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니어 수료 에세이

<노래 부르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다.>

0. Sing alone

작업장 학교에 들어오면서부터 ‘싱어송라이터’가 되겠다고 말해왔던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음악을 매체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싶었고, 그 ‘세상을 보는 눈’을 크게 하기 위해서 이 학교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길찾기 수료 후, 주니어 과정으로 음악/공연 팀의 멤버가 되어서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이름 짓기’였다. Felicidade, 보리, Festeza, 딴따라-(개인적으로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음), 닥쳐 등 별별 이름들의 각축 끝에 결국 ‘Festeza’라는 이름이 발탁되었는데, 의미는 촌닭들의 타이틀곡이었던 ‘슬픔’이란 의미의 ‘Tristeza’와 ‘축제’라는 의미의 ‘Festezo’가 합쳐진 신조어로서 ‘인재지변의 시대에 만연하는 슬픔에 공감하고 그들에게 위로를 건네며 슬픔을 뛰어넘는 축제의 노래를 하자’라는 의미다.

공연 팀으로 지낸 8개월의 긴 주니어 1학기 동안 그리 많은 수의 공연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노래했고, 또 사람들을 만나며 고민하고 이야기 나누면서 학습을 이끌어 왔던 1년이었고, 처음 혼자 부르던 노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수록 점점 많은 사람들에게 불려졌다.

만나고 노래하는, 실로 ‘노래 부르는 법’부터 다시 익히며 공부했던 1년이었다.

1. 너희들하고는 못해먹겠다

학교를 나오게 된, 아니 나왔다기보다는 고등학교에 가지 않게 된 이유는 학교에 있는 모든 것들을 좋아할 수가 없어서였다. 밥은 맛이 없지, 선생님들은 참된 가르침이다 뭐다 해서 일명 ‘사랑의 매’로 학생들을 다루고, 내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스스로 공부할 텐데 교과목에 따라 할 공부를 정해주고 하라며 억지로 시키는 것도, 각자 나름의 해석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오직 다섯 개중 하나의 답만이 있는 것도 싫었다. 보통 그러면 친구들에게라도 좀 의지해볼까 싶겠지만, 그때 난 학교에 있는 애들과의 하나같이 서로에게 진지하지 못했고 누군가와 친구가 되고 따돌리며, 절교하는 것들이 너무나 가볍게 여겨지는 관계들에 점차 회의적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어떠한 언어도 주고받으며 지속될 수 없는 교우관계 안에서 억지로 지내기가 싫었다. 도대체가 걔들은 무엇에 집중하며 살아가는 지 알 수 없었고, 외로운 건 싫어서 거기에 또 잘 들어가려 애쓰는 나도 싫어졌다. 여기에서 진정한 친구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학교가 괴롭고, 회의적으로만 느껴져서 아무런 말도 하기가 싫어졌다. 앞으로 음악가가 되고 싶어서 예술 고등학교 실용음악과 같은 곳에 들어간다고 해도, 경쟁과 지겨운 훈련들을 견뎌낼 수 없을 것 같다는 막연한 걱정과 불안이 있었다. 그보다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밤낮으로 기타 연습에만 몰두하는 뮤지션이 아니라 사회적인 안테나를 가지고 넓게 목소리를 내면서 참여하는 음악가였다는 생각이 들었고, 세상을 받아들이는 눈을 키우기 위해서, 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놀고 배우기 위해서 작업장 학교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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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장 학교에 일단 들어오기만 하면, 전부 나랑 착착 맞는 아웃사이더들이 모여 있을 것 같고, 음악도 할 수 있겠다고, 내가 했던 모든 고민들은 접고 생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막연한 기대들은 시작부터 삐걱거리기 마련이었다. 길찾기 예비학교 둘째 날에는 4명씩 모여서 서로의 경험들을 인터뷰하고 하나의 스토리를 만드는 ‘인상과 풍경’이라는 시간이 있었는데, 각자의 이야기가 전혀 모이질 않자, 답답한 나머지 내가 나서서 거의 억지로 이야기를 뽑아내고 구성해버리는 식으로 마무리 짓고 말았다. 발표는 다음 날이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머니와 통화했는데 나는 그저 다른 애들이 실망스러웠다는 말 밖에 하질 못했다. 결국 다음 날 발표는 별로 좋은 호응을 얻어내질 못했고 열심히 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후 자서전쓰기나 인문학, 드로잉 프로젝트 등을 제외한 팀으로서 진행하는 여러 프로젝트들이 있었다. 그 때마다 나는 그저 최대한 내 할당량을 많이 챙겨서 열심히 하는 게 팀 작업으로서 잘해내는 거라고 믿었다. 일반 학교 다닐 때처럼 무기력하게 지내는 것이 싫어서 최대한 많은 것들을 해보려고 했기 때문이었고 있는 대로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하려다보니 효율성도 떨어지고, 일에 치여서 길찾기가 끝나갈 때 즈음에는 허다하게 밤을 새게 되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는 음악, 기타 연습도 변변히 못한 것 같고, 뭐 하나 떡하니 이룬 것도 없는 것 같은 느낌마저 받았다. 결국 길찾기가 끝날 때 즈음에는 ‘솔직히 말해서 재미없었다.’라고 에세이에 써버리고 말았고, 생각해보니 작업장 학교에 오면서 접어두었던 고민들은 아무런 진전도 없어보였다.

