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세계를 넘어 상호적 신호관계 만들기(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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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시청권
하자에서 길 찾기 과정을 수료한 뒤 8개월 과정, 더불어 시즌 1의 마무리인 이번학기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가 가장 처음 했던 이야기는 고래 이야기였다. 하자에서 고래라는 상징은 고래의 가청권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고래가 있었다. 가청권 밖에서 소리를 내던 고래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야기 할 수 있고 또한 들어줄 수 있는 하자라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 공간에는 곧 그와 같은 여러 고래들이 모이게 되었다. 고래들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즐겁기도 하고, 몸이 근질근질 하기도 해서 가청권 밖의 소리가 아닌 새로운 표현방식으로 춤을 추게 되었다. 그들은 각자마다의 고유한 춤을 추며 자신들의 존재와, 의미를 표현했고 그 춤들은 또 다른 고래들을 불러 모으기도 했다. "

나의 생각과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매체에 대한 갈망으로 하자에 들어왔던 내가 하자에서 받았던 질문들은 그러나 표현하는 것 이전에 왜 표현하고자 하는지, 무엇으로 인해 움직이는 것인지, 그래서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것들이었다. 무엇으로 인해 움직이는 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어떤 것들을 보고 듣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자작업장학교 안에서의 1년가량의 학습과정은 나에겐 나의 가청권을 인식하고, 또한 내가 듣고 인식하는 것의 범위인 가청권의 범위를 얼마만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답을 하는 시간들이었다고 생각한다. 

흔히들 정보의 시대라 부르는, 인식이라는 단어가 무안해질 만큼 온갖 정보들과, 미디어들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우리의 가청권은 유린되고 만다. 더 이상 어떻게 더 많은 정보들을 잡아낼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올바른 정보를 판단하고, 찾아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하는 시대, 더불어 핫뉴스들을 시시각각 전달하는 매스미디어 덕에 더 이상 어지간하게 '핫' 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는 어려운 시대 속에서 하자는 오히려 나에게 다시금 '인식'을 물어왔다. 너는 어디까지를 인식하고 있느냐고, 너의 가청권은 어디까지냐고, 가청권의 범위를 어떻게 만들어가고 싶으냐고 말이다. 

기후변화 시대의 living literacy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하자에서는 가청권뿐만 아니라 가시권에 대해서 이야기 하며 좀 더 능동적인 인식활동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신호를 수신 받을 수 있게 길게 뽑고 있는 안테나와 같은 그것을 감수성이라고 불렀다. 기후변화 시대의 living literacy를 통해 나는 내가 살아가고 있는 환경에 대한 채널을 켜두는 생태적 감수성이란 무엇인지, 또한 그것을 인식한 후, 알게 된 정보들과 사실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인식이 인식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발자국 더 깊숙이 들어왔을 때 나는 책임감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2. 구성원
내가 9살 때부터 8년의 시간을 보낸 볍씨학교는 생명이 소중한 세상, 생명이 자유로운 세상이라는 모토 아래 만들어진 학교였다. 생명을 가진 것은 다 소중하다는 인식이 구현된 공간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기 위해 [ 몸으로 하는 폭력, 말로 하는 폭력 모두 하지 않겠다. /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 와 같은 약속들을 만들었고 그것들을 인지하고, 지키는 과정은 내가 속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써의 책임감을 갖는 것이었다. 공동체를 졸업하고, 하자작업장 학교에 들어왔던 것은 익숙한 공간의 구성원이라는 것에 안주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이기도 했다. 

그러나 하자는 나에게 다시 한 번 '구성원' 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세상을 구하는 시인들"이라는 제목을 가진 시민문화 워크숍을 통해 나는 시민의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인식하며 끝내는 시민 문화 워크숍 에세이에 "나는 나를 설명하는 정체성들 중 하나로 '시민' 이라는 단어를 크게 가져오고 싶다" 라는 선언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내가 인식한 시민의식이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지금의 현실이 단순히 세상일이 아니라 '내가 포함된 세상일' 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지금 몸담고 있는 공동체 안의 구성원일 뿐만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시민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잘 살아가고 싶다. 나에게 잘 살기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먹고 살기이다. 하지만 혼자 잘사는 것은 싫다. 혼자 잘살기는 재미없고, 심심하고, 외롭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우리" 라는 단어를 서서히 내놓기 시작했다. 시민의식은 내가 속한 세계를 인지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함께 잘 살 수 있을까" 에 대한 고민과 신념들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실천하며 살 수 있을까 라는 생각과 함께 나는 그러기위해 내가 이야기하는 "우리"의 범위는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계속해야 했다. 

3. 만남

현장학습을 준비하면서도 여전히 나는 내가 '우리'라고 부르며 인지하고 있는 가시청권의 범위는 어디까지 인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세상을 구하는 시인들" 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시민문화 워크숍에서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구성원으로써 가져야할 책임의식, 시민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세계 곳곳에서 탈 경계, 탈 민족의 양태가 벌어지고 있다지만, 전 지구적인 상황과 현실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감이 잡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게 서로 만나 내가 '우리' 라고 부르는 나의 세계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또 각자가 '우리'라고 부르는 개개인의 세계를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8시간정도의 상공에서 여러 국경을 넘는 비행 후 내가 발을 디딘 곳은 태국과 버마 사이 국경지역 메솟이었다. 

