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안의 규율을 넘어 삶의 유연성을 찾기 

나의 아버지는 늘 나의 질문에 정답을 알려주시지 않으시고 내가 찾게끔 알려주었다. 누군가 알려주는 정답을 따라가지 않고 자신의 대답을 내리기까지의 과정을 겪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알려준 아버지는 어쩌면 내가 아는 나보다 나를 더 많이 알고 있을지 모른다. 

나는 어릴 적부터 ‘탈무드’를 재미있게 봤는데, 그 책 역시 아버지가 나의 주변에 놓아둔 것이다. 탈무드에서 알려준 유대인의 속담 중에 “물고기를 주는 것 보다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라”라는 말을 하자에 와서도 자주 얘기하게 된다. 그 이유는 하자에서 ‘지속가능한 것’을 이야기하면서 잠깐의 해결보다 지속가능한 해결방법을 얻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자에 3년 가까이 다니고 수료하는 지금 이 시점에서 무엇을 가지고 나가서 지속해 나갈 것인지 감히 이야기해본다.

-대안학교에서 다시 대안학교로

중학과정을 대안학교에서 졸업하니 다시 일반학교로 진학하고 싶지는 않았다. 일반학교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 나에게 있어 엄청난 양이 요구되는 지식공부는 더욱이 하기 싫었다. 대학교를 준비하는 3년간의 준비를 할 이유도 없었지만 다른 계획도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어떤 소속감이 없어진다는 것은 공동체를 중시하던 학교에서 나온 나에게는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이었다. 졸업 후 여러 대안학교를 찾으러 다녔다. 학교선배들이 간 대안학교 리스트를 펼쳐 놓고 수소문을 통한 결과 하자작업장학교가 나에게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한 정보는 아니었으나, 그곳에는 밴드음악을 하는 팀이 있다고 들었고 그곳에는 아직도 나의 중학교 선배들이 판을 벌여놓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라도 그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특이한 공간과 분위기. 외부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상상이 나를 휘감았다.

"제 이름은 Move로 정할게요.”

잠깐 이름 짓기를 보류하겠다고 말했다가 정말로 별명이 ‘보류’가 될 뻔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스스로에게 ‘목적 없이, 막연히 있는 것보다는 행동이 더 필요하다’고 자신에게 상기시키며 단어가 또 하나의 이름으로 탈바꿈 되는 특별한 경험을 시작으로 주니어까지 직진했다.

-내 자리를 찾아서 앉아 숨을 돌리기까지

신입단원 오디션에 밝힌 포부는 “기타를 전공할 생각이지만, 촌닭들과 기타를 별개로 가져가겠다. 브라질음악만이 친구들과 할 수 있는 유일한 음악이라는 점에도 불만을 갖지 않겠다. 기타연습은 밤에라도 나 혼자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음악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싶지 않다. 학교에 다니는 낮 시간 동안 브라질음악에, 촌닭들에 최선을 다 하면 그만이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다.”였다. 그렇다. ‘잘해낼 수 있겠느냐?’ 라는 질문에도 ‘문제 될 일은 없다.’라고 당찬 포부를 밝히며 촌닭들과의 면담시간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방구석 기타리스트에서 벗어나 낯선 음악을 하는 그룹의 일원이 되어 보는 것. 개인의 활동에서 팀으로 움직이는 연습이 필요했기 때문에 나에겐 개인의 테크닉을 높이는 시간보다는 팀 작업을 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더 의미 있었다. 그러나 2년 반이 지난 지금 내가 꺼낸 말을 돌이켜 보았을 때 그 속에는 두 가지의 다른 생각들이 담겨있다.

첫째로 나는 내가 기타를 칠 일이 없으리라고 단정했다. 나는 일렉기타를 연주하면서 다른 장르들을 즐겨왔기 때문이었다. 현재 우리의 대표곡 ‘Tristeza’는 기타반주와 타악기로 이루어지지만 ‘촌닭들’의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었을 당시에 ‘Tristeza’조차 타악기를 위주로 구성된 곡이었다. 기존 멤버들에게 타악기가 아닌 다른 악기를 넣자는 제안을 하기에는 나의 기氣가 부족했다. 촌닭들 내부의 트레이닝 과정이 프로젝트 개념의 워크숍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인지 선배와 후배 혹은 강사와 학생과 같은 개념으로 나뉘었다. 나는 선배들이 정해놓은 기존의 레퍼토리에 내가 참여할 틈은 없다는 생각에 고민이 증폭되면서 속으로 앓고 있었다.

