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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음악글 수 566
- 홍콩 MaD컨퍼런스에서 Prof. Srikumar RAO 교수의 워크숍에 참여했을 때 이런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행복은 바깥의 환경으로부터 구하는 게 아니라 안으로부터 구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주위를 보십시오, 당신의 여러 친구들이 있고 그 사람들의 현실을 인지해보도록 노력하세요. 당신이 인지하는 것들, 그것이 우주(Universe), 그 자체입니다. 행복은 안에서부터 구하는 것이지만, 각자의 행복을 찾아가는 여행은 여럿이 함께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난 이 여행이란 뜻의 ‘Journey’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설득력은 없는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는 첫째로 끝없는 여정이라는 느낌을 받아서이고, 둘째로 혼자가 아닌 ‘같이 간다.’라는 느낌을 이 단어로부터 받기 때문이다. (사람 이름이랑 비슷해서 그런가?) RAO교수가 한 말은 웬일 인지 알아들을 수 있던 것도 신기하지만, 내 머리 속에도 깊게 남게 되었다. 내 주위를 인식하는 것이 우주라는 표현은 정말 재미있으면서도 대단한 표현이다. 이 표현을 빌려서 길찾기 4개월, 주니어 8개월의 하자작업장학교 안에서의 이 과정들은 내 주위와 우주, 그리고 나를 들여다보게 되는, 그러나 그것이 도착지가 아닌 긴 여정의 일부였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1. 무작정 돌파 - 중1 때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불현 듯이 어느 날 '기타가 배우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기타를 구해서 독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흥미가 있어서 좋아하는 음악들을 연주하는 정도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지만 점차 나의 음악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늘어가서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무렵, 나는 장래희망을 프로뮤지션으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나는 상하 수직적인 교사와 학생의 폭력적인 관계에, 별로 미래에 대해서 꿈도 없고 의지도 없어서 아무것도 아닌 관계 자체에만 집착해서 쉽게 친구가 되고 쉽게 따돌리는, 그래서 자신을 속여 가며 잘 지내지 않으면 외면당할 것을 노심초사해야 하는 그런 교우 관계에 이미 더 이상 회의적일 수가 없게 된 상태였다. 강제적이고 억압적인 딱딱한 학교에서의 생활도 더 이상은 적응할 수 없다고 생각한 나는 '하고 싶은 일하면서 먹고 살 거라는' 하자 작업장 학교로 가기로 결정했고 내 생각을 학교 아이들과 교사들에게 이야기했더니 ‘정신 차려라, 그냥 충동적인거야.’, ‘그래도 고등학교는 가야지...’, '대학가서 해라', '학생이 공부해야지 무슨 멍청한 소리냐.'하며 거의 매일 설교를 들어야만 했다. 왜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대학을 위해 미루어야하는 건지, 지금 교과서가 가르치는 지식들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의 이유는 나에게 납득되기 어려웠다. 답은 ‘일단’ 일반학교에 다녀야지, 대학에 가야지 올바른 학생이기 때문이란다. 정말 진절머리가 나서 학교에 있는 애들도 시시하고 멍청한 말만 한다고 생각하는 둥, 진지한 소리는 해봤자 소용없다고 단정 짓고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로 만들어버리게 된 나는 결국 중학교 졸업식과 길찾기 예비학교의 날짜가 겹치는 상황이 왔을 때, 졸업식에 가지 않았다. - 작업장 학교에 일단 들어오기만 하면, 내가 했던 모든 고민들은 접고 생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여기만 들어오면 나 같은 소위 아웃사이더’들이 모여 있을 것이다, 고로 모든 팀작업들은 답답한 것 없이 일사천리겠지.