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이지행선생님 번역한 휴고 뮌스터베르크의 글 중 일부예요.
좀 어려울 수 있다고 하셨는데, 대략의 감을 잡기만 하면 된다고 하시네요.
화면에서 직접 봐도 되고, 파일을 프린트해서 읽어도 됩니다.
내일부터 한 두 시간 더 모두가 참석하는 시간으로 하고, 이후에는 (10월부터는)
선택한 사람들 중심으로 진행해도 될 것 같으니 우리 미팅할 때 의견을 줘도 좋겠습니다.
아무튼 결론: 겁 먹지말고, 모두 읽어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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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고 뮌스터베르크 
<Photoplay: a psychological study>: Chapter 9-11 EXCERPT 정리   
포토플레이: 심리학적 연구: 9-11장 발췌
                                                
                                                                                                         번역 이지행

chapter 9. 영화의 방법

예술이란: 우리의 실제 삶과는 절연되어 있으면서도 완벽힌 우리의 실제 삶 physical reality에 기초해 이루어져야 한다. 영화가 리얼리티를 극복하는 방식은 중요한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삶으로부터 절연시키는 것. 우리가 실제 삶 안에서 느끼면서도 실제 삶과는 거리를 유지하고 영화속 요소들의 조화를 느낄수 있게 하려면 영화가 가지는 심리학적 기제들을 다시 꺼내보아야 한다. 

우리 마음 속의 내재적 움직임에 의해 형상화된 드라마틱한 사건들
영화 화면 속 사건들은 실재하는 어떤 장소에서 실제로 찍은 것들이다. 하지만 관객은 이 화면을 외부세계에서 일어나는 3차원적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단지 flat picture로 본다.  실제 우리가 보는 영상은 하나하나의 움직임들이 프레임으로 분절되어 있는것들이 결합되어 있는 영상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우리의 마음은 그런 객관적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그 영상을 하나로 묶어내어 보는 것이다. 
  • 집중attention: 디테일한 요소들에 집중하게 되면 그밖의 것들은 무시된다. 영화에서 클로즈업을 하면 클로즈업된 디테일은 확대되고 나머지 것들은 사라진다. 
  • 기억memory: 과거의 사진들을 꺼내봄으로써 기억은 현재적 사건으로 끼어 들어온다. 영화에서는 잦은 컷 백으로 과거의 일들을 현재적 시간 사이로 끼워넣는다. 
  • 상상imagination: 미래를 기대하거나 공상 혹은 꿈을 꾸며 현실을 극복하는 것이다. 영화는 그 어떤 상상보다도 이러한 일들을 더 잘해낸다. 
  • 흥미interest: 흥미가 나뉘게 되면 우리 마음은 이리 저리로 왔다갔다 한다. 각기 다른 장소에서 평행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우리는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이런 우리 마음이 하는 행위를, 각각 다른 씬들을 교차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실현한다. 전 세계의 여러 곳에서 일어나는 행위가 하나로 묶여 하나의 종합적인 행위를 만든다. 
  • 감정emotion: 마지막으로 관객의 마음 속 감정의 모든 결들이 영화의 씬을 형성하고 결국 그것은 우리의 감정의 구현이 된다. 
영화는 외부 세계의 어떤 형식 즉 공간space, 시간time, 인과율causality을 뛰어넘어 그것을 내부 세계의 형식 즉 집중, 기억, 상상, 감정이라는 형식들로 사건을 조정한다.  

영화와 무대공연의 차이
모든 예술작품은 어느 정도 우리의 실용적인 관심 범위에서 조금은 떨어져 구분되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극장도 마찬가지다. 극장의 구조 자체와 무대의 프레임화된 형태, 무대와 집안의 조명 자체의 차이, 무대장치와 의상, 이 모든 것들이 무대에서 일어나는 액션을 실제의 삶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을 차단한다. 무대 매니저들은 관객석에도 똑같이 밝은 빛을 비춤으로써 무대와 객석의 차이를 최소화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지만, 이 때문에 ‘현실로부터의 거리감’이라는 것이 약화되어 드라마틱한 효과도 감소되는 것을 목격했다. 극장과 영화의 이런 점은 명백하게 똑같다. 스크린 역시 스크린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완벽한 비실제성unreality을 처음부터 암시하고 있다. 영화극은 연극보다 물리적인 현실로부터 훨씬 떨어져있으며 물리적 세계로부터 떨어져 있을수록 정신적 세계에는 그만큼 더 가깝다는 이야기가 된다.

판토마임(무언극)은 연극에 있어 위세가 있는 장르다. 하지만 무성영화와는 차이가 있다. 
판토마임은 대사가 없음으로 인해 리얼리티에서 좀 더 떨어져 있는 효과는 주었지만 그렇더라도 배우 자체가 무대에서 차지하는 육체적 존재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무언극에서의 연기와 영화 속에서의 배우의 연기의 차이점-이 둘은 내부적 상태의 표현과 제스처의 체계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다르다: 그리고 영화가 판토마임보다 훨씬 실제적인 삶에 가깝다. 영화배우는 말로 자신들의 행동이나 생각의 의미를 표현할 수 있는 상태보다는 훨씬 더 제스춰의 리듬이라든지 강도에 의존해야 하는게 사실이다. 영화배우는 아주 감정적인 사람이 할듯한 행동들을 할뿐이다. 그러나 판토마임 배우는 그것만 가지고는 안된다. 그는 아주 부자연스러운, 즉 감정의 인위적인 표현을 덧붙여야만 한다. 단순히 화난 사람처럼 행동해서는 안되고 자신의 화에 관심을 느끼고 그것을 타인에게 표현하고자 하는 일념이 엿보이는 사람처럼 연기해야 한다. 즉 관객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전시하는 것이다. 