둘째로 “브라질음악만이 친구들과 할 수 있는 유일한 음악이라는 점에도 불만을 갖지 않겠다.”는 것은 은근슬쩍 꺼낸 나의 본심이었다. 음악만이 우리를 연결해주는 고리였다. 그것 외에는 가끔 즐거운 이야깃거리를 꺼낼 뿐 그 이상의 관계는 없었다. 그렇다 보니 어쩐지 내 주변에는 정말로 마음 통하는 친구도 없고 나는 혼자였다. 혼자인 것이 나로서는 편하지만 드문드문 찾아오는 외롭고 쓸쓸한 감정은 단숨에 나를 먹어 삼켰고 나는 네거티브의 결정체가 되었다. 음악만 주장하고 있다 보니 영상, 디자인, 글로벌학교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매 학기 쇼하자를 할 때 결과만 볼 수 있었고 그 과정을 알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단편 영화의 주인공으로 출연을 하게 되고, 학기를 열 때 진행되는 ‘무한도전’때는 비록 떠밀기 식이었지만 가상의 한 나라에 대통령도 되어보고 연기자도 되어보기까지 했다. 이건 나에게 큰 도전이었다. 기타로만 가능했던 나의 개성과 생각과 행동을 통한 표현의 능력이 드러나면서 팀 안에서도, 하자작업장학교 안에서도 발휘되었다. 흐를수록 자연스럽게 하자작업장학교 안에서의 내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인생의 전부를 음악으로 뒤덮기엔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이룰 수 있는 연결고리가 터무니없이 적었음을 깨달았다. 이전엔 모든 것에 대해서 나에게 적당한 범위를 정해놓고 행동했기 때문에 다양한 경험도 기쁨도, 힘듦도, 욕심도 없었다. 이제는 그 범위를 차근차근 넓혀가고 있는 중이다. 분명 하나를 깊이 들어가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다양한 경험에 충분히 즐거워할 수 있고 힘을 들이는 과정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알았다.

-내 안의 시민정체성을 발견하기

시민문화워크숍에는 우리나라뿐아니라 다른 나라의 사회시스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면서 가장 많이 나왔던 이야기를 꼽자면 스펙사회, 청소년, 10대, 여성, 환경 등이 있다. 여러 가지 인식하지 못 했던 것들이 한꺼번에 치고 올라오고 “덕분에 여러분은 이전의 어떤 세대보다 비교적 풍요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풍요의 댓가로 발생하고 있는 생태계의, 환경 파괴로부터의 위협을 해결하고 책임을 져야하는 것도 바로 여러분 세대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든 문제는 아니지만 여러분이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時人 홍성태 선생님의 이 말씀도 나에게 결정타를 날리신 것이었다. 외면할 수 없는 “나의 일”이란 것을 구체적으로 가리키고 계셨다.

나는 기후변화나 사회갈등의 문제가 심각해져 나의 삶의 영역을 흔들 때, 혼란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로 무기력에 시달리고 싶지 않다.

시민워크숍 시간에 나는 스스로를 음악가이자 한명의 시민이라고 말을 했다. 아직도 음악인이라고 말하기에도, 시민이라고 말하기에도 자신을 설명하기 부족하지만 음악에 매료되어 시민됨을 잊지 아니하고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읽고 그 속에서 존재하는 한명의 시민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하고 참여를 할 수 있고 그것을 매체로 널리 알릴 수 있는 힘을 가지려 한다. 지금의 사회에 맞춰서 내가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사회를 꿈꾸면서 자신의 존재를 망각시키지 않고 하고 싶은 일과 기꺼이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싶다.

