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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내가 선택한 길.

 

2006년 8월, 나는 하자센터에 “세 개의 옛 이야기 꼼꼼하게 읽기” 프로젝트를 참가하러 왔었다.  방학 중 우연히 신문을 읽던 중 하자센터와 관련된 기사를 본 것이 계기가 되어 홈페이지를 수시로 들른 결과이다. 3층 311호에서 진행 되었던 수업은 이제껏 들어왔던 문학수업과 다르게 토론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프로젝트 마지막 날에 단지를 처음 만나게 되었고, 그 당시에 단지가 소개했던 허난설헌의 생가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홍낭자의 활력프로젝트로 이어 질 뻔 했던 수업은 다니던 학교가 개학을 함으로서 참여하지 못했다. 현장 학습 신청서를 내고라도 다녀오겠다는 나의 말에 선생님께서는 아직 너의 수준에 맞지 않는다. 너무 이르다. 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2008년 1월, 또 다시 나는 하자센터를 찾았다. “커리어 위크- KBS편”을 참여하기 위해서 였다.

1주일이라는 시간동안 여의도 KBS와 하자센터를 오가면서 멘토와 판돌들과 함께 학교라는 틀 안에서 알 수 없었고, 교과서와 적성 검사 표에서만 보았던 직업보다 훨씬 많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리가 있었던 캐치스코프의 영상프로젝트를 통해 실제로 내가 영상을 만들어 보는 역할이 되어 보기도 했다. 가장 크게 느꼈던 것은 해보면 알 수 있다는 것 이었는데, 해보지 않았으면 판단 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 당시엔 할 수 있다 보다 용기가 되고 힘을 주는 말이었다.


캠프 기간동안 우리의 일정을 촬영 해준 원이 만든 영화도 보았다. 총 3편의 영화를 보았는데 그 중 창문 너머의 별의 끝 부분 원이 고정희 생가 마루에 걸터앉아 허난설헌과 나혜석의 이야기를 하며 말을 했었다. 자기가 태어난 집을 뛰쳐나간 순간부터 이 여자들의 진짜 인생이 펼쳐진 것은 아니었을까요? 라고. 나는 그 때 그 말을 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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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2일자로, 나는 공항고등학교를 자퇴 했다. 동시에 하자작업장학교 길 찾기가 되었다. 성적은 그렇게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학교 일 특히 대외 활동에 열성이고 반장, 방송부원, 학생회원 감투란 감투는 모두 뒤집어쓰길 좋아했다. “이 학생은 타의 모범이 되어......” 라고 시작하는 상을 받는 그냥 평범하지만 선생님에게 인정받는 학생이었다. 그렇지만 곧, 학교라는 공간은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을 점수와 등수로 결정하는 무지막지한 공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부정하는 순간, 나에게 학교는 언제까지나 대학 이후 라는 말 만 되풀이하는 지옥같은 공간이 되어버렸었다. 나는 열심히 살고 있었지만 내 인생에 주인 행세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계속 마음 속 에는 진짜 인생에 대해 말하는 하자라는 곳이 마음 한 쪽에 계속해서 자리하고 있었다. 주어진 인생에 충실할 뿐 내 인생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일은 남들에 의해서 판단되고 스스로에게서부터 유보시켜왔던 것이다.


학교라는 공간을 나온 순간부터 나는 진짜 인생을 살겠다고 결심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아 왔던 감투를 다 벗고 살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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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죽돌 생활을 시작하며 하자작업장학교에서 첫 번째로 한 것은 자전적 글쓰기와 인문학이다. 자전적 글쓰기를 통한, 나를 되돌아보는 학습은 현재의 내가 이 자리에 있기 까지 어떤 상황이 있었는지를 되짚어보는 과정이었다. 때로는 향수에 젖어 마냥 즐겁기도 생각하기 괴롭기도 했지만 그러한 시간들이 모이고 합쳐져 지금의 내가 만들어 졌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나의 삶을 읽고 글로 쓰고 이야기 하는 것은 나에게 나를 이해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영등포 프로젝트는 자주 다니던 길목에서 사람을 만나고 동네를 구석 구석 살피는 과정이 단순하게 이것을 봤고 저것을 봤다만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이야기 안에는 우리는 적극적으로 연결지으려 하고 어떤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는지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찾아가는 과정을 경험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굉장히 이상한 공간이었다. 조건이 사람을 만들기도 하고 사람이 상황을 만들어내고 그것들이 저마다의 사연들 속에서 함께 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보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았고 그 것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내가 있었다. 함께 있다는 것으로 서로에게 좋던 나쁘던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나의 주변에서 내가 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렇지만 본다고 해서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를 알고 내 주변을 살피는 학습은 더 나아가 시대를 읽고 해석하는 기후변화 시대의 living literacy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기후변화라는 글로벌 이슈에 대한 영상,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토론하는 과정에서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하지? 라는 질문에 맞부딛히게 되었다. 끔찍하게 벌어지는 상황들 속에 알고 있는 것과 도시라는 우리의 삶의 공간에서 할 수 있는 것 사이의 괴리감에 빠져있었던 찰나, 나는 히옥스가 제안한 지구마을 젊은 주민들 유스토크 기획팀에 지원했다.