‘ 라던가, ’들어오면 밴드라던가, 하고 싶은 음악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있겠구나.’ 같은 것들. 하지만 내 막연한 기대들은 시작부터 삐걱거렸고, 예비학교 둘째 날 4명씩 모여서 서로의 경험들을 인터뷰하고 하나의 스토리를 만드는 ‘인상과 풍경’에서는 각자의 이야기가 전혀 모이질 않자, 답답한 나머지 내가 나서서 거의 억지로 이야기를 뽑아내고 구성해버리는 식으로 마무리 짓고 말았다. 발표는 다음 날이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머니와 통화했는데 나는 그저 다른 애들이 실망스러웠다는 말 밖에 하질 못했다. 결국 다음 날 발표는 별로 좋은 호응을 얻어내질 못했고 열심히 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후 자서전쓰기나 인문학, 드로잉 프로젝트 등을 제외한 팀으로서 영등포 프로젝트나 걸어서 바다까지의 결과물을 만들 때 나는 그저 최대한 내 할당량을 많이 챙겨서 열심히 하는 게 팀 작업으로서 잘해내는 거라고 믿었다. 일반 학교 다닐 때처럼 무기력하게 지내는 것이 싫어서 최대한 많은 것들을 해보려고 했고,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하려다보니 효율성도 떨어지고, 일에 치여서 길찾기가 끝나갈 때 즈음에는 허다하게 밤을 새게 되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는 음악, 기타 연습도 변변히 못한 것 같고, 혼자서 떡하니 이룬 것도 없는 것 같은 느낌마저 받았다. 결국 길찾기가 끝날 때 즈음에는 ‘솔직히 말해서 재미없었다.’라고 에세이에 써버리고 말았고, 생각해보니 작업장 학교에 오기 전 겪었던 고민들은 아무런 진전도 없어보였다. 같이 있는 사람들의 무시,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들의 이분화……. 그렇게 길찾기를 수료한 나는 주니어가 되어 공연팀에 들어가면 하고 싶은 음악, 팀으로서의 관계 등 모두 잘해보겠다고 다짐하며 주니어에 지원했다. 또 접고 간 것이다. 2. 형상기억합금 주니어가 되어서 공연팀 ‘촌닭들’에 지원하고, 입단하게 되었던 8월 25일 여름, 불현 듯 우리는 우리의 ‘새 이름’을 짓고 다시 새 출발하게 되었다. 여러 이름들 [Felicidade(행복이란 뜻), 보리, Festeza, 딴따라-(개인적으로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음), 닥쳐 등... ]의 각축 끝에 결국 ‘Festeza’라는 이름이 발탁되었다. 의미는 촌닭들의 타이틀곡과도 같았던 ‘슬픔’이란 의미의 ‘Tristeza’와 ‘축제’라는 의미의 ‘Festezo’가 합쳐진 신조어인데, ‘인재지변의 시대에 만연하는 슬픔에 공감하고 그들에게 위로를 건네며 슬픔을 뛰어넘는 축제의 노래를 하자’라는 Full-meaning이다. 내 기억에, 그런 ‘이야기가 있는 공연을 지향하는 팀’으로서 가장 처음 시작한 것은 ‘교가’만들기였던 것 같다. 작업장 학교의 마지막 8개월의 한 학기를 마치고나서 다음 시즌2를 준비하면서 앞으로의 이야기보다는 지난 시즌 1을 지내온 죽돌들에게 무엇이 기억이 되고 선물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멜로디부터, 가사까지 Festeza가 만들기로 했었던 것이다. 각자 가사를 써오기로 해서 모여 미리 만들어놓은 코드와 멜로디에 맞춰보는 식으로 다 같이 모여 노래를 짓게 됐는데, 나는 영 내키지가 않았다. 보기에, 가사도, 멜로디도 내가 생각한 ‘멋진 음악’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노래도 CCM의 느낌이 나는데다가 가사도 유치하게만 느껴져서 전혀 진지하게 임하지 않았다. 나는 기타 반주를 맡았으니 베이스를 치기로 한 멤버와 구석에서 연주만 맞추면 그게 그냥 우리 역할 다 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될 대로 되라, 난 뭐 상관없다.’식의 마인드는 전혀 팀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충분히 그 날 이후 반성했다고 생각했지만, 나 하나 뿐만의 문제가 아닌 ‘공연팀’으로서 결여되는 논의와 이야기의 문제는 계속 나타났다. 곡을 정할 때도, 브레이크를 맞추거나 악기 파트에 대해서도 그저 다른 사람이 이렇게 하자고 하면 별 의견도 내지 않고, 그렇다고 좋으면 좋다고 딱히 분명하게 의사 표시도 하지 않는 답답한 회의들이 매번 이어졌고, 그럴 때마다 뒤 끝이 개운치 않았다. 