-마른 펌프질을 넘어서기

시민문화워크숍의 여파로 나는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서 질문하게 되었고, 내 자신에게 무심했던 시간이 밉기만 했다. 그러면서 나는 점점 만족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만약 당장의 조그만 기쁨에 만족을 한다면 그 이상의 진전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스스로를 보채면서 진정 하기가 어려웠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런 나를 주변사람들이 ‘고지식하다, 긴장되어 있다, 급하다.’라는 말을 했다. 그러고 보니 나의 일상에서 나의 즐거움, 음악인으로서 보장받아야하는 최소한의 라이프 서클도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나도 나 자신을 느리다고 생각하는데 내 주변 사람들은 왜 나보다 더 느리지?’라고 생각하면서 모든 프로젝트에 함께 참여하면서 홀로 열심히 했다. 그래서 나는 친구가 없음에 외로웠고 그럼에도 나는 친구들을 밀어내고 있었던 것 같다.

외롭게 독주하는 도중에 기무사(국군기무사령부) 전시회를 가게 되었다. 그때 나는 디자인과 영상으로 읽는,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나의 주변에 영상과 디자인 팀이 있었지만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매체를 읽는 것에 눈을 떴다. 작가가 작품에 부여한 의도를 파악하고 해석을 읽었을 때 알 수 없는 오묘한 감정이 피어올랐고 전혀 그에 어긋나는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들었을 때 ‘내가 무엇에 반응을 했기에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었을까?’라고 질문을 되묻기도 했다. 포괄적인 범위로 ‘예술’을 감지했다고 얘기할 수 있으나 정확하게 예술이 진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전대미문이다. 누구의 정의에 따라서 단어의 뜻은 변화할 수 있다.

공연팀은 종종 ‘너희는 의리가 없다’라는 말을 들었다. 특히 그 이야기는 촌닭들에 있을 때부터 많이 들어왔는데 우리들의 공연이 있으면 누구나 꼭 초대를 했지만 다른 팀들의 쇼하자나 상영회, 전시회가 있을 때는 뒤로 내빼는 매우 이기적인 행동을 했었기 때문이다. 기무사를 다녀온 후 내가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매체에 대해서 깊게 들어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나 그것과 상관없이 다른 것에도 관심을 보이는 것도 역시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In my world에 매몰되어 있다면 그 이후에도 너무나도 많은 것을 놓쳤을 것이다.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삶의 다른 많은 영역에 대해서 영감을 얻을 수 있어야하고 사회를 읽을 수 있는 시민이라면 나를 둘러싼 많은 것들을 관찰할 줄 알아야한다. 이것은 동료작업자를 이야기하는 하자작업장학교에서는 더없이 중요한 사실이었다. 자신의 시야를 넓혀가는 연습을 시작한 것은 불과 1년도 안되었지만 그 사이에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나의 주변에 어떤 친구들이 있었는지를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친구는 누군가 나타나서 바로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친구를 어떻게 만드는가, 그 친구는 어떠한가, 그러면 그 친구가 보는 나는 어떠한지에 대해서 생각해야한다.

언젠가 한의원에 갔을 때, 나는 내가 소음인小陰人인 것을 알게 되었다. 소음인은 신장보다 육체가 더 빨리 커서 소화가 잘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고 한다. 단시간에 많은 양의 무언가를 보고 흡수하고 그것들을 나의 것으로 가져가려고 했으나 그 양이 방대하여 내가 충분히 소화를 시키지 않은 상태로 혼자서 급하게 달려왔던 것 같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새싹인 것은 분명하지만, 자신의 소화량을 초과하는 물을 준다면 나는 빨리 시들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성격은 펌프질을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다만 지속적으로 스스로에게 펌프질을 계속 하고 싶다면 지금은 그 속도를 조절해야할 시기이다.