서울에 살고 있는 하자작업장학교 10대들과 홍콩에 살고 있는 홍콩창의력학교 10대들의 '유스토크'는 서울-홍콩간 실시간 비디오 컨퍼런스로 진행되었다. 우리는 주로 서울, 홍콩 두 도시에서 살아가는 10대로서 이러한 개인의 경험의 맥락이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에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것들이 계기가 되어, 타인과 주변의 문제로만 인식했던 상황들에 대해 이전보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해결 방안을 찾아보았다. 우리는 2차례의 비디오컨퍼런스와 유스토크를 통해서 우리의 실천사항을 담은 선언문을 만들었고, 그것을 토대로 제1회 창의 서밋 때, 다시 만나 홍대와 청계광장에서 거리 피켓팅을 주도 했다. “save my eart, save my self”라는 구호를 통해 우리의 목소리를 내본 경험을 가졌다.


기획팀의 일원으로 함께 판을 짜보는 경험을 통해, 나는 다시 한번 내가 살고 있는 도시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또, 급변하는 도시 안에서 살고 있는 내가 추구하는 삶의 조건은 무엇이고, 점점 더 삭막해져 가는 도시속에서 어떤 것에 가치를 두고 살아 갈 것인지를 진지하게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무분별한 개발과 자꾸만 빨라져만 가는 도시의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은 생태적 감수성을 잃지 않으려는 우리들의 소중한 마음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나에게도 어린 시절 추억의 장소를 잃어버린 기억이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변에 개발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살곳을 잃은 자의 슬픔을 더 공감할 수도 있었다. 그것들 모두 서로 단절되어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이유와 책임은 우리에게 있었으며, 좌절감과 죄책감이 아니라 책임감을 갖고 우리가 좀 더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생각들을 하길 원했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도시를, 사회를, 더 나아가서 지구를 지킨다는 것이 결국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며, 곳곳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더 이상 마주하기 어렵고,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 아닌, 나의 행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고 아주 작은 일부터 실천하기를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탈학교 한 후 나와 세상을 마주하는 첫 번째 과정이기도 했다.



-part 2. figure out. 또 다시 길을 떠나, 답을 구하러 (정선에 이어 시공간을 이동한다.)


나 자신과 소통하고, 더 나아가서 주변상황에 대해 감정을 갖는 감수성을 키우는 일은 지금 현실을 직시 해보는 것이었다. 작업장학교에서는 스스로 차별화나 특수화가 아니라 서로의 몸과 마음이 함께 협력하는 방법을 탐구하도록 한다. 만나고 부딫혀 보는 경험을 통해서,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길찾기를 수료하고 작업장학교에서는 조금 변화가 생겼다. 가을 학기에는 현 시점에서 작업장학교의 지난과정을 정리하고 새로운 학교를 준비하는 8개월의 긴 과정을 함께 갈 죽돌들을 모집했다. 나는 그 과정을 함께 하길 결심했고, 주니어 1학기, 영상팀에 들어왔다. 처음 하자작업장학교를 만들었던 선배 죽돌들의 고래 이야기로 시작한 이번 학기는 시민문화워크숍 세계를 구하는 시인들과 몸을 이동 하는 2번의 현장학습을 통해,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어디인지, 누구와 함께 사는지, 처해 있는 현실은 어디까지인지, 내가 가진 입장과 역할에 대해 끊임없이 물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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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선으로 여행,
예술가를 만나고 내가 작업자로서 어떤 작업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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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과 통신수단이 발달하면서 국경이 허물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실제로 우리는 비행기와 인터넷을 통해 보다 쉽고 다양하게 국경을 넘는 경험을 하거나 시시각각 새로운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버마의 독재, 폭력, 강간, 인권유린의 무자비함. 눈으로 보아도 실감 할 수 없고 육성으로 들어도 이해 할 수 없는 역설적인 상황에 직접 몸을 담갔던 경험은 애석하게도 2010년이라는 시간이 현재의 나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홍콩으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굉장히 설렜던 기억이 난다. 내가 경험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이동하는 여행에 대해 나는 일기장에 이렇게 표현했다. "뜨고 뜨는 그 순간 내가 발붙이고 있던 땅은 작고 오밀조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늘을 비행한다니 땅으로 영영 돌아갈 수 없을까봐 걱정이 되었지만, 그 곳 땅에 내리면 아마 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을 것 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아마도 나는 언어, 문화를 넘어 지구촌이라는 끈끈함을 통해 소통하는 꿈을 꾸었던 것 같다. 여러 가지 이야기에서 물론 많은 새롭고 다채로운 경험을 하였다. 확실히 우리는 같은 시대에 살고 있었고 저마다의 문제로 굉장히 복합적인 사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변화를 도모하려는 Youth를 만나서 이야기를 들을 수 도 있었다.  홍콩에서 3일의 컨퍼런스 기간은 나에게 figure out, against the wall, change start with you의 다양한 구호와 함께 Youth empowering을 격려하며 막을 내렸다.

