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벌’ 등록금 제도의 문제는 무한경쟁을 도입했다는 것만이 아니다. 보수 언론들이 서남표식 경쟁체제를 살리기 위해 애써 주장하는 것처럼 채찍만 휘두르면서 ‘실패가 용인되지 않는 문화’가 문제인 것도 아니다. 징벌 등록금 제도는 학생에게 과도한 등록금을 부과하거나 탈락에 대한 공포로 과도한 스트레스를 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이 제도의 핵심은 학생에게 인간으로서의 치명적인 모욕감을 안기는 것이다. 사람에게 극단적인 수치심을 유발하고, 그 수치심에서 한순간이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으면 무한경쟁에서 승리하라고 등을 떠미는 장치다. 인간 존엄의 바탕인 자존감과 명예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제도이다. 그러나 당사자는 상처받은 자신의 자존심을 어디 가서 호소할 수도 없다. ‘네가 열심히 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라고 이미 제도적으로 정당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고통은 누구로부터도 공개적인 공감을 얻어낼 수 없다. 내가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고, 누구도 거기에 대해 공개적으로 공감을 표할 수 없다.
고통을 당한 자와 고통, 그리고 고통에 대한 공감은 공동체에서 철저히 배제된다. 고통에 대한 공감이 배제된 공동체, 여기가 인간의 사회인가? 이것이 카이스트 학생들이 당하고 있는 가장 모욕적인 고통, 고통스러운 모욕이다.
그렇기에 자존감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지만 그 고통을 말할 수 없는 인간은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자신의 고통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모욕을 씻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몽매한 사회는 죽음이 있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입을 연다.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하는 사람은 죽은 이가 아니라 그의 고통에 대해 침묵하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고발되어야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사람에게 체계적으로 모욕을 가하는 제도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이것을 몰랐다. 인간이 자존감의 존재라는 것을 몰랐다. 인간이란 뒤에서 열심히 채찍을 휘두르면 두려움에 앞으로 열심히 달려가는 존재로 여겨졌을 뿐이다. 그런데 정말 몰랐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2009년 카이스트는 자신의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인터넷에 올린 학생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이번처럼 학내 구성원들끼리 허심탄회하게 토론해 보자는 제안도 없었다. 그 학생의 선의가 단지 소통되지 않아서 벌어진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고소했다.
그것은 명예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존감과 명예를 지키는 것이 인간이라고 한다면 카이스트에는 단 한 명의 인간만이 존재했던 셈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디 카이스트만의 문제인가? 한국에서 가장 특별하다면 특별한 대학인 카이스트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대다수가 공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우리 모두가 모욕을 삼키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때문인 것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