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하지만서도 다른 길


...............................................1학기, 디자인팀, 벗아(이사명)




960128 이후 유아기
1996년 1월 28일 광주에서 태어났다. 엄마 아빠 위로는 4살 터울인 오빠가 있고 아래로는 2살 터울인 동생이 있다. 어릴 때의 기억은 거의 없다. 동생이 태어나고 나는 잠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다. 할머니가 나를 오토바이에 태우시고 읍내에 가서 젤리를 사고 돌아오고 할머니등에 업혀서 잠든 기억밖에 없다. 그이후로는 유치원 이후에 기억밖에 없다. 일산에서 처음 유치원을 다녔는데 유치원에서 토끼들에게 풀먹여 주고 도자기에 그림 그리고 그런 기억 밖에 없다. 그 이후로 이사를 가고 또 한번 유치원을 가게 되었다. 유치원이 다 그렇듯이 그림 그리고 노래 부르고 놀이터에서 놀고 그랬다. 


잠깐의 행복과 그로 인한 상처
초등학교를 가기 전에 친구를 사귀게 되었는데 친구 이름은 은서였다. 과자로 시작된 인연이지만 재밌는 시간들을 보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배정을 받아서 반포초등학교를 가게 되었는데 마침 은서도, 같은 반은 아니지만 같은 학교를 가게 되어서 큰 걱정 없이 입학식을 거치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첫 등교를 했다. 다행히 선생님도 좋으시고 아이들 나이가 어리다보니 악한 감정들은 없어서 쉽게 친해질수 있었다. 만족스러운 1년을 보내고 2학년이 되었는데 선생님이 공주병이 심하셔서 고생이 많았다. 게다가 남자애들을 더 많이 좋아하셔서 차별이 심하셨다. 그래도 여전히 어린나이인 2학년이라서 동급생들과는 빨리 친해질 수 있었다. 그러고 3학년이 되었지만 그것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다.

그 후 2학기때 동생과 함께 캐나다로 가게 되었다. 낯선 환경에 낯선 사람들이었다. 여름캠프로 시작해서 학교도 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처음에는 영어도 잘 모르겠는데 앞에서는 나를 보면서 귓속말을 하는데 알아듣지는 못하겠는데 불쾌하니까 그만하라고 말도 못하겠고 너무 답답했다. 그래도 같이 시간을 보낼수록 점점 친해지고 나중에 정말 많이 친해졌다. 다시 한국으로 가야하는데 가족은 보고 싶은데 이 친구들을 두고 가려니까 너무 아쉬웠다. 정이라는 정은 다 쌓았는데 벌써 가야 한다는게 싫었다. 일 년이라는 시간은 나한테는 매우 짧게 느껴졌지만 짧은 시간 안에 좋고 많은 사람들과 많은 경험들과 풍부하게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망설이지 않고 1위라고 할수있을 만큼 행복한 짧고 굵은 1년을 보내고 다시 다니던 초등학교로 돌아왔다

마침 은서랑 같은 반에 배정받게 되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반으로 들어가서 선생님이 친구들에게 왜 2학기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하는 설명과 잘 지내라는 당부를 남기고 나도 내 자기소개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느낌이 되게 이상했다. 하지만 그 걱정은 곧 현실이 되었다. 아이들은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여자애들은 나를 싫어했다. 이유는 내가 단지 영어를 쓴다는 게 이유였다. 많은 사람들은 변명처럼 듣겠지만 원어민 수업때는 눈치 보지 않고 누군가와 영어를 쓸 수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 말을 했지만 하면 할수록 주위는 조용해졌다. 나는 캐나다에 간 이후로 그곳에 있는 동안은 한국어보다는 영어를 더 많이 썼다. 친구들이 국어를 배우는 동안 나는 영어를 배웠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친구들이 무슨 말을 하면 그 단어를 모르겠어서 영어로 이거야? 라고 하면 무척이나 잘난 척하는 애로 보았다. 그리고 하루는 앞에 앉아 있는데 뒤에서 은서를 포함한 여자애들이 들으라는 듯이 ‘야 재 잘난척이 그렇게 심하다며?’ ‘외국 좀 갔다 왔다고 잘난 척하는 거야?’ ‘공주병이네 완전’ ‘영어 쓰면 지가 뭔 공주인줄 알아’ 라는 식으로 사람을 앞에 두고 뒷담 아닌 뒷담을 들었다. 제일 친하다고 믿어왔던 친구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다는 충격도 받고 바로 뒤에서는 들으라는 듯이 말하는 여자애들의 행동에 상처를 받고 난 후 학교생활이 점점 싫어지고 같이 노는 친구는 많이 없었다. 그렇게 이것도 저것도 아닌 3학년을 보내고 4학년1학기가 되었다. 별반 다를게 없는 1학기를 보냈다.


