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캄보디아 무력 충돌, 어떻게 봐야 할까
[국경분쟁①] 갈등 원인은 '프레아비히어 사원'...역사적 배경 알아야
강기원 (ulnoulno) 기자

사상 최대의 교전, 캄보디아와 태국

 

캄보디아와 태국이 지난 4일부터 국경사원 "프레아비히어 사원"(Preah Vihear temple: 태국어-파위한 사원) 주변에서 연속 4일간 최소 5차례 이상 교전을 계속하면서 국제사회의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 프레아비히어 사원의 위치 초록색 점이 사원의 위치이다. 붉은색 원 3곳은 2월10일 현재 양국의 전력이 추가로 증강되고 있다고 보고되는 지역들로, 필자가 보완한 표기들이다.
ⓒ 크메르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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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보도들을 종합해 보면, 이번 무력충돌로 양측을 합쳐 최소 8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교전에 사용된 화기들 역시 기관총과 RPG-7 로켓 발사기와 같은 소대용 중화기는 물론이고, 야포와 전차, 그리고 다련장 로켓포 같은 본격적인 포병화력까지 동원됐다. 2008년 10월 이후 발생한 여러 번의 무력충돌 중에서도 가장 길고도 격렬한 포격전을 주고받은 상태다. 양국 군 관계자들은 서로가 상대방을 수십 명씩 사살했다는 미확인 주장들까지 하고 있다.

 

이번 교전의 영향은 해당 지역 주민들의 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캄보디아는 사원 주변 주둔 군인들의 가족들을 포함하여 3000명을 야포 사정거리 바깥의 임시 난민촌으로 소개시켰고, 태국 역시 최소 1만6000명 이상의 주민들을 여러 대피시설들로 피난시켰다.

 

하지만 이 사태가 언제 끝날지 알 수도 없는 상태에서, 교전지역보다 100km 이상 떨어진 국경도시 포이펫(오쯔로우 군)을 포함하여 최소 3곳의 추가적인 지점들에도 양국 병력들이 증강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있다. 입수가능한 사진들을 살펴보면 최소 대대급 이상의 기갑부대들이 트레일러에 실려 이동하는 등 그 규모가 만만치 않아 보인다.

 

또한 태국에서는 국방부장관과 육군사령관(참모총장) 등 고위 지휘관들도 전선을 시찰하고, 캄보디아에서는 훈센(Hun Sen) 총리의 장남인 훈 마넷(Hun Manet) 소장과 3남인 훈 마니(Nun Mani) 대령, 그리고 총리 경호부대 사령관 등 주요 지휘관들이 최전방에 주둔하며 병력을 지휘하는 상태이다.

 

이번 포격전의 와중에서 세계문화유산인 '프레아비히어 사원'도 손상되었고, 캄보디아에서는 태국군이 국제법상 금지된 집산탄까지 사용했다고 주장하며 비난하고 있다. 주요국들이 양국의 자제를 촉구하는 가운데, 캄보디아의 요청으로 개최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가 14일 뉴욕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유엔은 이 회의에 아세안(ASEAN) 의장국인 인도네시아 외무부장관도 초청했고, 그동안 국경문제를 양자간 협상에만 국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태국도 이 다자간 무대에 참여한다. 따라서 캄보디아와 태국의 외무부장관이 교전사태 이후 최초로 직접대면을 하게 될 전망이다. 유엔에서는 사안의 민감성을 고려하여 이 회의를 비공개로 진행키로 한 상태이다.

 

하지만 이러한 외교적 노력만으로 해결되기엔 태국과 캄보디아가 처한 상황은 무척이나 복잡해 보인다. 이번에 프레아비히어 사원에서 발생한 대치국면은, 지난 2008년 10월 이후 발생한 몇 차례 소규모 교전들과는 그 양상이 사뭇 다른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영토분쟁이 아니라, 지난 수십 년간 태국과 캄보디아 양국이 내부적으로 안고 있던 모든 문제들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현장이라 할 수 있다.

