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랑 내용 덧붙여서 이 글에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연보


2007 여름 도봉고등학교 자퇴

2007 가을 하자작업장학교 입학, 길찾기

        자서전

        걸어서 바다까지

        하자알자, 아침모임 등

        길찾기 수료식 “환승”

2008 봄   주니어 1학기, 글쓰기 팀

        자판기

        인문학 <니하우 베이징!>

        웹진 ‘하자로’

        개인 글쓰기 작업

        수료 에세이 “첫 학기를 알차게, 학습을 시작한다/연다!”

2008 가을 주니어 2학기, STUDIO 202

        디자인 프로젝트 - 명함 제작

        주말영상학교 <소녀에겐 가장 중요하지만 그 소녀에겐 반복되는 어떤 이야기>

        로마인 이야기

        08pre summit ‘Daily sketch’

        Save my city “동서남북”

        학기 수료 에세이 “”

2009 봄  주니어 3학기, 시민/문화 팀 + 휴학

        인문학5 애전별친愛錢別親

        기후변화 시대의 living literacy

        이대 인문학 “세계를 뒤흔든 8인의 독일인들”

        이미지 탐구생활 시즌2

        페미니즘 공부모임 1

        <얘. 너. 나>

2009 가을 주니어 3학기, 영상 팀

        시민문화 워크숍 “세계를 구한 시인들”

        Art in village 예술마을 고한․사북 프로젝트

        tck tck tck 시리즈

        페미니즘 공부모임 2 - 개인연구주제 발표

        MaD

        Maesot/Maela camp 현장학습







제목: 


0. 말하기


나는 길찾기 때부터 글쓰기를 무척 좋아했다. 처음에는 A4 반의반도 제대로 못 채웠지만 한두 달이 지나며 점점 A4 두 장씩 채우는 글들을 쓰게 되었다. 길게 써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고, 글에 들어간 내용에 대한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두렵기보다는 반가움이 더 컸다. 나는 말에 결핍이 있는 사람처럼 계속 글을 썼다. 어떤 종류의 생각이건, 정리가 되지 않으면 글을 써서 내 두 눈으로 내 머릿속을 확인해보았다. 그 때는 글이 좋다는 것이 중요했지, 왜 중요한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상대 불문하고 말할 수 있는 수단이 생겼다는 게, 글을 좋아하게 된 이유였다.

길찾기를 수료한 후 나는 큰 망설임 없이 글쓰기 작업장에 지원했고, 웹진 ‘하자로’1)의 편집장으로 주니어 첫 학기를 보냈다. ‘첫 학기를 알차게, 학습을 시작한다’는 제목의 수료 에세이로 마감한 그 학기에 나는 일의 책임감과, 매체로서의 글이 전달하는 힘을 배웠고, 객관적인 사실과 함께 나의 입장을 전달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정의한 ‘story teller’라는 작업자로서의 목표도 갖게 되었다. 그 때 나에게 글은 내 생각을 전달하는 하나의 소통 수단이었고, 내 머리에 있는 생각을 나 스스로 확인하게 해주는 도구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소통 수단의 스피커를 나 말고 누구에게 향하게 할 것인지를 놓치고 있었다. 때문에 나의 입장이라기엔 불분명한 생각들이 기사에 실리기도 했다.

그 이후 글쓰기 팀은 괭의 수료와 다른 길을 찾아간 다른 멤버의 부재로 없어졌고, 대신 202 studio가 생겼다. 202 studio는 테디, 달갱과 함께 디자인 작업을 하는 공간이었는데, 나는 그림에 관심이 있었지 디자인에 관심이 있지는 않았다. 하고 싶은 건 웹진이었는데 명함을 만들려고 하니 막막했고, 적응할 수 없는 대인원과 말할 수 없는 답답함에 나는 디자인을 거부하고, 억지로 붙잡고 있던 웹진에서 주말영상학교로 관심을 전환했다.

