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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시민문화 워크숍글 수 603
몸과 마음이 “함께” 0. 도피하기. “교복”입은 탈학교 학생
김포공항 옆에 위치했던 우리학교는 하루에도 여러 번 비행기가 뜨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그렇게 비행기를 보면서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건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그냥 학교라는 곳이 매일 나와 씨름을 하는 곳이라면, 이곳만 벗어나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었다.
나에게 있어 학교는 언제까지나 ‘대학 입학 후’ 만을 대답하는 자동응답기였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끊임없이 나오는 새로운 입시전략 속에서 상담을 원한다면 0번을 누르지만 아무도 네가 누구 인지, 어떤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 ‘나’ 자체를 묻지 않았고, 지금까지 해온 성적으로 갈 수 있는 대학 1순위, 2순위, 3순위로 이야기를 마무리되곤 하는 그런 공간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매번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이야기 했지만 그것조차
“영화 만드는 거? 그게 지금 중요하다고 생각하니? 그거 대학가서 동아리 활동으로 충분히 할 수 있어.”, “딴 생각 그만해. 지금 중요한건 공부야”
라는 말로 오히려 학교는 나에게 ‘튀지 않는 것이 제일‘인 그렇지만 열심히 공부하는 로봇이 되기를 바랐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바로 1순위, 2순위, 3순위를 매겨 이야기 해주는 선생님도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나의 “반항”이 선생님의 훈계로 바로 꺾여버리는 그 시절, 나는 소위 '모범생'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몸으로 경험하고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온몸으로 싫다. 라고 표현하는 소위 어른들이 말하는 ’문제아’들을 동경했는지도 모른다. 그때는 나는 이게 싫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해온 것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또 그렇게 되기가 너무 어려웠었나보다.
나는 똑똑했다. 내가 방황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 때 내가 '넘겨다본' 하자는 해보면 알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었고 정말로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다. 내가 하고자하는 일에 자유가 아른거리는 그곳! 신비의 세계! 그리고 나는 교복을 입은 채 어정쩡한 모습으로 그 앞에서 "이걸 넘어, 넘지 마? " 라는 고민을 하고 있는 학생이었다. 고민의 시간이 길어질 수 록 나는 힘이 들었고, 단순하게 학교자체 만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자퇴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그런 부분에서 어떻게 보면 나는 심각한 “문제아”였다. 결국 나는 “하자에 가서 영화를 찍겠다.” 고 결심했다.
고등학교에서 1년은 나에게 처음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있었기에 나는 학교라는 울타리를 넘겠다는 선택을 하게 된 것이었다. 지금 입장에선 그때의 고민들이 참 귀여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하다. 지금도 그 고민은 계속되고 있고, 나는 그 답을 찾아 이것저것을 해보는 중이니까,
1. 나없는 내 인생
하. 지. 만. 하자작업장학교에서 첫 번째로 한 것은 영화 찍기가 아니라, 자전적 글쓰기와 인문학이다.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과거를 글로써 풀어내는 과정에서 나를 되돌아보는 학습이라고 했던 자서전 쓰기는, 현재의 내가 이 자리에 있기 까지 어떤 상황이 있었는지를 되짚어보는 과정이었다. 억울하고 분통했던 기억을 써야 할 때는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그런 과정이 오히려 나를 좀 더 강하게 만들었다. 우울 할 때면 즐거웠던 기억을 꺼내볼 수도 있었다. 그러한 시간들이 모이고 합쳐져 지금의 내가 만들어 졌다는 것이 대견스럽기도 하고, 스스로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인문학 수업 혹은 프로젝트 <애, 전, 별, 친>은 너무나 쉽고 익숙하게 생각했던 4개의 테마를 가지고 책을 읽고 밑줄을 긋고 나누고 토론하는 과정은 어쩔 땐 명확했던 개념이 모호해지기도 하고 생각해 본적 없지만 새롭게 알게 된 일도 많았다. 자전적 글쓰기와는 다르게 아직 겪어보지 못한 일들, 하지만 내 주변과 앞으로 살아가면서 벌어지게 될 일들에 관해서 이야기해보았지만 매번 “잘 모르겠지만......”으로 시작하는 너무 조심스러운 시간이었다. 특히 “전”의 테마로 <멋진 한 세상>을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나는 ‘살자니 고생이오, 죽자니 청춘’이라는 책의 한 구절처럼 나의 삶도 어떤 면을 보느냐에 따라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천차만별이었다. 인문학은 삶을 공부하는 것이었고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곧 삶이라는 것은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묻는 것이었는데, 나에게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교과서에서 한번도 본 적 없고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인문학은 이제껏 내가 배우고 학습했던 방법과 다르게 정답을 내리라기 보단, 나의 생각을 물어주는 것이었다. 작업장학교에서 배우는 경험과 시간들이 너무나도 새롭고 재밌었다. 나는 이곳저곳 판이 생기는 곳 마다 참여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마치 내가 살아온 인생을 새롭게 정리하는 기분이랄까? 역시 나의 선택은 백번 옳았어! 속으로 외치면서 길찾기를 수료했다.
