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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시민문화 워크숍글 수 603
이런 일이 있어서 죄송합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하는데 후....
일단 혼자서 코멘트하면서 쓴 글입니다.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을 찾는다.
2007년 가을학기에 들어와 그 해 겨울 수료를 할 때, 우리 기수가 내건 수료식 이름은 <환승>이었다. 우리가 하자에 들어와 자기주도적 학습을 통해 새로운 학습의 여정으로 환승했다는 의미에서였다. 수료식 준비를 할 때 자기주도적 학습이 무엇인지 토론을 하기도 했는데, 그 때 우리는 스스로 학습을 찾지만, 그 학습의 내용이 일반학교의 획일화된 교육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그 학습이 무엇인지 그 때는 대답하기 힘들었지만, 나는 ‘자기주도적 학습’이라는 키워드를 계속 갖고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자 밖에서 그 경로를 찾기 힘들 거라는 판단에 나는 주니어과정을 지원했다.
1. 개인의 불평을 넘어 사회적 이슈로 가져가기
주니어가 되어 자연스럽게 경험하게 된 것은 매체 작업이었다. 하자에는 공연, 영상, 글쓰기, 디자인, 글로벌학교라는 작업장이 있었는데, 갓 길찾기를 수료한 주니어는 프리스쿨을 통해 각 작업장을 짧게 체험한 뒤 자신의 작업장을 선택했다. 나는 길찾기 때 리뷰 쓰기와 자서전 쓰기를 통해 글로 나를 치유하는 것을 배웠다. 리뷰 쓰기를 통해 나는 일반학교에서 타인의 인간성을 폄하하는 뒷담화에서 벗어나, 사회적 이슈에 대한 내 생각과 경험을 얘기하는 새로운 이야기 방식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서전을 쓰며 내가 가장 크게 겪은 사건을 정리함으로써 내 과거를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경험을 해보았다. 그 과정은 내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이기도 했으나, 밤비라는 한 명의 사람을 솔직하게 드러내볼 수 있던 중요한 경험이었다. 같은 기수의 아이들은 대부분 자신이 좋아하는 기호에 맞춰 작업장을 선택했기 때문에, 나도 길찾기 과정을 생각한 뒤 자연스럽게 글쓰기 팀에 들어가게 되었다. 글쓰기 팀을 보낸 한 학기를 마치고 내가 질문하게 된 것은 ‘나는 무슨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은가’였다. 웹진 ‘하자로’의 편집국을 맡으며 책임과 의무를 배웠지만, 그와 동시에 나는 ‘이야기 전달자, story teller’라는 역할을 꺼냈다. 단순히 객관적인 사실만 전달하지 않고 내 생각을 함께 전달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주니어 1학기 죽돌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얘기를 했기 때문에 그 기사가 ‘이야기’가 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에세이를 쓰고 그 다음 학기를 준비하며,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그 ‘이야기’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나만의 주제 혹은 화두 없이 이야기를 하는 건 내 이야기가 아니라 어느 사람이라도 얘기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니어 2학기가 되며, 나는 웹진에만 몰두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곤, 평소 관심있게 지켜본 주말영상학교나 디자인이 하고 싶다는 얘기를 꺼냈다. 디자인 스튜디오 202에 들어갔지만, 나는 디자인보다 웹진을 더 하고 싶어했고, 웹진이 계속 지지부진하다는 이유로 디자인 작업을 소홀히 했다. 반면에 주말영상학교는 내가 평소에 갖고 있던 상상이나 생각들을 담는 과정이 즐거웠기 때문에 더 열심히 할 수 있었다. 마지막에 단편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나는 내가 자서전에 쓴 내용을 각색한 시나리오를 써갔다. 