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현 "록의 비트가 내 몸의 늙은 세포를 깨운다"
아시아 최초 펜더 기타 헌정 기념공연 
`미인`은 세계 공통 `록`에 우리 전통 선율 얹어서 만든 노래
펄시스터즈 김추자 발굴했으니 국내 기획사 원조지요. 허허
기사입력 2010.12.14 17:33:05 | 최종수정 2010.12.14 17:56:26

"한국 대중음악의 산 역사" 신중현씨가 미국 기타 회사 펜더(Fender)로부터 헌정받은 기타를 메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헌정 받은 기타 프렛(Fret) 부분에는 "신중현에게 헌정함(Tribute to Shin Jung Hyeon)"이라는 문구가 선명히 새겨져 있다. <김호영 기자>

"집안이 어지럽게 널려 있어서 이렇게…." 그는 자신의 집이 아닌 곳에서 인터뷰를 한 것에 적잖이 미안해했다. 진눈깨비가 내린 13일 오전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의 한 호젓한 카페. 난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거장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날씨도 궂은데 오느라 고생많았습니다." 그는 짧게 깎은 머리에 회색 정장 차림이었고,갈비탕으로 점심을 하며 진행된 2시간 반 동안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음악과 삶을 털어놓았다. 얼굴은 칠순의 연륜이 느껴질 정도로 적당히 세월을 담았고, 눈이 뻑뻑한 듯 대화 도중 가끔 눈을 비볐다. `한국 록의 대부`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로 불리는 신중현(72). 지난 2006년에는 공식 은퇴를 선언, 한국 중년들을 안타깝게 했다. 그러나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펜더`기타를 헌정받은 기념으로 현재 대학로 작은 무대에서 공연 중이다. 



-지방 공연에 이어 대학로 공연 중인데, 일정이 어떤가. 

▶힘들고 정신적으로 굉장히 피곤하고 압박이 온다. 대학로는 젊은층이 몰리고 연극이나 뮤지컬을 많이 하는 곳이다. 내 공연은 옛날 사람들이나 와서 구경하는건데. 하지만 오히려 그런 무대에서 (젊은 사람에게) 자꾸 보이고 한 사람이라도 더 온다면 내 음악과 우리나라의 대중음악 역사를 얘기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대학로 공연장소가 좁은데. 

▶200명 넘게 들어올 수 있다. 세종문화회관처럼 큰 곳에서만 하다가 작은 데서 하니까 정감이 있더라. 관객들도 가까이서 접할 수 있고. 원래 외국에선 그런 데가 더 비싸다. 무엇보다 리얼하게 내 음악을 관객들에게 들려줄 수 있어 맘에 든다. 

-2006년 은퇴 공연【? 한 중년남자가 눈을 지긋이 감고 눈물 흘리는 게 카메라에 잡혔다. 

▶다섯 도시를 돌며 은퇴 공연을 했는데, 그런 장면은 보지 못했다. 아마 내 팬은 중년 이상인데, 내가 늙어서 은퇴하니 안타까워서 그랬을 것 같다. 대학로 공연에는 의외로 젊은층이 많이 온다. 내가 원로니까 `저 노인네가 어떻게 하나` 하고 직접 보고 인사도 할 겸 오는 젊은 뮤지션들이다. 

-중2 때부터 기타를 쳤다는데, 어린 시절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내가 태어난 때는 일제시대였고, 아버지께서 만주에서 이발 사업을 크게 하셨다. 광복 후에 그곳 재산을 그냥 놔두고 금붙이 몇 개만 챙겨 와서 노량진에 다시 이발소를 차렸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1년 후면 전쟁이 날 것`이라며 미리 피란을 가야겠다고 하셨다. 아버지께서 충북 진천에 있던 고모에게 돈을 맡기며 땅을 사고 집을 지어놓으라고 부탁한 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내려갔다. 그런데 고모가 돈을 다 빼돌려 가족이 순식간에 거지가 돼 버렸다. 얼마 안돼 전쟁이 났고, 아버지는 울화병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그 이듬해 돌아가셨다. 하나 있던 여동생도 영양실조로 죽었다. 남동생 하나 남은 것을 친척집에 맡겨 놓고 서울로 돈을 벌기 위해 올라왔다. 