그렇게 길찾기를 수료한 나는 주니어가 되어 공연팀에 들어가면 하고 싶은 음악, 팀으로서의 관계 등 모두 잘해보겠다고 다짐하며 주니어에 지원했다. 또 접고 갔다.

2. 종이는 12번 이상 못 접는다던데

길찾기로 들어올 때부터 음악가에 대해 이야기하던 나는 원래는 세션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었다. ‘프로뮤지션’인 것인데, 초일류의 스킬을 정복해서 누구보다 잘 치는 기타리스트로 인정받겠다고 꿈꾸며 기타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교본도 하나 얻어서 차근차근 공부했다. 그러나 이미 혼자서도 즐겁게 잘 치고 있던 터라 학원에서 배우는 기타는 영 재미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누구나 기타치고 음악하고 싶다고 해서 완벽하게 잘 치는 테크니션이 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난 작사 작곡하는 밴드로, 음악가로 방향을 돌렸다. 사회적, 특히 환경적 이슈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음악을 통해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막 작업장 학교에 들어왔을 때다. 촌닭들이라 불리는 처음 보는 퍼커션을 연주하는 팀들이 우리를 환영하며 공연을 벌였고 그들의 공연에 반한 나는 주니어가 되어서 공연팀에 입단했다. 나와 내 동기들이 입단하고 나자마자 공연팀은 회의를 거쳐서 ‘Festeza’라는 이름을 새로 지었는데, ‘인재지변의 시대에 만연하는 슬픔에 공감하고 그들에게 위로를 건네며 슬픔을 뛰어넘는 축제의 노래를 하자’라는 의미를 담았다. 따라서 Festeza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화두는 ‘이야기가 있는 공연’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공연하는 곳이 어디이고, 우리가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치는 것이 어떤 이야기를 가질 수 있을지 고민하며 공부해가는 팀’이었던 것이다. 내 기억에, 그런 ‘이야기가 있는 공연을 지향하는 팀’으로서 가장 처음 시작한 것은 ‘교가’만들기였던 것 같다. 작업장 학교의 마지막 8개월의 한 학기를 마치고 다음 시즌2를 준비하면서 앞으로의 이야기보다는 지난 시즌 1을 지내온 죽돌들에게 무엇이 기억이 되고 선물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멜로디부터, 가사까지 Festeza가 만들기로 했었다. 각자 가사를 써오기로 해서 모여 미리 만들어놓은 코드와 멜로디에 맞춰보는 식으로 다 같이 모여 노래를 짓게 됐는데, 나는 영 내키지가 않았다. 보기에, 가사도, 멜로디도 내가 생각한 ‘멋진 음악’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노래도 CCM의 느낌이 나는데다가 가사도 유치하게만 느껴져서 전혀 진지하게 임하지 않았다. 나는 기타 반주를 맡았으니 베이스 기타와 구석에서 연주만 맞추면 그게 그냥 우리 역할 다 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될 대로 되라, 난 뭐 상관없다.’식의 마인드는 전혀 팀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충분히 그 날 이후 반성했다고 생각했지만, 나 하나 뿐만의 문제가 아닌 ‘공연팀’으로서 결여되는 논의와 이야기의 문제는 계속 나타났다. 곡을 정할 때도, 브레이크를 맞추거나 악기 파트에 대해서도 그저 다른 사람이 이렇게 하자고 하면 별 의견도 내지 않고, 그렇다고 좋으면 좋다고 딱히 분명하게 의사 표시도 하지 않는 답답한 회의들이 매번 이어졌고, 그럴 때마다 뒤 끝이 개운치 않았다. 끝끝내 정선 고한시장에서의 공연에서는, 다 같이 짜던 공연 전 멘트도 어느새 그 날 멘트하는 사람에게 일임해버리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최악의 사태까지 갔고, 그 날 공연은 완전히 말아먹었다. 그때가 돼서야, 우리 사이에는 무언가 소통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관심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것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한 명이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고도 하고, 개인적인 힘든 일들로 오랫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게 되더라도 그저 나중이 되어야지 서로 미안하다고 밖에는 말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 같다.

