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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자 밖에서도 잘 살고 싶다 ...............................................3학기, 공연음악팀, 들풀(정의성) [2월 중순 학기 계약 전] 올해 초에 메솟을 다녀오고 나는 작업장학교를 그만 다니려고 생각했었다. 작업장학교에서 1년을 지냈고 이제 3학기부터는 본격적으로 동료가 되어 함께 해야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메솟에서 했던 일들과 공연, 노래만들기 워크숍 등 작업장학교와 페스테자의 일이 나에게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랬기에 작업장학교에서 배운 것들은 굉장히 소중하지만, 그것들을 반드시 작업장학교 안에서 풀어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고, 이제는 그것들을 내가 줄곧 하고 싶던 음악과 함께 가져갈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었다. '어떻게든 잘 되겠지', 하고 막연하게만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너무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계획이었다. 그 당시의 내 계획은 내가 서울에 처음 올라오려고 했을 때와 별 다를 것 없이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뚜렷하게 잡혀있지 않은 상태였고, 그건 얼마 못 가서 히옥스와의 면담에서 다 들통이 나버렸다. '너의 목표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앞으로 뭘 할 거냐' 라는 질문에 제대로 답을 못했다. 아빠는 지금 시점에서 내가 하자를 나간다면 내 성격상 하자에서의 인연들은 전부 끊어질 거고, 그렇게 음악을 하라고 내보내는 건 그냥 한 번 망해보는 경험을 쌓게하는 의미 정도나 될 거라고 아주 거침없이 거들었다. 거기에 '풀은 더 할 수 있는데 힘을 아낀다' 라는 말까지 들어서 이야기가 끝나고 결국에 나올 때는 히옥스한테 "이번 학기도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나와버렸다. 그리고는 지하철을 타고가는 내내 잘한 짓인가 못한 짓인가 머리가 복잡했다. 그렇게 며칠 있다가 홍대에서 영환을 만났는데, 요즘에 아마추어 공연하는 건 어떤지에 대해 얘기하다가 랩 학원은 잘나가는 랩퍼와 인맥을 만들기 위한 공간이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인맥이 탄탄하거나 엄청난 재능이 있어야 한다. 한국에 랩퍼되고 싶어하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우리가 알고있는 랩퍼들 중에 랩해서 자기 밥벌이 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있는지. 결국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생활고에 시달리는 인디뮤지션이 되거나 꿈을 접는다고. 사실 모르던 이야긴 아닌데, 얘기를 쭉 들으면서 그건 내가 바라던 게 아니니 이대로 학교를 나온다고 해도 되게 막막하고 재미없는 삶을 살 거 같았고, 그래서 작업장학교에 재계약한다고 해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굶든 실패하든 내가 고른 거니까 상관없어! 옛날에는 요렇게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굶는 것도 싫고 실패하는 것도 싫다.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많이 사라진 것도 사실인데 그렇게 해서 잘된다고 해도 별로 즐겁지 않고 내 자신에게 뭔가 떳떳하지 못할 것 같다. 그리고 다른 것도 아닌 먹고 사는 일 때문에 음악가지고 죽어라고 경쟁해야만 하는 삶을 내가 대체 왜 살아야 하는 건가 좀 어이가 없기도 하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마침 난 작업장학교의 죽돌이지. 이것저것 잘 배우고 알아가다가 학교를 나올 때쯤엔 그것들을 바탕으로 내가 살고 싶은 모습으로 바꿔도 되겠다. 이런 생각으로 이어지게 됬다. 예전에 대안교육한마당에 어느 대안학교 학생이 사회에 나가서 대안학교의 삶대로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다며 운 적이 있었다고 들었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조금 이해가 가는 것 같기도 하다. 