전학을 가게 된 후
그러다가 집이 이사를 가게 되면서 서래초등학교에 전학을 가게 되었다. 어쨌든 반포초등학교를 나왔다는 생각에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반에 가서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다행히 많은 애들이 관심을 가지고 먼저 다가와 주어서 빨리 친해질 수 있었지만 알게 모르게 어색함과 불편함이 공존했고 친구들이 많이 없었다. 하지만 나름 좋다고 느낀 4학년 2학기가 지나고 5학년이 되었다.

모두가 배정받은 반으로 가서 책상에 앉아 있는데 선생님이 키순으로 아이들을 차근차근 앉히셨다. 마지막에는 의자와 책상이 부족해서 나는 다솜이라는 친구와 단둘이 한 책상 한 의자에 앉아서 1교시를 보냈다. 다솜이는 엄청난 우연이라면서 좋아했다.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지고 자기 친구들도 소개시켜주고 그 친구들과도 급속도로 친해졌다. 정말 친구라고 생각 되는 친구 같은 친구도 생기고 뭔가 나도 일부가 되어 간다는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내다가 쉬는 시간에 중앙계단 혹은 화장실에 갈려고 6학년 교실 앞을 지나갈 때면 왠지 기분 나쁜 시선들이 느껴졌다. 그러다가 하루는 단체로 6학년 언니들이 반앞에서 단체로 있었는데 왠일인가 싶었는데 한 친구가 저 언니들이 나를 부른다길래 나갔는데 나를 둘러싸고 한 명씩 얘기를 하는데 듣기가 싫었다. 왜 이렇게 튀냐면서 하나부터 열까지 꼬투리를 잡으면서 나한테 짜증을 내고 결론으로 다솜이랑 놀지말고 자기들한테 오라는 거였다. 할말은 다해서 기분 나쁘게 만들고 누가 누구 보고 오라 가라는지 어이가 없었다. 언니들 말을 듣지 않고 원래 하던 대로 하니까 좋았지만 그 언니들이 졸업 할때까지 신경 써야 할 점들이 너무 많았다. 그때부터 조금은 나보다 언니인 사람들을 꺼려하게 되었다.

6학년이 졸업하고 내가 6학년이 되었다. 다솜이랑 소개시켜준 친구들과 자주 어울리면서 점점 선생님들 눈밖에 나기 시작했지만 나는 그 친구들하고 노는 게 너무 재밌고 그 친구들이라면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이 컸기 때문에 그런 점들은 크게 신경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만큼의 불편함과 불쾌함이 따랐다. 사소한 일이 생겨도 툭하면 옆반 선생님이 오셔서 담임선샌님과 같이 담임선생님 서랍장에 맡겨둔 내 핸드폰을 키고 전화목록과 문자내용을 확인 하셨다. 그런 일을 당하는데도 그 당시에는 사생활침해를 받는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그러려니 했다. 그러다가 하루는 정말 어이없는 이유로 선생님이 엄마를 학교로 부르셨다. 나는 이유도 모른채 수학학원을 끝내고 엄청난 무언의 압박으로 휩싸인 침묵의 차를 타고 다시 학교에 갔다. 도착하고 나는 다른 반에 가서 그 반 선생님과 얘기 했다. 사실 얘기라고 하기에도 서러운, 대화 아닌 대화였다. 처음에 들어가서 앉았는데 다짜고짜 나한테 뭐라고 하시는데 이유도 모르고 얘기만 듣고 있으니까 너무 서러워서 고개 숙이고 훌쩍이는데 웃냐면서 흥분해서 자기주위에 있던 물건들을 나한테 다 던졌다. 나중에는 조금 가라 앉히시고 말을 해주시는데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내가 한 것 마냥 얘기를 하시는게 너무 불쾌했다. 아니라고 말을 해도 들어주질 않으시니까 답답하고 짜증났다. 결국 마무리는 내 잘못인 것 마냥 끝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선생님들이 너무 싫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이미지가 그 사람을 좌우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작은학교
그러다가 엄마가 작은학교 여름캠프를 가보는게 어떻겠냐고 하셔서 가게 되었는데 좋은사람들과 좋은 시간들을 보내고 와서 난 무조건 작은학교를 가야하겠다고 말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친구들과 더 오랜시간 있다 보니까 작은학교를 가면서까지 친구들이랑 같이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엄마가 지원서를 넣어 보는게 어떻겠냐고 하셔서 나쁠 건 없지 하는 생각으로 넣었는데 1차 통과가 되었다. 붙었다는 말에 기분이 오묘했지만 좋았다. 그러고 좀 있다가 2차 면접을 하러 작은학교에 가게 되었다. 발우공양도 하고 수학도 풀고 애들이랑 많이 친해져서 편하게 놀기도 했다. 작은학교를 가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할 때쯤 최종발표가 나왔다. 아무리 내 이름을 찾아봐도 없었다. 대신 대기자 명단 1위였다. 그걸 보고 떨어졌다는 창피함과 대기자 1위라는 굴욕감 때문에 너무 가고싶지 않았다. 그러다 하루는 엄마가 내가 작은학교를 갈 수 있다고 했다. 그래도 꿍한 감은 없지않아 있었다. 그래도 간다고 했다. 늘 후회하다가 좋은 선택을 한 것 같다고 생각하다가 또 후회하고 또 좋은 선택을 한 것이라 생각을 하는 것을 반복하다가 친구들에게 징징대다가 엄마한테 몇 번 틱틱대다 보니까 벌써 졸업식이었다. 슬픈마음이 제일 컸다. 지금 내 주위에 있는 친구들을 버리고 갈 만큼 작은학교에 애착이 안 갔다. 작은학교 입학식은 점점 다가오는데 불만만 쌓고있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작은학교에 가게 되었다.