작업장학교에 나온다는 것, 그것은 서로간의 ‘나와야 하는 학교’라는 약속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강요하고 억압하는 그러한 ‘구속’이 아니라 어딘가로부터 ‘탈’해서 스스로들이 선택해서 모인 학교이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 각자의 ‘학교에 대한 기대들’과 ‘서로에 대한 기대들’을 나누며 같이 하고, 수다 떨 수 있는 학습을 찾아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계속 접고 펴지기를 반복하는 나의 ‘같이 하는 사람들과의 의리’가 더 이상 구부러지지 않기를 원했다.

3. 이야기가 있는 공연

Festeza로 새 출발하면서 가장 많이 한 고민은 ‘이야기가 있는 공연’에 대해서였다. 공연자로서 연주를 보여주면서 다 같이 즐겁게 놀 수 있는 판을 만들면 그걸로 좋은 것 같은데,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막연하기도 했다. 그런 상태에서 처음으로 Festeza가 공연을 준비한 것은 ‘달맞이 축제’를 맞아서였다. 달맞이 축제는 지난 추석, 인사동 한쪽에서 고향에 가지 못한 사람들, 명절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들, 외국인까지 너나 할 것 없이 달을 맞아서 한해 좋은 일과 소망을 기원하는 잔치였다. 모두가 공연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다 같이 준비하면서 어떤 말로 시작을 열지, 어떤 노래를 부르며 놀 수 있을지 이야기 나누며 잘 준비했다고 생각한다. 비록 신입단원이라 연주가 많이 어설펐지만 달을 맞아서 모두가 잘 놀 수 있도록 열심히 연주하고 노래하면 충분한 공연이었다. 연주를 잘해서 관객들에게 보여주기 뿐이기보다는 우리가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잘 이해하고, 어떻게 있고 싶고, 때로는 공부하고 싶은지 고민하면서 즐거운 축제의 판을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 역할로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뒤에 있었던 ‘강진 시민운동가 대회’에서의 공연도 나름대로 정말 즐겁게 잘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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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고한 예술마을 프로젝트>의 초대를 받고 정선으로 떠난 여행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작업장 학교의 모두는 오전동안 정선 5일장으로 놀러 갔다. Festeza는 시장 한 구석에서 악기치며 놀 심산으로 파고지 악기들을 챙겨갔더니, 장날이라 그랬는지 시장 한 복판에 이미 잔치판이 벌어져있었다. 마침 우리 악기들을 본 관계자가 우리에게 다가와서 공연 제의를 했고, 그냥 놀자고 시작한 것이 공연처럼 되어버리자 촌닭들 시절부터 지내왔던 엽이 “솔직히 말해서 퀄리티를 중시하자면 난 기존 단원들하고만 공연하고 싶어.”라고 말해버리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나는 큰 상처를 받았다. 사실 악기 연습을 시작한지 2달여 밖에 안 된 신입단원들이 촌닭들 때부터 함께 2년여 동안 악기 연습을 해오던 단원들만큼 실력이 되질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 문제가 창업을 염두하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공연에 있어서 테크니컬한 퀄리티를 중요시하는 팀인 ‘촌닭들’이 공부와 함께 연주를 보여주는 것 이상의 이야기가 있는 공연을 추구하는 'Festeza'로 넘어오면서 두 퀄리티가 충돌한 것 같았다. ‘Festeza의 퀄리티’는 연주 실력보다는 이야기가 우선되고 음악을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날 오후에는 고한 시장에서의 공연이 있었는데, 오전의 일로 마음이 상한 우리들은 공연을 위한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정해져있는 스케줄을 따르듯이 연주했고, 마음이 따르지 않은 공연은 당연히 좋을 리 없었다. 우리가 공연한 날은 예술마을 프로젝트의 마지막 날이었고 결과 발표에서 주민들과의 소통이 그다지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우리는 아무런 이야기도 나누지 않고 그저 악기를 쳤을 뿐이었다. 지금에서야 느끼는 게 있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퀄리티란 악기연습만 하는 것도 아니고 공부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여태껏 퀄리티라는 단어에 막연히 거부감을 가지고 촌닭들과 Festeza를 이분했었다. 언젠가 노리단이 우리보다 화려하게 바투카다를 했을 때에도 더 연습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쟤네들이 죽어라 연습했을 때, 우리는 죽어라 공부했으니까.’라는 핑계대기만 했다. (누구보다 더 잘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장점이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그리고 잊었던 것은 ‘얼마나 정성을 들여서 공연을 준비하느냐.’였다. 어떤 이야기를 담을 지 고민하고, 어떻게 잘 연주하고 놀 수 있을지 이야기 나누며 고민해서 만들어가는 것이 Festeza의 공연이었다. 바투카다 이야기만 했는데, Festeza는 파고지 공연을 더 많이 하고, 연습했다. 바투카다가 화려했던 촌닭들과는 또 다르게, 노랫말과 멜로디가 있고 그 스타일로 전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우리가 계속 말해왔던 것이 아닐까 한다.

