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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IOS글 수 9
산유화 - 이 시는 참 예뻐. 잔잔하고, 봄을 시작을 알리는 꽃인 노오란 산수유 꽃이 생각나는 시야. 그리고 산유화를 노래로 만든 것도 있는데, 그 노래도 좋아해. 그래서 오늘도 하루 종일 흥얼거렸었어. 시에는 울컥하면서 강렬하게 남는 시 보다 오히려 잔잔한 시가 마음에 더 남는 것 같아. 나한테 남기어주는 대표적인 시는 이 시고, 또한 매 해 봄마다 읽고 부르며 봄을 더 느낄 수 있었어.
2013.03.23 00:44:53
실제失題 (2) 김소월
이 가람과 저 가람이 모두처 흘러 그 무엇을 뜻하는고?
미더움을 모르는 당신의 맘
죽은 듯이 어두운 깊은 골의 꺼림직한 괴로운 몹쓸 꿈의 퍼르죽죽한 불길은 흐르지만 더듬기에 지치운 두 손길은 불어 가는 바람에 식히셔요 밝고 호젓한 보름달이 새벽의 흔들리는 물 노래로 수줍음에 추음에 숨을 듯이 떨고 있는 물 밑은 여기외다.
미더움을 모르는 당신의 맘 저 산山과 이 산山이 마주서서 그 무엇을 뜻하는고?
2013.03.23 04:54:46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솥작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든 머언 멈 젊음의 뒤안길이여 인제는 돌아와 거울앞에선 내 누님같이 고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필라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 -서정주, 국화옆에서
2013.03.23 05:59:26
봄 윤동주
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돌, 시내 가차운 언덕에 개나,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 삼동을 참아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솟쳐라 푸르른 하늘은 아른아른 높기만 한데
2013.03.23 06:00:25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뭄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든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어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해*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은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출처] 2013.03.05.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작성자 뮤뮤
2013.03.23 07:31:23
오감도 제1호 이상 지음
13인의 兒孩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뚜비 올림
2013.03.23 08:35:59
평 행 선 김남주
우리는 서로 만나본적은 없지만 - 서키가 올린 시 나도 좋아해서 그거 올리려다 다른 시 찾아 씁니동.. 왜냐면 우리부모님 꽃가게 이름이 산유화거든 ! 그 시에서 따왔다고 하더라고. (비록 우리가 만든 가게 이름은 아니고 먼저 있던 분이 물려준 가게 이름이지만..) 그렇지만 같은 해남출신 김남주 시인의 시를 올려봄. 김남주 시인의 생가는 우리 할머니집 마을에 있어서 할머니집에서 1분이면 가볼 수 있는 곳임 ㅎㅎ
2013.03.23 08:50:18
대학 시절 기형도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2013.03.23 08:50:38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천상병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 날이 와, 새가 울고 꽃이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일 때에 나는 도량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2013.03.23 09:03:34
나는 잊고저
한용운 남들은 님을 잊고저 생각한다지만 나는 님을 잊고저 하여요 잊고저 할수록 생각하기로 행여 잊힐가 하고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잊으려면 생각하고 생각하면 잊히지 아니하니 잊도 말고 생각도 말아볼까요 잊든지 생각든지 내버려두어 볼까요. 그러나 그리도 아니되고 끊임없는 생각생각에 님뿐인데 어찌하여요. 구태여 잊으려면 잊을 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잠과 죽음뿐이기로 님 두고는 못하여요 아아 잊히지 않는 생각보다 잊고저 하는 그것이 더욱 괴롭습니다.