메솟에 있던 9일의 시간 동안 우리는 하루 많을 때에는 4개, 총 15개의 단체 또는 학교를 방문했다. 크게 교육, 인권, 정치, 의료지원의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단체들은 지역간의 갈등과 버마 안과 밖에 있는 청소년의 교육환경, 핍박받고 있는 여성과 어린이의 인권 등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 지금 버마에는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했다. 어떤 단체는 독재정부에게 강하게 저항하고, 미래를 내다보며 청소년의 교육을 신경 쓰거나, 그 둘 사이에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아주며, 각자의 경험과 사실들을 국제사회에 호소하며 버마의 올바른 정치,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고 있었다. 메솟에서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불법이주민, 공식적으로 국적 없는 난민의 상태이다. 자신들이 몸담았던 사회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했고 우리에게 믿을 수 없는 경험을 전달하는 통로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버마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다른 곳으로 탈주를 감행한 사람들이 다시 버마 안에 있는 공동체와 사회를 이야기 한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여행을 떠나기 전 작업장학교에서 나는 사회 안에 속해 있는 구성원으로써 나의 시민 됨을 이야기했었다. 내가 속해 있는 현실을 인식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사회에 기여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전에 인식하고 있던 범위가 나와 너, 내가 선택한 하자작업장학교, 기후변화 시대라는 큰 틀의 사회 속에서 시민 됨을 생각했다면, 이곳에서 내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넓고 복잡했다.


급진적이고 열성적인 NGO의 어른들과는 사뭇 다르게 호기심 많고 발랄한 아이들에게 SPDC가 주는 위협의 그늘은 없는 듯해 보였다. CDC친구들과 국경다리를 갔을 때, 한 친구가 나에게 “어서 빨리, 버마에 가고 싶어. 나는 태국에서 태어났고 버마에는 한 번도 가본 적 없지만... ”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부모님이 먼저 태국으로 넘어왔고 그리고 자신은 메솟에서 태어나 줄 곧 메솟에서 자랐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친구는 불법 이주 2세대인 셈이다.  듣고 있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해 공감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조국에 대한 강한 그리움이 느껴져 숙연해지기까지 했었다. 이같이 지금 현재 메솟과 멜라 캠프 안에는 해진이와 같은 2세대들이 많아졌다. 만약, 메솟과 난민촌이라는 공간이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공간이 아니라면, 그 곳 사람들 모두가 동의한 가치와 원칙에 반기를 들 때, 그 사람에게 1세대가 느낀 문제적 상황에 대한 가치와 원칙을 강요 할 수 있을까?


마웅저 선생님이 만드신다던 직업교육학교의 입학 조건 중 하나는 제 3 국으로 재정착을 하지 않고 메솟이나 버마 안에서 활동을 지속할 학생이라는 조건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하자작업장이라는 공간은 탈학교를 선택 하게 된 문제적 상황에 대안이자 배움의 공간이다. 그리고 나도 여기서 했던 배움과 경험들과 공간, 사람들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계속)  




part 3. change start with you. (다시 떠날 여정을 하는 나.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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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we meet a desert, make it a gard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