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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시민문화 워크숍글 수 603
지금, 내 삶에 던지는 물음들 들어가기 나는 소위 386세대라 불리는 운동권 부모 밑에서 자라났다. 시대의 문제들과 시대를 읽는 것에 대해 또 이 시대의 소수자(약자)들과 같이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배우며 자랐다. 우리 아버지는 본인이 노동자로서 '노동 운동'을 적극적으로 하셨던 분이셨으며 포털 사이트인 네이버에 인물 검색을 하면 '정치인'으로 설명되어 있는 분이다. 또한 어머니는 제도권 교육현장에서 대안을 실천해 가시는 분이다. 그런 부모의 모습과 배움에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으며 자연스럽게 나는 자본주의 시대에서 생겨나는 '소수자, 약자'없이 사는 세상을 꿈꾸게 되었다. 그렇게 자란 난, 2007년 하자를 다니기 위해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던 부모님과 떨어져 살게 되었다. 그렇게 내가 독립을 해 첫 발을 내딛은 곳은 '서울'이었다. 그것은 즉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개발/자본/미디어의 공간에 비판적인 감수성을 갖은 내가 홀로 노출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상황 속을 혼자 살아가면서 내가 생각하게 된 것은 부모와 독립된 '나'라는 것이었다. 내 생각과 지키고 싶은 것,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을 상상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고민하는 것. 그 과정에서 내가 다녔던 하자는, '왜?', '너를 이끄는 것은 무엇이니?'등의 기본적인 것에 대한 질문을 시작으로, '너는 어떻게 살고 싶니?'라며, '어떻게'를 통해 공부의 필요성을 알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나의 감수성에 상처를 주는 문제 상황을 직면했을 때 분노와 충격으로 좌절에 머무는 것이 아닌, 더 나아가 그 구조를 인식하는 학습과 그 상황 속의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잘 살 수 있을까 물음으로써 내 삶을 생각해볼 여유를 주었다. 이 과정이 나에게 의미 있는 이유는 이 문제 많은 시대 속에서 나의 예민한 감수성을 자극하는 문제들로 인해 '나'라는 중심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같이 살기'라는 물음을 지키며 사는 것이 '운동'이라는 것을 알게 했기 때문이다.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난 돌볼래 내가 살고 있는 한국을 비롯한 이 시대는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말라'는 직설적 명령을 '경쟁'의 강령으로 지독한 혼자 잘 살기의 시대로 향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몸을 돌보려 하는 소비조차도 최빈국의 노동자들을 착취한 산물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소비하는 값싼 제품이 그보다 더 값싼 저임금 노동자에 의해 생산되는, 또 그것 자체가 '기후변화'에 타격을 주는 복잡한 구조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어느 순간부터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의도적이면서 의도치 않게 착취/피해를 범하게 되는 이 시대의 이상한 구조. 나는 이 매트릭스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라는 물음을 가졌다. 하자에서 나의 주된 이슈는 '사회적 문제'였다. 자본과 개발로 무성한 서울에서 내가 볼 수밖에 없는 문제 상황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난 사회 구조의 문제 상황을 발견하게 되면 곧바로 '현실을 바꾸자'라는 실천의 활동들을 떠올렸다. 그렇게 이상한 구조가 움직임을 어렵게 만듦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모색하고자 했다. 그렇게 나는 하자에 있는 동안 마음에 들지 않은 정책과 상황들을 비판하기 위해 그 근거 자료를 모아 '4대강 살리기와 선전 정치', '정선의 카지노 자본', '용산의 토건자본주의와 환상들' 등 사회적 이슈를 주제로 한, 시민의식에서 비롯한 비판적 작업들을 진행했다. 그렇지만 내 딴에 항상 조심스럽게 한 발짝 내딛은 작업은 '섣부름'이라는 코멘트로 돌아오곤 했다. 