주말영상학교 졸업 작품으로 찍게 된 <소녀에겐 가장 중요하지만 그 소녀에겐 반복되는 어떤 이야기>를 통해 일반학교에 존재하는 학생과 학생 사이의 위계와, 실질적인 도움보다는 무조건적인 부정을 말하는 성교육을 중심으로, 나를 포함한 내 주변의 10대를 둘러싼 문제 상황들을 비추었다. 영화를 찍고 편집을 통해 다시 한 번 영화를 만들며, 내 영화와 길찾기 때 조곤조곤 쓰던 리뷰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매개를 보고 생각을 말하는 것과, 여러 매개들을 보고 가지게 된 하나의 입장을 말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입장과 화두가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생각했고, 나는 웹진 때 말한 ‘일’과 영화를 찍으며 말한 ‘작업’이 같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가 경험한 사실에 근거한 문제의식 안에 내가 가진 입장을 드러내는 것이 화두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나는 내 화두를 10대로 가져가겠다는 결심을 했다. 하지만 10대라고만 규정을 지었지, 누가 10대인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10대라고 표현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후 시사회와 관객과의 대화가 파한 뒤 나캉이 내게 “밤비 영화, 아직 다 말할 순 없지만 공감할 수 있었어요”라고 말했던 것을 통해, 나는 ‘제 2의 문’인 웹진의 독자층이, 내가 만든 영화의 관객이 누구인지를 고려하지 않았던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내가 1학기 수료식 때 썼던 ‘웹진이 발송되어도 뿌듯함을 느끼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것이 어쩌면 당연할 수밖에 없던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독자가 눈에 보이지 않았고, 웹진을 보고 그 누구도 내게 내용상의 질문이나 코멘트를 하지 않았던 것이 가장 컸던 것 같다. 나는 계속 어떤 사실을 전달하고 있는데 반응이 없다보니, 나는 책임감을 끝까지 가져갔다는 것으로 나에 대한 성취를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하자에서 상영했고, 하자작업장학교에 관심 있는 많은 사람들이 내 앞과 뒤, 양 옆에서 영화를 보고 직접 질문을 했기 때문에 내가 말하고자 했던 대상이 누구인지를 질문할 수 있었다. 그 때부터 나는 화두로 가져가겠다는 10대의 문제 상황들을 계속해서 시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작업의 대상이 생긴 것이다.



.-.-.-.-.-.-.-.-.


하자에서 10대의 막바지를 보내고 20대에 접어든 나는, 나를 어떤 10대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학교를 자퇴하고, 대안학교를 다니며 글과 영상에 관심을 가진, 어떤 부분에선 비주류 문화를 경험한 사람이라고, 그렇게만 설명할 수 있을까? 하자 밖 사람들을 만나며 내가 다니는 학교를, 내가 하고 있는 일내지는 작업을 설명해야 할 때 느끼는 막막함과 불편함은, 단순히 학교가 대안학교이기 때문이고 10대가 매체 작업을 하는 것은 평범한 경우가 아니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할 수 있을까? 복잡하고 어렵지만, 내가 지금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면, 나는 하자와 하자 밖의 경계에서 많은 시간을 낭비하게 될 것 같다.


 1-1. 대상과 대화 상대의 분리에서 벗어나 문제의식을 나누는 것

주니어 3학기가 됐고, 작업장학교는 하자센터 3층으로 이사를 갔다. 원래 지하부터 3층까지 골고루 분포되어있던 작업장과 대여 공간들이 모두 공용공간으로 바뀌며, 우리는 조금 더 작아진 공간에서 서로 어떻게 배려하며 잘 지낼 수 있을 것인지 이야기했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다른 작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작업장과의 교류가 적었다. 길드 하자 같은 코어 그룹이 ‘살롱 수요일’이나 ‘영화 읽는 목요일’ 같은 시너지 프로젝트를 마련해야 했던 그 때의 상황과는 조금 다른 환경으로 변했고, 3학기들이 수료하며 수적으로도 많이 줄었다. 그래서 오히려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긍정적인 자리를 마련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긍정적이라고 생각한 건 누가 말해서가 아니라 내가 1학기 때부터 소속감을 원했기 때문이다.

구성원이 담임 판돌 모모, 죽돌 괭과 나뿐이었던 글쓰기 팀에서 나는 내가 하는 것이 작업인지, 일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강도 높게 훈련했다. 심지어 학기가 끝났을 때 판돌들에게 웹진 3개분을 다 해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일의 고단함과 나이 차나 학기 차가 많이 벌어져있는 괭과 친숙하게 작업 얘기를 하기에 나는 부족한 점이 많았고,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일정 공유나 웹진 컨셉 얘기를 더 나눴다. 무엇보다 그 때 나는 내가 원한다고 말했던 시너지나 동료 작업자의 상을 스스로 그리는 것도, 소속감으로만 표현할 뿐 많은 것이 부족했다. 그 다음 학기에 있던 studio 202에서는 디자인을 하고 싶어 하는 다수의 사람들과 함께 했지만, 웹진만을 바라던 나의 고집과 디자인에 등 돌린 나의 태도가 팀과의 이야기를 더욱 어렵게 했다. 그 때는 판돌들에게 내가 글쓰기 팀을 원하고, 디자인이 싫다고 얘기하면 내가 철부지 어린이처럼 보일까봐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고, 얘기 한다고 해도 구체적으로 무엇을 원하는지는 정확히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바람들과는 다르게 정작 모든 죽돌이 함께 하는 인문학 ‘애전별친’과 기후변화 시대의 living literacy 프로젝트, 잦은 전체모임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바뀐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당연히 힘든 일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다른 사람과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가장 고민되었다. 내가 갖고 있는 화두인 10대를 대놓고 표현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반야가 꺼낸 기후변화 이슈에 완전히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도 아니었다. 내 얘기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얘기도 듣지 않은 상태였다. 적응의 문제라고만 말하기도 힘들지만, 그렇다고 다른 부가 설명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나는 휴학하고 <얘. 너. 나>2) 기획으로 몸을 돌렸다. 하자 프로젝트들이 내게 묻는 질문들과 적응하기 힘든 상황에서 내가 가장 관심가질 수 있던 것은 <얘. 너. 나> 기획의 대상 10대였기 때문이다(각주 참고). 두 번째 영화를 계획하던 중 선택한 것이기도 했다.