-기타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초등학교 시절부터 음악에 소질이 있었다. 나무 상자에 철사를 박아서 악기를 직접 만들어 연주하곤 했다. 도레미파 음정까지 맞춰놓고 그 악기로 동요를 연주하면 아이들이 뺑 둘러서서 듣곤 했다. 서울에 와서 일을 하면서도 악기를 배우고 싶었다. 2~3년쯤 돈을 모아 바이올린을 하나 샀는데 잘 되지도 않고 소리도 듣기 싫었다. 그래서 그걸 들고 나가 기타로 바꿨다. 

-따로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나.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고, 있다고 해도 돈 주고 배울 형편이 못됐다. 악기상에서 파는 기타 코드집 하나 갖다 놓고 코드를 익혔다. 당시 명동 입구에 공터가 하나 있었는데,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책들을 산처럼 쌓아두고 한권에 100원씩 팔았다. 거기서 음악 교본이나 코드집, 기타에 관한 책들을 구해서 보며 독학했다. 

-기타리스트로 발돋움하게 된 1960년대 얘기를 들려달라. 

▶1950년대 중반에 미8군 부대에 들어가 12년 가까이 서양음악을 했다. 공연 끝나면 나와서 잠만 자고 다시 들어가는 생활이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음악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전혀 몰랐다. 우연히 전파사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를 들었는데 세계적인 흐름과 너무 동떨어진 음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젊은 혈기에 `한국 가요도 세계적인 흐름에 맞게 변화시켜보자`는 의욕이 생겼다. 1964년에 `애드 훠(add four)`라는 그룹으로 음반을 냈는데 거기에 있던 게 `빗속의 여인`과 `커피 한 잔`이었다. 내심 새로운 음악이어서 온 세상이 반기고 환영해줄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반응이 너무 없어 실망스러웠다. 그 후 1968년에 펄시스터즈를 픽업해서 `님아`라는 곡을 발표했는데 그땐 반응이 굉장했다. 

-다른 노래도 좋지만, 특히 `미인`은 음악인들이 화려한 기타 선율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아하던데. 

▶그 당시 내가 가장 의욕을 갖고 있었던 게 `록`이라는 세계 공통적인 음악에다 우리나라만의 특성을 얹어서 전 세계와 교류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룹 이름에도 `엽전`이라는 말을 넣었고, 노래에도 우리 선조들이 갖고 있던 오음계를 이용했다. 서양음악은 화음 위주로, 멜로디를 쌓아서 펼쳐내는 평면적인 음악이다. 반면 우리 음악은 하나의 선율로 깊이를 만들어내는 입체적인 음악이다. 음의 깊이를 통해 우주를 넘나드는 공간까지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런 `정신`을 이어가고 싶었다. 그런 바탕에서 나온 게 `미인`이다. 

-요즘 가요계를 보면 이런 `정신`이 담긴 노래가 드물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노래는 거의 기획사나 방송사에서 생산해낸 상품일 뿐 음악적으로 얼마나 가치 있는지 모르겠다. 음악계가 그게 전부인 것으로 젊은이들이 오해할까 염려된다. 그런 노래들이 짧은 시간에 이름 알리는 데에는 도움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에 인생을 걸 수 있는지, 자기의 장래까지도 고민을 해야 한다. 

-기획사 얘기가 나왔는데, 펄시스터즈와 김추자를 발굴해낸 국내 최초 기획사 사장님 아닌가.