그때 난 내 자신에 대한 코멘트를 나에 대한 채찍으로만 가져갔다. 또 한편으로 어찌 이 공간들이 직면한 고리들을 다 말 할 수 있을까? 정말 그 고리들을 다 염두에 둔 채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기는 할까? 이런 생각들이 나를 갑갑하게 만들었다. 이 시대의 '신(자본)자유주의'의 착취와 억압의 고리는 연쇄/교차적으로 짜여 있고 그럴수록 개인들은 그것을 개인이 모두 감당해야 할 무게로 어깨에 올려놓을 수밖에 없다. 나도, 우리 아버지도 이슈화된 문제에 당면한 당사자들도 그러했다. 이상하게도 그 지나치게 무거운 무게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항상 '소수'였고 변화를 만들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난 그런 연쇄적 고리로 생성된, 예를 들어 용산 참사에 대해 분노하며 '어떻게 이렇게 불공평한 개발이 가능한가!?'라며 분노의 의문을 가졌다. 그렇게 재개발에 대한 비판적 물음을 갖기는 했었지만 그것을 바꾸기 위해선 내가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내가 문제 상황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을 느꼈을 때 나는 그 순간 자체가 싫었다. 그래서 사회 구조와 문제를 일으키는 그 '무엇'을 파헤쳐 바꾸고 싶었다. 그러다보니 그런 구조와 그것으로 인해 벌어지는 '사회적 문제'들에는 무관심한 채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위해 밤낮으로 공부를 하는 내 또래 10대들과 그들의 부모들이 미워졌고, 그들이 다수였기에 10대 시절의 나는 나 스스로가 왕따를 자처했다. 그것에 더해 그런 '분노'와 '바꾸고 싶어!'라는 마음이 앞서고 강했던 나에겐, '섣부르다'라는 코멘트를 날리는 하자를 다니는 일상은 힘들고 애석하곤 했다. 나 또한 알아가고 공부해가는 과정에서 뭐라도 해보려 했었기 때문에 범한 타협이자 섣부름이었는데 말이다. 이런 섣부름에 대한 지적의 과정은 하자와 나 사이에 벽을 만들어 냈다. 그렇게 하자 안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내가 지키고 싶은 가치들과 그것을 무시하며 벌어지는 '문제 상황'을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과 함께 ('save my city'의) 은평 재개발지역에서의 갑갑함과 분노에 근거한 짱돌을 허공의 그 '무엇'을 향해 던지는 것이었고, 그와 함께 '섣부름'을 끌어내는 '비판'의 작업을 계속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몇 차례의 내가 하게 되는 현실의 문제에 대한 비판의 섣부름에 답답하고 힘들어 하며, 더 이상 무언가에 대해 비판해 볼 힘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실마리도 보이지 않게 되는 순간 나는 학교를 나왔다. 더 이상 학교를 다니며 내가 했던 말과 비판들을 떠올리는 것이 힘들었고 '섣부름'이라는 것에 사로잡혀 무엇 하나 말 해볼 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1달 동안을 학교 '밖'에서 지내며 대안교육이라는 '대안적 길'에 대한 내 시간을 설명해야 했었고 그 과정을 통해 비로소 내가 지내 온 하자에서의 시간에 대해 '탈학교생'이라는 위치에 대해 자각 할 수 있었다. 내가 하자에서의 3년 동안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라는 물음으로 만든 것은 지키고 싶은 것과 그 감수성으로 집중한 '시민 됨'이라는 강한 의식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본 생산성이 1차 판단기준이 되는 학교 밖에선 생소하고, 번거로운 의식으로 받아들여지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그렇게 학교 '밖'의 현실을 마주 한 순간, 내가 열심히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물어왔던 시간들에 대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에 '무엇을 하며(현실성)'를 연결시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곧잘 하자에서의 시간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마주하게 된 학교 '밖'의 내 현실에서 앞일을 그릴 힘도 없이 그저 '막막함'에 눈물만 흘리며 지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내가 지내온 시간을 '무의미함'으로 남겨둠에서 시작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선, 내가 배움과 일상을 만들었던 하자에서의 시간들에 대해 내 스스로가 의미를 부여해주고 믿어 주어야했다. 