우리가 만나서 가장 먼저 했던 것은 '자기소개'였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나는 나 자신을 소개하기 위해서 나를 둘러싼 나의 세계를 설명해야 했다. 나 역시 끊임없이 물었다. 너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서.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우리는 또한 현실에서의 나의 입장과 위치에 대해서 설명해야 했다. 

그것이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었던 버마의 현실에 대한 정보와 달랐던 것은 그것이 내가 만난 '너'들의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타인, 혹은 내가 모르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친구의 세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현실이었다. 

너의 세계를 만나며 나는 당황스러웠다. 답답했고, 울분이 터져 나왔다. 분명히 내 앞에 존재하고 있는 파치가, 미누가, 클라우가, 툰툰이, 구구가, 그러나 현실에서 존재증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태국과 버마의 사이에 있는, 걸어서, 수영을 해서, 보트를 타고, 쉽게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폭이 좁은 강이었으나, 내 옆에 서있던 클라우에게는 절대 열려있는 경계가 아니었던, 거대한 장벽과 막막함으로 다가오는 반짝거리고 있던 강을 마주했을 때, 난민캠프의 가장 높은 곳, 절벽 아래에 서서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사람들의 일시적인 공간, 그러나 일시적일 수 없었던 캠프의 거대함과 무기력함을 마주했을 때, 그리고 우리가 헤어지던 날, 네가 나올 수 있는 만큼, 그러나 그것이 캠프 안으로 들어가는 다리 너머까지였던. 우리에게 손을 흔들던 너를 보았을 때.  나는 너를 둘러싸고 있던 세계와 마주했다. 

내가 너를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너와 만난다고 했을 때는, 너뿐만 아니라 네가 속한 '너들'의 문화, 질서, 규칙들을 포함한 너의 세계와도 충돌하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며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에 각자의 세계의 규칙과 신호들의 존재를 확인하고 설명하는 '묻고 답하기'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것은 대화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며 또한 서로가 서로의 세계를 인식했을 때, 안테나를 세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오감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지금, 여기 나의 현실에서 나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규칙들을 바꾸어 나가고 싶다고 강하게 말하던 너의 목소리를 듣던 순간을 기억한다. 자신의 세계에 기여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의 범위를 넓힐 수 있는 스킬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했던 파치의 얼굴을 기억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부터 시작하면 좋을까요, 라는 물음에 시선을 주는 것부터 시작이라는 말을 해주셨던 HREIB 선생님과의 대화를 기억한다. 자신의 과거와 같은 끔찍한 기억을 갖는 사람들이 더 이상 없게 하고 싶다던 툰툰의 눈빛을 기억한다. 항상 농담을 주고받았던 미누가 자신의 가족과 자유롭게 만나지 못하는 현실이 가끔은 자신을 너무 힘들게 한다고 이야기했던 밤의 무릎위에 놓인 깍지 낀 두 손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마다의 방법으로 각각 이 현실 속에서 움직임을 만들어가고 있는 NGO단체들과의 만남을 기억한다. 그 순간 내가 느꼈던 수많은 감정들을 기억한다. 함께 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까를 고민하고 싶다고 느꼈던 순간들을 기억한다.

너와 내가 어떻게 같을 수 있을까, 그러나 너를 완전히 이해한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너의 세계, 나의 세계가 분명히 존재하는 이곳은, 하나의 현실이라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우리가 공감하는 지점이 있고, 그 지점이 있기에 함께 나누고, 도모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너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만났을 때, 닿았을 때, 그 세계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공감이라는 것을 할 때, 너와 나의 세계는 우리의 세계가 된다. 만남은 너와 나의 세계가 닿은 것이다. 우리가 닿은 이상, 내가 너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함께 가슴이 뛰는 순간, 너의 현실, 너의 세계는 내 안으로 들어와 내가 인식해야 할 나의 현실, 내가 책임과 의무를 가져야 할 나의 현실이 되었다.