▶하하하, 그런 셈이다. 그때 명동에 사무실 차리면 전국에서 가수 지망생이 20~30명씩 몰려왔다. 그때는 진짜 노래 잘하는 사람만 왔다. 감히 여기 와서 노래 부르겠다는 건 자기가 자신이 있고 스타 기질이 있다고 생각해서 오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추렸는데, 바로 펄시스터즈와 김추자다. 당시에는 우리 대중음악에 새로운 장르가 생겨날 때다. `뽕짝뽕짝`하던 트로트에서 한창 장르가 바뀌던 시절이라 너도나도 음악성 있는 분들이 이런 데 뛰어들었다. 

-미8군에서 인기는 어땠나. 

▶굉장했다. `재키`(Jackieㆍ당시 신중현의 별칭)를 모르면 미군이 아니라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하지만 만족스럽기는커녕 내가 이렇게 환영받을 자격이 있는가 자책감이 들었고,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해군 군악대장 출신으로 미국에서 음악 공부를 하셨던 이교숙 선생이 한국에 들어오셨다. 그분이 부대를 찾아와 `재즈 화성학을 가르치겠다`며 학생을 모집하기에 3년 동안 음악 이론을 배웠다. 그것이 음악을 이해하고 작곡하는 자양분이 됐다. 선생님께서 내 곡을 보시고 `자네는 작곡을 많이 하는 게 좋겠네`라고 말씀해주셨는데, 그 말씀에서 용기를 얻었다. 

-일찍이 한국 최고 기타리스트라는 명성을 얻었는데, 큰 무대에 나가서 실력을 겨뤄보고 싶다는 욕심은 없었나. 

▶음악이라는 건 스포츠처럼 경쟁하는 게 아니다. 음악은 다 독특하고 자기 나름의 세계가 있는 것이기에 견준다든지 대립한다든지 하는 말은 맞지 않다. 다만 미국에서 내 공연을 하고 싶은 생각은 있다. 지금 미국에서 내 옛날 노래를 추려서 두 장짜리 음반으로 만들고 있는데 내년 5월쯤 앨범이 나올 예정이다. 

-`빗속의 여인` `커피 한 잔` 등 그동안 부른 노래의 생명력이 긴데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음악 이론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미국이나 서양 음악을 분석해 봤는데 바늘 하나 찔러 넣을 곳이 없게 완벽해서 놀랐다. 나도 아무리 짤막한 대중음악이라 하더라도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곡을 썼다. `화성학`이든 `대위법`이든 음악의 근본 이론을 놓치지 않으면서 그 위에 자기만의 착상을 얹어서 완벽하게 곡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군사정권 시절, `대통령 찬가`를 만들어 달라는 제안을 거절해 고초를 겪었다. 그때 타협했으면 오히려 더 많은 곡이 나왔겠다는 생각은 안 해 봤는지. 

▶비록 대중음악인이지만 나는 음악적인 것 외에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대통령 찬가를 만들라"고 했을 때 "난 그런 거 할 줄 모른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내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끌어안는 진짜 음악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때 록이 침체되고 디스코가 유행하자 사람들이 내게 `춤추기 좋은 음악`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단순한 음악만 만들 수 없어서 이것저것 자꾸 새로운 시도를 했다. 그러다 보니 `신중현 음악은 춤추기 나쁘다`는 소문이 퍼져서 업소에서 몇 번 쫓겨나기도 했다. 내 음악이 너무 어렵다며 쉽게 만들어 달라는 제작자들 주문도 있었지만 난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내 스타일대로 했다. 만약 그때 내가 타협을 했더라면 지금까지 음악생활을 계속 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들 셋이 다 음악을 하고 있는데. 

▶나는 기타 하나 사려면 몇 년 동안 중노동해서 돈을 모아야 했는데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기타를 장난감으로 생각하고 치게 됐고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했다. 같은 소리라도 좀 고생을 해서 어렵게 치는 소리하고 편안하게 치는 소리는 다르다. 내가 고생을 좀 더 시켰어야 하는데 그런 면이 아쉽다. 



■ 밥 직접 해먹고 멸치볶음 잘 만들어 

-건강 관리는 어떻게 하는지.

