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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시민문화 워크숍글 수 603
이번 <민들레> 64호 특집은 '욕, 어떻게 볼까'였습니다. 욕 좀 하는? 나는 십대들에게 ‘샘’으로 불린다. 그 ‘샘’이라는 꼬리표는 교사로서의 어떤 기대치에 근거하여 나에게 부자연스러운 태도와 부담스런 관계를 의식하게 한다. 그래서 ‘젠장’, ‘제기랄’과 ‘아이 씨∼’, ‘야, 이 새끼야’ 따위 말을 조건반사처럼 쓰는 나로서는 종종 불편한 장면에서 일시정지를 하곤 한다. 그렇다. 나는 욕 좀 한다. 솔직히 이 지면에 다 쓰면 나의 인격에 대해 오해할 여지가 충분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기에 그만 하련다. 내가 원래부터 욕을 했던 것은 아니다. 나를 샘이라고 부르는 십대들과 만나기 시작하면서 의식적으로 욕을 썼다고 하면 믿어주려나? 그들은 말끝마다 ‘좆나’ ‘좆’을 찾았고, ‘이 새끼’ ‘저 새끼’뿐만 아니라 ‘개새끼’를 자주 호명한다. ‘지랄 염병할’ 정도로 ‘씨:팔'을 외쳐댄다. 그들에게는 타인의 반응에 대한 자동감지 능력이라든가 자신의 이미지를 만드는 자체 필터가 고장난 듯 느껴졌다. 영화에서 욕하는 걸 보는 것과 직접 내 귀로 얻어먹는 욕이 다르듯이 “초등학생 95%가 평소 욕을 한다”는 통계와 실제 아이들이 뱉는 욕은 하늘과 땅 차이로 실감하고 있는 요즘이다. 초등학교 4학년만 되어도 욕을 못하면 소통이 안 된다는 그네들의 비하인드 스토리와 그 놈의 욕 때문에 소통이 안 된다고 믿고 있는 해명이 서로 빌어먹을 판국이다. 뭐 욕쟁이 할머니까지 욕보인 대통령을 모시기까지 했으니 욕하지 않고 살 수 없는 세상 아닌가 하겠지만 우리의 화두는 항상 소통이지 않은가. 이놈의 지긋지긋한 ’소통‘이라는 말에 쩔어 있는 아이들도 무심코 욕으로 소통하는 세태를 만들어 내지 않았는가. 그래서 나는 나름대로 대범하게 시작했다. 그네들이 “아, 씨발, 좆 같애” 하면 돌림노래처럼 바로 뒤이어 “씨발이 좆 같은 거야?” 하고 반사한다. 이건 전반전에 불과하다. 좆, 씨:팔, 개새끼, 십대들이 가장 애용하는 욕 3종 세트이다. 뭐 다른 의견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많은 십대들이 이 세 단어를 마치 틱 현상처럼 무의식적으로 습관적으로 쓰고 있다. 물론 다양한 후보들이 있지만 유독 이 3종 세트는 확실한 파장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므로 대표 선수로 정한다. 사실 누구나 알게 모르게 욕을 많이 하고 있다. 누군가를 욕할 때만 욕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감탄사 대용으로 쓰거나 희노애락을 표현할 때, 또는 비유나 풍자를 할 때도 흔히 욕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욕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개 상대방이 들어서 기분 상하고 상황에 따라 움찔하게 만들거나 얼굴이 붉어지는 반사작용이 즉각 일어나게 하는 말들이다. 그런 전제라면 좆, 씨:팔, 개새끼는 확실하게 욕에 해당할 수 있다. 아이들은 이 3종 세트를 자신들의 얕고 짧은 어휘력을 숨기는 데 전략적으로 활발하게 쓰고 있다. 다양한 장면에서 쓸 수 있는 언어는 얼마 안 된다. 솔직히 아이들은 욕도 풍부하게 쓰지 못하고 있다. 단지 이 몇 개 안 되는 어휘를 어떤 상황에서나 두루 반복해서 쓸 뿐이다. 아주 좋을 때도 좆나(졸라), 아주 안 좋을 때도 좆나(졸라)를 쓴다. 배가 고파도 좆나 고프고, 배가 불러도 좆나 부르다. 종종 자신을 과시하거나 상대를 무시해야 할 때는 좆까를 날린다. 개새끼는 그냥 2인칭 혹은 3인칭 대명사이다. 단지 가장 평범한 대상을 지칭하거나 아주 친근한 사이를 과시할 때 이 새끼, 저 새끼를 쓴다. 그러다 특별히 누군가를 과감하게 씹어줘야 할 때는 이도 저도 아닌 최상의 표현, 개새끼로 방점을 찍는다. 마지막으로 씨팔은 이 셋 중 가장 애매모호하게 쓰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거나 어떤 것이 아쉬울 때 씨팔,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날 때나 상대를 제압할 때도 씨팔, 그리고 아무 의미 없는 혼자 중얼거림 속에서도 ‘씨팔’의 포스는 살아 있다. 이 3종 세트는 어떤 상황을 전제하거나 어떤 반응을 예측하면서 전략적으로 쓰이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단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감탄사에 불과하거나 말 사이 침묵을 채우는 주저어일 뿐이다. 그렇게 쓰는 욕은 매우 한정되어 있으며 여러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며 다양한 변주가 없다. 물론 이렇게 주구장창 무의식적으로 쓰고 있는 아이들도 욕이 안 좋은 말이라는 것, 그래서 안 써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쓰는 걸까? 단지 버릇이 되어 버려서?