그 당시, 한 편의 이야기를 만들 정도로 깊게 생각하고 가장 생생하게 떠오른 기억이 일반학교에서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시나리오 쓰기와 영화 제작 과정을 통해 ‘문제의식’을 깊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자서전을 쓸 때까지는 내가 학교에서 겪은 싸움이 나만의 이야기였고, 때문에 그 이야기가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이 되었지만, 시나리오를 쓸 때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야 했다. 나는 두 명의 상반되는 여학생 캐릭터를 만들어 두 캐릭터 모두에 감정을 이입하는 것과, 감독의 입장으로 화면 밖에서 사건을 제 3자의 시선으로 보는 경험을 했다. 그 경험으로 나는 내가 겪은 사건을 객관적으로, 심지어 화면으로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영화를 다 찍은 후, 나는 내 영화에 내 입장이 없어 감독이 보이지 않는다는 코멘트를 들었다. 그 때 나는 내가 어떤 입장으로 무엇을 얘기할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했다. 내가 꺼낸 얘기는, 학교에 존재하는 위계가 단순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문제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원인이 다른 곳에 존재한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그 때는 몰랐기에 물음표로 남았지만, 나는 내가 일반학교에 다닐 때 불평을 갖고 불만을 토로하던,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가식으로밖에 대할 수 없던 상황이 단순히 내 친구 혹은 패거리의 리더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나는 그 아이들을 완전히 미워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나는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내가 가지는 문제의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문제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개인의 경험에 있는 불만을 감정적으로 가져가지 않고 사회적 맥락 안에서 읽어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때부터 문제의식을 갖고 싶고, 그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story teller가 되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그러면서 나는 사회적 맥락을 읽기 위해선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공부 방법에 어떤 것이 있는지 찾아보기 시작했다. 물음표로 끝난, 학교의 수직적 관계와 그 안에 존재하는 위계의 진짜 원인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알아야 다음 영화를 찍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2. 대화 상대를 찾아 나선 여정
그 때 나는 필통에서 주최하는 작당 MT에 갔다. 작당은 탈학교생, 대안학교생, 일반학교생 등 다양한 청소년들이 모여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나누고, 그 나눔을 통해 기획이나 영화 제작, 밴드 만들기 등의 네트워크를 말 그대로 작당해보는 자리였다. 나는 작당에서 내가 당시 가지고 있던 10대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 범위를 좁혀 학교 안 위계를 상징하는 대표, 소위 말하는 일진을 얘기했다. 갓 20대로 진입한 이삭과 금자가 그 이야기에 함께 참여했고, 작당의 원페이지 기획 프로그램을 통해 <얘. 너. 나>라는 일진들의 자전적 글쓰기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30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스피드하게 기획해보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고민의 경로와 기획 과정이 허술했지만 나는 <얘. 너. 