시험도 반장도 없는 작업장학교에서는 번호 대신에 내가 불려지고 싶은 이름을 정하고 모두가 나를 그렇게 불러주었다. 그리고 “나”에 대해서 설명하기 전에 내 상태는 어떤지,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왜하고 싶은지 묻는 것이었다. 학교라는 공간이 집보다도 좋고 편한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일반 학교 다닐 때, 반장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수많은 학생보다는 “반장”은 우리 반에 한명이니까 되고 싶어 했다. 이전에는 내가 어떤 경험을 하고 있었던 사람이었는지를 들여다보기 전에 머릿속에 입력해야할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내가 선택한 이 길은 일반학교에서 내가 걸었던 길과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인생이라고 말했지만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지난 18년 동안의 나를 지우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에 의해서 불려진 서새롬 대신에 나를 홍조라는 이름으로 설명할 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었다.
2. 혼자서 할래 가 아니라 함께 하자
길찾기 때부터 공동작업은 매번 나에게 ‘공동’이라는 의미를 묻게 했다. 내가 생각했던 공동 작업은 단순히 하나의 일을 여럿이 나눠서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똑같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팀원들이 작업에 소홀하면 기분이 나빴고, 작업이 내 생각대로 잘 풀리면 혹시 내가 너무 독단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그렇지만 공동작업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시기, 양상과 영등포 프로젝트의 편집회의를 해보는 경험을 하면서 원고를 하나하나 살펴보고 전체를 생각해서 틀린 문맥을 다듬기도 필요한 것은 적절하게 배치하기도 했던 경험이 있다. 편집을 해보면서 어떤 애는 이 부분을 잘하고 어떤 애는 이 부분이 약하다는 것을 알아 볼 수 있었다. 공동작업을 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가 어떤 부분을 잘하는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때로는 나조차도 내가 어떤 부분을 잘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대화가 필요했고 서로를 진심으로 알아가는 것이 필요했다.
길찾기를 수료하고 나는 주니어 과정에서 영상팀을 지원했다. 자신을 작업자라고 칭하면서 어떤 작업을 할지 함께 고민하는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를 영화감독이라고 말 할 수는 없지만 영상팀에 있는 시간들은 의욕과 의기를 충만하게 해주는 공간이었다. 좋아하는 영화에서부터 “이런 것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제안까지 같은 분야의 관심사를 가진 판돌과 동료작업자와 이야기는 즐거웠다. 나는 길찾기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공동작업이 대화를 통해 서로를 진심으로 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영상팀은 물론 공동작업을 밥 먹듯이 해야 했음으로 주구장창 토론을 했다.
