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인간의 소통불가능성의 가능성

 

차옥숭(이화여대)

 

1. 들어가는 말

 

인간과 자연의 소통이라는 제목이 편안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왜일까? ‘인간과 자연의 소통’이라고 할 때조차도 자연은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자원으로 대상화되고 물상화되어 있는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일까? 그동안 자연을 바라보는, 다른 생명체를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대부분 완전한 불연속성의 전제에 따라 소통의 불가능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때로 우리 안에서 풍부하고 독특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초월의 행위는 인간과 자연, 혹은 인간과 다른 생명체와의 연속성을, 소통 가능성을 입증한다. 여기 그 가능성을 여는 경험담을 소개하면서 글을 시작하겠다.

 

“아까 저녁 물때에 갯벌을 나갔는데, 용석이 형 경운기 타고 한참을 들어갔어. 거기서 백합을 많이 잡았어. 근데 용석 형은 일이 있어 먼저 마을로 돌아갔고, 나중에 나 혼자서 갯벌을 걸어 나왔지. 저 멀리, 계화마을 불빛만 보고 걷는 거야. 주위가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근데 무슨 소리가 들리는 거야. 멈춰 서서 들어보니, 형, 정말 놀라웠어. 아주 작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소리들이 온통 가득한 거야. 한참 가만히 서서 그 소리를 들었어.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나중엔 귀가 멍멍할 정도였어. 그게 다 뭐겠어. 구멍마다 생명들이 소리를 내는 거잖아. 대합창이야. 새만금 갯벌이 밤에는 거대한 노래 밭인 거야, 나 진짜 너무 놀랐어.”

 

한 젊은이가 새만금 갯벌에서 조개를 잡고 돌아오는 길에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여 들은 경험담이다. 갯벌은 수없이 많은 생명들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드넓은 갯벌의 펄 1그램에는 10억마리 이상의 식물성 플랑크톤이 있어 생물밀도가 매우 높고 따라서 산소 생산량도 엄청 나다. 식물성 플랑크톤만이 아니다. 펄을 조금만 뒤집으면 바지락, 동족, 대합, 상합들과 같은 조개 무리와 꽃게, 칠게, 밤게, 콩게와 같은 크고 작은 게들과 각종 새우들이 어우러진다. 이들은 대개 탄산칼슘(CaCO3) 껍질을 가지고 있어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CO2)를 효과적으로 제거해 준다. 신선한 산소를 늘 공급해주는 갯벌의 정화능력은 놀랍다. 1제곱킬로미터의 갯벌은 대형 하수종말처리장 하나의 정화 능력과 맞먹는다고 한다. 서해에 서식하는 각종 어류가 새만금 갯벌을 산란장으로 이용한다. 새만금 갯벌은 기후와 계절적 영향을 받으면서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생태계로, 갯벌 스스로 물리적 환경에 따라 침전물과 영양물질의 퇴적과 배출을 지속할 뿐 아니라, 수질을 정화하고 생물다양성의 저장고가 된다.

 

사람의 소리가 잦아드는 밤이면 생명의 노래 밭으로 변하는 새만금 갯벌은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매립되어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생태적으로 중요한 새만금 갯벌은 그동안 다양한 저서생물을 먹이로 하는 각종 철새, 특히 도요, 물떼새류는 호주에서 시베리아를 오가면서 이동 경로를 따라 중간 기착지로 새만금 갯벌까지 온다. 철새들은 새만금까지 오는 동안 체중이 절반으로 감소하고 감소된 체중을 새만금에서 보충을 해서 다음 경로로 이동을 하는데, 새만금 갯벌이 없어서 수만마리가 떼죽음을 당했다는 소리도 들린다. 인간 이외의 생명들의 죽음에 우리는 아무 책임이 없는 걸까?

 

무모한 개발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로 많은 종류의 동식물이 멸종되었다. 지구에서 생명표현의 안전성은 복합적 생명 공동체의 다양성에 달려 있다. 다양성이 감소하는 순간 각 생명의 안전성이 약화된다.

 

이러한 생명 파괴의 바탕에는 모든 가치의 중심에 인간을 두고 자연과 인간의 불연속성을 전제로 한 세계관이 있다. 모든 가치의 중심에 인간을 두는 것은 우주의 구조 안에서 인간의 지위와 역할을 왜곡하는 것이다. 인간과, 우주의 나머지 존재들 사이에 커다란 격차가 있다는 생각은 인문학자들이나 과학자들 양편 모두에서 키워온 사상이다. 과학자들은 철두철미하게 우주의 나머지 존재들을 기계 혹은 객체라고 묘사함으로써 그런 사상을 부추겼고, 인문학자들은 인간의 정신과 영혼의 철저한 독특성을 강조함으로써 그렇게 했다. 그 결과 이원론적 사고방식이 널리 수용되었고, 자연과 인간의 경계 강화는 자연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 폭력은 그대로 인간에게 되돌아온다. 지구의 주요한 생명체계들이 지구안에서 제대로 기능할 수 없는 최종점에 직면하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의 윤리성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지구의 생명체계가 멸종되는 생명 살해와 지구 살해의 문제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다. 자연계가 황폐해진 원인은 경제적 이득을 취하거나 인간 상황을 진전시키기 위해 지구 전체를 파괴하는 산업경제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계를 위한 법적 보호 장치가 전혀 없다.