space issue 공간
몸의bodily 리얼리티로부터 결정적으로 거리를 두게 만드는 요소는, 영화에서는 배우 자체가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를 찍은 화면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바로, 영화속 인물들이 피와 살을 가진 인간으로 우리 앞에 서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그 화면이 평면적임에 대해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영화라는 것은 배우들을 반사된 렌더링을 통해 보는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을 스크린으로 옮기는 것은 단순한 거울 반사보다 훨씬 더 복합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이런 전달상의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화면에서 보는 것은 실제 배우들인 것이다. 영화에서 우리는 배우들 자체를 본다. 그것이 실제 서있는 사람을 보는 것과 다른 인상을 주는 이유는 우리가 카메라로 재생산된 매체를 통해서 살아있는 사람을 보는 것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재생산이 몸이 지닌bodily 공간 자체를 삭제해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화면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실제 세계의 실제적인 깊이감을 느끼게 만들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에서 펼쳐지는 플라스틱한 세계에 흥미를 놓지 않으면서도 사람이 움직일때 그 실제적 깊이감을 알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인지의 대상은 깊이감이 없는 상태이다. 이러한 공간에 대한 이슈는 우리로 하여금 무거움과 강고함 그리고 물질성이, 가벼운 비물질성으로 대체되야 한다는 점을 알게 한다

time issue 시간
영화가 실제 연극 무대의 공간적 가치만을 없애는것은 아니다. 공간 뿐 아니라 시간적 가치마저 바꾸어 놓는다. 연극 무대에서 플롯은 현실의 시간 순서에 따라 제시된다. 연극은 실제 시간의 기본적 원칙-즉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이동한다는-에 매여있을 수 밖에 없다.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연극의 사건들은 좀전에 우리가 봤던 연극의 사건들 다음 이야기 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완벽한 시간적 통일성을 요구하는 경직된 고전적 요구가 어떤 드라마에나 적용되는 건 아니지만 만약 3막에 나온 이야기가 2막 이전에 일어난 것이라면 희곡은 그것의 임무를 포기한 셈이 된다. 물론 극 안에 또다른 극이 있을수는 있다. 무대의 배우들은 무대에 등장해 있는 프랑스 왕 앞에서 고대 로마시대의 사건들을 연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현재 안에서 과거를 드러내는 것이므로 실제적 사건의 순서에 조응하는 것이다. 반면 영화는 물리적physical 우주의 이런 시간적 구조를 반드시 지켜야 할 필요는 없다. 영화는 어떤 순간에라도 전진하는 이야기를 멈추고 우리를 과거로 데려갈 수 있다. 공상의 자유와 생각의 접합의 이동성으로 말미암아 과거의 화면들이 현재의 씬들을 뚫고 들어온다. 시간은 이때 뒤로 남겨지는 것이다. 남자가 다시 소년이 되고 오늘은 과거와 함께 한 씬으로 구축된다. 마음의 자유가 외부 세계의 바뀔수 없는 법칙에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오늘날 희곡작가들이 영화에서의 시간 개념을 빌려와 무대에서 시간의 역전을 실험하기도 한다. 이러한 실험은 매우 암시적이기 하나 순수한 드라마 예술은 아니다. 나중에 일어난 사건이 앞에 일어난 사건보다 앞에 오는 드라마는 인위적인 극에 있어서 영리한 트릭일지는 몰라도 연극 드라마에 있어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이른바 미학적으로 미개한 행위이다. 그러나 이런 점들은 영화에 있어서 충분히 허용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자연스럽기 까지 하다. 세상을 화면picture으로 반영하는 행위는 시간의 강고한 메커니즘 속에 묶여있지 않다. 우리의 마음은 여기 혹은 저기에도 존재하며 우리의 마음은 현재로도 과거로도 갈수 있다. 영화는 물질적 세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이 모든 것을 공평하게 다룰수 있다. 

causality issue 인과율
연극 무대에는 오로지 공간과 시간적 속박만 있는 건 아니다. 연극에서 보여지는 것들은 자연의 지배적 원칙인 인과율에 제한을 받는다. 이 인과율에는 실제 일어나는 사건들의 연속성도 포함된다. 이른바 원인 없이 결과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적인 사건의 흐름은 스크린에서 반드시 존중받지는 않는다. 리얼리티로부터의 일탈은 우리가 영화의 심리학적 효과 부분에서 논의한 대로 연속적인 움직임으로부터 시작된다. 영화속의 움직임에 대한 인식은 각각 떨어진 화면들(프레임)을 하나로 묶으려는 우리 마음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인해 비롯된다. (분수 sample) 이런 화면들의 분수같은 움직임이 인과론적인 세계를 완벽하게 뛰어넘는 것이다. 우리는 씬이 갑자기 변화할 때도 인과율을 벗어나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과정은 자연스러운 결과를 이끌어내지 않는다. 동작이 시작된다. 그러나 이 동작이 어떤 결과를 이끌어내기 전에 화면은 다른 장면으로 대치된다. 이 새로운 씬은 어떠한 원인이 없는 결과다.이러한 씬의 섞임은 인과율에 대한 어떤 모순을 이룬다. 영화에서는, 원인들로 이루어진 고리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려는 찰나 영화가 갑자기 중지된다. 결과는 없는 원인들만 남는 것이다. 