-柴人

기무사를 관람하면서 열린작업장의 컨테이너 어페어를 지도했던 레옹을 마나게 되었는데, 레옹은 작업장학교가 정선에서 진행될 <공공미술프로젝트感감+動동>에 참여해보라고 초대했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 하자작업장학교 전체가 강원도 정선으로 떠나 1주일동안 이동학습을 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1분도 안 되는 거리에서 서로가 개인의 공간과 시간을 조금 양보하면서 생활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의 대상을 보는 각자의 시선이 어떻게 다른지, 같은 부분은 무엇인지 1주일간의 현장학습기간은 기회였다. 그래서 나는 죽(판)돌과 어떤 얘기를 할지 기대가 많이 되었다.

아차, 나는 집에 사진기를 두고 왔다. 다행히 비상용으로 마련해둔 1회용 카메라를 받을 수 있었으나 디지털카메라에 익숙한 나로서는 촬영에 집중하는 것보다 이것의 인화비가 얼마나 나올지에 대해 더 걱정했다. 사진에 대한 흥미의 싹마저 잘라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좋아 보이고 비싸 보이는 전문가용 디지털카메라를 맡아 재미삼아 몇 번 찍어보았는데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생각보다 느낌이 괜찮았다. 내가 보는 그대로를 기계에 담을 수 있었고 내 의지대로 영향을 줄 수 있었다. 그때의 기쁨은 주체할 수 없었고 나를 더 활기차게 만들었다. 사진에 대한 기본기들을 갖춘 죽돌들이 몇 몇 있어서 나는 그들에게 기본부터 배웠고 나는 정선에서 서울로 돌아가기 전 까지 내내 카메라를 내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단숨에 초보사진가가 된 나는 자신의 새로운 매체에 대해서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예전부터 누군가 나를 함부로 촬영하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했는데 내가 그런 행동을 똑같이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진을 촬영한다는 것은 상대를 이루고 있는 그 주변들까지 고려해야했다. 그렇게 들여다 보게 된 정선은 예술마을인지, 예술마을이 될 수 있는 가치나 상황이 적합한지 나 자신이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신경이 쓰였던 것은 그 마을이 부딪힌 현실인데, 의료혜택문제와 지역개발문제 때문에 문제가 계속 이야기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정선을 예술마을으로 추진하기에는 그를 둘러싼 많은 사건들이 들끓고 있었다. 나는 이 사이에서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옳은 것인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전례 없던 생각들이 나타나게 되면서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러는 와중 5일장이고 하니 하자작업장학교 사람들 모두 다 같이 시장으로 놀러갔는데 공연팀은 헐레벌떡 시장에서 즐겁게 놀 생각으로 악기를 가져갔다. 이미 시장 안에는 판이 벌어져있었고, 우리가 들어가서 더욱 흥을 복돋우고 즐겁게 할 만한 자리였다. 우리는 급하게 레퍼토리와 연주자들을 구성하면서, 조금 더 좋은 Quality를 만들기 위해서 신입단원들은 공연을 배제한 채로 공연을 하자는 얘기가 나오게 됐다. 즐겁게 놀자고 시작한 일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충격과 실망감이 컸고, 결과적으로 공연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시장에서 있었던 일은 오후에 정식으로 진행됐었어야 했던 공연 공연에까지 영향을 미치기에 이르렀다. 모두가 오전의 사건에 계속 신경을 쓰고, Sign은 맞지 않았고, 연주는 즐겁지 않았다.

연주 실력만이 공연의 품질을 높여주는가? 아니다. 애초에 우리는 연주기술에만 연연하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었고 세상의 수많은 사건과 사고의 슬픔을 넘어서 축제를 벌이자는 이름으로 'Festeza'를 만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슬픔에도 넘지 못하며, 타인의 슬픔에도 넘어서지 못한다. 연주를 하기에 앞서 팀의 기본바탕도 충분치 않았는데 어떤 공연의 Quality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불가능했다. 우리는 팀으로서 이해와 교감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팀으로서의 퀼리티를 보장받지 못한다. 어느 특정개인이 무엇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그때 내겐 기본의 수준이 대체 무엇이었을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 기본수준을 조금씩 넓혀가는 도중이었고,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의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중심이 흔들리는 느낌을 받으며 엎어지기에 이르렀다. 애초에 이 심각함의 시작은 공연 전부터 있었다. 정선의 주민들은 나를 내가 사진기를 들고 있으니 사진가냐고 물었고, 악기를 들고 있으니 음악가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 앞에 무엇을 하는 사진가고 음악가인지 그쪽에서 물어오지도 않았고, 물어도 나한테는 대답할 답도 없었다. 그저 '외부인‘으로 있으면서 마을에서 지내는 동안 나의 위치를 정하지 못한 채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기본과 중심 없이 달리기만 했다는 생각에 가슴 깊숙이 묻어놓고 참았던 감정이 폭발하면서 정신적 육체적 무기력감에 져버리고 말았다.