작은학교에서의 3년과 나의 변화
입학식을하고 작은학교에서 지내다보면서 느낀 거지만 작은학교는 지금까지 지내오던 환경과는 모든 방면에서 달랐다. 신선한 충격이라면 충격이었다. 학생들은 어떤 것에 크게 얽매이지 않으면서 살고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존중해주고 학교는 자유롭고. 처음에는 이런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지금까지 학교를 다니면서 처음 느껴보는 거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정말 학교와 선생님들에게 감사하게 생각하고있었는데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 이상의 것들을 바라게 되었다. 충분히 자유로운 상황에서 더 많은 걸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 두 개씩 불만이 쌓이고 나중에는 그 불만들을 터뜨리게 되었다. 하루는 친구들과 2학년들에게 종이를 주고 학교에 가지고 있는 불만이 있다면 종이에 쓰고 모아서 달라고 했다. 집에 가는 주간 전에 모아서 친구들이랑 이걸 어떤 방식으로 보여주어야 임팩트가 있을까? 하다가 결국에는 봉투에 모아서 교무실 책상에 올려놓고 오기로 했다. 집에 가는 주간이 끝나고 학교에 왔을 때 임팩트는 엄청 났다. 선생님들이 하나하나씩 읽어보시고 3학년들과 얘기를 하셨다. 하지만 그때 우리의 태도는 진지하게 얘기하기는커녕 징징대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만 주구장창 내놓고 이도저도 아니게 끝냈다. 그러다가 학기말에 갑자기 늘 학교에 가지고 있었던 불만들을 단지 불만으로 가지고 가는게 아니라 내가 직접 불만을 해결하는 게 더 빠르겠다고 생각을 해서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친구들을 모아서 같이 했는데 내 개인적으로는 결과는 좋았다고 느꼈다. 걱정했던 것보다 반응들이 좋아서 너무나도 만족스러웠다.

관계에 있어서 나는 늘 예민했다. 작은학교때는 매일매일 붙어있다보니까 안 쓸래야 안 쓸수가 없엇다. 상대방이 나를 생각하는게 부정적이면 그것에 대해서 계속 연연하게 되었다. 내가 굳이 신경쓰지 않아도되는 사람이라면 크게 걱정이 되진않았지만 나랑 오래있어야하는 사람이거나 내가 신경을 쓰거나 써야하는 사람이라면 되게 민감해졌다. 다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는 일에 나는 사소한것에도 예민해졌다. 그리고 관계의 문제가 하룻동안의 나의 기분을 좌지우지하게 될 때도 많았다. 그런 점들이 너무 싫어서 고쳐야지 하고 생각할 때는 수도 없이 많았지만 막상 일이 닥쳐오면 달라지는 게 없었다. 그런 모습들을 남들에게 보여지는게 싫어서 커버하려다 보니까 점점 생각하게되는게 많아졌다.