<얘. 너. 나>를 하며 내가 가져간 고민은 멘토로서 참가자들과 무엇을 얘기할 것인지, 기획자로서 책과 다큐라는 매체로 사회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인지였다. 그런데 멘토링을 하던 중 참가자들과 무엇을 얘기할 것인지 질문했을 때 나는 한 가지 문제를 놓치고 있었다. 내가 여태까지 또래들과 관계를 맺어온 방식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가십이나 잡담을 얘기하는 친구의 형태와 하자에서 내가 읽어온 삶을 어떻게 작업에 넣을 것인지 얘기하길 원했던 동료 작업자의 형태이다. 그런데 나는 참가자들과 내가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인지를 놓치고 계속 친구의 입장을 가졌다가, 하자에서 내가 가진 7가지 약속이나 토론을 통해 가져온 내 삶의 가치관을 얘기하는 입장을 가지는, 어떤 부분에선 참가자들이 하자의 아이들처럼 생각하길 강요했던 것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오토바이를 타는 걸 원하고 미래에 중국집 사장이 되길 바라는 아이에게 그건 직업이 아닌 꿈이라고 얘기하는 것 같은, 나조차도 불확실한 생각을 던지는 상황이 있었다. 어떤 부분에선 극단적으로 타자화를 하기도 했다. 내가 원하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그것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 일이 계속되며 <얘. 너. 나>가 끝날 때 나는 결국 프로젝트가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단정 짓기에 나는 너무 생각이 부족했다.

이 생각은 내가 Maesot에 가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볼 기회가 있었다. 꿈이 한국의 아이돌 가수라고 말하는 미진, 영진, 혜진, 윤지를 내가 고정적으로 갖고 있는 아이돌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로 받아들이고 “어째서 그것이 너의 꿈이냐”라고 묻는, <얘. 너. 나>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아이들은 어쩌면 현명하게 정말 유명한 아이돌이 되어 민주화를 원하는, 매체 운동의 다른 케이스를 만들 수 있는 것이기도 했는데 말이다. 이런 실수들은 내가 만나고자 하는 10대가 대화 상대인 건지, 작업의 대상인 건지 헷갈리게 만들었다. 그것은 하나를 선택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던 것이다.

내가 작업의 대상이라고 말해온 건 10대인데, 대화하고 싶다고 말한 것도 10대였기 때문이다. 이 생각은 Maesot에 가기 전 시민문화 워크숍 에세이에 ‘우리 세대가 기여하는 세대이길 바란다’는 말을 쓰면서 시작했다. 내가 말하는 세대에 누가 포함되어있는 건지 좀 더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것도 사실 흐지부지 된 상태였다. 내가 만난 특정 10대, 기여나 페미니즘을 함께 공부했거나 같은 공간에서 작업한 10대들을 얘기한 것인지, <얘. 너. 나>에서 만난 참가자들도 함께 얘기하는 것인지가 불분명했다.