욕을 포함한 모든 말은 관계를 전제한다. 관계는 사람들 사이의 말을 통해 드러나게 마련이다. 아이들의 욕이 이슈가 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소통을 통한 관계 맺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서로 통하지 않음이 문제라는 것이다. 말이란 소통의 수단이자 관계로 나아가는 출구라고 믿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욕은 그 통로를 미리 막아버리거나 혹은 먼 길로 우회하게 만든다. 여기에서 잠깐 일반적인 발화 장면을 상상해보자. 대부분 말하는 이, 듣는 이, 그리고 메시지가 등장하는 게 기본 옵션이다. 이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은 메시지를 공유하는 가운데 반응을 이어나가는 게 보통 소통의 공식이다. 하지만 아이들 사이의 욕은 이러한 상황을 전제하거나 인식하지 못한다. 우선 그들의 욕에는 어떤 메시지가 없다. 오직 희노애락, 특히 짜증과 화의 감정이 있을 뿐이다. 솔직히 내가 느끼기에도 아이들의 욕은 자신의 메시지를 전략적으로 풀어내는 수단이 아니다. 대상 없는 악담, 독창성 없는 되풀이, 노여움을 삭이지 않은 감정배설 등에 불과하다. 그런 일방적인 배설로 인해 욕이 단절의 표상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아이들은 교감하지 못하는 배설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인가? 요즘 아이들은 무수한 채널을 통해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그 자체를 소통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눈 뜨자마자 문자를 확인하고 이동 중에도 일거수일투족 메시지를 즉시 주고받으며 미니홈피나 미투데이를 통해 혹은 메신저나 채팅을 하면서 누군가와 항상 온라인 상태에 있다. 그럴 때 편리한 표기나 표현법을 전략적으로 만들어 낸다. 그들끼리만 통하는 은어, 줄임말, 낯선 표기법, 이모티콘 등으로 다른 세대들과 소통에 진입장벽을 높이고 있다. 또한 앞의 욕 3종 세트만큼이나 요즘 아이들이 잘 쓰는 ‘됐어요(괜찮아요)’, ‘그냥’, ‘모르겠어요’ 하는 말들을 들을 때면 이야기나 대화를 지속할 의지가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끼리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교감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의 상호작용은 종종 무시와 즉각적인 반사로 나타나며, 우정과 생활에 대한 소소한 탐구라는 영역이 증발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이야기가 사라졌다는 말로 대신할 수 있다. 자신의 일상, 배움, 경험 등이 모두 이야기가 될 수 있으며 이를 나누는 것이 소통인 줄 모른다. 자신의 속내는 어디 온라인 공간에서 익명으로 상담하고, 남의 사연은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엿본다. 그러니 소통이란 단어 자체는 익숙해도 그 행위에는 낯설다. 그리고 이야기가 증발된 자리에 대신 맥락 없는 감정이 차지한다. 그들에게는 ‘짱나’는 일들뿐이며 ‘좆나’는 일상이니 욕으로 채울 수밖에 없다. 그들의 욕은 일종의 보호막인 셈이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부족하다. 하지만 늘 밑바닥에는 원인모를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그 두려움과 불안은 종종 공격적으로 툭툭 나오는데, 짜증과 화를 동반한 욕으로 표현된다. 욕이란 원래 부정하고 금기했던 것에 대해 발설의 힘을 빌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그늘의 언어가 아니었는가. 그 발설의 힘을 아이들은 이미 체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 영화 <똥파리> 속의 주인공들의 욕하는 모습을 보면서 비슷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들이 욕을 하는 이유는 지금 아이들이 무심코 무의미하게 수없이 내뱉은 이유와 상통한다. 