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의 눈 /<한겨레>에 실린 은국님의 글을 읽었다.(12월3일치 ‘왜냐면’) 앞서 이 난에 쓴 칼럼(11월 21일치 ‘눈보라처럼 진실이 몰아치다’)을 읽고 나한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쓴 글이다. 은국님은 내가 알지 못하는 젊은이다. 지금 양심적 병역거부자로 수감중이라고 한다. 한국은 요즘 갑자기 추워졌다고 한다. 감옥에선 얼마나 더 추울까. 나는 먼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예컨대, 빈 병에 편지를 넣어 바다에 띄워보내는 것과 같은, 또는 어둠을 향해 돌을 던지는 것과 같은 행위다. 누군가에게 과연 가 닿을지, 반향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채 그냥 알지 못하는 독자를 향해 말하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언제라도 독자로부터 반향이 온다면 기쁜 일이다. 더구나 이번엔 감옥에 갇힌 미지의 사람에게 가 닿았기 때문에 더욱. 하지만 나는 그 기쁨 이상으로, 글을 쓴다는 행위의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가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통감하면서 팽팽한 긴장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한국에 머물고 있을 때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이 꾸린 모임에서 강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던 것이다. 그때도 나는 약간 망설였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그럴듯한 얘기를 할 자격이 내게 있을까 하는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한국 사회 속에서 소수자로 고립돼 있는 그들에게 내가 연대의 인사를 보내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만나 보니 그들은 내가 막연하게 상상하고 있던 이미지와는 달랐다. 뭐랄까, 몹시 여려서 오히려 가녀리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모두 말이 적었고, 자신들의 생각을 강하게 주장하는 듯한 태도가 아니었다. “교도소에서 고생하셨지요?” 하고 묻자 모두 “아니요”라든가 “별로…”, 또는 “나 혼자만 있었던 건 아니니까요”라는 식으로 대답했다. 감옥생활보다도 오히려 사회의 몰이해 쪽이 더 고통스러웠다는 말을 한 사람도 있었다. 이런 겸허한 사람들이 강대하고 무자비한 국가권력에 대한 불복종을 실천하다니. 그런 놀라움과 감명이 나를 사로잡았다. 은국님을 만난 적은 없지만 그도 또한 그런 사람들 중 한 사람일 것이다.
나는 일본 악동이 조선인 아이를 괴롭힐 때 “나도 조선사람”이라고 밝힐 용기는 없었다. 재일동포들이 지문날인을 거부했을 때 나는 응했다. 내 마음을 흔들었던 것은 백낙청 선생의 말이다. “우리 모두가 용감하다면 민주화를 바랄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민주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은국님은 내 칼럼 마지막 단락에서 “‘지금의 내 생활이 어쩐지 모조품 같고 그 바깥에 위험으로 가득 찬 진실이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는 말이 강한 울림으로 다가왔다”고 하고, 지옥과 같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지금 “모조품과 같은 평온하고 안전한 삶을 거부하고 위험으로 가득 찬 진실의 공간인 ‘바깥’에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럽다”고 했다. 이 얘기를 읽고 어찌 책임감을 느끼지 않겠는가.
지난번 칼럼 말미의 은국님이 인용한 부분 앞에 “나는 지금 대체로 평온하고 안전하게 살고 있다. 그리고 어느덧 노후 걱정 따위를 해야 할 나이가 돼버렸다. 하지만 이건 어쩐지 아니야, 이런 인생은 젊었을 때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라,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다”라는 구절이 있다.
실은 거기 “예상했던”으로 돼 있는 부분을 번역자 한승동 기자는 처음엔 “꿈꿨던”으로 번역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꿈꾸다니? 나는 위험한 진실 앞에 몸을 드러낸 채 살아가기를 바랐던 것일까? 진짜 나는 오히려 그저 오직 평온과 안전만을 바랐던 건 아닐까. 나는 진실을 위해 적극적으로 위험을 감수하는 타입의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늘 평온과 안전이 위협당하는 걸 감지하고 어두운 미래의 도래를 예감하고 있던 겁쟁이다. “꿈꿨던”이라는 번역을 그대로 두면 독자와 자기자신을 기만하는 결과가 된다. 그런 생각 끝에 한 기자에게 연락해서 “예상했던”으로 바꿔 달라고 했던 것이다.
초등학생 시절 나는 조선인 부락의 아이가 일본 악동한테서 괴롭힘당하는 장면과 마주쳤을 때 “폭력은 안 돼!” 하고 소리칠 수는 있었으나, “나도 조선사람이야!” 하고 밝힐 용기는 없었다. 1980년대 재일동포 중에서 용기 있는 사람들(그 중에는 중학생이나 고교생도 있었다)이 일본 정부의 차별과 압박에 항의하며 외국인등록 지문날인을 거부했을 때 나는 그들의 행동이 대의에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스스로는 지문날인에 응했다. 그 이유는 여럿 있지만 여기서 자세히 쓸 수는 없다. 쓴다면 서툰 변명처럼 비칠 것이므로 쓰고 싶지 않다. 어쨌든 그때 지문날인한 내 손가락 끝에 잔뜩 칠해진 검은 잉크의 감촉만은 지금도 나 자신을 향한 굴욕감과 함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한국의 군사정권 시절 옥중에 있던 형들과 다른 정치범들 구명운동은 했지만 나 자신이 감옥에 들어가진 못했다. 당시 내 마음을 흔든 가장 인상적이었던 말은 민청학련사건 피고인들이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는 순간 했다는 “영광입니다”라는 진술이 아니라, <창작과비평> 등록 취소 사건으로 법정에 섰던 백낙청 선생의 이런 말이었다.(기억에만 의존해 쓰는 것이니 부정확하더라도 용서해주시기 바란다) “만약 우리 모두가 용감했다면 어찌 민주화를 바랄 필요가 있겠습니까? 사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민주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처럼 나는 항상 대의 쪽에 서고 싶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결과적으로 나 자신을 안전지대에 두고 있었고 그 안전지대에서 뛰쳐나가지도 못한 채 이 나이가 되도록 살아왔다. 그런 내 글에서 은국님이 격려를 받았다는 건 어딘가 잘못돼 있다. 나야말로 그한테서 격려받은 것이며, 그 앞에서 부끄러워해야 한다.
나는 그나마 이 멋쩍음과 부끄러움을 소중하게 간직하려 한다. 그리고 내가 이런 기분에 젖도록 해준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와 존경의 인사를 보낸다. 그런 사람이 우리가 인간에서 비인간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경고해주는 귀한 존재다.
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