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둡고 고통스럽고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여전희 우리가 하루를 마감하는 밤하늘에는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별빛처럼 아름답게 떠 있고, 날이 밝으면 우리가 다시 걸어가야 할 길들이 가지런히 뻗어 있습니다.
우리는 저 길에 등을 돌릴 수도, 등을 돌려서도 안 되며 우리가 그리워하는 이름들에 대한 사랑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이 생각을 하게 되면 내가 꼭 울게 됩니다. 내게는 눈물이 절망이거나 패배가 아니라 이세계와 손잡는 순결한 표징이며 용기의 샘입니다. 뜨겁고 굵은 눈물속으로 무심하게 걸어 들어오는 안산의 저 황량한 들판과 나지막한 야산들이 내게는 소우주이고 세계 정신의 일부분이듯이,  그리운 이여, 내게는 당신이 인류를 만나는 통로이고 내일을 예비하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함께 떠받치는 하늘에서 지금은 하염없이 비가 내리고, 스산한 바람이 무섭게 창틀 밑을 흔드는 계절일지라도 빗방울에 어리는 경건한 나날들이 시의 강물 되어 나를 끌고 갑니다.

고정희, 시집 [지리산의 봄], 시인의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