 전기 <포로가 된 공작새 아웅 산 수 치>(정성호 옮김) 를 보는 것이 좋다. 아웅 산 수 치의 가계와 그녀의 인생, 버마의 현대사, 8888항쟁 당시 버마정계의 동향 등이 잘 정리되어 있다. 1991년에 쓰여진 책인 만큼 8888항쟁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접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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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 산 수 치가 쓴 저작물은 몇 권 있으나 최근에 출판된 <아웅 산 수 치의 평화>(이문희 옮김)를 권한다. 이 책에 실린 글은 아웅 산 수 치가 첫 번째 가택 연금에서 풀려난 후 일본의 요미우리 신문에 연재했던 에세이이다. 그녀의 글들은 버마 당국에 등록되지 않은 팩스로 전송되었는데 그녀를 도와 글을 몰래 일본 신문사에 전송하였다는 이유로 레오 니콜스라는 호주인은 버마 당국에 붙잡혀 결국 인세인 감옥에서 옥사하기도 하였다. 책에 실린 글들은 한 사람의 정치인으로서가 아니라, 인간 아웅 산 수 치가 느끼는 버마의 사람, 자연, 문화, 종교, 정치, 사회에 대한 이야기와 자신의 철학과 인생관 등을 담고 있다. 한때 문학을 하고자 하였던 아웅 산 수 치 이니만큼 글이 단아하고 섬세하여 읽는 맛이 있다.
버마의 현대사를 바라보는 서방의 시선을 느끼고 싶다면 1996년 작 존 부어맨 감독의 영화 <비욘드 랭군>도 볼만하다. 8888항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항쟁의 한가운데인 랭군(버마의 수도 양곤)에 우연히 머물게 된 서양인 여의사가 버마 민주화 세력을 도와 버마를 탈출하면서 겪게 되는 자기극복과 사회인식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극중에 아웅 산 수 치가 온화한 카리스마로 군인들의 총부리에 맞서 당당하게 총부리를 거두고 헤쳐나가는 장면이 나온다. | |

When we meet a desert, make it a gard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