그럼에도 존재하는 영화의 법칙- unity 통일성
영화가 공간과 시간 그리고 인과율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롭다고는 하나, 이런 영화를 지배하는 법칙은 존재한다. 우리는 앞에서 영화의 장면이 다른 장면으로 자유로이 대치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음악의 흐름과 비교될 만한 점이 있다고 말한바 있다. 정신적 에너지나 집중, 그리고 감정에 의해 좌우되는 영화적 흐름은 음악적인 멜로디나 하모니에서 더욱 완벽한 형태로 목격될수 있다. 아무리 음악적 천재라 할지라도 자신의 음악이 그 자체로 완벽한 통일성을 이뤄야 한다는 철의 원칙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음악은 물론 모든 예술 장르에서도 이것은 마찬가지다. 영화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공간, 시간의 물리적 형태와 인과율로부터의 자유로움이 이러한 미학적인 결합으로부터도 자유로움이라고 오해되서는 안된다. 마치 음악이 문학에 비해 더욱 기술적인 원칙들에 둘러싸인 것처럼 영화 역시 연극보다 훨씬 견고한 미학적 요구들에 의해 둘러싸여있다. 공간, 시간, 인과율에 종속된 예술은 외부세계와의 연결성이라는 요소를 포함한 물질적 형태에 의한 견고한 구조를 가진다면, 이러한 형태로부터 자유롭고 외부적 요인보다는 정신적인 드라마의 자유로움을 가지는 모든 예술은 만약 그 자체의 미학적 통일성이 떨어진다면 산산조각이 난다. 

통일성에 있어 첫째로 감안해야 할 것은 액션의 통일성이다. 이것은 연극에서의 액션의 통일성과 동일하다. 외부적 요소가 쉽게 치고 들어오고 개별적인 흥미요소들이 산발하는 영화에서 이런 액션의 통일성을 무시해버리고 싶은 유혹은 쉽게 생긴다. 영화는 물론 어떤 다른 예술에서도, 통일성있는 액션을 내보이기 위해 내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존재할 필요가 없다. 두가지 플롯이 있을때 보다는 단일한 플롯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더욱 더 잘 받아들인다. 통일된 액션에 일장 연설이나 프로파간다가 유기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끼어 들어와 이야기를 망칠때 우리는 그것을 가치 없다고 치부해버린다. 이러한 통일성에는 완벽한 절연isolation도 포함되어 있다. 예술적 창작을 실질적인 관심사들과 결부시킨다면 미는 무력화되고 관객은 구경꾼으로 전락된다. 극의 배경은 우리가 다음 휴가를 어디서 보낼지에 대한 힌트를 얻는 곳이 아니다. 극중의 내부 인테리어는 백화점의 전시 인테리어가 아니다. 플롯의 액션을 연기하는 배우들은 우리가 거리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사람들이어선 안된다. 극의 모든 실타래는 극 안에서 연결이 되어야지 우리의 외부적 관심사와 연결되어선 안된다. 좋은 영화는 반드시 절연되어야 하고 마치 아름다운 멜로디처럼 그 자체가 스스로 완결적이어야 한다. 새로 유행할 패션 광고같은 것이 되어선 안된다는 거다. 

액션의 통일성에는 캐릭터의 통일성도 있다. 영화 이론가들은 캐릭터의 계발은 희곡의 임무이지 영화에서는 캐릭터의 타입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의 영화가 발전시키지 못한 어떤 분야의 원시적인 상태를 반영한다. 영화라고 해서 복합적인 캐릭터를 섬세하게 표현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건 캐릭터가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며 액션이 내부적 필요성에 의거해 만들어지고 캐릭터 역시 플롯에 따라 하모니를 이루며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통일성을 주장하게 되면 더 이상 극의 내용인 액션에만 주의를 기울일수는 없게 된다. 형태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음악은 멜로디가 리듬이, 그림은 주제에 맞는 컬러 배합이 있는 것처럼 시에는 운율이 있는것처럼 영화 역시 액션과 화면적 표현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매 화면마다 말이다. 화가가 내부적인 통합성을 이루기 위해서 선과 곡선, 색깔을 적절히 배합하는 것처럼, 영화 역시 한 릴을 만들기 위해 몇만개의 프레임이 이러한 형태의 통일성을 유지하며 서로 배합되어야 한다

결론: 영화는 공간, 시간, 그리고 인과율이라는 물리적인 형태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인간 행위의 중요한 갈등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매체이다. 이 매체는 우리의 정신적 경험들의 자유로운 상영에 의거해 그 기준이 맞추어져 있는데, 영화는 따라서 물리적 세계로부터 완벽한 절연을 이루어야 하며 플롯과 화면의 완벽한 통일성을 이루어야 한다.          
   

chapter 10. 영화의 요구

시나리오 작가와 연출자의 상상력의 재능이 특출해서 아무런 원칙같은게 필요하지 않은 그런 상황이 가장 훌륭하다. 뛰어난 예술가의 예술적 재능에서 나오는 깊이만큼 흥미롭고 중요한 것은 없다. 예술적 재능만 뛰어나다면 거기서 나오는 작품의 형식과 내용의 통일성은 자연스럽고 완벽하다. 