끝끝내 정선 고한시장에서의 공연에서는, 다 같이 짜던 공연 전 멘트도 어느새 그 날 멘트하는 사람에게 일임해버리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최악의 사태까지 갔고, 그 날 공연은 완전히 말아먹었다. 그때가 돼서야, 우리 사이에는 무언가 소통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관심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것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한 명이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고도 하고, 개인적인 힘든 일들로 오랫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게 되더라도 그저 나중이 되어야지 서로 미안하다고 밖에는 말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 같다. 작업장학교에 나온다는 것, 그것은 서로간의 ‘나와야 하는 학교’라는 약속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강제적이나 억압하는 그런 ‘구속’이 아니라 어딘가로부터 ‘탈’해서 스스로들이 선택해서 모인 학교이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 각자의 ‘학교에 대한 기대들’과 ‘서로에 대한 기대들’을 나누며 같이 하고, 수다 떨 수 있는 학습을 찾아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계속 접고 펴지기를 반복하는 나의 ‘같이 하는 사람들과의 의리’를 더 이상 구부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러나 그 후, 메솟으로의 이동 학습 중에도, 다녀온 후에도 왠지 모르게 다른 죽돌들과 우스갯소리, 농담따먹기 따위가 아니라 같이 학습하는 사람들로서의 이야기들을 건네거나, 지속시켜나가는 것이 낯설고 어색하며 힘들기만 했다. 특히 메솟에서 그랬는데, 너무나 다른 상황에선 가만히만 있어도 너무나 새로운 경험들이 날아와 몸에 부딪치기 때문에 많은 경험들을 정리하는데도 힘들고 다른 사람의 생각들이 아무런 여과없이 내 머릿속에 들어온 게 아닌가 싶어서 무엇이 내 생각인지를 구분할 수가 없었고, 그것들을 정리하는 데에만 온 신경을 쓰게 되니 다른 사람이 무얼 말하든지 들리지 않았고, 돌아온 후에도 학교 생활이 재미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극단적인 생각으로까지 이어졌고, 이렇게 계속해서 외로움을 느끼면서 학교를 ‘혼자’ 다니는 것보다는 그만두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하기까지 되었다. 난 학교를 나가게 되면 밴드를 하든지, 창업을 하든지 어쨌든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며 살아가고 싶다. 만약 그랬을 때, ‘그러면 어떻게 나와 같이 무언가를 도모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아무나하고는 할 수 없는데….’ 라는 고민이 생긴다. 그래서 난 이곳에서 친구를 만들고 싶다. 서로 영감을 주거나 동료, 조력자로 있을 수 있는 사람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순간 그런 관계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친구란 되자고 되는 것이 아니니까. 때문에, 나는 계속 시도해보는 수밖에 없다. 1년 남짓 지금의 죽돌들과 같이 있었고 긴 시간이라고는 못하겠지만, 앞으로 남은 시간동안 짧은 순간들을 나중에까지 이어지도록 의미 있게 만드는 ‘캐치볼’은 아직도 시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3. Quality 길찾기로 들어올 때부터 음악가에 대해 이야기하던 나는 원래는 세션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었다. ‘프로뮤지션’인 것인데, 초일류의 스킬을 정복해서 누구보다 잘 치는 기타리스트로 인정받겠다고 꿈꾸며 기타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교본도 하나 얻어서 차근차근 공부했다. 