시민문화 워크숍에서 내가 기여하는 세대를 꺼낸 이유는, 우리 세대가 다른 사람이 붙인 88만원 세대나 꿈이 없는 10대라는 수식어에 기죽어 무기력해지는 것에서 벗어나 자신의 세대에 스스로 이름 붙일 수 있는 세대이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에 덧붙여 할 수 있는 얘기는 Maesot의 NGO단체 중 3)BWU와의 질의응답 시간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BWU가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고, 가정폭력 피해 여성이나 인턴에게 교육을 하고 있지만 그 이론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를 바라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들은 페미니즘의 관점 정도만 교육한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했다. 나도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지만 아직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기 부담스러워하는 것처럼, 내가 페미니즘 공부를 통해 알게된 것을 다른 사람들 모두가 똑같이 생각해야 하는 의무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세대를 얘기할 때 바란다고 표현했지, 그래야 한다고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작업 대상과 대화 상대를 분리하는 것에서 벗어나, 내 입장과 내 상황을 얘기하고, 그에 대한 공감이나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통해 서로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시 하자로 돌아와 09 가을학기에 적응하며 생각하게 된 것은, 내가 작업장학교에 함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다. 영상팀에 들어와 정선에 가서 함께 팀끼리 모여 얘기했던, “서로를 지지해주는 팀이 되길 바란다.”는 그 말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시민/문화 팀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팀과의 호흡을 원했지만 나 스스로 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화와 유리가 예전에 내게 해주신 “네가 10대를 얘기한다면 하자에 있는 10대들과도 대화할 생각을 했어야지”라는 코멘트를 고민하면서 나는 다른 죽돌들이 한 이야기에 좀 더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관심을 갖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세대를 말하기 전의 일이긴 하지만 다시 거듭 강조하자면, 시민문화 워크숍에서 조원규 시인이 말씀하신 “나의 내면을 구하는 것이 세계를 구하는 것”과 페미니즘 공부를 통해 알게 된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도 내가 나의 삶을 읽으며 시대를 읽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시야가 넓어졌다는 표현을 쓰고 싶다. 내가 느낀 불평만을 문제라고 이야기하고, 그것에만 집중하면 그건 내 문제이지 사회의 문제가 될 수 없으며, 그것은 문제의식이 아닌 불평을 털어놓는 것에만 그치기 때문이다. 주니어 2학기 때부터 ‘내 얘기’라고 꺼낸 영화나 <얘. 너. 나> 또한 나만의 이야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영화 내용이나 <얘. 너. 나> 참가자의 현실은 내가 직접 겪은 것이나 내 상황이 아니라, 내가 경험했던, 내가 본, 내가 문제를 느낀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사회적 맥락에 있는 이야기들이다. 예전에 판돌들에게 많이 들었던, ‘너만의 이야기를 하라’는 말에 품고 있던 오해를 알았기 때문에, 이제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다.






 1-2. 내가 말해온 10대는 더 이상 10대라고만 할 수 없다.

내가 영화를 통해, 정선에서, 심지어 Maesot에서 얘기한 10대는 모두 다르지만,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지점이 있다. 바로 내 마음이 동한 상황들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말한 학교 안 여자 아이들의 권력 구조와 다툼, 레벨을 따질 수 없는 눈치 보기 등은 한국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국의 청소년들은 확률적으로 따져 봐도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일반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모두 같은 교육 시스템을 경험한다. 때문에 이 아이들 모두 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더라도 모두 ‘일진’이라는 단어를 알 수 있고, 탈선의 대표가 담배와 술, 오토바이가 될 수 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한 명의 10대로, 중학생으로, 고등학생으로 학교를 경험했기 때문에 내가 특히 스트레스를 받은 관계 안에 존재하는 위계를 문제 삼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정선에서 고한고교에서의 사색이라는 챕터로 마감한, 말 그대로의 사색을 하게 된 이유는, 내가 알게 된 그 아이들의 현실, 학교 안에서 카지노 딜러 연습을 해야 하고 학교 정문에 관광 레저 스포츠 관련 대학 현수막만 떡하니 붙어있는 그 상황에 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표현하길, 사북․고한은 마치 작은 한국 사회 같다고 했다. 그곳의 교육 상황도 비슷했다. 물론 서로 처해있는 입장은 다르지만 내가 그 아이들의 현실과 나의 현실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고 이야기하길 원했던 것은, 학교가 사회를 반영한다는 점에서였다. 학교 안에 존재하는 위계도, 학교에서 직업 적성 검사를 통해 내게 추천했던 직업 의사, 판사, 검사, 선생님이 나온 것은 고한 고교에서 카지노 딜러가 되는 것과 서로 전혀 다른 맥락에서 둥둥 따로 떠다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Maesot에서의 아이들에게도 너의 현실과 나의 현실은 다르지 않다고 얘기하고 싶었다. (초고1 발췌내용임) 내가 존경을 느낄 수 있던 이유는 과정이나 상황이 다르지만 같은 이야기를 했다는 것에 마음이 동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난민 캠프라는 플랫폼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Burma 권력에 있다는 것에 화가 나기도 했다.

-추가필요-

그래서 나는 CDC와 LMTC의 아이들에게 너와 나의 현실이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렇게 여러 세계가 공존하는 지금의 현실에서 나는 무엇을 위해 일할 것인지 다시 한 번 질문하고 싶다. ‘세계를 구하는’이라는 말이 주는 무게에 눌려 ‘나 하나가 어떻게’라는 무기력함에서 벗어나 일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싶다.



profile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