영화가 다른 타 예술과 비교되는 가장 특징적인 점이라 하면, 영화 예술은 두 개의 각각 다른 창의적 재능의 합작품이라는 것이다. 즉 시나리오 작가와 연출자다. 오페라, 뮤지컬 같은 경우 작곡가와 작가가 있긴 하지만 둘은 서로 독립된 영역에서 각자의 독립적 예술을 한다. 영화는 시나리오 작가가 쓴 글을 연출자가 영상으로 옮기지 않으면 일체 무용한 것이 되버린다. 영화 연출자는 무대 연출가와는 완전히 다르다. 무대 연출가가 자신의 기량과 비주얼한 상상력으로 첨부하는 것은 말 그대로 희곡의 드라마적 액션의 구현에 불과하다. 그러나 영화 연출자는 극을 말 그대로 영상으로 옮기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만의 창조적인 예술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연극에서의 강조점은 대사에 있지만 영화에서의 강조점은 화면에 있고 그 화면을 만들어 내는 사람은 연출자인 것이다.

화면이라는 매체에 걸맞는 시나리오의 필요성
시나리오 작가도 역시 드라마적인 구성만 잘해선 안된다. 글을 쓰는 매순간 자신이 책을 쓰는게 아니라 스크린에서 상영될 이야기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다시말해, 영화란 그저 화면으로 옮긴 연극이 아니라 영화 매체 고유의 심리학적 조건에 의해 제한받는 매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걸 기억하는 순간 영화가 다른 예술 장르의 기계적 재생산이 아니라 특별한 종류의 예술장르가 되는 것이고 따라서 이러한 예술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은 예술가적 존엄성을 깍아먹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종류의 재능이 뒷받침 되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시나리오 문학이라는 것은 희곡의 위대한 작품들과 비견하기에는 비교할 것이 없을 정도로 쌓아놓은 것이 없다. 이러한 수준 높은 시나리오가 양산되기 위해서는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높은 이상적 노력을 들일 만큼 가치있는 예술 장르라는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영화가 많은 부분 연극과 비슷한 속성을 가진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두 매체 모두 인물의 이해관계 및 행위의 갈등에 기대고 있다. 희비극을 가리지 않고 이러한 갈등은 무대와 스크린 양 쪽 모두에서 비슷한 발달과정과 해결책을 요구한다. 이러한 의지의 충돌이 살아있는 배우의 목소리로 전달될때와 화면을 통해서 전달될때의 차이점은, 그 예술적인 개념에 있어서 아주 크다. 따라서 스크린으로 전달된다는 인식 하에 써진, 진정한 힘과 영향력을 가진 오리지널한 시나리오 문학에 대한 필요성은 크다고 할 수밖에 없다. 영화가 희곡 작품에 그 시나리오를 계속 공급받는 한 이 새로운 영화 예술은 절대로 성립될 수 없으며 진정한 목표를 달성 할수 없다. 햄릿과 리어왕이 영화로 만들었을 때 형편없는 것은 세익스피어의 잘못이 아니다. 만약 세익스피어가 시나리오 작가였고, 그의 시나리오를 토대로 희곡으로 각색되어 세익스피어가 연극무대에 올려졌다면 그 연극 역시 만족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잘 팔리는 베스트 셀러는 간혹 훌륭하게 희곡으로 탈바꿈되곤 한다. 하지만 브로드웨이에서 롱런한 사회극이 신문 연재 소설로 탈바꿈되는 경우는 잘 없다. 하지만 문학이 아주 높은 수준에 올라있을 경우, 소설과 희곡의 차이는 선명하다. 소설을 포함한 서사 장르는 인물의 경험과 발전을 추적하는 반면 희곡은 캐릭터의 갈등에 기댄다. 인물의 성격을 탐험하는 것 만으로는 훌륭한 희곡을 만들기 어렵고 영화의 플롯으로도 적당하지 않다. 소설에서 대립자의 역할은 주인공의 생애를 보여주기 위한 사회적 배경에 해당될 뿐이다. 반면 드라마적 갈등에서는 이 대립자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만약 소설이 드라마적인 플롯을 가진 소설적인 렌더링이 아니라 실제 진짜 소설이라면, 소설이 스크린으로 옮겨졌을때 생기를 잃고 영감을 주지도 않는다. 반면, 영화는 희곡보다 훨씬 인간 행위의 배경을 강조하는 편이고 이런 점에선 소설과 비슷한 속성을 공유한다. 이야기 속 주인공의 성장에 있어서 진짜 배경은 사회적이고 자연적인 배경이다. 소설의 이런 점은 영화로 쉽게 옮겨지고, 어떤 영화화된 소설은 영화화된 희곡보다 훨씬 잇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희곡이든 소설이든 영화 시나리오로 그 자체로는 충분하진 않다. 영화시인은 반드시 삶 그 자체에 관심을 돌려 그 삶을 예술적으로 리모델링해야만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 만약 영화라는 것의 기본적인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무대극이나 소설보다 그의 상상력이 그를 더 훌륭한 영화라는 것에 안전하게 인도할 것이다. 

