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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obish글 수 569
2. 지구는 하나의 기업이다. 유출사고는 석유로 돌아가는 거대기계의 모든 이익을 관리하는 기업이나 단체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끔찍한 재난"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단지 일시적인 것이라도 말이다. 이 사고는 기업이 보장하는 절대안전신화의 정반대를 보여주고, 분명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원주민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액손과 알래이스카 파이프라인 석유기업의 협력집단은 흔히 정부, 타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사고가 일어난 뒤에나 독성물질사고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움직인다. - 그것마저도 기업의 이미지를 관리하기 위해 사고를 수습하고 있다는 이미지로 치장한다. 이들은 정화작업에 매진하는 액손 노동자들, 건강해보이는 수달과 오리들의 그럴듯한 사진들을 공장에서 찍어내듯 보여주면서 유출문제에 대해서 진지한 대책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공표하고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재난을 대처하는 기업위기관리의 사례는 1984년 인도 보팔 유니언카바이드 공장에서 일어났던 화학가스누출사고에서도 볼 수 있다. 타라 존스는 최근 저서인 "기업의 살인 : 보팔의 비극은 또 일어날 것이다(Free Association Books, 1988)"에서 "보팔에서 일어난 사고는 즉각적인, 그리고 장기적인 조치 둘 다를 요구하는 사고였다. 사후조치 과정에서도 피해자들의 요구는 완전히 묵살되었다 : 그것과 두드러지게 오히려 우선수위는 유니언카바이드 인도지부의 경제적 손실 등이 더 위였고, 이 주인공은 자신의 이익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연기하면서 마치 죽음이 섬뜩한 춤을 추는 것과 같은 사망자, 부상자들은 한쪽에 버려진 것이다. 산업자본의의 지속적인 면에선 보팔 사고는 생태에 큰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고 기술적인 문제도 아니지만(사고는 피할 것), 보팔은 대중에게는 알려질 만한 일이었기 때문에 잠재적으로는 사람들이 가스누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중대한 사회적 위기일 것이다. 이런 연유로 모든 화학 산업은 오염이 지속되는 극적인 예를 보여주는 것보다는 "일반대중에게 보팔은 희귀한 케이스이며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해" 일한다.
프린스 윌리엄 사운드 유출사고 소식이 뉴스에 나가자마자, 액손은 유니언 카바이드 공장에서의 아름다운 환경의 이미지를 내보내는 전략을 또다시 시행했다. 액손은 발데즈와 코르도바 항구 근처의 보트들을 고용해서 어떤 미디어도 기업의 허락 없이는 사건을 취재하는 것을 금했고, 대부분의 환경단체나 비판적 성향의 기자들이 그 어두운 암초를 조사하기 위해 접근하는 것조차 막았다. 한편 액손사에 고용된 "The Hearse"라는 별명의 생선 잡이 배는 며칠 마다 유출사고로 죽은 동물을 쓰레기봉투에 가득 실어 항구로 나르는 일을 했고, 기자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죽은 지 2주가 지난 동물들은 실어오지 말라"는 명령을 하달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액손 사고로 인한 동물 사체를 집계한 수치도 어째서인지 제각각이었다. animal agenda의 조지미카엘은 "숫자부터가 아예 다르다."라며 역겨움을 토로했다. "[액손]지는 지난 6주동안 500마리의 수달이 죽어서 실려 왔다고 밝혔는데 내가 본 건 지난주에만 600마리에요." 실제로 유출로 인한 오염은 범위며 정도가 더 심해졌음에도 액손은 유출상황은 통제되었으며 오염이 정화되었다는 공식발표를 되풀이했고, 액손은 '알래스카의 진전"이라는 제목의 그럴 듯 해 보이는 비디오까지 만들어서는 기업이 환경적으로 헌신함과 석유로 발생한 이익의 85%를 사회적 이익으로 만든다며 발데즈사고에 대한 대책까지 자화자찬했다. 액손은 전국의 신문들의 전면 광고까지 매수하여 사고에 대해 기업이 책임을 지게 하는 상황을 방어하려했고, 여전히 사고현장의 긴급대응책들에 대해 엄격한 통제를 유지했는데 마치 이것은 대량살인자가 그가 일으킨 학살의 범죄과학수사를 도맡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일이다. - 경제적 부흥은 곧 생태적 파산이다.