영상팀은 공동작업을 좋아했다. 사실 나는 영상팀을 좋아했다. 우리는 바냐의 제안으로 “TCK TCK TCK” 이라는 구호와 함께, 기후변화 행동에 관련한 캠페인 영상을 만들었다. 많은 대화와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있었고 실제로 나는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었다. 그렇지만 영상을 만들고 나서 가장 많이 들었던 코멘트 중 하나는 “너희”가 없다는 말이었다. 나는 캠페인의 내용과 목표가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많은 대화와 토론들 와중에 “합의”된 내용이니까 모두 동의 했으니까 우리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는 “우리”라는 함정에 빠져있었다. 공동 작업을 하는 데 “나”의 입장이 제대로 서있지 않으면 “우리”의 입장이 제대로 될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것을 그 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확실히 얘기 하지 않고 좋게 넘어가는 식의 작업은 나에게도 모두에게도 좋은 태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결론적으로.
생각해보니, 나는 처음 영상팀에 들어왔을 때, “무슨 영화를 찍고 싶니? 어떤 주제에 관심이 있니? “라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그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 보기 시작했었다. 온 관심은 어떤 영화를 찍을까? 이었는데, 사실 영화는 생각만으로 찍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처음으로 내 시나리오를 써보았지만, 생각보다 쉬이 써지지 않는 글에 나는 ”아이씨, 내 머리 속에서 벌써 영화는 상영중인데....... “ 라는 푸념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과 시나리오가 다른 점은 바로 남들에게 보여 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뭔가 흥분되고 나는 한 것 고조되었지만 실상은 ”고작 시나리오 한개? “라는 물음을 받았어야 했다. 그렇지만 나는 고작 시나리오 한개 쓸 수 있는 것도 감지덕지 했다.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쉽지 않은 만큼, 공동작업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한 단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공동”은 그런 것이다. 서로의 몸과 마음을 함께 협력하는 방법을 탐구하는 것이고, “공동작업”은 혼자서 생각하고 단정 짓는 것이 아니라 만나고 부딪혀 보는 경험을 통해서, 서로 어울리는 최상의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를 더 만들어 낸다는 것은 때로는 힘들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다 알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영상팀 안에서 하나씩 알아가는 것이 즐겁기도 하다.
3. 세상과 만날 준비
나를 알고 내 주변을 살피는 작업장학교에서의 학습은 더 나아가 시대를 읽고 해석하는 <기후변화 시대의 living literacy>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기후변화라는 글로벌 이슈에 대한 영상,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토론하는 과정에서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라는 질문에 맞부딪히게 되었다. 끔찍하게 벌어지는 상황들 속에 내가 누리고 있는 삶, 그곳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다시 한번 짚어보는 시간이었다. 알고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의 괴리감에 빠져있었던 찰나, 나는 히옥스가 제안한 <유스토크> 기획팀에 지원했다. HKSC의 학생들과 함께하는 <유스토크>를 위해 나는 기획팀의 일원으로서 집중해서 이야기 하고 싶은 주제를 가지고 발제를 해야 했었다.
나는 다시 한번 내가 살고 있는 도시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또, 급변하는 도시 안에서 살고 있는 내가 추구하는 삶의 조건은 무엇이고, 점점 더 삭막해져 가는 도시 속에서 어떤 것에 가치를 두고 살아 갈 것인지를 진지하게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에게도 어린 시절 추억의 장소를 잃어버린 기억이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변에 개발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살 곳을 잃은 사람의 슬픔을 더 공감할 수도 있었다. 나는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재개발과 도시의 속도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로 발제를 했고 그것이 의외로 이야기가 잘되어서 나는 주로 서울, 홍콩 두 도시에서 살아가는 10대들의 이러한 개인의 경험의 맥락이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에 집중 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타인과 주변의 문제로만 인식했던 상황들에 대해 이야기를 가지고 가기 시작했다. 또한 나는 기후변화라는 글로벌 이슈에 대해서 좌절감과 죄책감이 아니라 책임감을 갖고 내가 좀 더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생각들을 하길 원했다.