무성영화의 중간자막 삽입에 대해
 만약 우리가 연기만 보고 미리 나오는 ‘리더’라는 것에서 나온 정보를 얻지 않는다면 영화의 이야기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겠는가. 제작사마다 이것은 다른데, 어떤 영화는 배우가 말하는 화면 위에 대사를 하얀 자막으로 쏘기도 한다. (마치 신문의 만화처럼)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배우의 연기가 진행되는 도중 까만 화면이 끼어들면서 배우의 대사나 혹은 설명적 나레이션이 삽입된다. 이런 방법은 화면을 해석하는데 덜 익숙한 관객들을 위한 양보이기도 하지만 대개는 이런 자막 없이는 플롯을 이해할수도 없고 지적인 관객일지라도 이런 가이드 없이는 무슨 말인지 모를 경우가 많다. 이런 방법에 영화가 의존하는 이유는 아직도 시나리오 작가들이 새로운 예술의 테크닉을 사용하는데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영화는 이런 화면 외적인 요소로부터 점점 자유로와 질 것이다. 연극을 모방하면서 시작된 영화의 초창기 형식이 가장 명백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이런 대화나 설명구들과의 비 유기적인 결합부분이다. 언어의 예술과 영상의 예술이 바로 이 부분에서 아주 강제적으로 얽힌다. 이런 언어적 설명 없이는 만들 수 없는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는 이 새로운 예술장르에서 이미 실패한 것이다. 영화를 진정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화면의 언어만으로 말하는 드라마를 만들어야 한다.    

두 가지 명백한 예외가 있다. 
하나의 씬에 타이틀이 달릴 경우다. “다음날”이라던가 “3년후” “남아프리카” “첫번째 단계” “깨달음” “친구들과 함께” 등의 씬 타이틀은 회화의 제목과도 비슷하다. “풍경”이라던가 “초상화”라는 제목보단 “안개에 쌓인 런던 브리지” “교황의 초상화” 같은 제목을 볼때가 더 회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게다가 그것은 그림 내부에 유기적으로 들어있는게 아니라 따로 떨여져 있다. 이런 점에서 볼때 “리더“는 한 씬의 제목이나 아니면 한 릴의 제목으로 쓰일때 미학적으로도 방해가 되지 않고 가능하다
또다른 경우는, 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당연한건데 편지나 전보 간판 포스터 신문 등 화면에 나온 글이 더 잘 보이도록 화면에 자막을 넣어주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요새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데 옳은 방향이라고 본다. 화면에 실제로 등장하는 위와 같은 문구는 리얼리티의 일부분이므로 그것 자체가 이야기의 일부이다. 단, 화면에 등장하는 문장에 수정을 가해서 넣으면 안되고 화면에 나온 그대로 넣어야 한다. 이런 방법은 화면 사이에 나오는 리더의 비 예술적인 방식과는 전혀 다른 정당한 방식이다. 

유성영화에 대한 반감
싱크 영화를 시도하려고 했던 에디슨 같은 이들에 대한 비난. 싱크영화가 관객의 외면을 받자, 기술적 불완전함 때문이라고 그들은 파악했다. 하지만 그건 미학적이고 내부적인 원인이다. 배우들의 행동과 대사가 완전히 일치되서 싱크로 들린다 하더라도 미학적으로 세심한 관객들은 실망했을 것이다. 영화의 비주얼적 순수성이 훼손되면 손해만이 있을 뿐이다.   
동시에 보고 또 들을 수 있다면 우리는 연극 무대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지만 그것은 연극 무대를 그대로 모방하고자 하는 목적에만 가까울 뿐이다. 그 목적이 실현되더라도 여전히 영화는 실제를 그대로 보고 듣고 할수있는 무대라는 매체보다는 열등한 것이다. 유성영화는 대리석 조각에 걸쳐진 옷에 색깔을 칠해놓은 것과 같다. 

영화음악의 존재는 인정
하지만 음악은 다르다. 요새 영화속 음악은 너무나 형편없어서 관객들이 그것이 영화의 유기적인 일부라고 느끼긴 어렵지만 조금만 더 멜로디와 하모니에 주의한다면 아무리 형편없는 음악이라도 어두운 극장에서 아무런 소리도 없이 견뎌야 하는 일반 대중들의 피로감을 조금쯤 풀어줄수 있을 것이다. 음악이야말로 긴장을 풀어주고 집중을 하게 만든다. 음악은 영상에 완벽히 종속되 있어서 관객은 음악이 나와도 크게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것이 없다면 불편한 기분을 느낀다. 단지 리듬만 전달해주는게 영화속 음악이 몫이 아니다. 음악은 스크린 속 드라마에 정확히 맞추어져야 한다. 이런 음악은 플롯을 설명하거나 글처럼 영상을 대체하진 않지만 정서적 세팅을 강화시켜준다. 만약 영화가 영화적 미학을 인지하기 시작한다면 작곡자들은 마치 뮤지컬을 위해 작곡하듯 영화를 위한 아름다운 스코어를 작곡하기 시작할 것이다. 