북극해에 프루도만 유전지역(세계에서 가장 큰 공업단지라고 할 수 있는) 건설 이후, 알래스카의 청정수, 자연보호구역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석유산업 측은 항상 안전을 보장한다고 확언해왔다. 석유 약탈에 달려든, 알래스카 주와 기업들은 기술적 자만심과 골드러쉬와 다를 바 없는 이 끔찍한 항해에 닻을 달았다. 알래스카는 그야 말로 호황이었다. 미국 내 석유의 1/4을 공급하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프루도만이 얻은 것은, 공공 서비스 예산이 두 배가 된 것, 개인 소득세 폐지, 알래스카 전 주민에게 연배당을 지급하는 신탁기금이 생긴 것이다.
석유개발 초기, 거대 석유회사는 개발을 반대하는 일부 알래스카 주민들에 대해 완승을 거두었다. 거대 석유회사는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법을 이용하는가 하면, 필요한 경우에는 언제든 법망을 피해갈 수 있었다. 1970년 대, 어류업계와 환경운동가들은 알래스카 파이프라인에 대한 소송을 벌였고 대법원에서 상고하여 승소했다. 하지만 의회는 이 프로젝트가 환경법에 전혀 저촉되지 않는다고 공표했다. 연방법은 알래스카의 자연보호구역 800마일을 가로질러 발데즈 항구에 파이프라인을 건설하고자 하는 아홉 개의 석유회사 컨소시엄을 수용하기 위해 힘을 잃고 완화되었다. 석유 개발 산업은 그 규모가 커짐에 따라서 '최고의 기술', 안전성 검토 그리고 설비 개선의 약속을 동반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심스러운 약속들은 현실화되지는 않고 있지만 말이다. 기업에게 있어서는 드릴에 의해 남겨진 유독한 구동이들을 정화시키는 것보다 유기해서 벌금을 내는 편이 더 싸게 먹히며 심지어 이 부당한 환경보호법은 무시되기 일쑤다. 존 그릴리가 The Nation지에서 언급했듯 발데즈 항구는 이미 북아메리카의 "만성 오염 해양 생태계"로 과학기관에 의해 취급되고 있다. 발데즈 유출 이전에 일어났었던 400개의 소규모 유출까지 생각하면 유출사고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문제다. 거대석유기업은 몇몇의 기업이 있는 동네정도가 아니라 아예 기업의 국가를 만들어냈다. 경제확장에 의한 이민자들의 파도는 기업들과 개발에 대한 반대를 어렵게 만드는데, 이는 주거, 학교, 도로, 전력사업 등 현대 자본-에너지-소비재-집약적 사회의 전체를 이루는 사회기반시설들은 모두 수익에 의해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패, 공모가 잘 안되었을 때, 알레이스카는 은폐하려는 술수를 썼고 예를 들면 석유유출 사고 이후 발데즈에서의 보다 엄중한 오염 방제에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 5월에 법정으로 간 것 같이 원활한 영업활동을 위해서 선전활동과 법적공작을 펼치기를 계속했다. 여기서 독물학자 그릴리의 말을 인용하자. "만일 알레이스카가 이러한 석유회사들이 환경적으로 원만하게 기업을 운영한다는 것의 예시라면 그 회사들은 외진 환경보전구역에서 심지어 최소한의 통제(감독?)도 없이 무엇을 하고 있는건가?" 이런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만약 “제3세계”의 목적을 잔혹한 폭력과 거대한 착취, 비밀 베일 발호에 의해 약탈당한 식민지라고 한다면, 프루도 베이는 제3세계 식민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루도 베이 단지는 복잡한 조립식건물, 드릴링 패드, 파이프라인, 도로와 활주로로 둘러싸여 있는 900평방 마일의 황무지인데, 그 모습은 산업화 된 세계의 악몽과도 같다. 연소된 연료는 북극 하늘을 검게 만들고, 이것을 야기한 대기 오염은 도시 시카고에 버금간다. 1988년 그린피스 매거진 3-4월호에 따르면, “각기 다른 양의 탄화수소, 화학첨가물, 납, 비소가 함유된 6천 4백만 갤런의 폐수를 어떤 처리과정도 없이 바로 배출되고 있다. 담당기관들은 한 해에 600건의 기름유출 사고가 일어난다고 보고하고 있고, 프루도에 있는 다섯 개의 유해 폐기물 지역은 정화작업을 위해 이미 연방 슈퍼펀드법1)이 발효되어야 하는 상황이다. 그뿐 아니라, 석유회사들은 연방, 주 환경법 위반으로 수차례 법정에 소환되어 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수많은 위반들은 명백히 보고되지 않았고, 때문에 그 사태가 얼마나 나쁜지 대외적으로 드러나지 않아 왔다. 도로와 건축 공사는 영구 동토 층을 녹게 만들고 홍수를 야기했다. 그로인해 유해화학물질이 확산되면서 실제 개발지역보다 훨씬 더 많은 지역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1) 수퍼펀드법은 미국의 환경법을 대표하는 연방법이다. 