공연팀 Festeza는 이 경험을 ‘사북사태’라고 일컫는다.

나는 그 무기력감을 넘기 위해서 스스로에 대한 펌프질은 멈출 수 없으며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만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다. 스스로에 대한 보다 더 진보적인 고민이 내안의 무기력을 치유할 단 한 가지 길 인 것만 같다. 앞으로 내가 잘 해나가야 할 것들과 집중적으로 파고들어야 할 것들에 대한 기본의 깊이를 갖고 싶다.

-Change Maker

홍콩에서 열린 MaD(Make a Difference) 'Change Maker‘가 화두였다. 세계 속 시민들은 우리랑 크게 다르지 않은 고민들을 하고 있었다. 자신은 어떤 사람인지, 매체를 통하여 무엇에 변화를 일으키려 하는 사람인지, 미래에 대해서 어떻게 고민을 하고 있는지. 그것이 자신의 직업이 있어도 하는 고민들이니 말이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만큼 힘을 갖고 있는지 잘 아는 것이라 생각했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으나, 대다수가 이야기를 할 때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그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준에 의하여 등장한 하나의 성공사례거나, 실패한 사례 등 여러 가지 형태로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늘 이야기의 끝에는 ‘책임감을 가져라, 이제는 나와 당신이 변화를 일으킬 때다.’라고 말을 했다.

지난 마지막학기를 시작하며 ‘내 안에 발생된 변화의 과정을 그 누구와 함께 나누고 싶다’라고 나의 입장을 밝혔고 나는 그 주변에 변화를 전달하는 ‘배달원’이 되기를 약속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바라는 환경, 사람들, 문화 등 변화를 일으키려 노력했으나 그것이 혼자만의 의지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인이 추구하는 것을 둘러싼 많은 사람들의 이견과 서로 잘 맞추어 가는 연습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MaD에서 얘기가 나온 것이 나에게 더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을 하면서 주변에도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을 같이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면서 점차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범위를 넓히는 것이 변화를 지속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사실 나는 변화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사람이다. 나는 내 안의 변화가 일어나면 나 자신에게도 잘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적응이 되기도 전에 다시 또 변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리고 더군다나 한국 사회에서 누가 어떤 일을 벌이는지도 잘 모르는 상태로 무언가 빨리 변화가 드러나는 상황인데, 어떤 필요로 인해서 변화를 일으키려 하는가? 무엇에 대한 변화인가? 난 그 이유에 대한 타당한 대답이 없는 채로 질서 없는 변화들이 삽시간에 일어난다면 인식하지 못했던 문제들까지 함께 일어날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섣불리 시도하는 변화는 어쩌면 책임지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MaD에서 Change Maker를 힘 있게 주장하는 것은 의미 있는 행동이긴 하나 누구나 잘 알듯 변화를 일으키기란 보통 쉬운 일이 아니란 것쯤은 알 것이다. MaD가 많은 이들에게 큰 자극을 준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각자가 ‘변화’의 대한 의미에 대해서 자신만의 숙성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내게는 꿈이 필요하다

외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이번 여행은 정선의 연장선’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개개인의 입장은 다르겠으나 한명의 柴人으로서, 어느 한 자락아래에서 자라고 누구도 돌보지 않은, 알려지지 않은 사람의 입장으로 떠난다는 말이었던 것 같다. 나는 한국의 땅에서만 여행을 해왔으며 심지어 제주도도 가본 적 없다. 타지로 여행을 간다는 것이 무척 설레는 일이지만 한편으로 마음 걸리는 부분도 적잖게 차지하고 있었다. 어떤 위험도 감수를 해야 할 것이고 내가 만나는 외국인들도 나를 외국인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런 것처럼 무척이나 낯설 것이고 언어문제도 제한도 있을 것이며 내가 늘 보장받아왔던 생활과 문화들과 일상들은 잠시 양보를 해야 할 것이고 그렇다고 완벽히 손님으로 가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가지 입장을 섬세하게 알아야 했다. 무슨 연유인지, 정선의 연장선처럼 나는 이번 여행을 시작하는 날도 지각했다.