 

'프레아비히어 사원', 두 나라 갈등의 원인

 

'프레아비히어 사원'은 크메르제국 시대인 11세기에 힌두교 사원으로 조성되었다가, 이후 불교가 흥기한 뒤에는 불교사원으로 개조되거나 증축되기도 하며 확장됐다. 이 사원은 해발 500m가 넘는 '당렉산맥'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위치해 있다. 동서로 이어지면서 태국과 캄보디아 국경을 이루는 당렉산맥은, 태국쪽의 북쪽 사면은 완만하게 '코랏고원'으로 이어지며, 캄보디아 쪽의 남쪽 사면은 급경사를 이루면서 '캄보디아 평원'으로 떨어진다.

 

  
▲ 프레아비히어 사원의 전경 당렉산맥의 절벽 위에 위치한 사원 유적군.
ⓒ http://cambodiaairdefense.word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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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는 이 사원 주변 지역이 자국의 프레아비히어(Preah Vihear) 도, 쪼암 크산(Choam Ksan) 군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 반면, 태국은 자국의 시사껫(Sisaket) 도, 깐타랄락(Kantharalak) 군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 프레아비히어 사원 주변도 1907년 프랑스 제작 지도. 1962년 국제사법재판소(ICJ)가 증거로 채택한, 1907년 프랑스 식민지 당국이 제작한 지도. +++선이 캄보디아가 주장하는 지도제작 당시에 표기된 국경선이고, 필자가 추가로 그려넣은 분홍색 선이 태국 측에서 주장하는 국경선이다. 파란색 유적군이 "프레아비히어 사원"이고, 좌측의 붉은 점은 현재 캄보디아가 실효 점유하면서 승려들을 거주케 하고 있는 "왓 께우 세까 끼리 스와라" 파고다(사찰)이다. 이 파고다는 사원 유적군에서 약 300 m 떨어져 있고, 양국 간에 논란이 있는 토지의 면적은 총 4.6 ㎢ 규모이다. 캄보디아 현대사에서 이곳은 "크메르공화국"(1970-1975) 및 "크메르루즈 정권"(1975-1979) 등 2번이나 몰락한 정권의 군대들이 최후의 항전지로 사용한 기록을 가진 곳이기도 하다.
ⓒ 크메르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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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1년 태국민족의 신흥국가인 '아유타야 왕국'(Ayutthaya Kingdom)이 강력한 군사력을 이용해 크메르제국의 도성이었던 앙코르 톰(Angkor Thom)을 함락시키면서, 한때 동남아의 패권국가였던 크메르 민족의 영광의 시대가 종말을 고했다. 이후 크메르(캄보디아) 민족은 두 번 다시 재기하지 못했고, '프레아비히어 사원'이 속한 캄보디아 서부와 북부는 시대에 따라 영향권의 범위만 다소 변동되었을 뿐 19세기까지도 태국(시암)의 종주권 하에 놓이는 경우가 많았다. 때로는 정식으로 태국 내 행정구역으로 편입되기도 했고, 이러한 현상은 1863년 프랑스가 캄보디아를 보호령으로 만든 이후에도 몇 차례 변동을 겪게 된다.

 

특히 오늘날까지 문제가 되는 변화는 1900년대 초에 발생했다. 당시 프랑스는 계속해서 시암을 압박하면서 오늘날 캄보디아와 라오스 지역의 태국 영토들을 조금씩 접수해 들어갔다. 1904년 프랑스와 태국은 국경문제를 논의할 공동위원회를 설치하여, 물길이 갈라져 내려가는 분수령(分水嶺)을 국경선으로 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당시 프랑스가 캄보디아 서북부 3개 도를 반환받았지만, '프레아비히어 사원'이 있는 오늘날의 프레아비히어 도는 여전히 태국의 소유였다.

 

1907년, 프랑스는 시암에 군사적 압력을 행사하여, 라오스 접경의 메콩강 서안과 라오스 남부, 그리고 캄보디아의 프레아비히어 지방까지 인도받았고, 새로운 지도를 제작하여 태국 측에도 전달했다. 이 지도는 대부분의 경우 1904년에 합의한 원칙대로 분수령을 국경으로 했지만, '프레아비히어 사원' 주변에서는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채, 사원 주변 지역이 캄보디아 영토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은 이 지도를 공람시켰고, 이 공람 행위가 현재의 영토분쟁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태국 피분송캄 독재정권은 일본에 협력하면서 다시금 캄보디아 북서부 지역에서 종주권을 행사했다. 하지만 1945년 연합국이 승리하자 항일운동에 나섰던 '자유타이 운동' 계열이 전후 처리를 하게 되었다. 프랑스가 영토반환 문제로 태국의 유엔가입을 반대하자, 결국 캄보디아 북서부 지방은 온존하게 프랑스령 캄보디아로 반환되었다.