수퍼펀드법은 미국사상 드물게 보는 오염사고로서 알려진 「러브 캐널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80년에 제정된 법률이다. 러브 캐널사건이 발생한 78년 당시 미국에는 대기정화법, 수질오염방지법, 자원보호회복법, 유해물질규제법 등이 있고 러브 캐널사건과 같은 과거에 폐기된 유해물질에서 생기는 오염에 유효하게 대처할 수 있는 법률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과거의 오염에 대해서도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법률의 필요성이 생겨 사건발생 2년 후에 제정된 것이 수퍼펀드법이다. 86년에는 이것을 대폭 수정한 수퍼펀드법 수정 및 재수권법(Superfund Amendments and Reauthorization Act : SARA)이 제정되고 기금도 16억달러에서 85억달러로 증액되었다. 이 법률을 수퍼펀드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연방정부 스스로가 거액의 자금(수퍼펀드)을 보유하고. 오염책임자를 특정할 수 없을 경우나 오염책임자가 정화비용을 지불할 수 없을 경우에 이 기금을 사용하여 오염시설을 정화하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이 기금은 석유세, 화학품세, 환경법인 소득세, 일반 재원 등에 의해서 조달되고 있다. 눈이 녹아내리는 늦은 봄, 수백 개의 폐광에서는 먹이사슬의 아래 단계에 있는 작은 담수 동물들의 대대적인 죽음과 끔찍한 음독 사건들이 줄을 잇는다. 작년, 북극곰 한 마리가 산업 독극물을 마시고 분홍색으로 변색되어 죽은 채 발견되었다. 이제껏 이렇게 여러 종류가 섞인 독극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른 야생동물들도 그 북극곰과 같이 죽어갔다. 석유회사들은 카리부(북미 순록) 수 증가를 재빠르게 언급했다. 하지만 그것은 벽지 도로공사를 늘려가던 1977-78년, 사냥꾼들에 의해 늑대가 대거 몰살된 것이 그 원인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카리부들이 어떤 영향을 받게 될 것인지는 미지수다. 뉴욕타임스로부터 도착한 편지에는 야생보호동물지로 가기 위해 동쪽으로 향하던 두 사람이 데드호스(프루도 단지의 핵심지)를 지나게 되었고, 그곳에서 본 그대로 묘사되어 있었다. "버려지거나 이용 중인 수천 대의 차량들, 소형트럭에서부터 거대한 이동드릴장비, 폐기름드럼통 더미, 기름범벅의 작은 구덩이와 잔해들이 전역에 널려있다." 석유 채굴 (이미 채굴은 끝나가고 있다.)은 서서히 줄어들고 있는데도, 데드호스 개발지역과 그 부근의 버려진 수십 개의 건축물은 재사용되거나 완전히 철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한낱 차량 더미, 건물 그리고 드릴장비들을 치우는 것" 그리고 이어 말하길, "오염된 툰드라를 해독시키고, 무너진 도로와 활주로, 파이프라인을 철거하기 위해서는 긴 시간과 수백, 수천만 달러가 들어감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과연 누가 그것을 지불할 것인가?" 역시 좋은 질문이다. 환경의 “안정성”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건축의 실제 에너지비용과 방대한 부지의 복잡한 원격운용을 고려할 때, 이러한 개발이 산업주의 전체의 전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미 이 게임의 사기꾼들이 자기 몫을 챙겨 자리를 뜨고 난 후엔 거대한 피라미드 방식은 어긴가에서 부터 철저하게 무너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사기꾼들이 칩을 돈으로 모두 교환해봤자 살아남을 어떤 곳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온실효과: 자본의 기업풍토 엑손사와 그의 이익집단들이 환경이나 인간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자본주의적인 집단들은 어떤 사회공익이 아닌 부와 권력을 축적하기 위해서만 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상가능하게도 엑손사는 비용감축을 위해서 대규모 유출은 거의 일어날 가능성이 없으므로 이러한 예방체계가 불필요하다는 환경연구결과를 이유로 들어 1980년대 내내 보유하고 있던 비상안전보호체계를 착실하게 해체했다. 그러니 정작 큰 사고가 터졌을 때는 완전히 무력하고 태만한 식의 대처 밖에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재해들을 기업적 욕망이 일으킨 일탈적 사고로만 보는 것은 안되고, 그것은 오히려 전체 사회적이고 기술적인 체제의 본질을 흐리게 만드는 일이다. 