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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IOS글 수 1,063
하자작업장학교에서는 매년 고정희시인의 기일에 해남에 내려가는 일정이 있었다. 내가 제일 처음으로 갔을 때는 내가 길찾기였던 2008년이고 그 후 2009년 그리고 올해까지 총 3번 참가하였다. 처음 고정희 시인을 만나러 여행을 떠났을 때를 생각해보면 그 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냥 여행을 떠나는 느낌이었다. 나에게는 그저 남도의 풍경이 익숙하였고 마음 편안하게 하였다. 그리고 3번에 와서 지금 고정희 시인을 만나러 간다는 게 나에게 어떤 것일까 자꾸 생각해보게 된다. 이번 여행은 순탄치 못한 출발로 시작하였다. 자동차 바퀴의 펑크와 렌트 문제 등 시간이 지연되면서 앞으로 갈 길이 막막하였다. 하지만 수도권을 빠져나오면서 건물들이 하나둘 씩 낮아지고 푸르른 논과 산들이 내 눈 앞에 하나둘 펼쳐질 때 왠지 모르게 마음에 안정감이 찾아왔다. 이맘때쯤 남도로 찾아갈 때 볼 수 있는 풍경들은 여전하였다. 저녁 늦게 도착한 미황사에는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고 우리가 포잇트리 나잇을 할때는 비가 많이 왔다. 우리는 각자 준비한 시를 읽고 음악도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이번 여행에는 산과 땀, toto, 왕양도 참여하여 서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듣기도 하였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에 내 이야기는 쉽사리 꺼내진 못하였다. 히옥스는 내년에도 다시 이곳에 올지에 대하여 고민이 많으셨던 것 같다. 나는 포잇트리 시간에 고정희 시인의 남도행을 읽었었다. 나는 그 시를 읽을 때 고정희 시인이 버스를 타고 창밖을 내다보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 때 고정희 시인은 어땠을까. 그리고 내가 창밖으로 봤던 풍경들이 겹치면서 그 느낌이 좋아 시도 좋아졌다. 처음 내가 고정희 시인을 알게 되었을 때는 죽은 시인이라는 사실에 왠지 모르게 엄숙한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또문 동인분들에게 고정희 시인의 생전 이야기를 듣다보면 무거운 느낌은 누그러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매년 고정희 시인을 찾는 이유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생각도 해본다. 조상이 죽으면 모시는 것은 한국의 전통이다. 고정희 시인을 찾아뵙는 것은 그런 전통을 따른 것은 아닌 것 같지만 어쨌든 시인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마음 내어 하던 것도 형식적으로 되어 습관처럼 일을 처리하기도 한다. 소녀들의 페미니즘에서 고정희 시인은 cultural hero 였다고 한다. 나는 처음에 학교 일정을 따라 가본 것으로 시작한 이 여행이 아직도 그 수준을 넘지 못한 것 같아 한편으로는 어떻게 고정희 여행에 대해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일까, 서로 통한다는 게 쉬운 일일까, 나는 고정희 시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라는 생각들을 해본다. 우리는 고정희 시인이 좋아하던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선물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고정희 시인이 좋아하셨을지는 모르겠다. ![]()
2010.06.16 04:11:49
2010 고정희 추모 기행 올해로 19주년 고정희 시인의 추모 기행. 왜 그녀를 몇 년 동안 지속적으로 찾아간 걸까? 이 물음을 아직 더 던져봐야 할 것 같다. 이번 2010년 추모기행을 시작으로, 해남이라는 먼 땅 끝 마을로 ‘시 여행’이라는 주제를 갖고 떠난 것이 나에겐 처음이었다. 바닷가 마을로 연상되었던 해남을 ‘시’의 마을로 생각하니 1일 밤 묵었던 미황사도, 만난 사람들도 새롭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죽은 시인의 남겨진 시를 읽고, 듣고, 나누며 자기 느낌과 감정 속에서 시인을 만났다. 고정희 시인은 치열한 현실 인식과 여성해방주의, 기독교정신, 지리산을 그리고 해남을 떠올리게 하는 시인, 우아하고 고상한 여성시인 보다는 ‘시’라는 자기표현과 신념으로 부당한 현실에 분노하고 눈물을 흘리며 끝없이 개혁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했던 시인이었다고 한다. 또한 고정희 시인은 또문의 동기였다. 이번 고정희 추모기행에 함께 자리를 채웠던 또문 고정희 동년배 어른들은 “고정희 시인은 자기 전에 꼭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노래를 부르며 기타를 치곤 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시를 한편씩 꼭 지었지요.”