그래야 다시 패기도, 의욕도 생길 것 같았다. 어쩌면 그 의미부여를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이 일시적 자율에 따르는 책임이고 적어도 학교 '밖'의 현실 앞에서 '두려움'에 지지 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쩌면 이런 맥락에서 일시적 자율 공간에서 내가 배운 것은 '스스로'라는 것을 잊지 않는 '자립'을 지켜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난 도저히 학교를 마무리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때문에 나는 다시 학교로, 메솟으로 향하길 마음먹게 되었었다. 내가 메솟에 가는 것을 두려워했던 이유는 현실을 비판하는 '섣부름'을 반복하게 되는 것 때문이었다. 특히 메솟의 상황을 이미 미디어를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세상 그 어느 곳 보다 '바꾸고 싶어!'라는 나의 거친 감수성을 자극하는 '문제 상황'이 뚜렷한 곳이기에, 나에게 학습의 공간으로서 메솟은 두려운 곳이었다. 만남을 통해 인식하다 시선 메솟은 태국과 버마의 국경지대에 있는 작은 도시이다. 그곳의 날씨는 무척이나 더웠다. 메솟은 버마와 태국의 국경지대이기 때문에 버마에서 (불법)이주를 한 사람들이 머물러 있었고 우리가 머물며 만난 이들도 버마와 관련된 '사회 운동'을 하는 단체와 학생, 개인들이었다. 나는 메솟에 머물면서는 10여개의 단체들을, 멜라캠프에서는 LMTC, LMC, ESP의 학생들을 만났다. 그들은 직접 그곳의 상황과 직면해 있는 문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버마는 SPDC(버마군사정부)로 인한 마약, 난민, 정치범, 아동군인, 교육, 여성 등과 관련된 문제들과 직면해 있고 '소수 민족'이라는 또 다른 분열의 문제가능성을 갖은 어려운 과제도 있다고 알게 되었다. 이제 막 변성기가 시작되거나 끝났을 무렵의 아이에게 총을 쥐어주는 사람들.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한 마을을 통째로 마약중독자마을로 만들어 버리는 사람들. 고향, 아니 돌아 갈 곳을 지우고 그것을 넘어서 그곳을 떠올리는 것조차 눈물이 흐르게 만드는 상황. 이런 상황을 경험하고 아직도 그 '난민'이라는 상황에 존재하는 사람을 만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편치 못함'이었다. 내 앞에 마주해 나에게 자신들의 강도 높은 경험을 이야기하는 인간을 만들어 낸 '상황'이 너무 이상할 정도로 미웠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특정한 '사람들'을 탓하기에는 더 이상 지역의 문제만이 될 수 없기에 커다란 '세상'을 탓 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을 감싸고 있는 문제들은 SPDC 하나를 적으로 지목해서 공격한다하여 해결되는 문제들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 다시 공평하지도, 자비롭지도 않은 세상에 대한 분노와 적지 않은 절망을 느끼며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떠올렸다. 그때에 나는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무기력하고 갑갑해지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 하는 것을 시작(바탕)으로 최대한 그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기 위해서 귀를 기울였다. 내가 들은 바로는 그들 또한 한비야가 말한 '사랑'이라는, 사회를 구하는 근원적이고 지구적인 관심을 깔고 자신들의 지역이 직면한 문제를 풀어가는 일을 꿈꾸고 구해나가고 있었다. 물론 메솟에서 머물고 들었던 이야기는 시간에 비례해 충분하지 않았으므로 그곳의 상황에 대해 말하는 것이 조심스러운 부분은 있다. 또 지금 일 초에도 누가 어느 곳에서 어떤 폭력을 경험하고 좌절하고 있을지. 굳이 메솟이 아니라 세계를 두고도 이 말을 할 수는 있겠지만, 메솟은 21세기에 특수한 상황인 것 또한 확실하고 심각하기에 '세계 시민'이라는 정체성으로 그들이 직면한 문제 상황의 변화에 대해 '어떻게'를 성실하게 묻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건 확실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일'을하고 있었다. 나는 이것이 중요하고 고맙다고 생각했다. 