그러나 이미 혼자서도 즐겁게 잘 치다가 가게 된 학원에서 배우는 기타는 전혀 재미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누구나 기타치고 음악하고 싶다고 해서 완벽하게 잘 치는 테크니션이 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난 작사작곡하는 밴드로, 음악가로 방향을 돌렸다. 사회적, 특히 환경적 이슈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음악을 통해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길찾기를 시작하며 말했던 기억이 난다. 작업장 학교에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할 수 있을 때는 아마도 주니어가 돼서일 것이라고만 생각해서, 길찾기를 수료한 뒤 브라질리언 퍼커션 공연팀 ‘촌닭들’에 지원했다. 길찾기 때 내가 본 ‘촌닭들’은 생전 처음 보는 퍼커션을 다루고, 생소한 브라질 음악을 하는데, 그 공연들, 특히 야외악인 ‘바투카다’는 강하고 화려하고 열정적이었다. 길찾기 때는 마냥 공연팀으로서의 생활을 동경하면서 지냈는데, 9시쯤에 집에 가려는데 막 연습을 마치고 나오는 모습들이라던가, 항상 모여서 연습하고 어딘가로 출장 공연을 떠나서 자리를 비우는 것 등등이 왠지 멋져보여서 나도 빨리 공연팀이 일원이 돼서 지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공연팀에 입단하자마자, 우리는 ‘촌닭들’이 아닌 ‘FESTEZA’라는 이름을 새로 짓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세계에 만연하는 슬픔에 공감하고 위로하며 그것을 뛰어넘는 축제를 만들자는 의미에 ‘우리가 공감하고 위로할 슬픔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서로간에 능동적인 공부의 분위기가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라고 내 기대를 달았다. 그렇게 우리는 개학했고, 시즌1을 마무리하는 8개월의 이례적인 한 학기를 시작한 작업장학교가 출발하였다. 이 학기, 작업장학교가 가장 중심에 두고 움직이는 주제는 “시민문화 워크숍 : 세계를 구하는 시인들”이었다. 시민문화 워크숍을 중심으로 작업장학교는 많은 전체 모임과 각 팀별로 이야기 나누는 시간들을 가지게 되는 것으로 움직였다. 이때부터 내가 길찾기 때 봐오던 주니어들의 생활과는 약간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공연팀은 굉장히 많은 연습시간들을 가졌던 것으로 기억했는데, 왜 점점 악기 잡아서 연습해본 적이 꽤 오래되었다고 말할 정도가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전 촌닭들의 어떤 멤버들은 수료를 하고 나가긴 했지만, 그래도 FESTEZA 멤버들의 반은 촌닭들 때부터 공연팀에서의 학습을 지속해오던 죽돌들이었고, 우리 연습은 이들에게 촌닭들 시절에 했던 레퍼토리, 스킬 등을 배우는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처음 한달은 나를 포함한 신입들이 공연팀에 적응하느라고 비교적으로는 많은 시간들을 연습하며 지내기도 했지만, 우리 실력이 제대로 좋아지고 있기는 한건지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FESTEZA 이후로 공연의 횟수는 줄었지만 공연을 거듭함에도 만족스러운 퀄리티의 공연은 초기에 연습에 비교적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을 때뿐이었고, 그래서 눈에 띄게 나아지지는 않는 연주들은 ‘우리가 공부에 좀 더 비중을 두었기 때문’이라며 어느새 자기 위안을 일삼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나는 우리의 음악을 두 개의 퀄리티로 나누고 저울질하고 있었다. ‘얼마나 이야기가 있는 공연을 위한 공부, 이야기를 잘 이해하고 공연하느냐’, ‘압도적이고 화려하게 멋진 공연을 연출하느냐’라는 식으로 말이다. 얼마 안 가서, 이 문제는 우리 앞에 떡하니 나타나게 되었다. - 그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계기는 <사북/고한 예술마을 프로젝트 동+감>에 초대되어 시민문화 워크숍의 일환으로 떠난 정선 여행의 마지막날, 작업장 학교의 모두가 정선 5일장에 놀러갔을 때였다. 들뜬 페스테자는 시장 한 구석에서 우리끼리 놀 생각으로 파고지 악기를 가져가기로 했다. 막상 시장에 가니 역시 5일장이라 그런지, 사람이 정말 많았고 한편에서 +
2010.03.03 01:46:09
내 글에서 읽기 힘들다는 것? 말해주면 좋겠다.