음향효과에 대한 부정적 견해
정서적 고양을 위해서라면 이런 소음은 음악 안으로 포섭되어야한다. 하지만 이야기에 개입하기 위해서라면 배제되어야 옳다. 마치 장미 정원 그림을 그리면서 장미 향수에다 그 그림을 푹 담가놓으면 관객이 그림을 보면서 향기까지 맡을수 있다고 믿는것과 똑같다. 어떤 예술의 제한적 조건은 결국은 그 예술의 강점인 것이다. 그 경계를 넘으려고 하는것은 그 예술의 강점을 약화시키는 거나 같다

컬러영화에 대해 반대
스텐실 기법, 키네마컬러 등 컬러영화의 기법은 발전하고 있다. 미학적 관점에서만 본다면 영화가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데 있어 지금 현재의 컬러 영화기술 수준도 충분히 만족스럽다는 의견도 있다. 영국의 대관식 장면을 촬영한 영화는 풍부한 색채 효과로 인해 큰 효과를 얻었다. 흑백으로 찍은 것보다 훨씬 훌륭하고 블루가 조금 덜 나온다 하더라도 별로 영향 받지 않았다. 키네마컬러나 그밖의 컬러영화 방식은 괜찮은 편이다. 하지만 영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또 다르다. 확실히 컬러로 인해 각각의 화면은 좀 더 효과가 커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영화라는 것 자체의 아름다움을 고양시킬것인가? 이 컬러 역시 특정 예술의 본질적인 제한 조건들을 넘어서려는 부가적인 과잉이 아닐까? 우리는 밀로의 비너스의 뺨에 색깔을 칠하길 원하지는 않지 않나? 메리 픽포드나 아니타 스튜워트가 컬러로 보여지는 건 원치 않는다. 영화의 독특한 책무는 리얼리티에 대한 절연을 통해서만 성취된다. pictorial한 비현실성을 통해 우리 안의 경험들이 훌륭한 극으로 스크린에 투사되는 것이다. 컬러는 이러한 비현실성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상처입힐 수 있다. 영화가 외부 세계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우리는 내부의 자유로움을 잃고 되고 자연에 대한 마음의 승리는 사라진다. 컬러는 소리처럼 영화에 있어 해로운 것이다

실제 사이즈로 보여지는 것의 중요성
하지만 연출자라면 리얼리티와의 결속을 충분하게 유지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극이 기대는 정서적 흥미가 파괴된다. 우리는 영화속 인물을 실제인 것으로 받아들여선 안되지만 등장인물들과 우리가 실제 인간과 관계에서 느끼는 감정과 결속력을 느껴야만 한다. 이런 점은 평면적이고 흑백화면에다 그림으로 보여지는 배경위에 실제 인간의 모습이 겹쳐져야만 한다. 관객에게 사람의 자연스런 크기로 느껴지는 사이즈로 보여주는게 중요하다. 화면 속 사람이나 물건의 정상적 사이즈를 상상하고자 하는 욕구는 너무나 강하다. 우리는 처음엔 등장인물을 노말한 사이즈로 본후 다음에 클로즈업과 극단적 클로즈업을 차례로 본다. 하지만 노말한 사이즈를 본 후라서 나중의 클로즈업을 보면서도 사람 자체가 커졌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거리가 줄어들면서 비주얼한 이미지 사이즈는 커지는 것이다. 만약 계속해서 커다란 사이즈의 사람의 화면만 나온다면 우린 실제보다 우리가 더 화면에 가까이 있다고 믿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는게 정상적 사이즈라는 관념 하에 우리는 언제나 놓여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환상이 깨지면 영화적 효과도 감소된다. 커다란 화면의 얼굴을 보면서 자신이 스크린 가까이에 있구나 느끼다가 그 아래에서 영화의 스코어를 연주하는 사람의 조그마한 형체를 보면 갑자기 이 모든게 가짜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영화의 적당한 주제
영화에 있어 적당한 토픽은 마법으로 가득찬 판타지 이야기가 영화의 우선 토픽이 되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럴 경우 어떤 연극도 라이벌이 될수 없다는 생각이다. (넵튠스 daughter의 예)또 어떤 작가는 엄청난 군중과 행렬의 등장이 영화에서 등장할수 있는 이상적 토픽이라 주장한다. (셔먼의 March to the sea바다를 향한 진군) 또 어떤 이는 이국적 배경(바다나 산 정글 등)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관객과 만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 생각한다. 반면 대다수의 작가들은 영화의 진정한 영역은 우리를 감싸고 있는 실제의 삶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문학이나 연극도 삶의 디테일을 그토록 성실하고 리얼하게 나타낼수는 없을거라고 말이다. 리얼하든 이상적이든, 실용적이건 로맨틱하건, 역사적이건 모던하건 모든 주제는 영화에 적합하다. 문학처럼 영화의 주제에 있어 영역은 없다


chapter 11. 영화의 기능

영화 열광론자들은 미국에서 매일 천만명 정도가 영화관을 찾는다 하고 회의론자들은 기껏해야 2-3백만 정도가 극장엘 간다고 분석한다. 어쨌든 영화는 오늘날 가장 대중적인 엔터테인먼트인것은 사실이다. 영화의 인기와 영향은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그 원인과 효과는 무엇인가?