그리고 나는 작은학교에서 제일 바보같지만 스트레스를 받았던 게 관계에서 이끌려지는 사람이 아니라 이끄는 사람이 되고싶다는 욕심이 컸다.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욕심이었다. 나 혼자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일 수도 있는데 그러다보니 친구와 친구를 문제로 경쟁하게 되었다. 한 친구를 두고 내 친구야! 하는 경쟁이 아니라 내주위에 친구가 없으면 난 불안했기 때문에 애정결핍 마냥 경쟁하다시피 내 주위에 친구를 두려고 많이 애썼다. 그러다가 다른 애 주위에 더 있다 싶으면 나는 그걸로 인해서 스트레스 받고 내 주위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애를 많이 썼다. 하지만 이건 결코 좋은게 아니라 오히려 친구와 친구간의 사이를 깨뜨리는 행동이었다. 남을 존중해주는 건 아예 없고 단지 내 생각대로 사람을 조종했다. 그렇게 이기적인 모습으로 살았다. 그러다보니까 친구들이랑도 많이 부딪히게 되었다. 그러면 또 스트레스를 받고 나도 그만큼 틱틱대고 그냥 악순환 그 자체였다. 

남들에게는 강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지만 한 편으로는 징징대고 싶고 위로받고 싶고 누군가 따뜻하게 나를 안아줄 사람을 필요로 했다. 애 같아 지고 싶기도 했다. 그러다보니까 나에게 맞추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맞춰주길 바라는 것부터가 이기적이라는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사람을 바랐다. 사실 그건 친구가 아니라 장단맞춰주는 사람에 불과했다.

처음 작은학교에 들어왔을때 단지 튄다는 이유로 언니들의 괴롭힘을 당했다. 나는 적어도 내가 최고학년이 되면 그러지 말아야지하는 생각으로 최고학년을 맞이했다. 하지만 막상 3학년이 되고 나니까 언니들의 마음이 이해가 가면서 언니들도 그랬으니까 나도 할 수 있어 하는 생각을 가지고 같은 방식으로 밑에 학년들을 괴롭혔다. 처음에는 당연하다고 생각을 하면서 1학기를 보내고 2학기 중반으로 접어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2학기 말에 갑자기 한 순간에 생각이 바뀌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벽을 쌓고 있을때 소통을 하면서 벽을 허무는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말로 찍어 내렸다. 너무 늦게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니까 지금까지 얘들에게 했던 행동들이 미안해지고 수치스러워졌다. 그래서 하루는 마음먹고 같이 큰 가정에 사는 9기 여자 친구들과 관계개선 프로젝트를 하자고 했다. 생각보다 애들 반응이 긍정적이여서 뭔가 힘이 됐다. 주말 저녁에 큰가정 여자들을 한방에 모아서 외박신청을 하고 게임과 놀이를 하면서 서로의 마음의 벽과 경계선을 허물고 나서 서로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이나 힘들었던 점들을 말하게 되면서 정말 많은 깨우침을 얻게 된것같다.


하자
대안학교에 있으면 다른 대안학교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듣게 되는 것 같다. 1학년때 부터 줄 곧 하자를 포함한 다른 대안학교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있었다. 그리고 2학년때는 타 대안학교 탐방을 가는데 그때 자신이 가고싶은 학교를 선택해서 가는 거였는데 나는 간디학교에 지원을 했고 점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3학년이 되었을때는 간디 고등학교에 진학을 할려고 했지만 떨어지고 난 후 학교를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없어져서 그냥 일 년간 학교를 가지 않고 내가 해보고 싶었던 일들을 다 해보면서 지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면서 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 방학을 하고도 정확한 결정을 내리지못하고 있다가 미술을 배우고 싶어서 미술학원은 아닌 작품을 위주로 하는 화실에 다니게 되면서 점점 관심이 갔다. 그러다가 하자에 디자인팀 얘기가 생각이 나면서 디자인 만이 아닌 다른 배움들도 있을거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만큼 어려운 점들이 많을 것이라는 당부가 있었다. 그래서 조금은 작은학교에서는 관계를 배우고 하자에서는 공부지만 조금 일반적인 공부와는 다른 공부를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오게되었다.