프루도만이나 보팔같은 장소에서의 전혀극적이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는 일상에서 일어난 끔찍한 재해는 발데즈가 사고가 아닌 보통의 상태인 것임을 말해주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이다. 현대 산업주의는 프루도만 같은 곳들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자본은 언제나 죽음의 촉수를 더욱 많은 곳에 길게 뻗기 위해서 엄청나게 착취할 식민지, 즉 하늘, 공동체, 유역, 토양, 유전자 풀 같은 어떤 종류의 "희생당할 곳"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진정한 유출사고는 자본주의와 대량기술이 그들의 계획에 따라서 가동하는 매 순간 일어나고 있다. 엑손발데즈는 120만 배럴 정도의 석유를 싣고 있었는데 그렇게 보면 매순간 세계의 바다 위에는 7억 5천만 배럴의 석유가 배에 실려서 떠돌아다니는 셈이다. 1979년, 전세계 육지와 바다에서 유출사고, 화재 그리고 침몰을 통해서 유실된 석유의 양은 최고 3억2800만 갤런에 달했고 그 이후 1983년 이라크-이란 전쟁에서 유조선 사고와 폭발로 2억4200만에 달했던 것을 제외하고 2400만에서 5500만 사이까지 매년 감소해왔다. 그런데 대부분의 바다에 떠다니는 석유는 사고에서부터 발생한게 아니라 지역이나 산업체에서 정기적으로 배 밑바닥의 청소를 한다거나 다른 정기작업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기업의 분석가들은 대형유출사고들이 감소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대형유출사고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사이에 매일 저수준의 '보팔'이 계속되는 것처럼 "비교적 작은" 유출은 매 시간 계속해서 일어나는 중이며 화학산업이 있는 한 평행하는 현상이다. 그리고 산업계가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는 상관없이 사고는 일어날 것이고 체제가 더 커지고 복잡해질 수록 파탄은 더욱 확실해진다. 계속 석유유출을 파악해온 캠브릿지 연구소장은 이러한 일들이 "매우 드물게 일어나며, 자원은 사고 현장 하나에서 효과적으로 대응하기에 불충분하다."(폭탄을 경로를 따라서 매 100야드마다 배치할 수 없음 등의 이유이다.) 결국 거대유출사고는 불가피한 것이다. 거대화된 현대사회는 끊임없이 화학누출과 석유유출이 발생하고 있다. 블라이 암초에 충돌한 발데즈에서 유출된 1,100만 갤런의 석유는 매년, 미시간 주 시민들이 하수구나 땅 위에 쏟아버리는 기름의 양과 맞먹는다. 제도적으로나 기술적으로 더 많은 안전조치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혁명적 노동자의회 혹은 국회에서도 안전조치를 마련해야한다), 산업주의는 이미 석유유출, 화학누출, 무능한 대처, 무능한 “치유”, 생태적 파산이라는 결과를 내재하고 있다. 어떤 제도적 관리가 필요하든 간에, 석유화학제품이 산업주의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듯, 유출사고 또한 석유화학제품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산업주의를 지구의 생체조직처럼 여기고, 석유, 화학누출사고를 일상화하게 된 이 사회는 산업주의에 중독되어버렸다. 이 관점은 4월 7일자 뉴욕타임즈 논평기사를 쓴 빌 맥키벤에 의해 제기되었다. 맥키벤은 묻는다. 결국 거침없이 달려온 엑손 발데즈가 가져온 결과가 무엇인가? 천만 갤런의 기름을 소비하면, 이산화탄소는 대기 중으로 6천만 파운드 가량 배출된다. 이산화탄소는 온실효과의 주범인데, 산업문명이 내뿜는 엄청난 양의 가스는 대기 중의 열을 가두며 지구 온도를 상승시켜, 지구생태계를 교란시키고 극심한 변형을 가한다. 말하자면, 이 기현상은, 21세기 자본주의 글로벌 비즈니스 기후인 것이다. 맥키벤은 다음 세기를 이렇게 쓰고 있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는 산업혁명 이전의 두 배 이상으로 증가할 것이다.” 과학자들은 이 결과를 예측불가능하다고 하지만, 화석연료의 연소가 화학성분을 방출시켜 오존층을 파괴할 것이라는 것, 각종 화학성분에 의해 열이 발생되고, 삼림 파괴 그리고 다른 많은 요인들이 심각한 멸종, 기후변화와 홍수, 큰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는 것에는 대체로 모두 동의하고 있다. 일반적인 자동차는 매년, 차체 무게만큼의 탄소를 배출한다. 맥키벤은 이것은 “또 다른 유막”과 같고, 이러한 탄소 배출은 일상처럼 일어나고 있다고 쓰고 있다. 