난 내가 하자를 나가서도 바르고 떳떳하게 잘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번 학기를 시작하면서는 그 방법들을 찾아보고 싶었고, 동시에 이번에는 좀 더 열심히 잘해서 야무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좋은 삶]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삶의 최소한은 내 주변의 사회문제들을 외면하지 않는 거, 땀 흘려 일한 만큼 먹으면서 다른 생명이랑 다음 세대한테 폐 안 끼치고 사는 거다. 원래는 잘 와닿지 않던 이 가치들이 이번 학기 어느 때부턴가 내게 굉장히 중요한 것이 되고, 누군가를 판단하는 기준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나도 나한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하나씩 시도해보고 방법을 찾아가며 노력하고 있다. 이 공부들은 이번 학기 동안 작업장학교 내에서 했던 것들로,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삶에 영향을 많이 끼친 것들이다. - 3만엔 비즈니스 작년 탈핵인문주간에 비전력공방 일로 뵈었던 후지무라 야스유키 선생님을 이번에는 3만엔 비즈니스로 만나 뵈었다. 3만엔 비즈니스란 한 달에 3만엔(한화 30만원 정도)을 벌며 사는 것으로, 딱 3만엔만 벌 수 있는 비즈니스(중요한 것은 돈만을 위한 일이 아니어야 하고, 주변 사회와 공동체를 위한 '착한 일'이어야 한다.) 몇 가지를 겸업으로 하며 일주일 중 이틀만 일하고 나머지 날들은 놀고, 공동체를 가꾸고,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한다. 여기 나오는 자급자족은 3만엔 비즈니스의 핵심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데, 사실 우리의 지출 중 대부분은 자급자족이 가능하다면 사라질 것들이고, 자급자족을 하기 위해서는 가까운 친구와 공동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자급자족이 아닌 이상 집을 짓는 등의 큰 일에는 주변의 도움이 필요하다.) 자급자족을 한다면 당연히 마을 공동체와 친구, 땀 흘리는 일과 농사의 중요성을 알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연히 돈에 대한 집착에서도 멀어져 돈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도 해결이 될 것이다. 우리는 3만엔 비즈니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자공공 포럼'을 준비하느라 한국에서 가을에 출판될 3만엔 비즈니스의 번역 초고를 읽었다. 읽으면서 '과연 이렇게 사는 게 정말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놀라웠는데, 이것이 실제로 적용이 된다면 내가 가지고 온 고민의 해결 뿐만 아니라 나비문명으로 가는 길도 멀지 않겠다 싶었다. 이번 학기에는 자공공 포럼 한 번 이후로 3만엔 비즈니스에 대한 공부는 깊게 되지 않았지만, 계속 3만엔 비즈니스에 관한 생각을 하고 그에 관한 프로젝트들을 진행했다. 이후에 나올 것들은 3만엔 비즈니스의 갈래들인데, 그만큼 3만엔 비즈니스는 이번 학기의 가장 큰 공부였다고 생각한다. - 현미 네 홉 3만엔 비즈니스를 이어 시작한 것이 바로 이 현미 네 홉 프로젝트다. 현미 네 홉은 도시의 자투리땅, 옥상, 화분 등에 농사를 짓는 도시농업 실험이고, 동시에 농업을 통한 사회운동과 공동체 회복을 위한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우리는 인천도시농업네트워크에서 나온 선생님 도시농부게릴라 짱짱과 함께 공부를 하고 하자센터 자투리땅에 자연농으로 농사를 지었다. 우리 아빠는 소꿉농사를 짓는다고 농담을 하시지만, 도시의 사람들이 규모는 작지만 농사를 지으며 자급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관계를 만들어가고, 밥과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는 등 (게다가 화학비료를 전혀 쓰지 않는 자연농) 도시농업은 일반 농사와는 다른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앞 밭, 뒷 밭, 옥상 밭을 각각 비에도 지지 않고 밭, 바람에도 지지 않고 밭, 눈에도 지지 않고 밭으로 이름 짓고 나뉘어 담당했다. 화학비료 대신에 직접 음식물쓰레기와 깻묵과 소변으로 비료를 만들어 사용했다. 나는 옥상에 있는 제일 넓은 '눈에도 지지 않고 밭'을 맡았다. 설렁설렁하려던 마음은 아니었지만, 나름 농부의 아들.. 이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하려했다. 