< 유스토크>를 하면서, 도시가 어떤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는지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조건이 사람을 만들기도 하고 사람이 상황을 만들어내고 그것들이 저마다의 사연들 속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함께 있다는 것으로 서로에게 좋던 나쁘던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나는 보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았고, 그 것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나의 주변에서 내가 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 있지만 본다고 해서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홍콩창의력학교와 하자작업장학교는 학생과 죽돌 들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담은 선언문을 만들었고, 그것을 토대로 제1회 창의 서밋 때, 다시 만나 홍대와 청계광장에서 거리에서 "save my earth, save myself"라는 구호를 통해 우리의 목소리를 내본 경험으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해보는데 에 의미를 두자라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하면 할수록 우리의 행동에 관심과 응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냉담한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반응은 제각각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실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알고 잇는 것을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설명을 하고, 함께 움직임을 권하는 캠페인 영상을 만들기도 하면서 말이다. 내가 먼저 실천하고 그 다음에 남들에게 전하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편리함도 어쩌면 누군가가 희생함으로서 만들어진 것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문제는 비단 아마존과 북극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 혼자만 잘 먹고 잘 살면 그게 끝일 줄 알았는데,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고 행동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이런 문제들이 발생했던 것이었다. 내가 보고 알게 된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이 전부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게 세계는 아주 크고 나는 아주 작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내가 있고 그 다음에 세계가 있었다. 나는 아주 작은 단위의 세계였고, 나는 다른 세계들과 연결이 되어 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릴 때 까지 너무 힘든 시간들이었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었다.
내가 만약 이 프로젝트를 하지 않았더라면, 이후에 갔던 두 차례의 현장학습이 나에게 큰 의미로 다가 오지 못했을 것이다. 깊게 생각해보지 못했던 문제들은 사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곳에서 시시각각 마주해야했고, 생각하고 있어야했다.
4. 사이에서 만남
메솟에서 버마시민운동을 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불법이주민이나, 공식적으로 “국적 없는” 난민의 상태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몸담았던 사회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면서도, 남겨진 사람들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다른 사람에게 믿을 수 없는 경험을 전달하는 통로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때로는 격렬하게 운동을 하고, 미래를 내다보며 청소년의 교육을 신경 쓰거나, 그 둘 사이에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아주며 의료지원 등을 해주는 단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단체별로 다 같은 맥락상에 위치해있지만, 각자의 경험과 사실들을 국제사회에 호소하며 버마의 올바른 정치,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CDC (Children Development Center)학교의 학생들은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태국과 버마의 국경을 따라 흐르는 강을 보러 갔을 때, 한 친구는 자신은 버마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버마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얘기했다. 부모님이 먼저 버마에서 태국으로 탈출했고, 그 이후에 자신은 메솟에서 태어나 줄 곧 메솟에서 자랐다고 얘기했었다. 나를 잊지 말아달라는 말에 절대 잊을 수 없다고 대답한 나는 해 줄 말을 찾지 못했다. 내 눈앞에 있는 친구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는데 친구는 자신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을 시시각각 느끼고 있다는 사실은 나로서도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다.
버마의 8888항쟁 이후 지금까지 현재 메솟과 멜라 캠프 안에는 여러 가지 상황으로 “탈”한 사람들이지만 8888항쟁의 학생운동(지금은 학생이 아닌) 세대와 그 이후의 “국적 없음”의 상태에서 한 번도 버마에 속해 보지 않았던 (조금 특별한 경험을 가진) 세대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참으로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났던 마웅저 선생님이나 많은 NGO들, CDC와 LMTC친구들 모두가 출발한 지점도 서로가 떠나온 시간들도 다르다. 그래서 NGO들이 버마민주화 운동을 지속하되, 운동의 한 갈래로 청소년들의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버마의 민주화가 더 지체된다면 이와 같은 상황은 점점 많아지고 그에 따라 발생되는 문제들도 속속들이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약 1년 반 동안, 나는 작업장학교에 속해 있는 학생으로서 내가 “탈” 해온 일반학교라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해왔다. 내가 이전에 인식하고 있던 범위로 안과 밖, 나와 너, 내가 선택한 학교와 떠나온 학교로 설명하기에는 단어도 힘도 많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현실은 그 두 가지만 생각 할 수 없는 많은 상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가 가진 경험에서 비롯된 편견은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나의 삶을 불편하게 하고 힘들게 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너무 다양해서 어떤 결을 읽느냐에 따라 이야기 할 수 있는 부분은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의 잣대를 가지고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려고 하면 그 사이에 자꾸만 소외되는 것들이 늘어난다. 내가 학교를 나온다고 해서 일반학교에서 요구하는 모든 시스템을 거부하려는 것이 아니다. 대안학교에서 공부한다고 해도 일반 사회와 담을 쌓고 모두가 산으로 들로 나가지 않는다. 서로가 필요해서 선택하고 원하는 곳에서 삶을 꾸려가는 것이다.