라며 고정희 시인을 떠올리시더라. 고정희시인 생가에 가보니 몇차례 오간 사람들의 흔적이 눈에 띄었다. 여러 그림과 조각상, 방명록 등등.. 그렇게 오래도록 고정희시인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고정희 시인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남긴 몇 권의 시집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시인의 마을을 찾아가 시인이 몸담았던 생가를 방문하고, 무덤 앞에서 시인이 좋아하던 노래를 부르면서였다. 시인의 남겨진 시만을 읽은 나는 내 감정과 느낌 속에서 시인을 상상했다. 처음으로 가게 된 여행이었지만 올해로 또문과 하자의 19번째인 고정희 추모기행을 간다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생각하게 된다. 지난 8개월 동안 매주 화요일 저녁 poetry afternoon 시간을 가지면서 여러 시인의 시를 읽었다. 시는 사람에 따라, 또는 시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다른 시간대에 읽으면 다르게 다가오기도 한다. 우리는 해남 죽은 시인의 마을에 방문해 시를 읽었다. 시인은 죽어도 시는 죽지 않는다는 말이 머리에 계속 맴돌았다. 그럼 죽은 시인의 시를 읽으며 어떤 의미를 되새길 수 있을까? 지금과 앞으로 다른 여러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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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번째 고정희 추모기행
나는 이번이 세 번째 추모기행이었다.
처음 고정희 추모기행을 간다고 했을 때는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 이미 죽어서 땅 밑에 묻힌 사람을 통해서 그를 추모하러 온 여러 사람들과 만난다는 것이 마냥 설렜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난 학기 우리는 저마다 각자의 ‘시’를 가졌고, 앞으로도 그 것을 잊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수료식 이후로 그저 품고만 있었던 나의 ‘시’는 영화 ‘시’를 보면서, 그리고 고정희 추모기행을 준비하면서 다시 조금씩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번 기행은 첫 날부터 생각지도 않은 비가 내리는 바람에 우리는 그녀를 위해 준비한 노래를 과연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매년 방식이 바뀌긴 하겠지만 기억하려는 마음과 움직임은 그대로일 것 같았고, 이번에는 노래하는 것이 그녀를 기억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하자에 들어와서 새 학기가 되어 1년의 일정을 살펴보면 이미 계획되어 있는 큰 일정에는 고정희 추모기행이 늘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추모한다는 것은 기억한다는 것인데 멀리 해남까지 고정희 시인을 만나러 가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만큼 고정희 시인이 특별한 사람인지 점점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그것이 어느 순간 일정에 있기 때문에 그냥 가는 것이 되어버리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고, 그렇기에 해남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그저 만나는 것일 뿐, 그들이 고정희 시인의 시는 읽어봤는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이번 2박 3일 동안 나는 영화 '시‘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리고 지난 번 핀란드 워크숍에서 오띠의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자신의 속엣 것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는 말이 생각나면서 무엇인가 눈앞에 보이고 머릿속에 들어오고, 마음에도 들어와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의 내가 생각났다.
고정희 시인도 속에 담아두기에는 너무 벅차고 큰 것을 시로 쓰는 것이고, 영화 ‘시’에서의 미자 또한 비슷한 것을 느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시를 쓰는 것, 적는 것이 아니었을까? 시를 쓰다는 것이 어떤 표현 방법으로써만 쓰이는 것이 아닌 꼭 ‘시’여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그 속에만 담아 둘 수 없었던 것이, 그래서 겉으로 표현해야 하는데, 그 방법이 시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뭘까 생각하고 있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