4.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이번 학기 시민문화 팀이 사라지고 나머지 디자인, 영상, 음악공연의 3개의 작업장만이 남은 것, 그리고 시민문화 워크숍이 시작된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세계를 구하는 시인들’이라는 거창한 부제를 달고 있는 이 프로젝트는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시민정체성을 이야기하며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시인들 - 市 詩 時 施 視 翅 始, 柴’을 만나는 시간이었다. 그러면서 각자가 시민으로서, 작업자로서 사회에 기여하고 참여하고 이야기 나누기를 고민하게 되었다. 나는 주니어 한 학기 내내, ‘길섶의 시인’으로서 나는 나의 ‘시柴’에 어떤 의미를 만들어가고 있는지 집중했었고 음악가로서의 역할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고 싶게 된 나에게 있어서 시민문화 워크숍은 타인의 현실을 마주하는 눈을 키우는 계기였다. ‘세계를 노래하는 것’이 내 화두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2009년 11월 2일부터 11월 8일까지 작업장 학교는 ‘예술가가 사는 마을’로서의 재활력화를 목표로 하고 있는 <예술마을 프로젝트 동+감>의 초대를 받아서 정선 사북/고한으로 7박 8일간의 여행을 다녀왔다. 과거 탄광촌이었던 사북/고한은 석탄이 주된 연료로 각광받던 시절에 경제적으로 큰 번영을 누렸고, 전국에서 일하려고 찾아온 사람들 북새통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석유가 석탄을 밀어내가면서 탄광의 경제적 사정은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고, 결국 폐광된다. 일자리를 잃은 갈 곳 없는 광부들은 도시로 이주해가거나, 마을에 가게를 내서 살게 되었다. 마을의 주민 번영회는 경제가 다시 살아나길 바라며 카지노 유치에 힘을 쏟았고, 그래서 지금 그 마을 산 중턱에는 카지노와 리조트가 들어서게 되어 경제적인 풍요는 얻을 수 있었지만 도박 중독자나 대금업만 늘어난 마을은 정작 점점 활력을 잃게 되었다고 한다. 여행의 중반에 이르러서까지도, 나에겐 어떠한 확신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출발할 때부터 그곳에서 공부한 것을 노래로 쓰고 부름으로서 내 작업을 시작하려고 마음먹었는데, 막상 카지노가 보여주는 그들 땅의 현재 모습과 탄좌와 석탄산이 보여주고 있는 역사를 접하게 되면서 마음은 답답하고, 무언가를 하고 싶은데 대체 ‘감히’ 내가 어떤 입장을 무슨 생각을 가지고 이곳에서 지켜나갈 수 있을지 몰랐다. 다른 프로젝트들에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옛 광부들이 사용하던 캐비닛, 장비들과 손때와 기름때가 뒤섞인 작업복과 벽, 폭약과 곳곳에 붙어있는 안전제일이라는 문구, 그리고 석탄 찌꺼기가 40년 동안 쌓인 경석산에 오르면서 나는 그들이 얼마나 고된 삶을 이어나갔을는지 상상하며 멋대로 내가 그 시대의 사람인양 그 시대로부터 멈춰진 시간 위에 또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는 흔적들을 보며 그들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모른 채 마치 전지적인 시점을 가진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자꾸 그들의 슬픔에 ‘공감’하려는 것이 그들이 되어서 ‘동조’하려는 식으로 되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내가 타인의 현실을 대할 때 어떤 식으로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었는지 기억해내는 것이 필요했다.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동원탄좌에 3번째 간 날, 어떤 아저씨 한 분을 만났다. 그 분은 탄광에서 25년간 일하시다가 지금은 아무도 없는 탄좌를 동료들과 지키고 있다고 하셨다. 나는 들어오면서 밖에서 보았던 하이원 리조트의 관광 개발에 대한 안내 표지판에 대해 이야기를 건넸다. 그 분께서는 혹시라도 지금껏 보존해오고 있는 흔적들을, 과거의 동료들과 함께 일했던 삶터가 관광 개발로 깎여나가는 것에 대해 우려한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물었다. “만약 정말 그렇게 되면 어떡하죠?” “그렇게 되지 않게 하도록 우리들이 여기 있는 거지.”