당장에 변화의 모습이 보이지 않더라도 지역의 문제가 곧 그들 자신의 문제이기에, 이 문제에 대해 계속해서 '말'을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이것이 '운동'이다. 그렇게 그들 지역의 문제를 더 많고 다양한 사람들이 알 수 있게 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단체)의 활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을 통해서 우리의 지역에 시선을 두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그리고 세계 시민이 이 문제가, 예를 들면 자신들 마을의 마약 문제가 전 세계적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SPDC든 마약상이든 쉽게 '잘못 된 일'을 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그들은 그 아슬아슬한 '변할 거야'라는 믿음을 지켜가며 계속 일을 한다. 나는 그 변하지 않는 믿음이 세상 앞에서 좌절을 반복하게 될 수도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믿음을 지켜가는 힘을 존경하며, 그들의 이야기에 응답/응원을 하고 싶어진다. 그렇게 나는 일단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무거운 마음을 덜어내며 그들이 내게 전해준 '세계 시민'으로서 '시선'을 두는 일부터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그들의 일에 응답하는 것에서 시작하기로 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내가 그곳에 '시선'을 어떻게 둘 수 있을지를 고민 중이다. 울지 않고 떠올릴 수 있다 내가 처음 접한 메솟과 멜라에서 만난 이들의 위치는 충격이고 이상함이었다. 나에겐 '난민', '난민 캠프' 그것의, 존재자체가 '문제'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캠프 안에 머무는 동안 무척이나 이상하고 슬픈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었다. '존재 자체가 문제인 상황 속에 내가 있다'. '이들의 존재는 인정되지 않고 추방의 대상으로 이 '캠프'안에 몰려 머물고/갇혀있다'는 생각들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말하는 "you are lucky, becoz you have freedom"은 그곳에 머무는 동안 편치 못함 그 자체였다. 나는 정말 'lucky',하고 'free'한가?. 돈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고, 제도권으로부터 인정되지 않는 대안학교 학생으로 사는 것은 불편하고 고단할 때도 많다. 그렇지만 그들 앞에서 그런 나의 불안과 자유롭지 못함을 견주기란 그 차이는 너무 확연했기에 나는 그들의 말에 그저 인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때에 난 도대체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살 수 있을까? 라는 물음을 가졌다. 그렇지만 현재 나의 일상적 공간과 캠프는 물리적으로 너무 먼 거리였고 쉽게 이 존재들의 위치/상황을 변화시키기엔 내가 알지 못하는 거대한 '무엇'의 힘이 작용하고 있었기에 혼란스럽고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난민이라는 존재? 그들의 삶? 쉽게 설명 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들이 나에게 들려 준 그들의 상황은 내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내가 관심을 지속해온 한국의 개발과 이주의 상황과 다르지 않았다. 한국에도 고향을 등지고 이주를 해야 하는 문제 상황이 존재해왔다. 1960년대 미군의 주둔을 위해 많은 토박이 농사꾼 들이 억울하게 고향을 등져야 했고, 1980년대와 지금까지는 '더 좋은 생활 여건'을 위한 재개발로 인해 그렇게 해야 했다. 그 때마다 돈이 없는 사람들은 재정착에 대한 자유를 누리지 못한 채, 강제이주를 떠나야 했었다. 심지어 지난 해 용산 재개발의 당사자들은 '테러범'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국가로부터 보호받지도 못한 채, 오갈 곳 없는 상황에 놓이기도 했었다. 그리고 난 그 개발로 인해 벌어지는 부당하고 강제적인 이주에 관심과 책임감을 갖고 철거민들과 함께하고자 했다. 난 그들과의 만남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껴갔지만, 그들이 내 앞에서 들려주었던 현실 경험의 강도 차이는 너무도 내 경험 이상이었기에 슬퍼 눈물을 흘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서로 다른 현실/상황의 무게를 갖고 있는 이들과 만나 공감하는 것이 시작이다. 