5. 몸과 마음이 함께
처음 로드무비를 접하게 된 것은 한참 자퇴를 다짐 할 즈음이었는데, 나는 “파리, 텍사스”라는 영화의 첫 장면을 보고 나도 영화를 찍겠다고 결심을 했었다. 영화의 첫 장면은 광활한 땅위에 홀로 걷는 주인공의 모습이었는데, 나는 그 장면을 보고 이렇게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나의 인생은 저렇게 혼자서 자유롭게 가는 거야. 누구의 간섭 없이 내 스스로.” 자퇴를 한 후, 내가 길을 떠나 처음 선택한 작업장학교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영화 찍고 싶은데요. 작업장학교에 오면 다 할 수 있는 거 아니었나요?” 하지만 학교는 먼저 너는 누구인지, 관심사는 무엇인지, 어떤 영화를 찍고 싶은지 내게 찬찬히 설명해 보라며 질문을 던진 곳이었다.
나는 그런 질문에 답을 이곳에서 여러 가지 경험들에서 각기 다른 삶, 관심사, 목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서 찾아갔다. 나는 “로드무비”에서 표현하는 “길”이 좋아한다. 그 길은 자유롭고, 그 길을 걷는 주인공들이 깨달음을 얻고 있으니 말이다. 주인공이 걷고 있는 길의 여정은 단순히 여행자체를 위한 여행일 수 도 있고 아닐 수 도 있었지만, 확실한 것은 모두가 무언가를 찾는, 추구하는 물음을 가지고 있고 집을 떠나 길을 걷고 있다는 것 이었다. 그래서 학교를 나온 후부터 나도 영화처럼 혼자서 길을 걷는 것인 줄 알고 더욱 정신 차리고 앞에만 보고 있었는데 옆을 보니 다양한 사람들이 각기 다른 길을 계속 걷고 있었던 것이다. 저마다 출발한 지점도, 지나온 과정도 모두 다르지만 어느 지점에서는 만나게 되었다.
내가 선택한 길에서 현실과 마주하는 경험들을 통해 또 다시 길을 떠날 수 있는 나만의 방향을 잡으면서 학습했다. 하지만 이제 그 방향은 곧이 곧대로 한 나의 몸과 마음을 함께 협력하는 방법을 혼자서 생각하고 단정 짓는 것이 아니라 만나고 부딪혀 보는 경험을 통해서, 어느새 나도 서로 어울리고 있었던 것 같다. 공동작업을 통해서, 현장학습을 통해서 그렇게 나의 배움은 만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혼자서 덩그러니 서있으면서 만남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적극적으로 마음이 가는 곳, 몸이 가는 곳으로 움직이니까 그곳에서 “함께” 만나는 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보니 나는 내 길의 역사를 나만의 로드무비로 재조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걷고 있는 길은 나만 혼자 있지 않고, 여러 결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세상과 함께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료를 하고 앞으로 나는 카메라를 들고 기후변화, 평화, 대안교육이라는 이슈와 길과 영화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갈 것이다.
![]() When we meet a desert, make it a ga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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