나> 같은 프로젝트를 통해 10대들을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 경험 외에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듣고, 내가 사회적 맥락에서 그들의 경험을 읽는 과정을 하나의 공부 방법으로 가져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10대들에게 기획의 기회를 주고 싶다고 얘기한 연대 청년문화원의 운짱이 우리에게 프로그램 기획을 실제로 해보자는 제안을 했고, 우리는 한 명의 인큐베이터와 세 명의 기획자로 팀을 꾸렸다. 이후 인터뷰를 통해 세 명의 기획팀을 더 받은 뒤, 마포구의 성사중학교 선생님의 추천으로 소개받은 문제아 집단과, 마포 청소년 수련관의 프로그램을 하기로 했던 보호관찰소 아이들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진행을 시작할 때 즈음 나는 휴학을 했다. 그 학기에 하자센터는 창의센터로의 전환을 위해 여러 변화가 있었는데, 작업장학교의 모든 작업장이 3층으로 모이며 우리는 서로 배려하는 방법과, 함께 자신의 생각과 이야기를 공유하는 과정을 많이 갖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혼자서 작업한 경험밖에 없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 기울이는 것보다 내 주제를 얘기하는 것이 더 급했다. 그런 내 모습에 유리가 주변을 둘러보라는 코멘트를 하셨는데, 나는 그 말을 듣기 전까지 내가 주변을 보지 않고 혼자서 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두 학기에 거쳐 소속감을 얘기했는데 어째서 그 코멘트를 받은 건지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 나는 지나친 패배감에 하자로부터 도망을 쳤다. 때문에 <얘. 너. 나>를 할 때 나는 몸도 마음도 꽤 혼란스러웠다. 첫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해야 했다. 어른은 어른인데 그러면서도 친근한 나를 아이들은 ‘밤비언니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속상했다. 내가 미숙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친근한 교생선생님이 되는 건 내가 원한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다음 프로그램을 하게 된 보호관찰소 아이들은 고등학생의 연령대였지만 출석 일수가 매우 적어서 짧은 대화도 감지덕지였다. 처음에는 서로 제대로된 말조차 할 수 없다는 것에 큰 위기감과 좌절을 느꼈다. 하지만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는 내가 10대를 만나고자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정리해볼 수 있었다. 내가 <얘. 너. 나>를 하려고 했던 처음 이유는 서로 경험을 공유하는 것보다 참가자의 경험을 듣는 게 더 중요했다. 나는 공부하기 위해선 10대들이 가진 다양한 문제 상황들을 알아야 깊게 파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만났을 때 한 명, 한 명이 겪는 사건이나 상황들에선 너무 많은 문제들이 뒤섞여 있었고, 그 문제들을 하나하나 분석해내는 건 전문가들이 하는 거지, 내가 하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10대로서 그 아이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얘기해보는 거였는데, 서로 같은 시간동안 한 경험이 달랐기 때문에 동등한 입장을 갖는,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내가 그 대화를 원한 것은 한국 사회에서 ‘공교육’이라는 보편적 조건의 경험을 통해 겪게 된 나의 문제의식을 함께 바꿔보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나는 그 연대를 누구와 함께 할 것인지 질문하게 되었다. 프로젝트가 끝나고 잠깐 쉬며 나는 ‘이상적인 관계를 상상하고 구현한다’는 목표로 하자에 학습 계약서를 제출했다. 내가 <얘. 너. 나>에서 만난 청소년들은 나와 같은 시간에 같은 경험을 공유하지 않았지만, 하자 죽돌들은 같은 모토 안에 같은 경험을 하며 서로의 고민을 공유하는 하나의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문화 안에서 나는 ‘동료 작업자’가 문제의식이 통하고, 마음도 통할 수 있는 사람이길 바란다는 하나의 ‘이상적 관계’로 자리 잡았다. 나는 그 이상적 관계를 하자에서 맺고 싶었다. 그 관계를 모든 사람과 맺겠다는 과도한 욕심도 갖고 있었다. 3. 대화를 통한 재창조는 입장을 도모하는 과정이다.