홍콩에 도착했었을 때 ‘어떻게 이렇게 습하고 공기가 안 좋을 수 있지?’라며 툴툴되었다. 실로 공기로부터 오는 끈적끈적함과 얼굴에 소복이 쌓일 것만 같은 느낌은 무척 찜찜했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 환경은 홍콩이 억지로 만들어낸 것도 아니라고 생각을 해야 한다. 사람들이 많으니 물품수요는 늘 수밖에 없다. 그에 상응하는 환경적인 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을 인지한 것 같은데 그것에 대해서 곧바로 불만을 토로하는 것이 나로썬 적절치 못했던 행동이었던 것 같다. 과연 눈앞의 펼쳐진 현실을 뛰어 넘어 더 많은 것을 읽을 수 있을까? 내가 타인의 삶과 문화에 대해서 공감하고 이해하며 더 나아가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지 지레 근심이 가득했다.

치앙마이 공항에 도착하고 내릴 때는 많은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첫째로 이 나라에는 장비시설이 좋지 않아서 직접 물품을 확인해야했고, 둘째로는 나가는 문으로는 다시 들어올 수 없다는 점, 셋째로는 경찰들이 있었다. 사실 남의 짐 가방을 들춰내는 것은 상당히 무례한 행동이지만 삼엄한 경계 속에서는 감수해야할 문제였다. 우리는 외국인이고, 정치적 움직임을 감시하는 입장에서 우리가 가져간 옷 보따리나 책상자들은 요주의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나가는 문 따로, 들어오는 문 따로 있는 것은 조금 어리둥절했다. 문이 내 눈앞에 턱하니 자리 잡고 있는데 내가 30Cm도 안 되는 경계를 넘어갈 수 없다니, 믿기진 않지만 알 수 없는 벽이 형성되어있는 것 같았다.

10개가 넘는 아동보호단체, 인권보호단체, 구호단체, 여성단체 등 많은 단체를 만나며 버마사람들의 삶의 조건이 얼마만큼 열악한지 짐작할 수가 있었다. 정말로 숨 막히는 현실이었고 그 때문에 질문을 받게되면 상당히 난감했다. 한국의 경제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잘 사는지, 어떤 조건에 열악한 것인지 이야기를 하고 한국의 일반학교에서 왜 탈학교를 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이 사람들한테 그런 설명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일반화된 시스템에 견딜 수 없어 나왔다고 말을 한다면 이 사람들은 대체 어느 학교를 가야할까? 일반학교도 등교를 못하는 처지에 놓여있는 것을 아는데도 말을 한다면 내가 너무 배부른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가지 상황이 너무나 다른지라 조건적 상황을 놓고 보았을 때 이들과 우리의 고민을 나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메솟을 떠나기 전까지 서로의 꿈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이야기를 했다.

CDC(Children Development Center)의 한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1. ‘너는 무슨 직업을 갖고 싶니?’
그러자 ‘나는 기계를 다루는 엔지니어가 되고 싶어. 돈도 잘 벌고, 우리 마을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 라고 대답했다.