특히 아무도 액비에 먼저 손을 대지 않을 때나 너무 더워서 물이고 뭐고 대충 뿌려주고 내려가고 싶을 때마다 한 여름에 땀이 비 오듯 흐르는 비닐하우스에서 약을 치던 아빠가 눈앞에 아른거려서 도저히 건성으로 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맨날 일 안하고 선풍기랑 붙어있던 내 모습도 불필요하게 자꾸 떠올랐다) 20주도 안되는 오이들도 진딧물에게 다 뜯기게 만들고, 책상보다 작은 논에도 제대로 모내기를 못해 모들이 쓰러지나 하는 걸 보면서 아빠가 그렇게 대단해보일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니 난 한번도 아빠의 게으르거나 허술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성실하게 꾸준하게 일할 수 있을까. 나도 그런 단단한 사람, 좋은 농부가 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우리가 현미 네 홉을 시작하며 했던 얘기 중 의무감, 사명감, 어렵고 힘든 노동 등의 농사가 아닌 즐거운 일, 삶을 아름답게 하는 일, 예술 등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얘기가 있었다. 농사는 나에게 줄곧 어렵고 절대 만만하지 않은 일이었고, 주변에 큰 뜻을 품고 귀농을 한 어른들이 대단하게도 보이고, 억지로 농사짓다가 포기하는 몇몇 어른들을 볼 때면 안타까움도 느꼈었다. 한 학기가 지난 지금도 생각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도시농업으로 얻는 즐거움이나 행복함을 시골에서 짓는 일반 농사, 특히 생계를 위한 농사에서도 똑같이 얻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쪽하고는 아예 게임이 다른 거라고 생각한다. 현미 네 홉 마무리 시간에 한 죽돌이 '도시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고 말했다. 여러 생각이 들게 하는 말이다. 도시 - 서울, 빌딩 숲,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길, 아파트- 라는 전혀 자연스럽지 못한 공간, 기형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삶의 공간에서 애써 조그맣게 농사를 지으며 만족해야 하나? 애초에 그 도시라는 공간 자체가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우리의 방식으로 농사의 삶을 아름답게 하는 부분이 고된 노동의 크기보다 커질 수 있을까. 도시에서 짓는 농사라는 게 이치에 맞는 것인가. 이 두 가지가 이번 학기 현미 네 홉 수업을 하면서 얻은 고민이다. -적정기술 워크숍 이 또한 3만엔 비즈니스 공부의 하나. 학기 말에 완주에 내려가서 일주일간 먹고 자며 들었던 워크숍이다. 적정기술이란 말하자면 오토바이와 도보 사이의 자전거 같은 기술로, 첨단 과학기술과 인간의 힘 중간의 ‘적정’한 위치에 있어 거대 자본과 외부의 힘 없이도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기술을 뜻한다. 기술에 대해 배우는 워크숍이었지만 자급자족과 공동체에 관한 공부임과 동시에 에너지대안에 대한 공부이기도 했다. 우리는 일주일 동안 폐식용유로 만드는 바이오디젤, 음식물 쓰레기를 이용한 바이오가스, 연비가 매우 좋은 로켓화목보일러와 여러가지 버전의 흙벽난로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적정기술 워크숍에 가서는 주로 공동체와 일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워크숍을 지내는 일주일 동안 밥 먹고 일하고 밥 먹고 일하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다보니 내가 일이 서투른 사람이라는 게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일을 잘 못 찾고, 겉돌고, 집중하지 못하고, 졸고, 지치는 등 그렇게 새로운 일도 아니지만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내 자신에게 실망하게 되는 부분이 사실 좀 많다. 그래서 워크숍을 하는 동안 앞으로 내가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고 걱정을 했는데, 나를 강제로 붙잡고 일을 가르치시지 않은 부모님의 의도와 그런 과정을 거쳐 나는 지금 어떤 사람이 되었나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해보라는 코멘트를 들었다. 생각해보면 아빠는 거의 언제나 나에게 일을 가르쳐주고 싶어하셨고 일을 잘하기를 바라셨지만, 나를 불러 시키는 일은 당신이 하시는 일에 비하면 새발의 피 수준이었다. 