너의 현실과 마주하는 그 과정에서 내가 다시 깨닫게 된 것은 나의 바운더리였다. 내 세계 안에서 통용되는 규칙들이 있었다. 너의 현실에서 마주하게 된 아찔하고 당황스러웠던, 가끔은 무기력해져버렸던 순간들은 또한 내 세계의 규칙과 신호들에 대해서 들여다보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4. 나의 세계
하자에 들어와 처음에는 자율 공간 앞에 왜 '일시적'이라는 말이 붙는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나의 현실과 세계는 그 바운더리 안이었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통용되는 신호들을 읽어내면 되었었고, 그 안에서 나의 목소리를 내면 되었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세계 밖 너의 세계와 만났을 때, 그리고 그것이 너의 세계일뿐만 아니라 나의 현실, 우리의 현실이라고 생각했을 때, 나는 그것이 '일시적'이여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분통터지지만 현실 어디에서나 자율이라는 규칙이 통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약육강식, 시장경제, 무언가를 생산해 내야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것 등 현 시대의 일상 속의 보이지 않는 힘의 법칙과 공식들 틈에서 대안적인 공간이란 그것의 대안으로써 그 자율이 통용되고, 보호 받는 작은 세계를 구현한 공간인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세계를 넘어 타율이 통용되는 대부분의 현실과 마주했을 때 나는 현실이 왜 이렇게 거지같아 라고 이야기하며 절망하거나 도피할 수는 없다. 그것이 바로 '나'의 현실이며 또한 나와 직접 닿았다고 생각하는, 만난, '너'들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 바운더리 안에서 자라며 내가 기른 것은 자율의 감수성이라고 생각한다. 일시적 자율공간 안에서 기른 타율이 아닌 자율의 감수성이란 외부의 권위나 권력이 아닌 나 자신의 목소리가 행동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나는 이 감수성을 가지고 현실 안에서 살아가고 싶다. 그러나 자율의 감수성을 지켜나가겠다는 것이 현실 안에서의 아웃사이더, 현실을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자신의 이야기만을 하는 것이 되어선 안 된다. 그것은 또 다른 폭력이며, 유치하다. 또한 결정적으로 스스로의 가시청권을 제약하는 행위이다. 이 감수성을 가지고 '현실' 안에서 '살아가겠다.' 라는 것은 그것이 유토피아적인 상상의 만족으로 끝나게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그러기 위해 경계해야 할 것은, 지키고 싶은 것을 가지고 현실과 마주했을 때 자칫 잘못하면 현실의 권력과 룰이 대항해야 하는, 거대하고 뭉뚱그려진, 괴물과 같은 '악' 으로 인식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분법적인 사고를 했을 때 생기는 권력(사회적 힘)의 괴물화는 그 정체를 흐리게 하는 것이며, 마치 나의 목소리를 판타지처럼 보이게 해 움직임이 버거워지는 무기력한 상태를 만든다. 그런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상황과 조건에 대한 섬세한 구분과 인식이 필요하다. 신호를 섬세하게 잡기 위해선 나의 안테나를 잘 만들어가야 한다. 

5. 신호
신호란 인간의 시청각이 도달하는 범위 내에서 통용되는 통신 방법이다. 신호는 신호 자체로써 존재하는데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신호를 '보내는 사람' 또 신호를 받는 대상이 있을 때 의미를 갖게 된다. 혹은 신호를 '읽는 사람' 신호를 '전달하는 사람' 이 필요하기도 하다. 

나의 목소리가 혼잣말이 되지 않기 위해선,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신호를 서로 보내고 받는다는 것은, 서로 다른 규칙이 통용되는 세계에서 그저 각각의 신호를 대상 없이, 허공에다 쏘는 것이 아니다. 대상이 불분명한 신호란 얼마나 큰 안타까움을 만들어 내는지를 나는 TCK TCK TCK 캠페인 영상을 만들며 뼈져리게 느꼈다. 

신호는 내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기도 하며, 내가 읽어낸 것을 전달하는 응답, 혹은 메신저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신호를 폭죽처럼 하늘에 대고 뻥뻥 쏘는 것이 아니라 '보낸다' 라고 표현했을 때에는 그것은 상호적이며, 자신의 가시청권 안에서만 야기되는 자위적인 표출, 표현을 넘어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도모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나의 대상은 우리의 현실이다. 

의무와 책임을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수동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율에 의해 능동적인 사명감을 갖는 것. 그 소명을 현실에서 실천하고 구현하는 과정에서의 상호적 신호관계를 위해서 나는 나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기 위한, 현실의 가시청권과 공유할 수 있는 언어가 필요하다. 나는 지금까지 경험의 순간들을 사진, 그림, 글 등으로 기록해왔다. 이제는 그것이 나만의 경험, 과거의 포착된 순간으로 존재하는 것에서 멈추고 싶지 않다. 나는 보는 것을 좋아하고, 시각언어를 사용할 때면 시간가는 줄 모르겠다. 영상팀 안에서 팀 작업을 하며 보낸 나의 시간은 매체가 시각적인 순간에 심취해 단순히 '머리로만 하는 아트'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신호가 되어 현실에서 나의 목소리를 전달해주는 매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 과정이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이 언어로써 나의 신호를 보내고 싶다. 나는 이제 나의 언어가 신호를 공유하는 하나의 운동으로써, 나의 시도들로써 존재하길 바란다. 

나의 세계에서 핵심적인 코드인 '나의 목소리'를 가지고 이 현실에서 '어떻게' 능동적으로 살아갈까 는 9년간 나의 세계였던 자율공간의 경계 밖을 나오려는 내 앞에 놓인 과제다. 그것은 대안적인 공간 안에 있는 것이 '가능'했던 환경 속에서 자란 내가 가져야 할 의무와 책임이기도 하다. 나는 현실의 보이지 않는 힘에 쫄지 않고, 나의 목소리를 지키며 살고 싶다. 자율공간에서 기른 나의 감수성을 내가 살아가는 현실을 읽고 응답하는 상호적 신호관계로써 구현할 것을 다짐하며 나는 이제 나의 세계를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