그 말은 마음을 잔잔하게 울렸고 나는 스스로에게 ‘그들의 흔적과 삶에서 현재의 나는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노래하려 하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졌다. 밥딜런을 모티브로 한 영화인 ‘I'm not there’에서 나에게 가장 중요하게 남았던 대사인 ‘너의 시대를 노래해라.’가 떠올랐다. 오랜 세월동안 광부들은 위험한 작업환경과 고된 노동으로의, ‘Life on Edge’를 살아가고 있었고 그것들은 그들의 존재를 흔적으로 남겼다. 그 흔적들은 내게 그 사실들을 말하고 있는 것인데, 마치 내가 광부인 것처럼 시선을 가지고 생각한다는 것은 부자연스러울뿐더러,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역사의 흔적으로부터 이어진 시간을 따라, 지금의 마을의 모습, 그럼에도 계속해서 자신의 삶터를 지켜오는 사람, 떠나야 했던 사람들에게 노래하는 것이다. 닿지 못할지 몰라도, 노래뿐이지만 적어도 나는 그 슬픔에 공감하고 위로를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기에 그들을 위한 노래를 지었다. 정선 여행에서 만났던 광부들의 역사와 더불어 내가 겪었던 시대에 대한 혼동은 시민으로서, 모두와 함께 슬픔에 공감하고 위로할 때 그들을 위한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음악가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게 했다. 동시에 여행은 내가 노래한다는 ‘동시대’나 ‘세계’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시민문화 워크숍이 끝나갈 때 즈음, 나는 이 단어들을 정의하고 내가 세계를 인식하는 과정을 들여다보고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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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가을학기 시민문화 워크숍을 정리하면서 나에게 남았던 질문들이 있다. 거의 히옥스로부터 던져졌다고 당시 심정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데, 바로 ‘우주적 관점’과 ‘세계관’에 대해서 생각해보라는 말이었다. 정말 느닷없이 커다란 이야기인 것만 같아서 차라리 머리가 아팠으면 좋았을 걸 오히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정선 여행이 나에게 넘겼던 ‘시대를 노래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아직 풀어내지 못했는데 무언가 그 위에 상위적인 개념이 얹어진 듯 머리가 무겁기만 했다. 결국 그 막연했던 말들은 에세이에 ‘여러 세계관들이 있고 그래서 내가 보지 못하는 세계관들을 갖기 위해 공부해야겠다.’라는 내용의 앞뒤 잘라먹은 말로 우겨 넣어졌다. 그렇게 새해가 되어서 작업장 학교가 홍콩과 태국 국경 지대로의 여행을 떠나면서, 내 생각이 나아갈 수 있을지 불확실한 마음속에서 막연하게나마 이 여행에 기대를 걸어야만 했다. 학교에서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2년 전 글로벌 학교가 그곳에 다녀온 기록 영상을 보다가 등장한 밴드가 ‘떠나온 사람들’이라는 노래를 불렀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사람들이나 음악하고 있다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정선에서 내가 누군가의 현실들과 만나고, 그것을 위로하고 공감하여 노래한다는 것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그때까지도 그 이야기들을 내 안으로 연장시켜 끌고 들어오는 그 과정인 ‘공감’에 대해서는, 그래서 이 이야기를 하게 된 나와는 무슨 상관인 것인지를 확실히 할 수 없게 되었다.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그것이 내 세계와 만날 수 있는 것인지를 말이다. 이번 여행을 잘해낼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우리는 거의 매일 그곳에서 NGO단체들과 만나고, 청소년들과 만나며 그들이 겪고 있는 문제 상황들에 대해서 듣게 되었고 가끔씩은 듣는 것조차 감당이 되질 않는 이야기들도 있었다. 너무나 다른 상황에서 엄청난 일들이 일어난다고 생각했고, 그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계속 수많은 ‘다름’의 벽 밖에 보이질 않았다. 나는 그 다름을 넘어서는 접점을 발견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들과 이야기한들 모든 것들이 다른 조건과 현실을 확인하는 것뿐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여행 중에는 여러 학교들과 만났는데, 특히 매솟의 CDC(Children development center)학교와 멜라 캠프의 LMTC(Leadership management training collage)학교와는 각 팀으로 나누어 Activity를 진행하면서 만났었다. Festeza는 우리가 부르던 노래들을 그곳 청소년들과 함께 부를 수 있게 하는 것을 준비했었다. 작업장 학교에서 하는 춤, 그리고 노래들을 알려주었다. 여행 일정 상 메솟에서 지내다가 멜라 캠프로 간 것이므로 먼저 CDC학교에서 activity를 진행하게 되었다. ‘뭉게구름’을 저쪽 청소년들에게 알려주고, 우리도 카렌족이 부르는 노래를 배우면서 다 같이 노래를 불렀는데, 불현 듯 지금 노래를 부르고 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인건지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래를 부른다고 자신의 상황이나 꿈, 생각들을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대체 매체 학습을 한다는 나는 지금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건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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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우리는 LMTC학교가 있는 멜라 캠프에 도착했다. LMTC에서도 CDC에서 했던 것처럼 Activity를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Tristeza와 Take me home, country road를 부르기로 정하고 1학년 학생들과 만났다. 