그렇게 서로가 어떤 현실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으로 나아가, 물리적 거리를 넘어 같은 인간(시민)으로서 '같이 살기'라는 사명감과 과제에 대해 생각해본다. 또 동시에 이 시대를 같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함께 풀어가야 할 과제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게 나에게 생겨난 믿음과 사명감은 그곳을 떠나온 나에겐 위로이자 희망인 것 같다. 이 위로와 희망 속에는 기여와 혁명을 꿈꾸는 그들이 있다. 그래서 난 그곳을 떠올리며 울지 않을 수가 있다. 그들의 상황은 바꾸기 힘든 것이지만 그들에게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지지를 보내는 한명의 '너'이고 싶기 때문이다. '소셜 워커' 서로 다른 현실, 조건을 읽어가는 것. 그리고 '같은 시대'라는 것을 통해서 접촉하고 연결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운동을 하고 싶은 거다. 그 운동의 모습은 절대 거리의 운동으로 규정하지 않을 것이며 내 언어와 위치라는 것을 통한 세상 읽기와 움직임을 하고 싶다. 이번 메솟 이동 학습을 통해서 만난 학생들에게서 '꿈'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나는 하자에서의 '시민 됨'을 이어가며 즐거운 언어로 '작업'을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 바람에 대해 소위 '현실성'이라는 경제적 측면을 고려했을 때엔 당장에 20살이 된 내가 하자 밖으로 나가 돈을 만들어 낼 수 없는 '하고 싶은 일'에 불과했던 것이다. 때문에 당장에 한 달 뒤면 닥쳐올 현실에 대한 '막막함'도 컸던 내게, '꿈'에 대해 물어오는 것은 그저 나를 갑갑하게만 만든 질문이었다. 난 그렇게 내가 갑갑한 이유를 영어로 설명하는 것이 힘들어 질문을 피하던 중, 사회 운동을 하는 시민으로서 살고 싶기도, 작업을 하고 싶기도 하다는 것을 설명하기가 어려워 "my dream is social worker."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나는 순간 깜짝 놀랐다. 이유는 'social worker'라는 것을 모르는 사이에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에게 이 발견은 큰 의미이다. 비록 구체적이지 않고 경제적 측면을 연결시키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과제이지만 적어도 내가 기분 좋게 상상 할 '실마리'라도 잡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나에겐 조금 더 '여유'를 갖고 앞일을 그려 볼 이유가 됐다. 내 꿈에 대해 돈 벌이를 중심으로 '꿈'과 '직업'을 설계하는 것을 넘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소셜워커'. 내 머릿속에 '소셜워커'는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거의 다 할 수 있는 위치로 아주 넓은 가능성의 것이다. 나는 문제 상황에 대해서든, 내 개인적 삶에 대해서든 이 시대를 살아가며 물음과 사회/너와 나의 관계를 만들어가고 재조합해내는 한 명의 작업자로서 살아 보고 싶다. 예를 들면, 지금처럼 사회적 문제가 구경거리로 여겨지는 분위기에 대해 '너는 어디서 누구와 살고 있는 거냐'라는 질문을 던지는. 그렇게 나는 내 눈에 걸리는 것들을 '너'들에게 물음을 하며 그 '너'들의 응답과 질문을 나누고 변화를 만들어가는 작업에 관심이 있다. 지금은 나를 위한 삶이 남을 위한 '너'들에게도 힘이 되는, 그 중에서도 사회적으로 힘이 적은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작업을 하고 싶다. 거대하게 뱉어내보자면 '시민사회'와 내 관계를 생각하며 기여가 되는 삶을 꿈꾼다. 나는 그것이 '경쟁'이라는 강령에 따른 '개인화', 다르게 말하자면 '파편화'의 시대에서 '관계'와 '같이 살기'를 말하는 나를 시작으로 '시대/사회 혹은 다른 '너'들의 현실과 연결 짓고, 그것을 통해서 이야기되는 것을 '너'들과 나누는 '언어'까지 훈련하는 '소셜워커'를 상상하고 있다. 나는 열심히 꿈꾸고 싶다. 이제 막 상상하기 시작한 '소셜 워커'를 시작으로 현실 속에서 직접 구체화시켜 만들어가 보려한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욕심 부리지 않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기꺼이' 내 일로 만드는 공부와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을 '지속'하는 것부터가 기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 나 스펙 없다. 