하자에 다시 돌아와 나는 영상팀이 되었다. 원래는 3학기 때 졸업 작품으로 영화를 찍고 수료할 계획이었지만, <얘. 너. 나>를 하며 현장에서 사회를 읽겠다는 결심으로 공부를 한 뒤, 좀 더 설득력 있고 정확한 입장을 갖고 영화를 찍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얘. 너. 나>를 하면서, 내가 그 아이들의 상황을 보고 문제를 읽어낸 뒤 사회의 맥락 안에서 다시 생각하기엔 두 달 남짓 되는 시간만으론 부족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얘. 너. 나> 참가자들의 삶 외에 내 삶까지 복합적으로 생각하면 공부할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얘. 너. 나>를 다시 해도 내가 원하는 만큼 준비된 상태로 영화를 찍는 건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하자로 돌아와 지금 내 위치에서 어떤 작업을 할 수 있을 것인지를 먼저 고민하는 게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 때 하자는 하자 시즌1을 마무리하는 단계였고, 나도 8개월간의 긴 학기로 나의 하자에서의 학습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나는 가을학기에 시민문화 워크숍 ‘세계를 구한 시인들’에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각각의 위치에서 세계를 구한다는 게 무엇인지를 얘기한 시인들의 이야기에서 나는 사회에 기여하는 것에 대해 질문하게 되었다. 나의 내면을 구하는 것이 곧 세계를 구하는 것이라는 조원규 시인의 말에, 나는 페미니즘에서 공부한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다시 한 번 상기했고, 더불어 내가 문제의식을 갖기만 하지 않고 말하려고 했던 그 행동이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홍성태 시인의 ‘지금 청(소)년들은 88만원 세대라는 말에 기죽지 않고 자신의 세대에 스스로 이름을 붙여야 한다’는 말을 통해 세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었다. 나는 우리 세대가 무기력하게 수동적으로 삶을 살아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 주체로서 살아가는, 그리고 사회에 기여하는 세대이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한 세대가 모든 청소년이었으면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기여와 다른 방향의 기여가 있을 수도 있고, 또 어쩌면 기여보다 다른 것을 원하는 청소년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어디까지 ‘우리 세대’라고 표현할 것인지 질문하게 되었다. 이후 버마와 태국의 국경지역 Maesot과 Maela camp로의 현장학습을 가기 전, 나는 그곳 청소년들이 자신의 세대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질문하겠다고 했다. 내가 사전 조사를 통해 본 Maesot 청소년들의 모습은, 자발적으로 국경을 넘어 버마 군사정권 SPDC에 항의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외치는 사람들이었다. 실제로 처음 도착한 Maesot에서 내 기대와 다르게 정치에 관심이 있는 아이는 생각 외로 적었다. Maesot에서 나고 자란 아이도 있었고, 잠자다 갑자기 국경을 넘게 된 아이도 있었다. 기대한 것과 다른 모습에 나는 당황했고, 그건 다른 죽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밤마다 숙소에서 리뷰를 할 때 우리는 우리가 그곳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이길 원하는지, 어떤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인지 고민했다. Maesot에서 우리는 CDC(Children Development Center)의 SAT(Student Affair Team)와 함께 13개의 NGO 단체들을 방문했다. 그 중 Knowlege Zone에 갔을 때 환영 인사는 ‘행운아들, 환영합니다!’였다. 그 말 자체에서 나는 큰 부담감을 느꼈다. 내 상황에서 나는 나를 행운아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버마 사람들에게 나는 행운아였던 것이다. SAT 학생들과 담당 선생님도 우리를 ‘기회opportunity를 가진 사람’이라고 부르며 “We have nothing.”이라는 말을 했다. 심지어 워크숍에 참여한 아이는 우리를 선생님teacher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얘. 너. 나> 때 겪은, 역할에 대한 딜레마를 다시 경험하게 되었다. 두 사람, 혹은 두 학교, 혹은 두 단의 만남에서 ‘기회의 우위’가 결정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기회의 우위가 결정되는 상황 속에서 나는 BWU(Burme Women's Union)과의 만남을 통해 대화의 가능성을 볼 수 있었다. 한 학기동안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나는 ‘여성주의로 다시 본 평등’이라는 주제로 연구주제를 발표했다. 그 때 <페미니즘의 도전>이라는 책을 통해 나는 한국 사회에 자리 잡은 여성의 불평등을 사회적 맥락에서 다시 들여다보는 과정을 가졌다. 그 때 내가 공부한 범위 안에서 BWU가 주장한 단체의 목적과 활동들은 나를 충분히 ‘동하게’ 했고, 나는 그 단체에서 일하고 싶다고 얘기했다. 여성주의의 맥락 안에서 같은 입장을 공유할 수 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버마의 여성들과 나는 같은 여성으로 성평등을 얘기할 수 있다는 동등한 입장을 공유한 것이다. 때문에 내가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들과 ‘대화를 통한 재창조’가 가능할 것이라는 상상과 기대에 의한 것이었다. 대화를 통한 재창조는 단순히 개인과 개인이 만나 서로 얘기를 하며 ‘동하는 것’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그 이후에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질문하는 과정이다. 나는 BWU를 도와 여성의 불평등에 대해 말하는 걸 원했기 때문에 그곳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런 생각에서, 나는 ‘누구와 어디서 일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었다. 내가 함께 이야기를 하고, 힘을 합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나서야겠다는 생각과, 모두와 함께 대화하겠다고 한 내 주장 사이에서 괴리를 느꼈기 때문이다.