2013.03.23 09:24:45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김수영, '눈'
2013.03.23 09:28:56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게 쌔김질 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 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글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2013.03.23 09:44:03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고 정희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그리움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러질 때까지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이면 나는 너에게 가까이 가기 위하여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허공 중에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또 울 것이다
2013.03.23 09:53:53
너를 내가슴에 품고 있으면
고정희
고요하여라 울렁거려라 눈물겨워라
2013.03.23 09:59:08
별 헤는 밤 -윤 동 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의 시와 별 하나의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의 아름다운 말 한마 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 머니 된 계집애들 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 리아 릴케 이런 시 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2013.03.23 10:44:12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 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름을 부르기 전에는 몸짓이었지만 이름을 부르며 꽃이 되었다는 표현. 이름을 부르는것을 시작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알맞은 꽃이 되고, 각기 다른 향과 빛을 내는 꽃들이 하나의 눈짓으로 만나기. 아름다운 꽃의향연... 은 계속되겠지.
2013.03.23 18:33:04
서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2013.03.23 19:10:09
죽 한그릇
김삿갓 네 다리 소반 위에 죽 한 그릇 놓였는데 하늘에 떠도는 구름 그림자가 비치네 주인 양반 조금도 무안해 할 것 없소 나는 본시 물에 비친 산을 사랑한다오.
2013.03.23 20:02:07
풀 김수영
2013.03.23 20:11:59
위로 윤동주
거미란 놈이 흉한 심보로 병원 뒤뜰 난간과 꽃밭 사이 사람 발이 잘 닿지 않는 곳에 그물을 쳐 놓았다. 옥외 요양을 받는 젊은 사나이가 누워서 치어다 보기 바르게.......
나비 한마리가 꽃밭에 날아들다 그물에 걸리었다. 노-란 날개를 퍼득거려도 파득거려도 나비는 자꼬 감기우기만 한다. 거미가 쏜살같이 가더니 끝없는 끝없는 실을 뽑아 나비의 온 몸을 감아 버린다.
사나이는 긴 한숨을 쉬었다.
나이보담 무수한 고생 끝에 때를 잃고
병을 얻은 이 사나이를 위로 할 말이
거미줄을 헝클어 버리라는 것밖에 위로의 말이 없었다.
2013.03.23 20:22:21
가는길 나쵸, 김소월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도 까마귀 서산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2013.03.23 20:33:09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은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2013.03.24 07:18:55
병원 - 윤동주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2013.03.25 22:00:36
이주의 시 대학 시절 기형도
나무 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 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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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구름
기형도
구름으로 가득찬 더러운 창문 밑에
한 사내가 쓰러져 있다, 마룻바닥 위에
그의 손은 장난감처럼 뒤집혀져 있다
이런 기회가 오기를 기다려온 것처럼
비닐 백의 입구같이 입을 벌린 저 죽음
감정이 없는 저 몇 가지 음식들도
마지막까지 사내의 혀를 괴롭혔을 것이다
이제는 힘과 털이 빠진 개 한 마리가 접시를 노린다
죽은 사내가 살았을 때, 나는 그를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다
그를 사람들은 미치광이라고 했다, 술과 침이 가득 묻은 저
엎어진 망토를 향해, 백동전을 던진 적도 있다
아무도 모른다, 오직 자신만이 홀로 즐겼을 생각
끝끝내 들키지 않았을 은밀한 성욕과 슬픔
어느 한때 분명 쓸모가 있었을 저 어깨의 근육
그러나 우울하고 추악한 맨발 따위는
동정심 많은 부인들을 위한 선물이었으리
어쨌든 구름들이란 매우 조심스럽게 관찰해야 한다
미치광이, 이젠 빗방울조차 두려워 않을 죽은 사내
자신감을 얻은 늙은 개는 접시를 엎지르고
마루 위엔 사람의 손을 닮은 흉측한 얼룩이 생기는 동안
두 명의 경관이 들어와 느릿느릿 대화를 나눈다
어느 고장이건 한두 개쯤 이런 빈집이 있더군,
이따위 미치광이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 죽어갈까
더 이상의 흥미를 갖지 않는 늙은 개도 측은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저 홀로 없어진 구름은
처음부터 창문의 것이 아니었으니
[출처] 詩. 기형도 「죽은 구름」|작성자 이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