2. ‘너는 무슨 꿈을 갖고 있니?’
그러자 ‘나는 대통령이 되고 싶어.’ 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여기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꿈과 직업이 분리되는 순간을 봐야만 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왜 꿈과 직업을 분리해서 상상하는데?’라고 묻는다면 상대도, 나도 공황상태에 빠질 것이다. 나는 꿈과 직업사이에서 함정에 빠졌다. 중학교 1학년 때 우연찮게 잡았던 기타가 손에 잘 맞아 단숨에 장래에 염두를 두어왔던 나는 포괄적으로 ‘음악’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나의 연주가 어디선가 필요하겠지’ 라는 생각으로 벌써 미래가 보장된 듯 마냥 그대로 믿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곳을 나가고도 음악아카데미에 다니고 수료하여 실기로 대학교를 갈 것이고 후에는 학원선생님으로 하게 되면 음악계는 그 이후로 진출하면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기타를 설명하기 이전에 학원선생님이 되어 먹고살리라는 전제를 펴놓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하고 싶은 일이 직업화가 되어버리는 결정타를 맞았다. 그렇다면 나는 먹고살려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건가? 이건 아니기를 바랐으나 나는 장래의 직업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음악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열악한 상황을 상상하면서 나는 미리 내 자리를 생각해 두고 나중에 찾아서 들어갈 허울 좋은 궁리를 미리 해놓으려는 것이 아닐까?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직업이 되어버린다면 근 5년간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하여 나의 매체를 쥔 것인가? 그 의문을 품은채로 여행은 계속 진행이 되었다.

LMTC(Leadership Management Training Center)는 난민캠프 안에 있는 대학교이다. 우리는 그 학교를 들어가기까지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사진이라도 촬영하다가는 적이 되어버리는 순간이었다. 무사히 안으로 들어왔으나 놀라운 건 그 안에는 내가 어릴 적부터 갔던 계절마다 열리는 캠프와 별반 차이 없는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문짝 없는 세면실과 대나무로 만들어진 기숙사, 휑하게 뚫린 교실 등 의외로 재밌는 추억들을 떠올리게 했지만 변함없는 사실은 이곳은 난민캠프라는 것이었다. 국경을 넘고 고향을 쫓겨나거나 떠나온, 그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은 사람들이다.

진짜로 기가 찰 노릇이었다. 우리는 출국 전에 ‘난민’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를 했었는데 나는 ‘어느 사이트에 가입하려고 할 때 등록되지 않은 주민등록번호라고 경고메세지가 뜨는 것을 보고 기가 찼다. 내가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데 나는 한국인이 아니라고 매몰차게 대하니 말이다.’ 라는 말을 했다. 이들이 난민이라는 입장과 존재자체가 문제로 구분되어 ID카드도 없어서 구역 외부로는 더 이상 나올 수 없으니 말이다. 눈앞에 이렇게 ‘알고 보면 좋은 사람’들이 눈앞에 존재하는데 ID카드가 모든 것을 대변하는가? 나는 당황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너는 자유롭다, 넌 매우 행복해 보인다.’라고 얘기를 들을 때마다 불편했다. 난민들은 제한된 구역 내에서 발을 떼어놓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으며 덧붙여 이들은 비행기표도 살 수 없었고, 심지어 식량도 부족할 뿐 더러 근로조건, 생활조건도 충분하지 못하다. 그러나 지금의 나도 점점 독립을 염두에 두어야 할 시기에 이르렀고 내가 속한 가족공동체를 벗어나서 어떤 자유를 누릴 수 있을지 불안하기만 하다. 나는 무엇에 자유로운가? 나 역시 경제적조건도 충분치 못하고 일자리도 쉽게 구할 수 없다. 요즘엔 행복보다는 오히려 세상에 대한 걱정과 근심과 고민에 빠져들면서 무기력해질까봐 경계를 더욱 삼엄하게하고 있을 뿐이지. 더 나쁜 조건의 난민들을 보면서 그에 비해서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Festeza의 모토를 잊을 수 없었다. 그런 조건적 상황의 슬픔을 뛰어넘어 노래를 부르는 것이 내가할 수 있는 최소한의 Activity였고 공감을 하다못해 슬픔에 먹혀 버릴까봐 스스로의 Image Making을 해야 했다. 늘 즐겁고, 비록 언어가 원활히 통하지 않아도 재미있게 할 수 있는 능력, 그들의 목소리를 더 크게 이끌어내기 위해서 기꺼이 함께 노래를 불렀다. 물론 ‘Country Road’를 함께 부르면서 자신의 ‘고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나의 기억 속 구석 한편에 잊었던 경험이 드러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부모님은 어렸을 적 이혼하셨고, 5살 때 살았던 농장은 이제는 폐허가 되어있고,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고향이 있어도, 없어도 돌아갈 수 없는 이들처럼 나도 나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런데 다시 고향을 그리는 노래를 불렀다. 감정을 담은 노래라는 것은 이런 것일까? 노래의 내용과 멜로디가 우리를 공감하게 만들고 슬픔을 넘어 노래를 이것이 어쩌면 우리의 팀의 진정한 뜻이 현실로 드러나 처음으로 하나의 작업으로 이룬 것이라 생각한다.