4. ‘모두’와 함께 대화할 수는 없다.
‘누구와 어디서 일할 것인가’는 ‘누구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얻게 된 질문이다. ‘누구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는 내가 하자에서 가장 크게 가져간 고민이다. 19살로 접어들며 나는 ‘성인이 되기 싫다’고 말하고, ‘영원히 10대로 살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청소년 보호법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보호’라는 말이 주는 안도감과, 하자의 약속들로 하여금 나를 한 명의 사람으로 존중받을 수 있게 해주는 분위기가 성인이 되는 것을 거부하게 했다. 시기적으로, 성인이 되면 나는 하자를 수료하게 되고, 하자 밖을 나가면 어떤 차별과 불평등을 겪게 될 것인지 두렵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는 하자 밖을 나가기 이전에 내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누구로서 살아갈 것인지 대답을 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차별이라는 거대한 두려움에 무기력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질문은 한 번에 끝낼 수 있는 질문이 아니라, 평생을 가져갈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어떤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대상이 있다는 말이다. 여태까지 나는 ‘우리 세대’나 ‘위기 청소년’, ‘여성’이라는 손에 잡히지 않는 거대한 상대를 마주하고 있었다. 때문에 Maesot에서 어떤 질문을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지점에서 Aungaung이나 파치가 아닌, 버마 국경을 넘은 CDC 학생으로만 생각한 것이다. 모두와 대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국과 버마가 다른 상황이라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힘들지만, 한국의 사람들도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힘들다. 각자의 상황이 모두 다 다르고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모두와 같은 입장을 공유할 수 없고, 모두에게 같은 질문을 해서 많은 대답을 얻어내는 것은 힘들다. 그러므로 하자를 수료한 뒤 나는 ‘모두’라는 손에 잡히지 않는 상대를 만나는 게 아니라, 내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대화를 통해 재창조의 과정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나서고 싶다. 그렇다고 그 과정에서 내가 나와 같은 상황과 같은 입장을 가진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사람과 나의 상황이 다르다는 차이에 가로막혀 대화를 포기하지 않고,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와 입장을 찾는 과정을 갖고 싶다. 그렇기에 나는 하자를 나가서도 일과 학습을 함께 하고 싶다. 편견이나 불평등의 두려움에 짓눌려 내가 다시 하자에서 한 모든 것을 버리고 순응하며 살고 싶지 않다. 나에게 일과 학습은 사회에 기여하는 과정이며, 대화를 통해 재창조하는 과정이다. 나의 경험으로부터 시작한 문제의식은 지금 가진 것에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확장해나갈 것이다. 나는 내가 발을 딛는 곳이 학교이길 바란다. 학교는 사회를 반영하고 그에 맞는 학습을 제시하는 공간이며, 스스로 주체를 갖고 주도적으로 일할 수 있는 배움의 공간이다. 내가 앞으로 가게 될 여정이 만드는 지도는 나에게 하나의 학교이다. 하자는 나에게 그런 학교를 상상할 수 있게 도와준 공간이다. 나의 첫 여정이자, 첫 발자국을 찍은 곳은 하자이다. 다음 발자국을 찍는 곳에 나는 하자에서 가져온 내 발자국을 함께 찍고 싶다. 그리고 그 다음 여정에도 나는 내가 가져온 수많은 발자국들을 잊거나 지우지 않고 이어나갈 것이다. ![]()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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