경제학자들은 관람료가 싼 것이 이유라고 분석한다. 연극무대나 콘서트에 비해 저렴한 5-10센트만 내고도 몇시간을 좋은 좌석에서 관람할수 있으니 얼마나 훌륭한가. 하지만 가격이 25센트로 오르고 나서도 꾸준히 관객은 늘고 있으니 가격만이 원인은 아니다. 1910년도에 사회학자가 영화 관객층에 대해 이런 분석을 했다. 중하층 계급으로 청소년기와 성인 사이의 젊은이들, 영세상인, 잡상인, 노동자, 아이들, 잡역부들이라고. 6년이 지난 오늘날 이런 분석은 거의 맞지 않는다. 이제 영화의 관객은 중상류층까지 포함한다. 이제 영화는 초반의 냉소적인 반응을 걷어내고 모두들 새로운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분위기다. 결국 영화의 이런 승리는 그 내용에 달려있는 것일거다. 신랄한 비평가라면 평균적 미국인이 비즈니스와 래그타임 그리고 감상적 기질의 혼합체이므로 영화와 걸맞다고 말할것이다. 몇푼에 볼수있다는게 비즈니스 본능을 만족시키고, 슬랩스틱 코메디를 보며 래그타임을 즐기고 감상적 기질을 터무니없는 멜로드라마를 보면서 만족시키는 것이다. 맞는 말이지만 전혀 틀린 말이기도 한다. 더 나은 영화가 더 많은 관객을 끌어모은다. 분명히 영화에 대해 야심차게 접근하는 제작사의 영화가 더 환대받는것이다. 분명히 영화를 매력적으로 만든 것에는 어떤 내적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런것에는 영화가 보여준 초창기의 기술적 신기함도 있지만 이미 이런 초창기의 흥분을 가셨고, 이유중의 하나라면 다양한 배경이랄수 있다. (같은 멜로라도 연극에서의 멜로보단 알라스카의 눈내리는 벌판이나 플로리다의 야자수가 나오는 영화에서의 멜로가 더 참기 쉽다) 그리고 또 하나는 지적 흥미도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인데 낯선 분야에 대한 통찰을 얻을수 있다는 것이다. 연극에서는 그것이 표준화된 제시로 끝날뿐이지만 영화는 우리를 제분소와 공장, 농장과 광산, 법정과 병원, 성과 궁전으로 데리고 가 보여준다. 

또하나 영화의 힘은 영화만이 가지는 드라마틱한 퀄리티에 있다. 연극에 비해 영화는 사건들이 훨씬 더 빠르게 지나간다. 말이 없기 때문에 제스춰 사이에 뜨는 시간을 말로 커버할 수 가 없고 따라서 정상 속도보다 빠르게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묘하게 생기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사가 없는 무성 영화는 사회적 갈등에 대해서는 단순화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동기의 미묘한 차이는 말을 수반하지 않고는 제대로 전달되기 힘들다. 입센의 후기 희곡은 영화화 되기 힘들것이다. 대화가 없이는 인물들은 너무 스테레오타입화 되어 보일것이다.영화의 플롯은 그래서 기본적으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 감정들에 기반한다. 사랑과 미움, 감사와 질투, 희망과 공포, 동정심과 질투, 후회와 죄책감등 원초적인 감정들이 그것이다. 영화 매체가 좀 더 성숙하게 되면 이런 부분은 극복될 것이다. 

영화에서 사람들이 만족감을 얻는 보다 큰 원인은 영화라는 것이 갖는 심리학적 조건들 때문일거다. 거대한 외부 세계는 무게를 잃고, 공간과 시간 그리고 인과율에서 해방되어 관객의 의식이라는 옷을 걸친다. 정신은 물질과 음악적 톤으로 편하게 받아들여지는 화면으로 된 영상에 승리를 거둔다. 연극 무대 자리에 영화관이 들어서는 건 놀랄 일이 아니다. 