결국 나는 그렇게 자라나서 도시 애라고 하기에는 그닥 세련되지 못하고, 시골 애라고 하기에는 자연과 일과 땀이랑 거리가 있는 그런 어정쩡한 청소년이 된 것 같지만 그건 뒤집어 말하면 양 쪽의 장점을 모두 가진 셈이 되니 그 점이 후회스럽지는 않다. 오히려 한 쪽 특성만 가지고 있게 되었다면 정말 내 자신에게 흥미롭지 못한 사람이 됬을 것 같아서 지금의 내가 된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언제까지고 손에 흙 안 묻히고 살 건 아니니까, 사실 이제는 일도 좀 잘하고 싶다. -채식 사실 난 내가 채식을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평소에 육식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싶어하기도 했었고 고기와 인스턴트 음식들이 나와 내 삶을 산만하게 만든다는 생각을 계속 해왔지만 그렇다할 동기나 계기는 없었는데, 그렇다고 그걸 막을 어떤 강한 이유가 있던 것도 아니라서 그렇게 시작은 충동적으로 이루어졌다. 사실 나는 채식과 채식스러운 라이프스타일을 좋아하기보다는 육식주의와 공장식 축산에 대한 반대의 입장을 가진 채식주의자였다. 채식에 관해 읽었던 책은 '왜 우리는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라는 책이었다. 이름 그대로 육식을 둘러싼 우리의 인식에 관한 내용이 주가 되는 책이었는데, 공장식 축산에 관한 사실들도 물론 충격적이었지만 가장 경악스러웠던 것은 이 모든 것이 '육식주의' 라고 하는 폭력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육식주의는 군국주의나 전체주의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폭력이 일어나는 것에 대한 사회 구성원 모두의 암묵적인 동의로 유지된다. 하지만 그들의 동의 또한 어디선가 주입받은 것 혹은 이미 있던 것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일 뿐이다. 오히려 나아지면 나아졌지 고기를 먹지 않아도 우리의 건강에는 아무런 해가 없다. 또한 고기는 맛있는 것이라고 느끼는 그 입맛도 사실은 주입받고 길러진 것이다. 그리고 그 입맛을 위해서 거대한 축산시스템이 돌아가고, 우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는 무자비한 폭력의 불편한 진실을 우리는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음에도 우리의 입맛과 습관과 안락함을 위해 모른 척 눈과 귀를 닫는다. 채식에 대해 공부하면서 나는 이 육식주의라는 것이 원자력 산업과 굉장히 많이 닮았다고 느꼈다. 전기 없이도 잘만 살던 우리나라는 서구의 산업문명에 의해 개조당해 이제는 세계에서 에너지를 가장 많이 쓰는 나라 중 하나가 되어버렸고, 우리의 풍족함(이라고 느끼는 것)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한정된 자원을 마구 쓰고 우리가 보이지 않는 곳에 원자력 발전소를 짓는다. 내가 육식주의를 공부하며 느낀 데자뷰가 비단 원자력 산업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폭력적 이데올로기들을 나는 어떻게 알아차리고 해체하고 거부할 수 있을까, 그건 아직 잘 모르겠고 막막하다. 그렇지만 원자력 산업을 거부하고 비판하는 내가 육식주의를 비롯한 폭력적 이데올로기들에는 모른 척 눈 돌리는 건 너무 비겁하고 우스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채식주의자분들은 비웃겠지만 서울에서 2달 좀 넘게 페스코가 되어 채식을 해봤다. 되게 어렵기도 하고, 가끔은 보람차기도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채식을 지속할 수 있는 환경과 마음이 덜 되었는데 의무감만으로 채식을 지속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 채식은 무얼 먹지 않느냐가 아니라 무얼 먹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2개월 동안의 나는 무얼 먹지 않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채식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이후로 어떤 환경 혹은 마음의 변화가 있다면 채식을 다시 시작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2개월 동안의 짧은 채식은 이 정도의 배움과 경험에서 이렇게 마무리를 지어놓고 싶다. [시골] 시골의 산과 들을 노니며 어린 시절을 다 보낸 나지만 나는 