그래도 당당하(고싶)다. 내가 학교 밖을 나갔을 때, 나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하자에서 있는 시간 동안 내 머릿속을 채웠던 인문학, 시민의식과 현실성과의 '갭'이었다. 나에게 이 갭은 정말 큰 불안함이었다. 그때에 내가 보게 된 세상 속의 나는 안전한 집도 없고 내 학습의 맥락을 이어가는 것을 포기하면서 까지도 살기 위한 돈을 만들 수 있는 알바(일자리)조차 스펙을 기준으로 밀려나는 소위 '잉여인간'이었다. 내가 하자 밖을 나갔던 순간, 사회가 나에게 요구했던 것은 하자가 나에게 물었던 '넌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래?'라는 물음이 아닌 '넌 뭘 할 수가 있어?, 그건 얼마짜리 가치야?'였기 때문이다. 이 요구가 나를 당혹스럽게 했던 이유는 하자에 있으며 내가 했던 것들은 '나는 무엇을 해서 돈을 만들까'를 계획해 시대의 요구에 걸맞은 인간상을 갖춰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이 그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자에 있는 동안 우석훈의 책을 포함한 여러 책들을 통해서 '신자유주의'라는 것이 무엇을 요구하는 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때는 오히려 정말로 이 시대에를 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시간에 대한 자부심과 믿음을 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짧게 마주했던 하자 밖의 현실에서 내가 하자에서 집중했던 '인문학'과 '시민 됨'의 맥락을 이어가기란 쉽지 않았다. 그 '현실성'에서 오는 지독한 갭. 그 지독함이 내가 책에서 보았던 '신자유주의'의 힘일 수도, 어쩌면 모든 사람이 느끼는 현실의 지독함 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다시 학교로 돌아온 이유도 그런 현실에서 내가 배워 왔고 중요시 여겼던 학습의 맥락을 이어가는 것에 실패해 피해 온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20살이 되었고 하자를 나간다. 이젠 나 스스로가 나에게 '현실성'을 요구한다. 지금으로서 나에게 '현실성'은 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내 생존이 걸린 문제인 것이다. 학생이었던 하자에서의 시간은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현실성'. 소위 스펙과 전문성보단 인문학으로 나를 채우며 의식과 의지를 다지는 '불안함'과의 싸움이었다. 그렇지만 불안했다고 해서 분명 이 시간이 시대가 요구하는 '현실성'을 잠시 미루는 시간이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내 삶에 던지는 물음이 달랐던 것 같다. '어떻게 살아갈래?'라는 여유를 갖고 내 주변과 더 넓은 세상을 보는 물음과 '무엇을 해서 돈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당장에 내 코앞을 내다보는 물음. 하자에서의 '어떻게 살아갈래?'라는 물음은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고, 이 세상에서 '잘'산다는 것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을 택한 또 하나의 삶과 교육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런 맥락에서 하자에게 정말 고마워하고 있다. 나에게 '너는 무엇을 할 수 있니?'라는 물음이 아닌, '너는 어떻게 살고 싶니?'를 물어주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나에겐 '현실성'에서 오는 불안함을 견딜만한 응원이 됐기 때문이다. 지금 20살이 되어 하자를 나가는 나에겐 스펙도 전문성도 없다고 해서 후자의 시간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나는 타인의 삶과 시대를 이동학습과 인문학 그리고 시민이라는 것을 통해 내 삶과 연결시켜보았던 시간들에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또 그 과정을 통해서 나는 이미 내가 개입하지 않을 수 없는 '너'들인 '사회적 약자'들의 존재와 부당한 구조의 문제로 인한 많은 이슈들과 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렇게 내 감수성에서 시작된 사회적 문제를 만들어내는 구조를 인식하기 위한 학습(비판의 작업)들을 해봄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상황(현상)에 대한 비판을 넘어 계속해서 시대에 물음을 하는 개인들의 '지속성'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렇게 나는 지속성을 가져보려 노력하고 있다. 