영화의 사회적 효과
영화에 대한 이런 열광은 사회적 효과를 낳는다. 보고서에 따르면 영화를 보고나서 감각적 환각과 환영에 시달린다는 결과가 나왔다. 신경쇠약증 환자들은 특히 스크린에서 자신들이 본 것 중에 촉각이나 온도 냄새 사운드에 의한 경험을 특별히 하는 걸로 나타난다. 정신이 영화에 완전히 흡수되기 때문에 몰입이 마치 현실처럼 생생히 나타나는 것이다. 특히 시골에서 멜로드라마가 해피엔딩으로 변화할 때 박수가 터져나오는 것은 이상한 매혹의 징후라고 할수 있다. 이러한 침투의 효과에는 반드시 위험이 따른다. 영화를 보고나서 그 생생함에 매혹되면 모방심리가 나타난다. 범죄장면을 보고나면 끔찍한 결과가 따를 각성을 하게 될 여지도 있다. 평범한 저항감과 도덕적 균형은 이러한 리얼한 재현에 의해 무너질수도 있다. 특히 민감한 젊은이들은 더욱 그러하다. 영화가 정신적 감염과 파괴를 불러올수 있다는 가능성은 간과되선 안된다. 영화를 보고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이지만 심리학자들은 낮은 도덕적 기준을 가진 극을 보고 정의감이나 정직함 성적 순수함등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수 있는지에 대한 통계치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어떤 회사에서는 검열을 환영하기도 하는데 예술적 자유와 도덕적 방종을 헷갈리지 않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연방 정부의 검열이 표현의 자유라는 미국적 사고와 병행할 수 있는지에 대해선 의심스런 눈길을 보낸다. 이런 사회적 위험이 존재하긴 하지만 우리는 영화가 가져다 줄 좋은 영향들에 대해서도 초점을 맞춰야 한다. 매일 수백만의 사람들이 영화의 주술에 빠져든다. 국가적 정신을 재정비하고 세우는데 있어 영화는 다른 매체에 비교할수 없는 힘을 가졌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극영화와 뉴스영화 류의 교훈적인 영화 사이의 경계선은 사라지고 있다. 교육자들은 문화회관의 설립에 참여하고 있다. 이 계획은 젊은이들의 교육에 영화를 이용하자는 취지다. 학교나 교회 대학에 최근의 모든 분야의 활동과 결과들에 대해 영상릴로 공급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대중들은 이런 교육적 관점이 아닌 엔터테인먼트적 관점에서 영화를 받아들인다. 이런 류의 대중들에게 영화는 교육적 관점을 전면에 내세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흡수되도록 해야한다. 이런 지적인 부분의 고양은 의외로 쉽다. 뉴스 영상이나 과학적인 재현이 아니라 극영화만 보여줘도 노소를 막론하고 새로운 영역의 지식을 기쁘게 따라올 것이다. 진정한 위험은 우리가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아는데 있지 않다. 위험은, 우리가 알 필요가 없는 것들을 끊임없이 꾸준이 봄으로써 생기는 사소해지는 효과이다. 대부분 영화의 지적 배경은 빈약하다. 희곡의 대사가 하듯 미묘한 동기를 부여하지 못하는 플롯을 계속해 보다보면 인물도 고유의 색깔을 잃고 모든 씬과 상황이 단순화되서 관객을 생각없는 대중으로 만들고 지적인 관객들에겐 더 이상 견딜수 없는 어떤 것이 되버린다. 들은 가락을 계속 반복해서 듣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영화라고 해서 오리지널리티와 영감이 부족할 이유는 없다.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보여지기 위해 플롯이 빈약하고 단순할 필요는 없다. 이미 영화도 여러 다른 종류들로 분화해서 영화 예술이 꼭 지적으로 빈약하다고 결론지을 필요는 없다. 관찰의 힘이 충분히 발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교육적 영상이 큰 힘을 발휘하리란 기대는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인간의 이해관계가 영상 뒤에 있고 그것이 영화의 사건들과 연관되 있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이런 지적인 부분에서보다 제대로 된 도덕적 효과에서의 어려움이 더욱 크다. 영화 속에서 악인 몇 명을 처벌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영화속 범죄의 장면이 매혹적으로 그려진다면 연계된 사회적 반응에 의해 도덕적 황폐화가 초래될 것이다. 아이들은 영화를 보고 자신들은 걸리지 않을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저명한 범죄학자가 최근 내놓은 ‘청소년 범죄의 85%가 직간접적으로 영화에서 어떻게 범죄가 저질러지는지를 보고 영향을 받았다’는 보고는 과장된 감이 없지 않다. 만약 범죄를 저지르는 씬이 영향력 있었다면 범죄자가 범죄에 실패하는 장면도 영향력 있을 것이다. 진정한 도덕적 감화는 영화 그 자체의 긍정적인 정신에서 나와야 한다. 영화 전반적으로 도덕적 건전함의 분위기가 있어야 한다. 의무와 이상에 대한 신념 등등. 만약 영화가 전반적으로 이런 가치들을 내재하고 있다면 악행이나 범죄도 영화 통해서 보여질 수 있다. 

영화의 커다란 임무- 미학적인 의식을 끌어올려야 한다
선생이 학생들이 좋아하는 것만, 그 수준에만 맞출수 없듯, 영화도 미학적으로 진부한것만 보여줘서는 안된다. 언제나 진부한게 중요한 걸 이기므로 구조적인 노력을 통해 진정한 아름다움을 지닌 작품을 생산해내야 한다. 사람들은 처음엔 언제나 베토벤보다 수자-미국의 취주악 지휘자이자 작곡가로 《워싱턴 포스트 마치》 등의 행진곡으로 이름을 떨쳤다-를 더 좋아하기 마련이다. 대중 대상으로 진정한 아름다움의 가치를 깨닫게 해야 한다. 조화와 통일성 진정한 만족 행복감 같은 미에 대한 열망. 진정한 즐거움과 쉽게 사라지는 즐거움, 진정한 아름다움과 말초적 자극을 구분할수 있도록 영화는 애써야 한다. 그 존재 자체가 예술의 반대말인 영화로 어떻게 예술의 진정한 정신을 가르치겠다는 건가 비웃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깡통에 든 드라마다, 기계가 만든 연극이다...이런 경멸을 듣지만 지금의 예술 장르 중에 기술 도움 안받는건 하나도 없다. 책도 대량 인쇄에 의해서, 조각에 필요한 대리석도 2000년 전의 여인의 아름다움을 2000여년간 보존해오고 있다. 연극은 실존 인물들에 의해 눈앞에서 재현되므로 화면을 통해 실제가 아닌 형태로 재현되는 영화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눈앞에 핀 정원의 장미는 향기도 곧 사라지고 퇴색하지만 시 속에 읊어진 장미의 향기는 영원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물리적으로 눈앞에 가까이 존재해야만 예술의 가치가 있다고 하는 이런 얄팍한 주장과 반대에 맞서기 위해 그동안 이 책에서는 논의를 해왔다. 예술이란 자연을 넘어서는 한 방법이며 혼란스런 세계를 새롭고 비실재하는 어떤 것으로 재창조하면서 그안에 완벽한 통일성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해왔다. 영화는 오리지널리티를 가진 독자적 예술이다. 영화의 다 빈치나 세익스피어, 모차르트가 태어나 이 새로운 예술이 위대한 예술이 될것인지는 미래에 가봐야만 알수있다. 아무도 이 새로운 예술의 방향을 예측할 수는 없다. 단지 원칙에 대한 미학적 통찰만으로는 문명 발달에 의해 발전이 어떤 식으로 흐를수 예측할 수 없다. 몇 세기전 현대의 오케스트라가 이런 수단과 결과를 낳을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언제나 창조적인 천재가 나타난 예술의 흐름을 바꾸어놓는걸 역사를 보면 알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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