서로 자기소개를 한 뒤, 노래를 연습하고 각자 악기를 맡아 Take me home country road를 연주할 수 있도록 연습했다. 긴 시간동안 고민해서 정한 activity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안 되는 영어도 잘 굴려보고, 진행도 하면서 열심히 했지만 아무래도 CDC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의문에 한편으로는 기분이 마냥 흥겹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열심히 연습하면서 쇼하자의 시간은 다가왔고, 우리는 히옥스의 제안으로, 나와 LMTC학생인 네이투와 칫이 ‘컨트리로드’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소개를 하기로 했다. 그 두명의 학생은 컨트리로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 노래의 멜로디는 즐겁지만, 가사는 자신의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아 슬픈 감정이 생긴다며 스피치를 마쳤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면서 이번 Activities의 쇼하자는 끝났고, 우리는 모여서 컨트리로드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이야기를 나누기 전, 컨트리로드는 당신의 시골고향일 수도 있고, 상상하고 있는 ‘이상’이나 Homeland 등… 아무래도 괜찮다고 말하고 시작을 했지만 LMTC학생들은 빠짐없이 전부다 자신의 실제적 경험과 국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처음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나였다, 난 어릴 적에 살던 나무도 있고, 산도 강도 있고 무엇보다도 지금의 내가 계속 간직할 수 있는 추억을 만들어준 고향에서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떠나와서 지금은 도시에서 살고 있고 너무 삭막한 풍경, 그리고 도시의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다른 곳을 고향이라고 불러본 적은 없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좀 당황스러웠다. 그렇게 시작을 열었는데 그 이후로 모두가 자신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그들의 경험은 마을이 불타고, 헤어지고, 누군가가 죽었던 이야기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듣고 있기가 참 미안했는데, 더욱이 많은 학생들이 이야기를 열기 전에 나를 가리키며 '나도 저 한국학생과 같습니다.'라고 말했던 까닯이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배부른 소리였을지 모른다. 나야 이 도시에서 필요에 의해 공부하고 있고, 금전적 문제도 있어서 거처를 옮기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일은 못되지만, 사실 마음먹고 다 때려치우고 돌아가서 텐트라도 치고 초야에 묻혀 살 수도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동의 '선택권'이 없었고, 나에게는 있었다. 나에 비하면, 그 사람들의 경험과 나의 것에는 엄밀한 현실의 강도가 존재하고, 그들 선택에는 나로선 상상할 수 없는 무게가 딸려있었다. 그 때문에 다른 현실을 마주했을 때 나는 대체 어렴풋이 느껴지는 접점이 대체 어디쯤에 있는 건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다만 그들이 했던 두 가지 말을 잊을 수가 없다. ‘나도 저 한국 학생과 같습니다.’ 그리고, ‘우선 이렇게 우리들의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긴 것에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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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메솟에서의 일정이 막바지에 다다를 때 즈음, 우리는 CDC학교 친구들과 태국-버마간 국경 다리를 방문했던 때가 기억난다. 그곳을 본 순간, 나는 허탈함과 동시에 가슴이 먹먹해져옴을 느낄 수 있었다. 작은 강이 하나, 그 위에 커다란 다리가 놓여 있는데 인근 주민들이 태국에서 장을 본 뒤 그 다리를 통해 버마로 돌아가기도 하고, 삯을 내고 커다란 튜브로 건너편까지 가기도 하는 것이 보였다. 벌거벗은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곳곳에 군인들이 순찰을 돌기는 했지만, 엄중한 검문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사람들은 그대로 자유로이 국경을 넘고 있었다. 마웅저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니, 오가는 것은 딱히 어떤 검문이나 심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불법 이주해서 살 수 없도록 자동으로 12시간의 비자가 있고, 그 기한을 넘기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아이들에게는 국경을 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지만 진짜 문제는 국경을 넘은 뒤, 타국에서 앞으로 살아가는 것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너려면, 건널 수 있지만 건너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그 다리를 보았을 때 느꼈던 감정들은 웬 것일까 생각해보았었다. 바로 눈앞에 자신들의 조국이 보이고 넘어갈 수 있는 다리가 있는데도 넘어갈 수 없었던 CDC 학생들을 보면서 나는 왜 슬퍼졌는지. 내 고향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분명 나에게는 이동의 권리만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몇 년마다 찾아가는 내 고향의 산과 흙은 점점 파여져 없어져가고, 도로들은 계속 새로 닦여지고, 집은 사라지고 지어지고, 시냇물은 메말라가며 옛 모습을 잃어가고 있었다. 갈 수는 있다, 하지만 이미 내가 알고 있던 그 모습들은 하나 둘씩 자취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산업 개발화의 물결이라고 해야 하는지.