미술? 디자인?
처음에 하자에 가겠다고 한 이유 중 가장 컸던 건 디자인팀이었다. 학교 오기전 부터 미술 혹은 디자인에 관심이 있었다. 그림에 실력이 좋다거나 재능이 있다 이런게 아니라 그냥 원래부터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랬다. 하자에 들어온 후 디자인팀에 들어와 처음 하게된 화장실 프로젝트를 하면서 기대 반 걱정반으로 시작했다. 뭔가 이제 제대로 한다는 느낌이 많이 들어서 기대가 컸다. 초반까지는 재밌는 일이라고 느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감히 일학기지만 이게 의무감처럼 느껴졌다. 그림을 그리는 것도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사실 무서웠다. 2학기와 3학기가 그려 온것과 내가 그려온걸 보고 있으면 난 왜 이럴까 하는 생각이 자주들었다. 학기라는 갭이 있는데 내가 너무 많을걸 바라고 있는 거야 싶으면서도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의 차이인가? 라는 쓸데없는 생각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건 당연히 디자인팀으로서는 해야 할 일이 겠지만 모두 벽에 붙혀 놓을때 그때가 제일 싫었다. 다른 죽돌들의 작품을 보면 확연히 다른점이 보였기 때문에 그걸 보면 보고 있을수록 내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디자인팀을 하면 할수록 자신감은 바닥을 치고 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다. 디자인팀 할 때 제일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다면 처음 우리가 3층에서 모두에게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지금까지 자기가 해온걸 벽에 걸고 이것에 대한 얘기를 하고 사람들에게 평가를 받는 시간이었는데 그때 정말 어디에라도 숨고 싶었다. 투표를 할 거라 하셨지만 이렇게 공개적으로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한편으로 자기가 노력한 만큼 받는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아예 열심히 안한건 아니지만 노력을 하진않았다. 더 생각을 해 볼수도 있는 점에서 멈추고 그냥 이게 최선이야 라고 생각하고 더할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 그런 후회를 많이 하게 된 것같다. 지금까지 디자인이라는 것에 대해 가볍게만 생각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앞서 말했다 싶이 디자인팀을 하면서 나는 단지 좋아서가 아니라  디자인팀의 일원으로서라는 의무감 때문에 한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었다. 아이디어를 내도 사람이 기계적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디자인팀에 계속 연연하게 되면서 다른 할 일들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오로지 일주일 내내 디자인팀 워크샵이 올 때까지 매달리고 워크샵을 하고 난 후에도 다음 워크샵 때까지 그걸 붙들고 있다보니 점점 지치게 되었다. 다른 해야할 일들이나 하고 싶은 일들은 모두 뒷전이었다. 오로지 디자인팀을 위해서 학교에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다. 실력도 좋지 않고 상상력 혹은 아이디어도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매달리게 되었다. 1학기니까 괜찮아 라는 말을 들으면 위안은커녕 걱정만 쌓이게 되었다. 디자인팀의 프로젝트가 갈수록 늦어지고 한학기가 종강했는데도 마무리 하지못한 것이 일학기인 내가 그만큼 따라가질 못해서 그런 것 같이 느껴질 때가 많았다. 하지만 디자인팀을 하면서 너무 안좋았던 것만 있진 않았다. 좀 더 디자인을 보더라고 아 이건 이렇구나 하면서 그러려니 넘어가는게 아니라 본 것을 한번 더 생각해 보는 자세를 조금은 취하게 된 것 같다.
 