▶나이가 들다보니 안 아픈 데가 없다. 하지만 그냥 `늙으니까 그런가보다` 하고 산다. 그저 계속 음악을 하는 게 내 건강 비결이다. 노래와 음악 속에는 리듬과 비트가 있으니까 그걸 느끼다보면 몸에 순발력도 생기고, 세포들도 침체되지 않고 활력을 가지고, 피도 순환되고 건강도 좋아진다고 생각한다. 나만의 엉터리 건강 이론이다.

-아들들 다 분가시키고 혼자 사는데, 식사는 어떻게 해결하나 

▶직접 해 먹는다. 밥이야 전기밥솥이 알아서 해주고, 반찬은 동네 마트에서 사다 먹거나 간단한 건 직접 만들기도 한다. 멸치볶음을 제일 잘 만든다. 옛날엔 가난했으니까 반찬을 조금만 먹어도 밥 한 공기 다 먹을 수 있게 반찬을 짜게 만들었는데, 그 입맛이 남아서 지금도 짜게 먹는 편이다. 

-운전도 직접 하나. 

▶물론이다. 게다가 다 스틱이다. 오토는 운전하는 재미도 없고 답답해서 못한다. 워낙 성격이 급한 편이라 차가 순발력 있게 반응하는 게 좋다. 속도도 꽤 내는 편이다. 내비게이션을 달고 다니니까 60으로 가라고 하면 60으로 가고, 100으로 가라고 하면 100으로 가고, 아무 말 없으면 더 밟기도 한다. 

-젊은 시절, 인기가 많았을 것 같다. `빗속의 여인`이라는 곡에는 뭔가 숨은 사연이 있을 것 같은데. 

▶생긴 게 이렇다보니 인기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내 노래들이 전부 고독하다. `빗湛? 여인`에 보면 `다정하게 미소지으며 검은 우산을 받쳐주네` 그러는데, 누가 나 같은 사람한테 우산을 받쳐주겠나. 그냥 다 상상으로 만든 노래다. 

-빡빡머리는 이제 아예 트레이드 마크가 된 것 같다. 

▶머리도 집에서 직접 민다. 관리하고 신경쓰는 게 귀찮아서 그냥 밀어버렸다. 지금은 머리를 민 지 며칠 돼서 조금 길었는데, 이것보다 더 길면 다시 빡빡 밀어버리고 며칠 동안은 신경 안 쓰고 산다. 



■ 신중현이 헌정받은 펜더 기타는 

지난해 12월, 이미 은퇴를 선언했던 신중현(72)에게 새 기타가 전달됐다. 낡은 느낌이 나도록 스크래치를 낸 검은색 몸체, 50년대 지미 헨드릭스가 썼던 것과 같은 재질, 국악적인 `농현`이 가능하도록 최대한 넓게 만든 프렛(Frets), 거기에 자신이 직접 서명한 사인이 새겨진 신중현만의 기타였다. 

미국의 기타 회사 펜더(Fender)가 전설적인 음악을 남긴 음악인을 선정해 맞춤형 기타를 헌정하는 `펜더 커스텀 숍 트리뷰트 시리즈(Fender Custom Shop Tribute Series)`에 `대한민국 록의 대부` 신중현이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선정된 것이었다. 

신중현 이전에 기타를 헌정받은 이들은 에릭 클랩튼, 제프 백, 잉베이 맘스틴, 스티비 레이 본, 에디 반 헤일런 5명뿐이었다. 

신중현은 펜더 기타를 `주는 대로 받아주는 기타`라고 말했다. 못 치면 못 치는 대로, 잘 치면 잘 치는 대로 솔직하게 소리가 나기 때문에 연주자들에게는 두려운 기타라는 뜻이다. 

`표현의 한계`가 없는 기타여서 연주가 즐겁다는 말도 덧붙였다. 

[정리 = 정아영 기자 / 대담 = 황국성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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