과할기술의 변모로 일산화탄소, 탄화수소 같은 오염물질을 96%나 낮추는 “클린 버닝” 자동차가 생산되었지만, 그 자동차들은 초기 자동차만큼이나 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화석연료에서 에너지를 얻는 전기자동차도 비슷한 문제를 보인다. (‘기술적 해결을 절대 신뢰하지 마라’ 참고). 자동차 생산과 공해방지기술은 우리의 분석 대상이 아니지만 그 기술적 고유결함은 충분히 예측 가능할 것이다. 앞으로 백 년간 일어날 기후변화 속도는 마지막 빙하기부터 진행된 지구온난화 속도보다 30배 빠를 것이다. 배기구에서 나오는 오염물질만 낮춘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맥키벤은 말한다. “온실효과는 실수에 의해 일어난 결과가 아니다. 만취한 한 명의 선원, 불충분한 비상계획, 갑자기 나타난 암초와 같은 장애물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 의해 나타난 결과이고, 그렇기 때문에 온실효과를 해결하는 일은 정말 어려운 것이다.” “평범한 일상”을 산업 자본주의 그 자체라 하는 것에 대한 논쟁은 우선 차치하고, 만약 맥키벤의 “적은 에너지 사용”에 대한 권고가 앞으로 다가올 온실효과 위기의 의미 있는 대응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모든 사회 분야에서 고려하고 있는 산업활동 축소가 훨씬 더 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것은 이전에 보았던 그 어떤 사회 혁명적 변화보다 더 심오한 해체 과정을 암시한다. 이 해체과정이 정말 가능할지는 확답할 수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논의 이전에 중요한 것은, 지금의 환경적 영향이 수십 년 전, 우리의 활동 결과라는 인식에서부터 시작하는 문제의식이다. 근대과학은 기준치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 얼마의 시간이 남았는지 답해 주지 않는다. 하지만 너무나 명징한 것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2013.07.10 23:41:58
Limitation of Leftism 좌파주의의 한계
Despite numerous insights into commodities and the market economy, the left historically has always embraced the industrial, energy-intensive system originally generated by private capitalism as a “progressive” force that would lay the basis for a free and abundant society. According to this schema, humanity has always lacked the technological basis for freedom that industrial capitalism, for all its negative aspects, would create. Once that basis was laid, a revolution would usher in communism (or a “post-scarcity” society) using many of the wonders of technology that were capitalism’s “progressive” legacy. Presently, capitalism has allegedly outlived its progressive role and now functions as a brake on genuine development. Hence it is the role of the left to rationalise, modernize, and ultimately humanise the industrial environment through socialisation, collectivisation and participatory management of mass technics. In fact, in societies where the bourgeois class was incapable of creating the basic structures of capitalism - urban-industrial-energy development, mass production of consumer goods, mass communications, state centralisation, etc - the left, through national revolution and state-managed economies, fulfilled the historic mission of the bourgeoisie.