 

1953년 말 프랑스가 캄보디아의 독립을 인정하고 철수하자, 태국 군은 1954년에 프레아비히어 사원'을 점령했다. 캄보디아는 이에 대해 항의하면서, 1959년에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했다. 이 문제는 양국 내에서 상당히 폭력적인 이슈였다. 외교관계가 악화됐고, 양국 정부는 서로 군사적인 위협 발언을 하기도 했다.

 

헤이그에서 열린 재판에서 캄보디아측을 변론한 사람은 미국의 전직 국무장관이었던 딘 에치슨(Dean Acheson)이었고, 태국측 법무팀에는 영국의 법무부장관을 지낸 프랭크 소스키스(Frank Soskice)경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국제사법재판소의 재판은 이 사원의 문화유산이란 측면이나 어느 국가가 크메르 제국의 역사적 계승자인가 하는 문제는 다루지 않았다. 다만 20세기 초에 이뤄진 국경선 확정과정에 관한 기술적 문제들을 검토했고, 태국 정부가 문제의 지도를 접수한 이후 어떠한 조치를 취했는가에 초점을 맞췄다.

 

1962년 6월 15일, 국제사법재판소는 재판관 9대 3의 판결로 이 사원이 캄보디아 영토 내에 있다고 판결했고, 재판관 7대 5의 판결로 만일 태국이 조각 등 이 사원 내에서 분리해 유물들을 보유하고 있다면 그 또한 캄보디아측에 돌려주어야 한다고 판결했다. 판결문은 이 지도가 그려진 지 50여년이 지났지만, 지도 상에 나타난 사원의 위치에 대하여 다양한 국제 포럼을 통해 태국 측이 단 한번도 반론을 제기한 적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1930년 프랑스 식민당국이 태국 정부인사로 역사학자였던 담롱 왕자(Prince Damrong)와 여타 학자들을 이 사원에 초청했을 때도 반대하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했다. 또한 이 지도를 수용함으로써 태국은 국경문제의 다른 부분들에서 이익을 보았다는 점도 지적했다. 판결문은 이러저러한 근거를 통해, 태국 측이 지도를 수용했고, 사원은 캄보디아 영토에 속한다고 판결했다.

 

태국은 격렬하게 반발했고, 대규모 군중시위도 발생했다. 하지만 태국은 결국 이 사원이 캄보디아에 귀속된다는 데 마지못해 동의했다. 태국 병사들은 이 사원에 나부끼던 태국 국기를 하강시키지 않고, 여전히 깃발이 펄럭이는 게양된 상태로 깃봉을 파냈다. 이 깃발은 "몬 이댕"(Mor I Daeng) 절벽으로 옮겨져, 지금도 그곳에 게양돼 있다.

 

1963년 1월 캄보디아는 약 1000명의 인원이 참석한 가운데 공식적인 영토수복식을 거행했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캄보디아 쪽 절벽을 고되게 등벽해서 참석했다. 통치자였던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공도 1시간이 채 못 되게 절벽에 매달려 있었고, 이후 무사히 도착해 스님들께 공양을 올렸다. 시하누크 공은 연설을 통해, 모든 태국인들이 별도의 경유를 거치지 않고 이 사원을 출입할 수 있으며, 만일 태국 측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유물들이 있다면 그것을 반환하지 않아도 좋다는 유화 제스처를 보이기도 했다.

 

태국의 국내상황에서 촉발, 새로운 긴장 국면

 

2008년 7월 8일 유네스코(UNESCO) 산하 '세계유산위원회'는 '프레아비히어 사원' 유적군을 캄보디아 영토로 인정하는 가운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켰다. 당시 세계문화유산 등록이 가능했던 것은, 태국의 친-탁신계 정권이 실용적 접근방법을 취하면서 캄보디아의 외교노력을 은연 중 지원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실제로 이 사원의 주요 진입로는 태국 쪽으로 나 있어서 태국에 미치는 경제효과 역시 적지 않다.