다시 내가 왜 저들 앞에 놓인 강을 보며 가슴이 먹먹해졌는지 묻는다면, 나는 어쩌면 그것은 내가 ‘모름지기 인간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점점 사라져가는 내 고향으로 가는 것이 힘들어지겠지만, 나는 그들이 앞에 놓인 강의 경계를 넘을 수 있도록 지지하고 응원해줄 수 있고, 그들 또한 다른 현실들에 대해 지지하고 응원해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들의 상황과 내 상황을 연결할 ‘전 지구적’인 문제의 지점을 찾으려거든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전에 전 지구적인 감수성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나와는 다른, 가령 아이티의 지진 난민들이라든가, 몰디브의 난민들이라든가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을, 개발로 서식지를 잃고 쫓겨나는 도롱뇽, 족제비, 너구리들을 보고 눈물짓는 것은 왜 그런 것일까? 난 그것이 ‘우리가 사람이면 누구나 그러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생각을 한다. 이것은 우리가 마치 경제적 이윤만을 바라보고 강바닥을 콘크리트로 뒤덮어 버리고 산의 구멍을 뚫는 것과 같다. 아무리 한쪽에서 자연보호를 외쳐도 공사가 멈추지 않는 것은 무조건 그 사람들이 나쁘다기만보다는 그저 같은 세계의 일면인 다른 현실들을 보는 세계관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럴 때에는 ‘생태적’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전 지구적’, ‘전 생물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주거지를 잃어가고 있지만, 동물들은 서식지를 잃어가고 있는 세상이고, 원인인 개발문제, 기후변화는 전혀 다른 문제들이 만나지 못하는 평행선 같은 것이 아니다. 모든 상황과 입장이 얽혀져 있는 상황이고 그렇기 때문에 작업장 학교에서 기후변화를 이야기하는 동시에, 개발이나 이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두 개의 관심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각자의 매체를 통해서 동시대의 여러 세계관들이 교차하는 부분을 바라보는 생태적인 감수성을 가지고 파편화된 각각의 삶들을 잇는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가 다 같이 노래하고, 노래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지지하게 되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 지금 노래가 가질 수 있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모두가 같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필요한 시점이다.