상품경제와 시장경제에 대한 여러 견해 속에서도, 좌파는 자유와 풍요사회의 기반이 되는 "혁신적인" 힘으로써 사적 자본주의에 의해 작동하는 산업과 에너지 집중적인 체제를 언제나 용인해 왔다. 이 스키마에 따르면, 산업 자본주의는 부정적 측면을 가지고 있음에도 자유를 위한 기술기반을 창조할 수 있지만, 인간은 그 기술기반이 부족하다. 언젠가 그 기술기반이 구축되고 나면 혁명은 도래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혁신적인" 유산인 경이로운 기술을 바탕으로 공산주의 혹은 "탈희소성" 사회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공산주의가 아닌 자본주의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술기반이 혁신적인 기능을 할 거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 기술기반이 공산주의로 가는 개발단계의 브레이크가 되어버렸다. 그 때문에, 좌파는 사회주의, 공영화, 거대 기술의 참여적 관리를 통해 산업 환경을 합리화, 근대화, 인간화하는 것을 자신들의 역할이라 여기고 있다. 사실, 부르주아 계급이 자본주의 구조(도시산업에너지개발, 대량생산, 대중매체, 중앙집권화 등)를 만들어 낼 수 없던 사회에서는 좌파가 국민혁명과 국가주도경제를 통해 부르주아의 역사적 임무를 수행했다. In the leftist model (shared by leninist and social democratic marxists, as well as by anarcho-syndicalists and even social ecologists), the real progressive promise of industrialisation and mechanisation is being thwarted by private capitalism and state socialism. But under the collective management of the workers, the industrial apparatus and the entire society can be administered safely and democratically. According to this view, present dangers and disasters do not flow from contradictions inherent in mass technics (a view considered to reflect the mistake of “technological determinism”), but rather from capitalist greed or bourgeois mismanagement - not from the “forces of production” (to use the marxist terminology) but from the separate “relations of production”.
레닌주의자와 사민주의적 막시스트, 그리고 무정부 신디칼리스트, 심지어 사회생태주의자들의 좌파주의적 모델에서는, 산업화와 기계화의 진정한 혁신적 가능성이 사적 자본주의와 국가 사회주의에 의해 방해받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 주도의 집합적 관리 아래에서는, 산업 조직체와 전체사회가 안전하고 민주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관점(“기술결정론”의 오류가 그대로 반영된 관점)에 따르면, 현존하는 위험과 재난은 거대기술이 내재하고 있는 모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탐욕 혹은 부르주아의 경영실패, 그러니까 막시스트의 용어를 빌리자면, “생산력”이 아니라 그와는 별개인 “생산관계”에 의한 것이다. The left, blinded by a focus on what are seen as purely economic relations, challenges only the forms and not the material, cultural and subjective content of modern industrialism. It fails to examine the view - one it shares with bourgeois liberalism - that human freedom is based necessarily on a material plenitude of goods and services. Parroting their prophet, marxists argue that the “appropriation” by the workers of the “instruments of production” represents “the development of a totality of capacities in the individuals themselves.” Conquest of the “realm of necessity” (read: conquest of nature) will usher in the “realm of freedom”. In this view, the material development of industrial society (the “productive forces”) will make possible the abolition of the division of labour; “the domination of circumstances and chance over individuals” will be replaced “by the domination of individuals over chance and necessity.” (Marx and Engels, “The German Ideology”) Mastery of nature by means of workers’ councils and scientific management will put an end to oil spills. Thus, if mass technics confront the workers as an alien power, it is because the apparatus is controlled by the capitalist ruling class, not because such technics are themselves uncontrollable. 좌파는 오직 경제적 관계에만 집중하며 근대 산업주의의 문화와 내용이 아니라 그저 형식에 도전하고 있다. 부르주아 자유주의와 다를 바 없이, 좌파는 인간의 자유가 반드시 생산물과 서비스 내용의 풍성함을 기반으로 한다는 관점을 면밀하게 검토하는 것에 실패했다. 그들의 선지자가 반복해서 말한 것은, 노동자들이 “생산도구”를 “적용”시키는 것은 “노동자 개인들의 생산능력 개발”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필요영역”의 획득은 (“자연정복” 참고) 그것을 “자유영역”이 되도록 할 것이다. 