 

하지만 이후 태국 극우 민족주의 왕당파 '옐로 셔츠 운동'(PAD: 정식명칭-국민민주주의연대)이 주도한 태국 내 반발여론이 거세지면서, 이 사원은 다시금 양국간 정치, 외교적 초점으로 부상했다. 사실 1962년의 국제사법재판소 판결은 사원의 영유권만 캄보디아로 규정했을 뿐, 그 주변지역(총 4.6 ㎢ 면적: 위의 지도 참조)에 대한 영유권에 관해선 다루지 않았는데, 이것이 새로운 갈등에서 계속해서 쟁점이 되고 있다.

 

양국은 이 지역에 군대를 집중시켰고, 결국 2008년 10월 3일 첫 교전이 발생한 이후, 현재까지 소교모 충돌이 2009년에 1회, 2010년에 2회가 발생한 바 있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이 갈등은 주로 양국의 국내정치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때로는 집권세력의 정치적 수단이 되기도 한다. 바로 그 점 때문에 필자는 '프레아비히어 사원'을 '인도차이나판 육상 NLL'이라 부르곤 한다.

 

하지만 과거의 교전들에서 정치적 주도권을 행사한 이는 캄보디아의 훈센 총리인 경우가 많았다. 아시아에서 가장 오랜 기간 재임중인 집권자이자 독재자인 훈센에게 있어서, 인권상황과 부정부패, 그리고 크메르인들에게는 매국적 모습으로 비치는 친-베트남 성향의 외교정책 등, 이 사원의 국경분쟁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만한 여러 필요성이 존재했다. 반면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총리를 실각시킨 '2006년 9월 군사쿠데타' 이후 최근까지, 태국 사회는 국경 문제가 매우 첨예한 민족주의적 사안이기는 해도, '옐로 셔츠'(PAD)로 대변되는 보수층과 '레드 셔츠'(UDD)"로 대변되는 민주화 세력 사이의 갈등에 매달려 있기 바쁜 상태였다.

 

훈센은 태국의 이러한 정치적 상황을 잘 활용하여, 프레아비히어 사원에서 강력한 지도자 상 만들기와 내부안정화 작업에 일정 부분 성공을 거뒀다. 이에 반해 태국은 그 사이 자국의 국내문제에 치중하면서, 캄보디아에 비해 막강한 국력과 군사력을 가진 국가로서, 자제할 만한 여유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사태 악화를 피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이 사원에서 발생한 대규모 무력충돌은, 캄보디아가 아니라 태국의 국내상황에서부터 그 동기가 촉발됐다는 점에서, 과거의 교전들과는 성격 자체가 판이하게 다른 상태이다. 그리고 태국은 지금 자국의 문제를 해결해줄 정치적 탈출구가 절박한 사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사안에 있어서 과거 태국이 훈센 식의 돌출적 정치 쇼를 완화시켜 받아들였던 것과 달리, 캄보디아는 원래 그렇게 양보할 만한 힘도 없거니와, 태국의 정치적 상황을 감안하여 이미 2차례나 구체적인 양보를 한 바 있다. 즉 캄보디아는 "왓 께오 시까 키리 스와라" 파고다에 "이곳은 태국군이 침략했다가 철수한 곳"이란 내용의 석조 비문을 세웠다가, 태국 총리가 문제를 제기하자 파괴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 직후 "여기는 캄보디아!"라는 비문을 세웠다. 또다시 태국 측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간파한 캄보디아는 바로 다음날인 1월 26일 이 비문도 파괴했다. 그것도 태국육군 제2군구 사령관과 태국 언론들 앞에서 파괴하여, 다소의 굴욕을 감수하면서도 확실하게 체면을 살려준 바 있다. 이후 태국은 이 사찰에 게양되어 있던 캄보디아 국기의 철거를 요구했다. 하지만 캄보디아는 더 이상 양보하지 않았고, 결국 며칠 후 교전사태로 이어졌다.

 

캄보디아 역시 태국과 마찬가지로, 이번 사태에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정치, 사회적 동기들의 압박도 받고 있다. 그렇기에 이번 국경분쟁은 아무 생각없이 서로의 길을 전력으로 달리던 기관차 2대가, "하필이면" 서로가 상대방의 앞길에 막아서게 된 것과도 유사한 상태인 것이다. 따라서 태국과 캄보디아 사이의 이번 국경충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국이 처한 국내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계속)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크메르의 세계"(http://cafe.daum.net/khmer-nomad)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11.02.12 14:18ⓒ 2011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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