음...말하고 싶었던 것은 '서로에 대해서 궁금해하자.' 라고 할 수는 있겠다. 모든 것 이전에 우선적으로 서로에 대해 같이 나누는 '말' 조차도 너무나 부족했던 느낌을 받았어. 서로의 표정이나 진심을 확인하기가 힘들어서 점점 하소연식으로 되어버려서 지치게 되는 네이트온에서의 남모르는 대화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지난 번의 무브의 MSN 접속 회의같은 경우 정도로 쓰는 건 뭐...) 서로의 생각이나 진심들을 확인하려면 꼭 정선의 사북사태같은 사건들이 있어야만 하는지 생각해보기도 하고 어쩌면 무브말대로 그건 필연적으로 있어야'만' 했다는 말도 공감되긴해. 그러면 우리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도 생각해보게 되지만...
2010.03.03 08:40:24
'의리가 없다'라는 이야기가 나온 배경은
적어도 같은 팀인데, 서로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부분도 없고 더 알고 싶어하는지도 서로가 모르는 상태에서 정체되어있을때 그런 이야기가 나왔었지. 뭐 나야 사정상 움직이지 못해서 당장에 내가 꼭 참여를 하고싶었으니까 MSN을 사용했던 것이고. 네가 말했던 교가를 만드는 과정중에 함께 했던 베이스 연주자였던 사람으로서 나는 너와 함께 그 교과의 멜로디를 편성했는데도 그것을 막말로 다른사람에게 저작권을 넘겨버린다는둥의 무책임한 발언이 자신의 것을 맘에 들지않으면 당장에 제거해버리는, 그런 상황이 벌어졌던 것. 그리고 교과를 만드는데 앞서 '참여'를 거부한 채로 뒷짐지고 멀찌감치 떨어져 시크하게 지켜보고있었던 것. 우리 것이지만, 우리 것이 아니게 만드는 것이 그런게 의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진심을 알기에는 꼭 사건이 터져야만 이야기를 하는것이라면 앞으로의 여정은 너무나도 힘겨울 것이라 생각이 드는데 우리가 언젠가부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한다는 생각이 점차 그 이야기가 우리의 내부에 스며든듯한 느낌을 받은 것은 오늘날 에세이를 쓰는데, 자신이 고민하고 있던 것을 넌스레 던지면 그에 반응을 무척 빠르게 하거든.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가 늘 필요했으나 어떤 계기가 아닌 이상 '수다'를 떨기에는 너무나도 어색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 서로의 진심을 들여다 보려면 자신이 무엇을 학습하고 있는지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은 필요한 듯.
2010.03.03 09:20:33
몇 차례 '진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거기에 대해서는 인식을 시작.....하려고 노력하고 있겠지, 우리는.
왜 지난 번 정선에서의 TCK3 영상을 영상팀이 만든 것에 코멘트하는 시간 이후로 나도 '우리 것'이라는 인식에 인색한 우리 모습을 알게 된 것 같아서 참 다시는 그러지 않으려고 애쓰게 되는데 메솟에 다녀온 이후로부터 아무리봐도 학교가 재미있질 않아서 생각해보니 내 생각, 내 글 쓰는 데에만 바빠서 다른 사람이 어떤 이야기들을 하는 지도 잘 듣지 않은 채로 몇일을 보내고 있더라고. 어색함을 조금씩 줄여나가려거든 '시도'들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여기는데, 어느 순간 순간에 마음을 내서 '흐앗! 흐앗!'하는 식의 일발 보다는 정말 항상 자기 진심을 몸에 두르고 내비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하고 있음. 작곡 이야기하니까 생각나는 건데, 나도 지난 번 포잇트리 애프터눈 시간에 '등불'이라는 곡을 '다시' 불렀는데 말이지. 장장 몇개월이 걸렸다는 것이 꽤 놀라웠지. 조금 스스로가 실망스럽기도 했다. 솔직히 자기들 의견을 표현해주었음에도 나는 내 것에 너희들이 관여하는 게 싫기도 하고, 그냥 좋다고 해주면 되는 걸 그렇게 까지 말해야 하나 하는 식으로 코멘트에 대해서 정말 유치하게 굴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어떤 우연한 계기나 사건으로만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진심이 스며든 일상을 보내다가 어느날 불현듯 나타나는 '계기'는 대체 얼마나 클 지 '기대'하고 있기도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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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한 약속을 지키는 것?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것? 책임감을 갖는 것? 학습을 같이 하는 사람으로서 나누는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