사실 큰 물에서 놀고 싶고 돈도 많이 벌어서 좋은 옷이랑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고 싶고 성공해서 이름을 날리고 싶어한다는 걸 꽤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내 생각에 나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닌데 뭔가 가끔은 그렇게 흥청망청하는 소비적 삶을 살고 싶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 마음과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지역과 시골과 자립의 삶 사이의 갭을 어떻게 줄일까 고민을 많이 했었다. 적정기술 워크숍은 그 고민의 피크여서 '나는 공동체랑은 안 맞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우면서 웃긴게, 그 적정기술 워크숍을 끝내고 서울로 올라오니 갑자기 밥이 잘 안 먹히고, 괜히 마음이 산만하고, 주변이 너무 시끄럽고 정신없게 느껴졌다. 밤에도 불이 왜 이렇게 밝고 날씨는 왜 찜통같이 더운가. 동네는 왜 이렇게 사람이 많고 더러운가.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하나하나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고 지금 와서 내린 결론은 사실 나는 시골을 좋아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막연한 생각이 아니라 정말로, 나는 도시에서 아주 살지는 못할 거 같다. 물론 언제 또 흥청망청 병이 도질지 모르고 집에서 일 좀 돕다가 지긋지긋해질 수도 있지만, 그리고 당분간은 서울에서 할 일들이 있으니 바로 내려가진 않겠지만 언젠가는 시골에 내려갈 거다. 그리고 그게 맞다는 마음이 생긴 것 같다. [학교 생활] 학교의 중심을 잡고 가던 논스톱 5명이 학기 초에 졸업을 하고 이제 3학기라는 - 그 때에는 특히나 부담이었던 - 이름으로 바톤을 넘겨받았다. 늘어난 책임과 목표치 때문에 다들 굉장히 피곤해했고, 예민해졌다. 공연음악 3학기 팀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학기 초에 나는 정말 열심히 해보겠다고 마음 먹었고, 그렇게 1년이 지나 훌륭한 퍼포머가 되어 메솟에 다시 가면 1월에 메솟에서 잘못했던 것들을 갚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1년을 쳐왔던 수루두에서 해삐끼로 악기를 바꾸고, 수루두, 빤데이로, 아고고를 같이 연습했던 것들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3월, 4월, 학기 시작 이후로 그렇게 페스테자의 하드 트레이닝에 맞춰서 나 자신에게 채찍질을 하며 달리면 한 학기가 지났을 때에는 쑥 자라있을 줄 알았는데, 5월 쯤 되니 안되겠다 싶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멈춰졌다. 내가 아무래도 내 자신을 좀 과대평가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봤을 때 학기 초반 3학기 회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건 반 이상이 내 잘못이었다. 매체 작업이 잘 안되서 코멘트 받고 상한 기분을 그대로 갖고 있어서 회의에서 나온 코멘트들에 예민해지고, 빈정 상하고, 오기부리고, 혼자 오해하고는 마음을 못되게 먹었다. 갑자기 너무 많은 것들이 어께에 지워진 탓에 적응을 못했고 서툴러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그럴만한 것들도 아닌데. 좀 미안하고 민망하다. 5월에 워크숍에 변화가 생기면서(동시에 수준이 제자리를 멤돌면서) 브라질음악과 바투카다에 대한 흥미도 함께 시들해지고 책임감만 남았다. 이게 굉장히 자주 찾아오는 걸 봐서는 근본적인 이유, 즉 내가 '브라질음악은 작업장학교에서의 음악'이라고 설정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어떻게 됬건 브라질음악과 정을 붙이기가 되게 힘든 건 사실이다. 그래서 다음 학기는 매체 작업을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했다. 그렇지만 조금 다행스러운 건 쇼케이스 바투카다를 짜고 연습하는 과정은 이전의 워크숍보다 훨씬 더 재밌고 집중할 수 있었다. 이전부터 페스테자의 진도를 따라가고 레파토리를 그대로 받는 게 아닌 직접 창작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계속 있었는데 그게 좀 해소가 된 걸지도, 아니면 그냥 재밌다가 재미없다가 하는 과정의 일부일지도 모르겠지만 아직 이렇다 할 확신 같은 건 안 선다. [정리되지 않는 메솟] 1월에 메솟 여행을 아주 찝찝하게.. 