이 관점에 의하면, 산업사회의 물질개발, 즉 생산력은 노동 분업의 폐지를 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개인을 넘어선 기회와 상황의 통제”는 “기회와 필요를 넘어선 개인의 통제”로 대체될 것이다. (맑스, 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노동자조합에 의한 상황 통제 그리고 과학적 관리는 기름유출로 인해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만약 거대기술이 외부세력으로서 노동자들과 정면으로 맞서게 된다면, 자본주의 지배계급에 의해 시스템이 컨트롤되기 때문이지, 그 거대기술 자체를 컨트롤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This ideology, accompanied usually by fantasies of global computer networks and the complete automation of all onerous tasks (machines making machines making machines to strip-mine the coal and drill the oil and manufacture the plastics, etc.), cannot understand either the necessity for strict and vast compartmentalisation of tasks and expertise, or the resulting social opacity and stratification and the impossibility of making coherent decisions in such a context. Unforeseen consequences, be they local or global, social or ecological, are discounted along with the inevitable errors, miscalculations, and disasters. Technological decisions implying massive intervention into nature are treated as mere logic problems or technical puzzles which workers can solve through their computer networks. 글로벌 컴퓨터 네트워크와 고된 작업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는 자동화 (예를 들어, 채광, 시추드릴과 플라스틱을 제조하는 기계를 기계가 만들고, 또 기계가 기계를 만드는)에 대한 환상이 동반되는 이 이데올로기는 엄격하고 방대한 세부화 작업 전문성의 필요를 이해하지 못하고, 또 너무 세부화 되어 버리면 사회의 투명성이 사라지고 계층화되어 일관된 결정의 불가능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즉, 예기치 않은 결과들은 무시된다. 불가피한 오류, 계산착오, 재해와 함께, 로컬 혹은 글로벌, 사회적 혹은 생태적 가치들이 무시되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거대한 개입을 하는 기술적 결정은 이 개입을 논리적 문제이거나 기술적 퍼즐정도로 다루기 때문에 노동자들도 이 문제를 컴퓨터 네트워크로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된다. Such a view, rooted in the nineteenth century technological and scientific optimism that the workers’ movement shared with the bourgeoisie, does not recognise the matrix of forces that has now come to characterise modern civilisation - the convergence of commodity relations, mass communications, urbanisation and mass technics, along with the rise of interlocking, rival nuclear-cybernetic states into a global megamachine. Technology is not an isolated project, or even an accumulation of technical knowledge, that is determined by a somehow separate and more fundamental sphere of “social relations”. Mass technics have become, in the words of Langdon Winner, “ structures whose conditions of operation demand the restructuring of their environments “ (’Autonomous Technology’, 1977), and thus of the very social relations that brought them about. 이러한 관점에서 노동자 운동과 부르주아지는 19세기 과학기술에 대한 낙관주의적 입장을 같이 하고 있다. 이는 인공두뇌와 같은 각 국가들이 하나의 거대한 글로벌 기계가 되어가는 근대문명(인터로킹과 핵 경쟁의 증가와 함께 상품거래, 대중매체, 도시화, 거대기술의 집합체)의 폭력체제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기술은 기술지식의 축적만도 아니며 기술 그 자체로 존재하는 단일 프로젝트도 아니다. 기술은 “사회적 관계”와 분리되어 있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사회적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랭던 위너는 “기술의 자율성(1977)”에서 “거대기술은 거대기술이 운영 가능할 수 있도록 그 주변 환경을 재구조화 한다.”고 적고 있다. 그야말로 사회적 관계는 거대기술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Mass technics - a product of earlier forms and archaic hierarchies - have now outgrown the conditions that engendered them, taking on an autonomous life (though overlapping with and never completely nullifying these earlier forms). They furnish, or have become, a kind of total environment and social system, both in their general and individual, subjective aspects.For the most part, the left never grasped Marx’s acute insight that as human beings express their lives, so they themselves are. When the “means of production” are in actuality interlocking elements of a dangerously complex, interdependent global system, made up not only of technological apparatus and human operatives as working parts in that apparatus, but of forms of culture and communication and even the landscape itself, it makes no sense to speak of “relations of production” as a separate sphere. 등장 초기에는 한 체제의 산물이었던 거대기술이 자율적 생명체가 되어 거대기술을 가능케 했던 그 조건보다 더 비대해졌다. (물론, 거대기술은 거대기술의 등장 초기 형태를 부분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절대 초기 형태를 완전히 무효화시킬 수는 없다.) 거대기술은 보편적이기도 하고, 개별적이기도 하고, 주관적이기도 한 총체적 환경이자 사회시스템을 만듦과 동시에 그 시스템 자체가 되었다. 대개 좌파는 절대적인 통제를 했다. 대개 좌파는 인간들은 그들의 삶을 표현해서 그들 스스로가 되는 것이라는 맑스의 예리한 통찰력을 절대 이해하지 못했다. 