 

지구변화의 위기 속에서 사라져가는 숲, 세계 빈곤의 증가, 지구 온난화의 위협, 생물다양성의 감소 등과 같은 암울한 오늘날 현실에서 하나의 통합적 공동체로서 지구를 소생시키기 위해서는 인간과 다른 생명 사이를 연속성에 토대하여 이해해야 한다. “또한 오늘날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도전적인 과제는 지속가능하며 바람직한 사회에 대한 공동의 비전을 창출하는 과제일 것인데, 그 비전은 이 세계의 생물-물리학적 압박속에서도 모든 인류, 모든 생명체, 그리고 미래 세계들에게 공정하며 형평성을 갖춘 방식으로 영구적인 번영을 제공할 수 있는 비전이어야 한다.”

 

2. 이천식천(以天食天)

 

해월 최시형(1827-1898)은 1863년 수운에게서 도통을 이어받고 동학운동을 이끌어온 사람이다. 해월은 ‘만사지(萬事知)는 식일완(食一碗)’이라 하여 밥 한 그릇을 먹게 된 이치만 알게 되면 모든 이치를 다 알게 된다고 가르쳤다.

 

천지의 젖인 밥은 우주만물은 지기(至氣)인 하늘(天)의 화현(化現)인 까닭에 ‘이천식천(以天食天)-이천화천(以天化天)’ 즉 하늘로써 하늘을 먹고 하늘로써 하늘로 화한다는 것이다. 어찌 밥뿐일까. 우리의 밥상에 올라오는 뭇 생명들이 모두 하늘의 화현인 것을, 따라서 해월은 일상적인 식사 행위는 이천식천(以天食天)하는 즉 밥 한 그릇에 바람, 햇님, 물이 힘을 보탠 한울의 조화와 노동을 통한 한울의 창조행위가, 생명의 근원인 한울 자체가 담겨져 있으니 소중하고 감사하게 먹으라는 것이다. 풀 한 포기도 함부로 다루지 말라고 가르쳤던 해월의 이천식천은 양육강식의 논리가 아닌 상생의 논리이다.

 

한울이 한울을 먹고 한울이 한울을 키우는 것이다. 여기에 유기적인 생명의 상호의존성, 생명의 그물망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해월의 사상 속에는 인간의 존엄성과 아울러 모든 만물에 이르기까지 무궁한 우주의 대생명이 꿈틀거리고 있는 천지만물 모두가 유기체적인 생명 공동체라는 깨달음이 담겨 있다. 해월의 자연에 대한 이해는 가난한 농민으로 화전민으로 흙과 살아온 삶의 체험 속에서 생명의 소중함과 자연의 모든 것들 속에 그것이 있음이 비롯되게 한 한울의 씨앗이, 한울 자체가 깃들어 있다고 보았으리라고 생각한다.

 

3. 나가는 말

 

생태계의 파괴로 지구의 위험수위가 임계점에 달했다는 위기감이 “자연과 인간의 경계를 허물고 인간과 자연, 혹은 인간과 다른 생명체와의 연속성을, 소통가능성을 숙고하게 만들었다.

 

맥페이그는 하느님 몸으로서의 자연에게 행하는 인간의 폭력이 바로 하느님에게 하는 폭력이라는 것을 상기하면서 2000년 전의 예수의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그래서 영원히 십자가에 달려 계신다. 자연을 나와 똑같은 몸이요 나아가서 나를 낳고 길러주는 天地父母천지부모로 인식하는 해월은 자연을 어머니처럼 공경하고 모시라고 한다.

 

이 ‘텅 빈 모심’, 어떻게 가능할까? 자연에게서 배울 수 있을 것 같다. 흙은 생명의 씨에게 자기를 비워 자리를 내어줌으로써 자기 품에 안긴 생명의 씨가 그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한다. 오래된 나무숲의 ‘보호목’은 썩어가면서 어린 나무에 온기와 양분을 제공한다. 바로 자기 비움이다.

 

흙은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다. 무는 무 되게, 배추는 배추 되게 한다. 그뿐인가? 죽음에서 생명이 나온다. 삶은 죽음에 기대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생명까지 내주면서 우리를 살게 하는, 우리의 밥상에 오르는 뭇 생명들에 기대어 살고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매일 먹는 밥을 자연과 인간이 만나는 우주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이천식천하는 마음으로 한울을 모시는 마음으로 적게 먹고 나눌 수는 없을까? 자연과 인간의 진정한 소통은 바로 자연에게서 배운 것을 실천하는 것이 아닐까? 조금이라도 나를 비워내어 내 안에 자연의 고통이 이웃의 아픔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내어주는 것일 것이다.

 

2003년 3월 새만금 갯벌에서 서울까지 삼보일배의 길을 떠나며 문규현 신부가 올린 글을 끝으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부안에서 서울까지 305km라 합니다. 길고 긴 여정이며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따라 내 온몸을 낮추어 보이지 않는 생명의 소리들, 고통 받는 그들의 소리를 듣겠습니다. 개발이라는 이름하에 파괴되고 있는 자연, 전쟁과 온갖 폭력 속에 고통 받는 모든 이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겠습니다. 나의 땀 한 줌, 나의 기도 한마디가 죽어가는 새만금 갯벌의 생명들과 공감을 이루고 나눠질 수 있도록 간절히 마음 모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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