바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내가 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욕을 통해 상대방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그 이면에는 자신은 이미 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그래서 공격적인 욕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방어적인 욕인 것이다. 너무 두려워서, 너무 외로워서, 너무 힘들어서, 너무 불안하고 약해서 욕을 하는 것이다. 욕으로 방어막을 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가장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감정 언어들을 배설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소통하고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우정과 무신경과 무관심으로 무장한 쿨함을 요구하는 표식으로 쌍방의 쌍스러움을 유도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아이들이 욕하는 것을 그냥 이해하라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이제는 욕으로도 소통하는 법에 대해서 생각을 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쓰는 욕은 일종의 감탄사이며 지금 현재 아이들의 감정을 번역하는 말이거나 ‘아, 저, 그러니까’ 정도의 주저어 라는 전제를 두고 다시 말 걸기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방어막 뒤에 숨어 있는 서사를 끌어내야 한다. 묻고 답하는 식의 심문이 아니라 일상의 소소한 내력에 대해서 서로 나누는 서사와 경청이 필요하다. 그 시작을 부정이나 금지로 차단시키지 말고 이야기로 이어가는 과정을 인내해야 한다. 그래서 어느 때부터 나는 ‘왜’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단순한 궁금증이기도 하지만 직면의 한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네가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하고 있는 줄 아니? 왜 그런 말을 하고 있어? 이런 물음을 담고 있는 짧고 굵은 제스처이기도 하다. 솔직히 이 질문에 시원하게 답하는 아이들은 없다. ‘개새끼’ ‘씨팔’ 하는데 ‘왜’라는 뜬금없는 질문에 어떤 아이가 속 시원히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게 내가 그들과 소통하는 최선의 방법인 것을 어찌할 것인가. 욕을 먹어야 이야기가 시작되는 이상한 대화가 필요한 시대인 것을 어찌할 것인가. 그리하야 우리는 모두 나름 욕 보고 있는 것이다. 출처 『민들레』 64호 특집 <욕, 어떻게 볼까>
2009.09.10 08:51:31
흑- 저는 욕보기 싫어요. 어쩌나.
대학 때 제 친구가 "새 세계가 열릴 것"이라며 집요하게 꼬드겼는데도 실패. 여전히 자폐적 성향이 남아 있나봐. 신랄한 욕들은 언제 적어주실 거예요? 적어주면 머릿속으로, 혼자, 아무튼 슬쩍 연습해볼까요...
2009.09.12 08:14:43
그들의 욕은 일종의 보호막인 셈이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부족하다. 하지만 늘 밑바닥에는 원인모를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그 두려움과 불안은 종종 공격적으로 툭툭 나오는데, 짜증과 화를 동반한 욕으로 표현된다. 욕이란 원래 부정하고 금기했던 것에 대해 발설의 힘을 빌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그늘의 언어가 아니었는가. 그 발설의 힘을 아이들은 이미 체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욕도 해본 사람만 할 수 있는 듯ㅠㅠㅠㅠㅠ 밑줄긋고 갑니다. 사이다의 긴 장문의 글을 보니 기분이 묘하군요ㅎㅎ 저는 북카페에서 봤습니다. 아는 사람의 글이 2개씩(한개는 제규)이나 나와서 무척 기뻤다는(?!) 이로써, 등단하신건가요? 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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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같은경우는 몇몇 욕은 쓰지 않는 원칙을 세워서 지키고있어요
사실 욕이 다 그게그건데 뭐는 되고 뭐는 안되고 이러는게 좀 말이안될수도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