실제로 “생산 수단”이 기술 장치나 그 장치에서 단순한 노동력으로서 존재하는 사람 뿐만 아니라 문화와 소통의 형태, 심지어 풍경으로까 이루어진 위험하게 복합된 독립적인 글로벌 체제의 인터로킹의 요소일 때, 개별적 영역으로서의 “생산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In such a mechanised pyramid, in which instrumental relations and social relations are one and the same, accidents are endemic. No risk analysis can predict or avoid them all, or their consequences, which will become increasingly great and far-reaching. Workers councils will be no more able to avert accidents than the regulatory reforms proposed by liberal environmentalists and the social-democratic left, unless their central task is to begin immediately to dismantle the machine altogether.(7) 도구적 관계와 사회적 관계가 같은 것이 되어버린 이러한 기계화된 피라미드 안에서 일어나는 사고들은 고질적인 것이다. 예측하거나 혹은 사고 전부와 엄청나고 지대한 영향이 될지 모를 결과들을 다 피할 수 있는 위험분석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그 기계를 해체하기 위해서 당장 다 같이 시작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로 만들지 않으면 자유환경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제시하는 규제 개혁보다 이 사태를 피할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은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The left also fails to recognise what is in a sense a deeper problem for those desiring revolutionary change, that of the cultural context and content of mass society - the addiction to capitalist-defined “comforts” and a vision of material plenitude that are so destructive ecologically. The result is an incapacity to confront not just the ruling class, but the grid itself - on the land, in society, in the character of each person - of mass technics, mass mobility, mass pseudo-communications, mass energy-use, mass consumption of mass-produced goods. 좌파는 또한 문화적 맥락과 자본주의적으로 정의된 "편리함"에 중독되어있고 생태적으로 매우 파괴적인 자원적 풍부함을 꿈꾸는 대중사회의 컨텐츠의 혁명적 변화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있어 무엇이 심층적인 문제가 되는 것인지 알아차리는 데에 실패했다. 결과는 지배계급 뿐 만 아니라 엄청난 양의 기술과 이동성과 가짜 의사소통, 에너지 소비와 대량의 상품 소비의 틀에 속한 이 땅의, 이 사회의, 모든 개인이 직면한 무기력이다. As Jacques Ellul writes in ‘The Technological System’ (1980), “ It is the technological coherence that now makes up the social coherence ... Technology is in itself not only a means, but a universe of means - in the original sense of Universum: both exclusive and total. “ This universe degrades and colonises the social and natural world, making their dwindling vestiges ever more perilously dependent on the technological environment that has supplanted them. The ecological implications are evident. As Ellul argues, “Technology can become an environment only if the old environment stops being one. But that implies destructuring it to such an extreme that nothing is left of it.” We are obviously reaching that point, as capital begins to pose its ultimate technology, bioengineering and the illusion of total biological control, as the only solution to the ecological crisis it has created. Thus, the important insights that come from a class analysis are incomplete. It won’t be enough to get rid of the rulers who have turned the earth into a company town; a way of life must end and an entirely new, post-industrial culture must also emerge. "현재 사회적 일관성을 만들어내는 것은 기술적 일관성이다. …기술은 하나의 수단을 넘어서 독일어 Universum의 원래 그 뜻 그대로 전용적이면서도 전체적인, 모든 방법의 전체세계 그 자체다."라고 Jacques Ellul가 '기술적 체계(1980)'에서 서술했듯, 이 세계는 점차 자취를 감추는 사회로서의 세계, 자연으로서의 세계를 대체된 기술적 환경에 더 위태롭게 의존하게 만들며 타락시키고 식민화시킨다. 생태적인 영향들이 그 증거다. Ellul가 주장하듯, "기존의 환경이 오직 환경이어야 하는 낡은 개념이 빠지게 되면, 기술은 환경 그 자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존의 세계가 아무것도 남지 않는 극한의 수준으로 파괴되는 것임을 시사한다." 우리는 명백히 그 지점에 도달했다. 자본주의는 궁극적 기술, 생명공학과 완전한 생태적 지배에 대해 자세를 취하듯이, 이것만이 자본주의가 일으킨 생태적 위기의 단 하나의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이런 계층 계급 분석의 깊은 통찰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지구를 기업도시로 만든 지배자들을 없애버린다 하더라도 충분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삶의 방식은 반드시 끝내야하고 전적으로 새롭게 해야 하며, 완전히 새로운 후기 산업 문화도 만들어져야 한다. 우리는 분명 그 지점에 도달했고 자본은 궁극적인 기술, 생명공학과 모든 생물학적 방제의 환상들을 마치 그 자신이 만들어낸 생태적 위기의 유일한 해결책인양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이, 계급분석으로부터 출발한 중요한 혜안들은 미완성적이다. 지구를 기업의 마을로 바꿔버린 지배자들을 없애 버린다 해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 보고, 이러한 삶의 방식은 이젠 끝내야하며 완전히 새로운 산업 이후의 문화들 또한 부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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