지금은 예전처럼 문제 상황으로 직접 뛰어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잠 못 들지는 않는다. 정말 내 위치를 갖고 할 수 있는 일로 구조를 바꾸는 일에 동참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나는 문제를 일으키는 구조의 변화를 꿈꾸며, 계속해서 물음을 지속하고 싶다. 그래서 지금 나는 심지어 'make a difference'라는 구조와 현실의 변화를 만드는 운동적 삶을 사는 'social worker'로서 살겠다는 선언에까지 이르게 되었기도 하다. 사실 내가 지금 이 에세이에서 '쏘셜워커'를 내세우는 것은 일종의 발악이고 다짐이다. 1달 뒤 또 다시 학교 밖을 마주하게 될 나에게 하는 선언. 지금은 학교 밖에서의 내 위치가 막막해도 살아가다보면 지키고 싶은 것들을 지켜가며 '잘'살고 있는 나를 발견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매 학기를 마무리하며 나의 위치, 즉 '어떤 사람이고 싶은가?'를 정리했었다. 전후의 전위적이고 시대에 질문을 하는 다다이스트를 비롯한 예술가들을 만나면서 나도 시대와 함께 살아가며 질문하고 시대를 기록 할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난 학기 본격적으로 시민과 시민 사회라는 것을 만나서는 나 또한 '시민'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시민이 갖추고 만들어야 하는 사회의 모습을 상상하며 용산 재개발에 대한 작업으로 이어가게 되기까지. 나는 하자에 있는 동안 계속해서 나의 시대를 읽고 '같이 살기'를 모색하는 시민이고자 했었다. 그 과정에서 내 감수성에서 생겨나는 답답함에 근거한 외침과 움직임이 현실 속에서 받아들여지고, 나와 함께 '같이 살기'를 이야기 할 수 있는 이가 생겨나기 위해선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감수성이 시작이 되어야하지, 그것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에세이를 쓰다 보니 하자에서 내가 배운 것은 이 시대의 거대한 흐름에(자본과 경쟁에) 무방비상태로 흡수되지 않고 그 속에서 내가 지향하는 '너들과 같이 살기'라는 생태적 가치를 통한 '어떻게 같이 잘 살아 갈 수 있을까?'를 묻는 감수성과 그것을 지속할 힘을 기르는 것이었던 것 같다. 난 그렇게 앞으로 마주하게 될 '넌 무엇을 할 수 있니?'를 물어오는 세상 속에서 그 물음에 응답하기 위해 '돈 벌기 위한 일'만을 생각하며 앞을 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하자에서의 3년이란 시간 동안에 채워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에 대한 내 생각과 다짐들을 현실 속에서 불편한 짐으로 느끼지 않고 싶다. 지금 내 바람은 이것뿐이다. 부디, 나에게 의미 있었던 하자를 통한 배움이 학교 밖의 '현실성'이라는 것과 맞서는 '짐'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 나는 꽤나 비장하다. 그래야만 한다. 나는 지금 이 바람을 내가 선택한 시간들에 대한 책임의 몫으로 가져가, 다시 학교 밖으로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젠 나를 응원하며 계속해서 사회와 관계 맺고 그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은 '시민'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가'를 묻는 것을 스스로 해나가고 싶다. 관건은 내 스스로가 나에게 주는 호흡의 조절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10대 시절을 통해 나를 구성하고 있는 시민의식을 고민했던 시간이 현실성과 갭을 만들어내는 결함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닌, 사회적 기여로 작용하기 위한 길을 찾고 만들어 갈 것이다. 분명 하자 밖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있을 거라고 믿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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