실현시키고 싶은 꿈이나 이상적인 바람이 생기지 않는 이유는 변화에 대한 나의 태도에 기인한다. 나는 내가 모르는 이유로 변화에 휘둘리는 것이 싫고 두려웠다. 중심을 잃지 않으려는 고집과 보험을 감행하지 않는 안전한 원칙을 세우는 것이 나의 뚝심이자 장점이라 여겨왔다. 하지만 이번 여정을 다시 돌이켜 보았을 때 나의 ‘무뚝뚝한 뚝심’이 내면과 외면의 힘을 기르지 못하게 만든다는 사실과 내가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의 제한을 만드는 일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젠가는 먹고 살만 한 때가 왔을 때 그 다음에는 무엇을 이루어낼 것인가? 직업을 갖춘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더 넓게, 더 멀리 봐야한다. 꿈과 직업을 분리해서 접근 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하는, 할 일을 통해서 꿈을 성취하는 것이 꿈을 이루는데 다가서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지금의 내가 꿈에 대해서 답을 내리려고 하는 것보다 고민을 품고 쫓을 준비를 하려고 하는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 정선을 다녀왔을 때처럼 스스로가 분에 못 이겨 당장의 펌프질을 하려고 하는 것보다 차분히 들여다보는 것부터 시작하니 말이다.

-가져나갈 것을 생각하며

막연히 내가 해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태이거나 무언가에 실패와 실수를 하는 것이 두려워 내 능력으로 불가능한일이라 판단되면 외면하려 노력했다. 왜냐하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나를 누군가 받아주는 일도 없었으면 했고 괜히 내가 타인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한테 의지하는 일 없이 자존감 하나로 스스로 모든 것을 헤쳐 나가는 것이 나에겐 더 맘 편하고 좋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나르시시스트적 개념에 머무르지 않고 나 자신에게 전환을 요구하려고 한다. 나는 나 개인의 능력을 믿지만 그 힘은 너무나 미미하기 때문에 이제는 신뢰할 수 있는 나의 친구들을 발견하자. 그리고 숨어있지 않아도 발견될 사람이 되자.

‘결과에 집착하지 마라, 과정에 집중해라’라는 말을 내가 꺼내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으나 이제는 그 말에 대한 순간의 감동이 아닌, 지속적인 책임감을 갖추며 그 과정 안에는 실수와 성찰을 포함한 수많은 과정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며 무엇을 터득한지를 안다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된다. 변화, 그 자체를 인식을 하면서 무엇이 변화되었는지에 대해서 찾아내고 찾아내려고 한다.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학습하게 해준 하자를 고맙게 여기고 있다. 앞으로 살아갈 현실에 요지부동했던 나 자신에 질문과 고민이 쏟아져 그제야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Living literacy, 여행들, 시민문화워크숍, 그리고 Festeza가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타인에게 귀를 기울일 수 있게끔 도와주었다. 하지만 학교를 떠나면 기후문제, 국가 문제 등 그 이슈들로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의 지속을 다시 이야기하는 지금, 내 삶의 범주로 들어온 문제들을 인식의 지속으로 책임감 있게 가져가려 한다.

스스로의 중심을 믿으며 모든 것들을 도맡으며 착한 모범생의 얼굴로 개인적 ‘의무방어’를 또 한 차례 하지 않기를 바란다. 탓할 게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닐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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