5. Sing along

줄곧 음악가를 이야기하며 노래를 짓겠다고 말했었는데, 지금 보니까 5곡 밖에 되질 않는다. 사실 멜로디나 코드만으로 흥얼거리는 곡들은 꽤 있었던 것 같은데 막상 노래로서 완성시키지 못한 것들을 보니 가사를 붙이는 것이 어려웠나보다. 왜 그랬냐면, 할 이야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주니어 과정동안, ‘음악가’는 나의 가장 커다란 화두였다. 정선의 폐광촌에서도, 유스호스텔을 짓기 위해 깊숙이 파헤쳐진 하자 앞마당에서도, 강바닥이 드러난 개발 중인 낙동강에서도, 군부 독재를 피해 국경을 넘어 타국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만나면서도 나는 음악가로서 어떻게 노래를 해야 할까 고민했었다. 많은 생각이 들었고, 나는 회고 모임 중에 들려오는 다른 사람들의 말들보다는 많은 이야기들을 어떻게 멋지게 정리해서 보여줄지 궁리하게만 되었다. 그러는 것이 쉽지 않을 터인데도,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되다보니 잘 되지 않을 때는 혼자 힘들어하고 좌절하기도 했었다. 지금까지의 나를 되돌아보면 힘들다 말하고 지쳐하던 시간들이 많았다. 길찾기였을 무렵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다른 사람들과 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도 유독 지쳐하고, 힘들어하며 즐거워하지 못하는 모습들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아마 아직도 어깨의 힘을 빼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유독 어깨근육이 뭉쳐있고 쉽게 피로해지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것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옆에 Festeza가 있었고, 죽돌들이 있었지만 무언가 혼자 대단한 것을 해냈다고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내 작업’이라고 꼬리표가 붙은 것들은 전혀 나누지 않고 혼자 해내려 했다. 아직까지 내가 쓴 노래 중 단 한곡도 페스테자와 같이 부른 노래가 없다는 게 의아하다.

길찾기로 입학하면서 나는 ‘음악가로서 메시지를 던지고 싶다.’고 말했다. 그건 아티스트였다. ‘나 홀로 음악의 길을 걸을테요.’하면서 씁쓸하게 세상에 물음을 ‘던지는’, 그런 사람. Festeza, 그리고 내 음악의 Quality와 프로페셔널에 대해서 혼란스러웠을 때, 나는 작업장학교에서의 공부를 통해 내게 ‘뮤지션으로서의 프로페셔널’이 보장될 수 있는지 확신이 없었던 적이 있다. 지금은 좀 다른 것 같다. ‘음악가’가 좋은 것은 아직도 변함이 없지만, ‘좋아서 하는 음악’을 지속하면서도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들 하면서 같이 무언가를 도모할 수 있는 사람들과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작업장학교에 들어올 무렵 나는 ‘솔로플레이’였다. 중학교에 다닐 때에는 이미 스스로 아웃사이더를 자칭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길찾기가 되어서도 다른 사람들이 낯설어서 혼자서 끙끙대다가 지치는게 일상다반사였고, 주니어로 올라와 Festeza라는 팀에 소속되어서도 가끔씩 찾아오는 알 수 없는 외로움이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에세이를 쓰고 있는 지금 무렵도 사실 완전히 솔로플레이가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아직까지도 내게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한다는 것이 때로는 어렵고 어색할 때가 있다. 그렇지만 이 1년간은 감히 다른 누군가에게 돌리지 못했던 몸의 방향을 틀어서 타인을, 세계를 그리고 그 안에 나를 받아들여서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 묻는 시도를 했던 1년이었다.

하나의 노래로 많은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뒤에 말이 긴 것도 보기 좋지는 않다. 요즘 들어서 나에게 ‘짧고 간결함’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앞으로는 짧고 별 것 아니더라도 나누고 연찬하면서 나아가는 시도들과 함께 살아가는 수밖에는 없는 것 같다. 서로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그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의 기대들을 살피면서 가고 싶다. 지금 와서 좀 늦었다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지금까지는 앞으로 이어질 모든 만남의 가능성들을 이야기했던 것 같기 때문에 앞으로도 서로가 서로의 ‘다시 만나도 좋은 사람들’이 될 수 있으면 충분한 것 같다.

혼자만 부르던 노래를 어느새 다른 사람들 앞에서 부르고 있고, 학교의 모두가 한 노래를 부르고 나아가서 처음 만난 사람들과도 노래하며 만나기까지, 노래 자체의 의미를 물어왔다면, 이제는 그 너머서 ‘노래를 부르고 논 다음’에 있을 수 있는 만남과 이야기들을 찾으려 한다. 작업장학교에서 지내면서, 나는 노래 부르는 법부터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