농사만 4년째 이지만
가끔 가족끼리 주말농장을 하면서 아주 작은 농사를 체험으로 하다가 작은학교에 들어가서 개인밭이 주어지고 나 혼자서 파종하고 내 밭을 갈구고 수확한다는 것에 기대가 컸다. 작은학교에 들어가고 난후 농사라는 매체와는 늘 가깝게 있다고 느꼈다. 졸업 후에 집에 왔을때 엄마랑 장을 보다가 채소 코너에 갔을 때 가격을 보니까 너무 비쌌다. 작은학교에 있는 동안은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를 못하고 살다가 졸업하고 나서 서울에 살다보면서 새삼 채소를 우리가 직접 키우고 재배를 하는게 좋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장을 보고 난후에 엄마께 작은학교에서 농사했을 때가 힘들고 귀찮았어도 좋았고 나는 서울에 있어도 우리집에서 채소정도는 자급자족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사가기 전까지 만해도 옥상에서 아빠가 채소 심어놓으신걸 먹었지만 이사를 간 후에는 그럴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주말농장을 해보는게 어떠냐고 하고있다가 하자에 들어오고 나서 이번학기부터 작업장학교에서도 농사수업이 있다고 해서 되게 들뜨는 마음도 있지만 작은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학교를 다닌다면 절대 않할거라고만 생각하고 있어서 되게 나와서도 하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작업장학교에서의 농사수업은 지금까지 내가 해오던 농사수업과는 달랐다. 하자에서는 꾸준한 관리와 애정을  가지고 임하는 모습에 3년간 나는 도대체 뭘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 작은학교에 왔을때는 자기가 농사 지은것을 수확해서 집에 가져가거나 학교에 팔거나 하는게 주였는데 자기가 수확을 해서 먹는다는게 좋았다. 그리고 한번은 양상추를 심었는데 엄청난 심혈을 기울여서 키웠다. 학기말에는 거의 최상급이라해도 좋을 만큼 잘키웠다. 그런데 하루는 저녁에 내밭이 고라니와 멧돼지의 습격을 받아서 내가 엄청난 애정과 관심을 주었던 양상추가 많이 없어졌다. 그 이후로 제대로 키우나봐라 라는식으로 키우게 되었다. 그리고 작은학교 에서는 좋은 먹거리에 관심이 많았지만 점점 애들이 불량식품을 먹는것에 대해서 포커스를 맞추게 되다보니 내 자신은 그저 내가 심은 채소를 잘키우고 수확해서 학기말에 용돈을 받는 그런걸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키우는 것에는 관심을 가지지않고 다른일들을 하기에 바빴다. 액비를 주라고 해도 일주일에 한번 농사시간에 줄까말까 하고 매일매일 물을 주라고 해도 아무도 제대로 관리를 안해서 그냥 아예 선생님이 스프링클러로 한꺼번에 물을 주셨다. 처음에는 내가 해야하는 일인데 라는 불편한 마음은 들었지만 점점 스프링클러의 편리함이 좋아서 계속 그대로 하게 되었다.

현미네홉은 나비문명과 후쿠시마 이후의 삶에 대한 공부로 이어진다는 것을 한참 후에 알게 되었는데 내가 느꼈을 때는 그런 부분과는 거의 연관 없이 갔던 것 같았다. 그리고 실험적인 농사라고 했을 때 도시농업에 관해서 하는 줄 알았다. 예를 들어 도시에서 이 작물은 이런 병해충에 약하고 이 작물은 도시에서 강하구나 혹은 여기에 잡초를 키워보고 여기는 뽑아서 해보자 하는 실험들이 있었지만 부족했었던 것 같다.

하자에서 현미네 홉은내가 한 일에 책임을 진다는 마인드에 밭 또한 개개인의 밭 개개인의 작물이 아닌 모두의 밭 모두의 작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다뤄진다는 점이 지금까지 내가 농사시간에 해오던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그러면서 또하는구나..... 싶다가도 다른 환경에 다른 마인드를 가지고 하니까 나도 이제는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지고 임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현미네 홉 수업을 들었지만 조금은 작은학교에서 했던것과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그리고 다 같이 라는 느낌은 작업장학교 사람들에게서는 느꼈지만 다른 하자에 계시는 사람들에게서는 극히 드물었다. 크게 다같이라고 느낄때가 수확한 걸 나눌 때였다. 그게 나쁘다는게 아니라 단지 같이라고 했을 때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나 싶었다. 그리고 나 자신도 조금은 수확 한다는 것에만 신경을 썼다. 그런 점들이 이번 학기 현미네홉 수업을 아쉽게 했다.


1학기를 마치며
2학기를 한다고 하면 더 이상 나에게는 1학기라는 쉴드가 없다. 하지만 1학기 였을 때도 1학기라는 쉴드가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집같고 조금은 식구같던 작은학교를 떠나서 이제 난 정말 배우고 싶어 하는 생각을 가지고 기대 반 설레임 반으로 와서 처음에는 들뜨고 뭐든지 우선 긍정적으로 생각을 가지고 힘들다고 생각하는 일에 바꾸려고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과정에서 너무 지치고 괜히 혼자 스트레스 받아서 혼자 예민해졌다. 열등감이라 한다면 열등감도 느꼈다. 하지만 1학기 인데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있는 건가 싶으면서도 어느정도 깔린 판에서 조차 죽돌로서 즐기고 배우질 못한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나 스스로가 공부를 하지 않은 점이 내가 힘들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배우고 싶다면서 학교에 온건데 막상 하고 보니까 힘들다고 징징대고 있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지고 후회로 가득가득 차있는 나의 이번 한 학기가 애매모호하게 끝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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