마무리하고 그 뒤로는 생각을 별로 이어가지 못했지만, 사실 생각할 계기는 꽤 있었다. 라후라가 해주신 하트스쿨에 대한 이야기나 인권강의도 있었고, 6월 22일에 있었던 난민포럼은 '산업화된 원조, 대안교육으로 돌파구를 찾는다' 라는 주제로 따비에에 관해 설명하고 이야기해보는 포럼이었다. 산업화된 기존 원조의 방식에서 마웅저 선생님을 만나고, 따비에를 생각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지만 사실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다. 거기 나오신 선생님들의 말씀도 마찮가지로 모두 이해하진 못했다. 난민포럼 중에 '우리 아이들을 위한 체험의 장이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이 친구를 만나 함꼐 일할 삶의 현장을 만들어가는 "공동의 이바쇼"가 되기를 바랍니다.' 라는 부분이 있었다. 분명 우리가 1월에 메솟을 갈 때에도 비슷한 얘기를 했었다. 같은 시대, 같은 하늘 아래에 사는 우리가 같은 꿈을 꾸는 것. 따비에가 지어지고 메솟 청년들과 한국 청년들이 함께 지역공동체를 가꾸고 지속가능한 삶을 사는 것. 그게 내가 이해한 공동의 이바쇼와 따비에의 의미였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산업화된 원조를 해결한다' 에 비해 '공동의 이바쇼' 라는 개념은 너무 모호하고 먼 이야기 같이 느껴진다. 이바쇼라는 개념이 이야기 될 때마다 이런 느낌이 드는 걸 보면은 내가 어느 한 장소에 뿌리를 박고 살 생각을 해보지 않아서일 수도, 지역과 주변 사람들에 오랫동안 깊은 관계를 맺어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우리는 '대안적인 원조'가 아니라 '공동의 이바쇼'를 위해, 즉 동정이 아니라 공감을 하기 위해 메솟에 간다. 그렇지만 나는 1월에 간 메솟에서 청소년들과 충분히 소통을 했나? 친구가 되었나?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은 그들과 나는 어떤 관계지? 난 거기에서 뭘 하고 온 거지? 라고 하면 할 말이 없다. singing for our dreams의 가사들이 사실은 잘 와닿지 않으니까. 1월에 다녀온 내 메솟 여행은 너무 좋지 않았고 꼭 다시 갚아야겠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했다. 그 방법 중에 하나가 훌륭한 퍼포머가 되는 것이었는데 그마저도 헤매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은 여행을 할 수 있을까 감이 잘 안 잡힌다. [한 학기를 마치며] 뭘 하지도 못했는데 순식간에 7월이 오고 한 학기가 끝난 기분이다. 학기 초에 세운 목표, 하자 밖에서도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과 좋은 퍼포머가 되어 메솟에 다시 가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위해 조금 더 야무지고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에 한 학기가 끝났어도 뭔가 뚜렷히 보이는 건 아쉽게도 별로 없는 거 같다. 이번 학기는 2학기에서 3학기로 넘어오며 책임감을 가지고 일을 잘 할 수 있게 되기 위해 몸이 적응하는 시기로 마무리 짓고 싶다. 애초에 재계약 미팅에서 생각했던 목표들은 1년을 두고 세웠던 것들이니까 지금 애써 완결을 내려고 하기 보다는 남은 반 년을 어떻게 잘 채워갈 것인가에 집중해야지 싶다. 개인적으로 이번 학기는 만만한 학기가 절대 아니었는데, 다음 학기는 어떻게 될까, 조금 더 능숙해진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기대도 걱정도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번 학기는 너무 나에게만 온 집중이 쏠려있던 학기였다. 나를 거치는 모든 학교 공부들은 결국 '내가 밖에서 써먹을 수 있는가'의 여부로 이어지고, 다른 죽돌들은 어떤 과정을 거치고 있는지, 학교 전체의 공부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상당히 무심했던 것 같다. 앞으론 혼자 공부하고 혼자 익히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페이스를 맞춰 걸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부분을 미처 생각을 못했던 이유가 곧 내가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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